무례한 시대를 품위 있게 건너는 법 - 차별과 배제, 혐오의 시대를 살아내기 위하여
악셀 하케 지음, 장윤경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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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차별과 배제, 혐오의 시대를 살아내기 위하여

공존을 위한 포용과 연대, 품위 있는 삶에 대한 고민

 

 

무례하다 라는 말을 체감하며 살고 있는 시대이다. 무례, 말 그대로 예의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품위 라는 단어가 그에 상응하는 말인 것일까? 품위 -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위엄이나 기품

무례 를 예의가 있다 없다 로 구분할 수 있다면 품위는 예의를 아우르는 그 무언가 가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해본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세운 높은 기준에 도달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높은 기준은커녕 일반적으로 괜찮다고 여겨지는 최소한의 수준에조차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내가 여기에서 다루려는 이야기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의 기본적인 예의와 품위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p. 11)

저자는 어려운 철학적 담론이나 심오한 삶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겪고 살아가고 있는 일상에 대해 이야기를 건넨다. 무심코 지나쳤던 시간들을 다시한번 생각해보라고.

얼마 전부터 품위가 상실된 언행과 현상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그저 한번 몰아치고 마는 파도가 아니라 온 세상을 뒤덮을 정도로 광란의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현재 우리는 인간적 품위가 결여된 한 남자가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지 못한 세상에 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끄는 정부는 스스로의 비열한 언행을 숨기기는커녕 오히려 과시하는 듯하다. 도널드 트럼프가 해온 그 모든 불쾌한 언행들은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그가 쏟아낸 너무나도 많은 혐오의 언행은 충분하고도 남는다. (p. 12)

무례의 대표적인 예가 트럼프 대통령이다. 일상을 이야기하려 하지만 일상은 정치나 사회문제와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시사평론서는 아니지만 현실칼럼으로 다양한 실제적 무례한 경우들을 끄집어낸다. 소설이든 사회비평서든 여하튼 현실을 반영한 책을 읽다보면 트럼프가 자주 등장한다. wow 이렇게 세계적으로 욕먹는 대통령이 또 있었던가 싶다. 실은 그렇기 때문이 더 위기일수 있다. 반면교사를 훌륭한 교사인줄 알고 따라하는 이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을 보면.

예의 없는 사람, 배려 없는 사람 그리고 거칠고 폭력적인 사람 등 행태는 각기 다르지만 이들이 결국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이 겪은 불쾌한 일화는 수많은 이야기가 되어 하나의 역사를 이룰 것이다. 현재 우리의 일상이 역사로 남게 된다고 생각하면 조금 두렵기까지 하다. 그러면서 몇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지금까지 풍요로운 사회에서 궤도를 이탈한, 예의와 품위가 결여된 언행이 유독 늘어난 이유가 무엇일까? 그동안 인류가 쌓아올린 문명이 상실되고 있는 오늘날의 현상은 단순히 생존 경쟁의 산물이 아닌, 시대적 위기로 보아야 옳지 않을까? 지금 우리 시대가 마주한 절박한 문제는 과연 무엇일까? (p. 15)

이 책의 원제는 Über den Anstand in schwierigen Zeiten und die Frage, wie wir miteinander umgehen 이다.

나는 독일어를 모르므로 당연히 번역기에 물어봤다. '어려운 시기에 품위 있는 것에 관하여 질문하다, 우리가 어떻게 상대하는지' 정도로 해석되는 듯 하다.

그렇다. 이 책의 원제에서 핵심은 '질문'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한국어판의 제목은 '-는 법' 이라는 답이 되었는가?

저자는 지금을 일상을 대화하듯 말하면서 툭툭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그 질문들이 질문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 '답'으로 변할 수 있었던 이유인듯 싶다. 일종의 소크라테스적 방법이랄까? 한번에 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을 하면서 스스로 답을 찾게 하는.

품위는 법도 아니며 도덕도 아니라고 괴테르트는 이야기한다. 이렇게 설명하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즉 품위는 "유행과 유사하면서 이를 넘어서는 개념으로, 해가 바뀔 때마다 (반드시) 입어야 하는 옷이 있듯이 각각의 시대에 발생하는 문제를 매번 새로운 생각으로 해결하는 방식" 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여기서 몇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현재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 지켜야 하는 품위는 과연 무엇일까? 지금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며, 지금 우리가 마주한 문제는 무엇일까? (p. 39)

현대 사회는 결속과 분열이 동시에 이루어지는데, 그 한가운데에 이른바 '중간 세계'가 있다. "이 중간 세계에서 개인은 타인과 서로 조율하고 화합하며, 서로를 받아들이면서 (사적 영역을 존중하며) 나란히 성장해 간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품위가 존재해야 할 곳은 바로 이 영역이다. (p. 41)

품위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책을 읽는 내내 다른 형식으로 자꾸 등장한다. 이것이 품위인가? 아니 저것이 품위인가? 그렇게 읽는이에게 품위가 무엇인지 생각의 업그레이드를 시켜나간다. 질문을 통해.

판타지소설을 읽으면 중간계가 등장하곤 한다. 신들이 사는 천상계와 괴물비슷한 여하튼 암흑적 존재가 사는 지하계와 그리고 중간계. 인간은 늘 이 중간계에 산다. 품위를 중간계에 놓고 보니 얼핏 이해가 더 되는 기분이 든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도 이처럼 '중간 세계' 가 있다. 저~ 꼭대기도 아니고 저~ 밑바닥도 아닌 이 중간세계가 중심을 제대로 잡아야 사회가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한동안 타인과 공존하는 방법을 고심하지 않았다. 이제는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 사는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더불어 지내야 하는지 깊이 고민하며 공론화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여기에는 타인과 대화할 때 지켜야 할 어조와 성량 그리고 단어 선택까지도 퐘된다. 즉 타인을 대하는 모든 태도와 자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p. 48)

지금 우리가 왜 품위를 생각해야 하는가? 함께 살기 위해서다. 사회는 혼자 살아가는 곳이 아니다. 무례 라는 단어 자체가 상대방으로 부터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사회가 분열될 수록 불안감이 높아질수록 공존의 방법은 평화적이어야 한다. 그 방법의 핵심으로 저자는 품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주제는 법이 아니라 공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법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이 새로운 세계에서 타인과 더불어 살려면 각 개인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자세와 배려이다. 이에 더해 우리 모두가 각각 한 명의 시민으로서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이를 적극적으로 시도해야 한다. (p. 77)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무례의 경우를 이야기하는데 저자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그 예중에 2017년 3월 부산에 사는 미국출신 교수 로버트 켈리의 BBC 인터뷰 영상이 있었다. 당시 탄핵관련 주제로 한국에 사는 정치학 교수로서 그를 인터뷰한 것이었는데, 내용보다도 인터뷰도중 등장한 켈리의 아이들과 아내로 인해 화제가 됐었다. (집에서 스카이프로 인터뷰했었다) 나도 기억이 난다. 귀여운 해프닝으로 티비에서 소개가 됐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후의 댓글논쟁에 집중한다.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는 장면을 두고 '보모' 라는 표현이 언급되면서 동양인 아내는 왜 보모로 인식하냐며 댓글로 갑론을박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듯이 이러한 댓글논쟁에서 품위는 커녕 존중이나 예의는 찾아볼 수 없기 마련이다. 인터넷 사회에서의 품위에 대해 저자는 더욱 심각하게 문제임을 지적한다.

우리 사회는 지위나 권위가 높은 이들의 태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즉 그들의 언행을 품위나 예의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일상에 스며들어 습관으로 자리하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무엇을 받아들이고 또 무엇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까? (p. 97)

또다시 트럼프의 일화를 등장시켜서 그 악영향을 우려하며 저자는 트럼프 외에도 다른 지도자급 인물들의 걱정스런 일화들을 알려준다. 다양한 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의 파급력은 무시해서는 안된다. 누가 따라하겠느냐고? 의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댓글에서 누군가 함부로 말하는 순간 그렇게 누군가 시작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험한 댓글들이 쏟아지는 것을 수시로 볼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익명의 한사람에게도 이렇게 영향을 받는데 하물며 사회의 리더가 수시로 그런 행동을 보인다면?

지금 우리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현재 우리는 지금 처한 상황이 무언가 잘못되었으며, 어딘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하며 또 어디로 가지 말아야 하는지도 다들 인지하고 있다. 그럼 이쯤에서 질문이 하나 떠오른다. 왜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솔직하게 시인하지 않는 것일까? (p. 112)

이 사회가 역행하고 있는가? 과연 그럴까? 과거가 지금보다 더 품위있었다고? 지금이 더 무례하다고?

나는 잘 모르겠다. 늘 무례와 품위가 경쟁하듯 공존해왔다. 어느쪽으로 쏠리느냐에 따라 표면적 모습이 달라 보일 수 있지 않을까.

현실 세계에서는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며, 누구도 나에게 무언가를 묻지 않는다. 설령 묻는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답을 할 수가 없다. 또한 이 현실 세계에서는 대단하든 미미하든 간에, 인생이 발전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세운다. 현실 세계에서는 자기 자신이 완전히 무의미한 존재로 느껴지기 때문에 이를 견딜 수 없어 확실하고 안전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p. 141)

자기만의 세계에 대한 규칙이 확고한 사람일수록 사실은 현실에 대한 불안감이 높을 수 있다는 말에는 일면 공감한다. 취업이 안되는 청년이 채식주의자로 변신하여 자신의 일상에서 엄격히 자신을 관리하는 것이 외부적 불안 요소에 대해 자신을 지키는 방법 중 하나일 수 있다는 저자의 사례에도 그럴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저자도 말하듯이 어떤 이유에서는 개인화로 자꾸 찢어지기만 하는 것은 사회적 측면에서 봤을때 불안요소가 될 수 있다. 파편화된 개인들은 거짓 뉴스에 더 쉽게 휩쓸리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 책을 시작할 때만 해도 품위라는 개념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다다르니 그 개념에 조금은 가까워진 듯하다. 한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하는 행위라고 말이다. 아니면 살을 좀 더 붙여서 이렇게 표현하는 건 어떨까. 품위란 다른 이들과 기본적인 연대 의식을 느끼는 것이며, 우리 모두가 생을 공유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라고. 또한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크든 작든 모두 동일하게 중요하며, 이를 일상의 모든 상황 속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p. 207)

저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에 감동한다. 로마제국의 황제임에도 스스로에 대한 검열이 철저했던 그가 남긴 기록은 '명상록'으로 대대손손 가르침을 주고 있지만, 그가 그토록 어렵게 유지했던 품위가 그 자신에게만 지켜졌던 것임을 역사는 (안타깝지만) 이미 알려주고 있다. 지금 이 시대에 로마황제도 지키기 어려웠던 품위를 일상에서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다른 건 물라도, 인간은 자신의 인생만은 제대로 통제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한때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가 통제의 한 부분을 담당했지만 오늘날 민주주의는 그 힘을 잃었다. 이제 더 이상 민주주의는 통제를 보장하지 못한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어떻게든 통제의 힘을되돌리려 애쓰고 있다. (p. 225)

"네가 만약 다른 사람을 바꾸려고 한다면 이내 실패하게 될 거야. 실제로 네가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뿐이지. 바로 너 자신.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을 바꿀 수 없어. 그러니까 너 스스로 세상을 보다 호의적으로 대한다면 아주 작은 티끌만큼이라도 세상은 더욱 나아지게 될 거야" (p. 228)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우리는 이들을 존중할 책임이 있다. 또한 이들을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인정과 배려 그리고 호의와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 여기에는 '모든 유형의 인간' 과 연대하려는 의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 연대감은 우리가 인간다운 품위라 칭하는 가치의 근본적인 토대이기도 하다. 각 개인의 문제는 곧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p. 244)

인간이 인간이기에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품위가 무엇일까? 인간답다는 것이 무엇일까? 상대적인 개념일수록 쉽게 답할 수 없다.

그렇기에 어쩌면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누구에게 보다도 일단은 나 자신에게 계속 질문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품위가 있는 인간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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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지기 2022-07-16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더 무례한 시대로 역행하고 있다는 주장에는 크게 공감이 안되었어요. 정말 과거에 비해 다름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가 되었나? 오히려 그렇지 않기에 다원화된거 아니야? 싶기도 하고요.

정성스러운 리뷰 잘 읽었습니다! ㅎㅎ

LILLY 2022-07-19 12:08   좋아요 1 | URL
공감하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키르케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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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신화를 좋아하고 역사를 좋아하는 이에게 신화적 존재를 모티브로 한 소설은 일단 소재자체부터 끌리게 되지 않을까. 내게 이 책이 그랬다.

고전학을 공부하고 라틴어와 고대그리스어, 세익스피어를 가르쳐왔다는 작가의 첫번째 소설은 '아킬레우스의 노래' 라고 한다. 저자의 이력과 첫번째 소설제목으로 보건대 자신의 전공분야를 잘 살린, 신화적 요소를 끌어왔으나 현대적 의미로 각색한 작품이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저자의 두번째 소설이라는 이 작품을 읽고 나니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다. 저자는 이 시대의 베르길리우스 였다.^^

일리아드와 오뒷세이아를 아는 사람이라면 '키르케' 라는 이름은 한번쯤 들어봤을 이름이다. 하지만 오딧세우스의 귀향길에 잠깐 등장했던 존재들중 하나였을 뿐, 괴물이든 거인이든 마녀이든 그저 주인공을 돋보이게하기 위한 보조장치였을 뿐 그 자체로서의 서사는 별게 없었다. 아니 별게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고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일리아드와 오뒷세이아를 적절히 응용해 아이네이스 라는 로마건국서사시를 써낸 베르길리우스 처럼, 저자는 이 고대의 서사시 3개를 뒷배경으로 하는 키르케 만의 서사를 소설로 완벽히 구현해내고 있었다.

키르케의 어머니는 물의 님프 페르세였다. 하지만 다른 님프들과 뭔가 달랐다.

<<그녀는 가녀렸을지 몰라도 뽀족한 이빨이 달린 뱀장어처럼 꾀가 많았다. 자기 같은 존재가 힘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았고, 사생아를 낳거나 강둑에서 몸을 섞는 건 알맞은 방법이 아니었다. (p. 11) >>

키르케의 아버지인 태양의 티탄신족 헬리오스를 만났을때 페르세는 결혼을 요구했고, 당당히 헬리오스의 아내자리를 꿰찮다. 그리고 4남매를 낳았다.

<<어머니의 환심을 사고 싶은 마음에 곁에 남은 이모가, 눈이 노랗고 우는 소리가 특이하고 가늘다며 내 이름을 매hawk라는 뜻의 키르케라고 지었다. (p. 14) >>

키르케가 태어났을때, 미래의 사위를 궁금해하는 페르세에게 헬리오스는 '왕자겠지' 라 말했고 페르세는 인간이냐며 혐오스러워했다.

<<"바보 같은 키르케" (p. 22)

어느 누구도 나는 안중에 없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돌멩이였다. 수천 곱하기 수천의 어린 님프 가운데 한 명일 뿐이었다. (p. 34) >>

키르케는 부모와 형제자매에게 따돌림과 무시를 당하며 성장하는 내내 있는듯없는듯한 눈에 띄지 않는 존재로 외롭게 견뎌야 했다.

<< "당신 눈에 제가 얼마나 추하게 보일지 압니다"

아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의 외할아버지의 신전은 눈부신 님프와 근육질을 자랑하는 강의 신들로 가득하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 너를 바라보고 싶다. (p. 53) >>

바닷가에서 우연히 인간 어부 글라우코스를 만났을때, 처음에 그는 여신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지만 만남이 잦아지면서 둘은 친구와 연인 사이 그 어딘가에서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다.

<<"아가, 아무리 작은 거라도, 하다못해 네 샘물에 포도주를 붓는 것도 좋으니 반드시 뭔가를 바치게 해야 한단다. 안 그러면 고마운 마음을 잊을 거야. 나중엔." (p. 58) >>

글라우코스라는 인간을 위해 뭔가 해주고 싶어하는 키르케에게 외할머니는 신의 취해야 할 입장을 알려주지만, 키르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땅바닥에 쓰러져 흐느꼈다. 그 꽃의 즙을 먹고 드러난 그의 진면모는 파랗고 지느러미가 달렸고, 내 것이 아니었다. 너무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았다. 칼날이 내 가슴을 관통하는 듯 날카롭고 격렬했다. 하지만 나는 죽을 수 없는 몸이었다. 데일 듯한 순간을 견뎌가며 게속 살아가야 했다. 우리 신족이 육신을 버리고 돌이나 나무로 지내는 쪽을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런 상심이었다. (p. 74) >>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에 짧게 나오는 '어부가 우연히 신이 된 이야기' 가 키르케를 만나 한편의 러브스토리로 완성됐다. 늘 그렇듯 첫사랑은 비극이었다. 그 비극도 비극이지만, 영원히 사는 신들이 삶을 멈추는 방법을 알려주는 이 문장에 나는 뒤통수를 맞은 듯 했다. 죽을 수 없는 존재의 선택, 신성한 자연, 신성! 어쩜 이렇게 똑 떨어지는지!!

<<"아버지 생각이 틀렸어요"

"방금 뭐라고 했느냐?">>

그동안 무시당해왔던 키르케가 서서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존재감 조차 처음엔 무시당했지만 키르케는 꿋꿋하게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런 술수를 파르마케이아라고 부릅니다. 세상에 변화를 유발하는 능력이 있는 약초 파르마콘을 쓰기 때문인데, 신들이 피를 흘린 곳에서 피어나기도 하고 지상에서 지천으로 자라기도 하죠. 그 약초의 능력을 끄집어내는 것이 재능이고 저 혼자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크레테에서는 파시파에가 독약으로 왕국을 다스리고 바빌론에서는 페르세스가 육신에 영혼을 다시 불어넣습니다. 키르케가 마지막으로 능력을 입증한 셈이죠" (p. 89)

"파르마키스" 내가 말했다. 마녀 라는 뜻이었다. (p. 90) >>

메데이아의 아버지인 콜키스의 왕 아이에테스, 미노타우로스를 낳은 미노스의 왕비 파시파에, 그리스신들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간 페르세스 모두 키르케의 동생들이었다.

<<앞에서도 밝혔다시피 나에게는 일말의 자존심이 있었고 그래서 다행이었다. 그보다 더 많았다면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이쯤에서 설명하자면 마법은 머릿속에 떠올리고 눈만 감빡이면 되는 신적인 능력이 아니다. 마법은 만들고 작업하고 계획하고 모색하고 파헤치고 말리고 다지고 빻고 끓이고 그 위에 대고 말을 걸고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걸 다 했어도 실패할 수 있다. 신들의 방식과 다른 점이다. (p. 110)

하지만 아이에테스의 말마따나 내가 가장 재능이 있는 분야는 변신이었고 계속해서 생각이 나는 것도 그것이었다. (p. 114) >>

인간을 신으로 변신시켰고, 님프를 스퀼라 라는 괴물로 변신시켰지만 그것은 그저 신비한 꽃의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변신에 대한 스스로의 고백 덕분에 키르케가 신전에서 쫓겨나 외로운 섬에 유배당했을때 그 꽃이 없는 그 섬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키르케는 포기하지 않았다.

<<"신들은 대부분 천둥과 바위 소리를 내지. 인간과 얘기할때 소곤소곤하지 않으면 귀가 갈기갈기 찢걸 거야. 우리가 듣기에 인간들의 목소리는 희미하고 가늘지. 흔한 일은 아니야. 하지만 하급 님프들이 인간의 목소리로 태어나는 경우가 가끔 있어. 너처럼 말이야. 그들은 우리를 무서워하듯 너를 무서워하지는 않을거야"

인간의 목소리를 한 신이라니. 충격이었지만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그럴 줄 알았다는 인식 비슷한게 느껴졌다. (p. 122) >>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섬에서 키르케가 마녀로서의 성장을 하기 시작했을 때 호기심덩어리 헤르메스가 찾아오곤 했다. 그에게 새로운 장난감이 필요했을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키르케는 그의 방문만이 유일했기에 반갑고 반가웠다. 그리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향한 눈도 띄여지고 있었다. 그리고 신들의 세계에 대해서도.

<<"최대한 잘 감당하는 수밖에" (p. 195) >>

헬리오스의 신전에서 자신만의 세계속에 살다가 갑자기 섬에 내동댕이 쳐진 후 키르케가 모질게 세상을 알아가고 겪어나가는 동안 그 누구도 키르케에게 진심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게 키르케는 마녀가 되어갔다. 그리고 다이달로스와 미노스의 궁전에서 파시파에가 미노타우로스를 낳는 것을 돕게 됐을때 키르케는 오래전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했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인간을 돕다 벌을 받은 신, 프로메테우스가 준 교훈 같은 그 말...

<<그들이 청한 건 주술이 아니라 우리 신족의 가장 오랜 의식이었다. 카타르시스. 연기와 기도, 물과 피로 하는 정화였다. 내 쪽에서는 그들이 죄를 지었다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심문할 수가 없었다. 요청에 응하거나 거부하거나 둘 중 하나만 할 수 있었다. (p. 211) >>

이아손과 메데이아가 정체를 숨기고 정화를 요청하러 섬에 방문하는 부분을 읽으며 또 한번 감탄했다. 고대의 신화적 사건들이 어쩌면 이렇게 자연스럽게 키르케와 연결될 수 있는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를 분명 읽었었는데.. 메데이아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 키르케가 나왔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왔더라도 스치듯 잠깐 언급되었을 것인데... 저자의 짜임새가 기막히게 감탄스러웠다.

<<님프들이 내 주변에서 맴돌았다. 숨죽인 그들의 웃음소리가 복도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그나마 그들의 형제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그런 사태가 벌어질 일은 없었다. 아들들은 절대 벌을 받지 않았다. (p. 236) >>

헤르메스가 퍼뜨린 소문들로 키르케는 만만한 웃음거리가 되고 아버지신들이 딸 님프들을 벌주러 일정기간 격리시키는 유배지가 되는 키르케의 섬, 아이아이에. 그리고 벌은 항상 딸들만 받았다. 신들의 세계에서도 여신들의 존재란, 하급신 님프들의 존재란, 님프 대우조차 받은 적 없는 키르케의 존재란...

<<님프들은 신부라고 불렸지만 세상은 우리를 그렇게 보지 않았다. 우리는 식탁 위에 차려진, 아름답고 늘 새롭게 바뀌는 진수성찬이었다. 그리고 도망치는 데 영 젬병이었다. (p. 252) >>

좌초한 인간의 배들이 처음엔 반가웠다. 외로움에 사무쳐 우연히 섬에 닿은 인간들이 그저 반가워서 극진히 대접했건만... 인간의 목소리로 말하고 혼자 사는 여신 키르케는 인간남성들의 눈에 그저 멋잇감이었다. 그렇게 키르케의 돼지우리에 돼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돼지우리에 돼지가 넘쳐나던 어느날 좀 다른 인간이 나타났다.

<<"너는 왕인가? 귀족인가?"

"왕자입니다"

"그렇다면 오디세우스 왕자,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너에게는 몰리가 있고 나에게는 네 부하들이 있으니 말이다. 나는 너를 해치지 못하지만 네가 나를 공격하면 그들은 영영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p. 263)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험준한 바위에 앉아 있는 매가 된 느낌이었다. 발톱으로 바위를 움켜쥐고 있었지만 마음은 허공을 날아다녔다.

"휴전을 제안한다" 내가 말했다. "일종의 시험을" (p. 264) >>

둘은 휴전을 한 적으로서 시작했지만 이내 둘이 서로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처음 사흘에서 한달에서 점점 더 섬에 머무는 날들이 길어져 갔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가 나와 부부처럼 오순도순 지낸 것은 일종의 예행연습이었다. 벽난로 옆에 앉았을 때, 내 꽃밭에서 일을 했을 때 그는 그 요령을 기억하려고 애를 썼다. 도끼로 살이 아니라 나무를 쪼개면 어떤 느낌인지. 어떻게 하면 다이달로스가 만든 이음새처럼 부드럽게 다시 페넬로페에게 맞출 수 있을지 (p. 288) >>

하지만 예행연습 기간이 짧았던 걸까? 페넬로페에게 돌아가 구혼자를 물리친 것까지만 고대서사시에서 말해주었었는데, 이 소설에선 그 이후를 알려준다. 너무나 그럴듯 하게. 정말 그랬던 것처럼. 신화는 지금도 진행중일 수 있었다.

<<그의 배가 닻을 올린 순간부터 내 뱃속이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구역질이 멈출 줄 몰랐다. 그 어떤 차단 마법을 동원해도, 심지어 몰리를 써도 고통이 가라앉을 줄 몰랐다. 이런 상태라면 선원들이 찾아왔을 때 나 자신을 지킬 수가 없었고 나도 그렇다는 걸 알았다. 약초를 담은 병 앞으로 기어가 오래전에 생각해놓은 주문을 외웠다. 섬이 배를 난파시키기 딱 좋은 험상궂은 바위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마법이었다. (p. 306~308) >>

오디세우스를 보낼때 키르케는 말하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아들임을 이미 알 수 있었다. 그 아이는 오디세우스의 아들이 아니라 키르케의 아들이었다. 키르케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지만 모든 것을 혼자 해내야 했다. 그리고 아이가 생기고 나서야 섬을 완전히 고립시킬 결심이 서게 되었다.

<<나는 이 세상만큼 나이를 먹었고 조건은 내 마음대로 정한다. 그 조건을 충족시킨 자는 네가 처음이고 (p. 364) >>

아테나여신이 키르케의 아들 텔레고노스의 목숨을 요구하자 키르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총 동원하여 아들을 지켜내고자 한다. 그 마지막 수단으로 심해 깊은 곳에 사는 티탄신족보다 더 오래된 존재의 독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그일을 실행했다.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이의 표정을 보셨어야 하는 건데. 구혼자들을 죽였지만 그러고 나니 뭐가 남았을까요? 물고기와 염소, 여신과는 거리가 먼 나이 먹은 아내, 이해할 수 없는 아들.

그리고 날이면 날마다 멀리서 으리으리한 소식이 새롭게 전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메넬라오스는 황금 궁전을 새롭게 지였죠. 디오메데스는 이탈리아의 어느 왕국을 정복했고요. 심지어 트로이아에서 망명한 아이네이아스도 도시를 건설했지 뭡니까." (p. 425) >>

오디세우스는 고향에 돌아가 행복하게 자알 살았습니다~ 가 오뒷세이아의 결말이었을까? 하지만 정말 행복하게 살았을까 라는 생각을 나는 왜 한번도 해보지 못했을까?

심지어 아이네이아스도 도시를 건설했다는 표현에서 혼자 빵 터졌다. 요즘 '아이네이스'를 읽고 있는데, 로마건국의 시조로 칭송과 경탄의 존재인 아이네이아스에 대해 '심지어' 라고 표현하는 걸 읽고 어찌나 웃기던지 ㅋㅋㅋ 베르길리우스가 이 소설을 읽으면 좀 기분나빠하려나? ㅎㅎㅎ

<<"너를 위해 만들어지는 노래는 없을 것이다. 이야기도 그렇고, 알겠느냐? 너는 아무도 모르는 삶을 살게 될 것이야.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될 것이다"

"저는 그쪽의 운명을 택하겠습니다" (p. 458) >>

아테네의 총아 오디세우스가 죽고 키르케의 섬에 아테네가 찾아온다. 그 아테네 앞에는 네명이 있었다. 텔레마코스, 페넬로페, 텔레고노스 그리고 키르케.

<<예전에는 신이 죽음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무엇보다 죽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바뀌지도 않고, 손에 쥘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나는 평생 전진한 끝에 지금 이 자리에 왔다. 인간의 목소리를 가졌으니 그 나머지까지 가져보자. 나는 찰랑거리는 사발을 입술에 대고 마신다. (p. 500) >>

이렇게 완벽할 수가.

이렇게 모든 신화적 요소들이 딱딱 들어맞게 키르케의 생을 구성해 낼 수가.

읽는 내내 손에서 놓을 수 없었고 읽는 내내 감탄 정도가 아니라 경탄에 경탄을 거듭했다.

신들의 전쟁속에 겪는 반신반인 아킬레우스의 고뇌를 담은 일리아드도,

신들의 참견속에 겪는 인간 오디세우스의 고행을 담은 오뒷세이아도,

신들의 동의속에 겪는 아이네이아스의 거룩함을 담은 아이네이스도

모두 인간이 주인공인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인간이 주인공인지는 의문이다. 모두 '신의 뜻대로' 인것을...

하지만,

이 소설은, 키르케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키르케는

여신 키르케가 주인공이지만 인간이 주인공인 작품으로 생각되어졌다. 신들중심이 아니라, 인간중심.

요즘 신화관련 책을 읽고 있던 중에 읽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너무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신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정말정말 흠~뻑 빠져들만한 멋진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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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하고 역동적인 바이킹 - 전 세계의 박물관 소장품에서 선정한 유물로 읽는 문명 이야기 손바닥 박물관 4
스티븐 애슈비.앨리슨 레너드 지음, 김지선 옮김 / 성안북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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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박물관 소장품에서 선정한 유물로 읽는 문명 이야기

집에서 탐험하는 손바닥 박물관 시리즈 4

 

 

박물관의 유물 중심으로 풀어낸 문명이야기 시리즈인 손바닥 박물관 시리즈가 고대로마, 고대그리스, 고대이집트 에 이어 바이킹을 등장시켰다. 사실 고대그리스,로마,이집트 는 고대문명으로 워낙 유명해서 대충이라도 짐작가는 바가 있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대시리즈 3권의 책 역시 몹시아주무척 보고싶긴 하다) '바이킹'은 정말 처음이었다. 몹시 궁금했고 아주 흥미로웠으며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네덜란드, 덴마크, 독일, 러시아, 미국, 스웨덴, 스페인,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영국, 캐나다, 핀란드 에 있는 세계 유수의 박물관 소장품 중 세심하게 가려 뽑은 200여 점의 바이킹 유물을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유물을 읽으며 바이킹의 역사도 틈틈이 엿볼수 있는 책이다.

 

 

책을 시작함에 앞서 이 책을 더 재미있게 보는 Tip 을 알려주고 있는데, 바로 유물의 실제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표식이다. 인체와 손바닥을 이용하여 유물의 크기를 대비시켜 놓았는데, 유물마다 이 표식을 통해 실제크기를 연상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바이킹이 활동했던 지역을 시대순으로 구분하여 표시해놓은 지도도 마음에 들었다. 세계사의 중심을 유럽사의 중심을 너무 로마제국 중심으로만 생각해왔던 터라 이런 지도가 알려주는 느낌은 신선하다. 그리고 대서양을 가운데 둔 세계지도는 늘 나도모르게 좁혀진 시각을 다시 넓혀주곤 한다.

바이킹의 시대를 연대순으로 구분하자면 초기, 중기, 후기 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연대는 각각 약 550년~899년경, 약900년~999년, 약1000년~1500년 이다. 로마제국이 쇠망하던 시기에 점차 바이킹의 세력이 커졌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는데, 중세암흑기에 가려진 곳들 중 이슬람을 최근 ('십자가와 초승달, 천년의 공존' 이라는 책을 통해) 발견한 나로서는 '바이킹' 또한 그렇게 가려진 곳들 중 하나였음을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됐다. 어두웠던 천년 중에도 반짝이는 별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또한 어쩌면 당연함에도 이제야 새삼스레 깨달았다.

바이킹 세계에서 어떤 단일한 시작이나 종말의 일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양한 시기에, 그 세계는 현대의 스칸디나비아와 유럽 북부의 넓은 영토를 아울렀고, 서쪽으로는 북대서양의 섬들, 그리고 동쪽으로는 러시아의 변방까지 뻗었다. 많은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심지어 그 한계선도 넘어갔다. 시대적 또는 지리적으로 확관 경계선을 긋기가 불가능하다보니, 바이킹 세계를 정의하려면 실용적 접근법을 취할 필요가 있다. 몇 세기에 걸쳐 군사 행위, 집단 이동, 교역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동안 이 세계를 하나로 묶어 준 것은 무엇인가? 답은 '변화'이다. (p. 6)

천하를 재패했던 로마가 무너져가던 시기 다른 곳들이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종종 잊곤 한다. 권력은 늘 흥망성쇠를 거듭하기 마련이며 그 중심지는 변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세계는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계 곳곳에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따로 떨어져 있었지만 어느 순간 서로 만나기 마련이다. 문화의 흐름은 강물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강물보다 더 멀리 뻗어나가고 그렇게 흩어져 발달하던 문화는 서로 섞이며 또다른 세계를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누군가 망하면 누군가는 흥한다.

서사는 아마도 고대 그리스, 로마 또는 이집트 세계에 대해서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바이킹 시대에는 통하지 않는다. 바이킹 세계가, 비록 크고 폭넓게 연결되어 있었지만, 더 이전 문명들에 비해 좀 더 정치적으로 파편화되었고 사회적으로 다양했기 때문이다. 어떤 단일한 서사에 액자 역할을 할 바이킹 제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바이킹 시대는 바이킹들의 한 시대였다. (p. 7)

이 책은 전문적 연구에 요구되는 정도의 상세한 유물 묘사를 다루기보다, 서사를 위한 시작 지점으로 유물들을 이용한다. 유물들은 말을 하지 못하지만, 창의성과 새로운 과학 기법에 힘입으면, 이따금 읽어낼 수 있다. (p. 9)

바이킹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세력이다. 이런 점에서 징기스칸의 몽골과 비슷한 것도 같다. 그들은 적은 것을 남겼지만, 그 시대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고고학은 이름대비 사실 그리 오래된 학문이 아니다. 약탈과 도굴과 개인적 수집을 넘어 학문으로 정착한 것은 생각보다 최근이다. 그래서인지 고고학의 발달은 최신과학의 발달과 맞물려 성과를 뚜렷이 내기 시작했다. 이 책속의 유물들을 보면서 이걸 어떻게 알아냈지? 싶은 유물들이 있었다. 과학은 고고학의 필수적 동반자이다.

6세기 중반, 아마도 환경적 재앙(화산분출)의 결과로 사회는 붕괴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정착지 폐기와 정치적 이탈이 초래되었다. 다양한 당파들이 지역 지배를 놓고 경쟁하다 보니, 다시 건축된 사회는 틀림없이 그 후유증을 안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수평선에서는 유럽 대륙이 꽃을 피우고 있었고, 북해와 발트해 해안을 끼고 도시와 교역 정착지들이 솟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아랍 칼리프 국가로부터 유럽으로 은이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바이킹 시대 여명의 상황은 그러했다. 매우 무너지기 쉬운 신분질서를 가진 사회에서, 성공적인 해외원정이 한 족장의 지위를 얼마나 높아지게 만들었을 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p. 16)

침탈과 약탈로 시작된 교류도 반복되고 서로 섞이다 보면 나름의 구조를 갖추기 마련이다. 바이킹의 흥망성쇠는 소규모 부족난립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어떻게 서로 교류하게 되고 또 어떻게 중앙집권화되어 서로 비슷해지는지를 보여준다. 바이킹의 시대는 일종의 춘추전국시대였다.

 

 

가장 놀라운(혹은 충격적인^^) 유물과 가장 상징적인 유물을 고르라면, '변'과 '장신구' 이다.

영국 요크지역의 늪지대에서 발견된 '변'은 그야말로 '이런 변이 있나!' 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었다. 검색해보니, 요크에는 2천년 이상 동안 정착촌이 있어왔고, 이 도시의 지속적인 점령의 결과는 현대도시가 고밀도로 압축 된 쓰레기 와 오물층에 자리잡게 만들었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이 추정하는 깊이가 약 10피트에 이른다는데, 켜켜이 '뭔가' 들이 쌓여 있다는 말이다. 이 지역의 일부는 도시의 일부 지역의 토양에 수분이 침착되어 있고 산소가 거의 없어 소멸되기 쉬운 목재,가죽,천,뼈 같은 것들을 천년 이상 보존해 놓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 1970년대에서야 발굴된 이 지역에서 뭐가 얼마나 더 나올지 모르겠지만, '변' 뿐만 아니라 '뇌'도 나왔다고 하니 진흙이 산소를 차단하면서 부패를 막은 또다른 유물이 무엇이 더 나올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소부족 난립 시대에서 해외원정을 성공한 바이킹들은 서로 동맹과 충성관계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때 이용되는 선물로 '장신구'들은 특별했을 것이고 정략결혼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다양한 지역에서 발굴되는 금속세공품들을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200여개에 이르는 이국적 물품들을 활용해 만든 목걸이를 보면서 바이킹이 불러일으킨 변화의 핵심은 결국 교류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이러한 교류의 핵심은 '바다' 였다.

그러고보면 지중해라는 바다를 중심으로 발달했던 고대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이집트의 교류에서도 중요했던 지역은 땅보다는 바다였다.

로마가 제국으로 모두를 통합하고 육지중심 권력으로 변화해가면서 교류는 폐쇄적이 된 것이 아닐까. 육지에서 그렇게 치고받고 있을때 바다에 등장한 새로운 세력이 교류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이 세력이 결국은 중심패권을 흔들게 된 것이 아닐까. 이슬람도 바다를 통해 스페인까지 진출했을 때가 가장 부흥했던 때가 아닐까. 오스만제국이라는 육지에 갇히면서 결국 패망의 길로 간 것이 아닐까. 바다는 지구표면의 70%이상을 차지한다는 부피 이상으로 역사에서도 중심무대였던 것이 아닐까.

맹약을 다지기 위해 '반지를 주는' 관습은 게르만 세계 전역에서 공통적이었다. 검 자체도 족장이 추종자들에게 충성 및 봉사의 대가로 주는 선물이었다. (p. 47)

10세기는 팽창의 시대였다. 상업과 정착지, 그리고 권력의 팽창, 이는 새로운 육지로의 여행, 교역 및 산업 조직의 혁신, 그리고 정치적 권력에서는 중앙집권화의 증가를 야기했다. 초기 바이킹 시대가 일종의 초기 중세식 거친 서부였다면, 그 후 수백 년간은 결국 중세 유럽 사회로 성장할 씨앗들이 부려진 셈이다. (p. 103)

자물쇠와 열쇠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것은 바이킹 시대 사회가 어떻게 짜여 있었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 소지품 및 개인 공간에 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p. 115)

맹약의 징표로 주고 받던 반지, 그 반지를 달고 있는 검, 검또한 충성의 증표, 자물쇠와 열쇠 사용의 확대 이러한 것들이 결혼서약때 주고받는 반지와 기사에게 내려지던 검과 재산보호를 위한 잠금장치의 발달등과 관련이 있겠지 싶어서 흥미로웠다. 바이킹이 뿌린 씨앗들은 다른 씨앗들과 섞여 중세문화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바이킹 연구에서 너무나 자주 나오는 뻔한 이야기는 바이킹이 뿔 달린 투구를 쓴 적 없다는 것이다. (p. 146)

바이킹! 하면 뿔투구! 인데 바이킹은 뿔달린 투구를 쓴 적 없다니!! ㅎㅎㅎ

이런 역사적 왜곡은 찾아보면 은근히 많다. 소크라테스도 '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을 한 적 없는 것처럼.

핵실버는 바이킹이 경제 거래에 사용하기 위해 작게 자른 은 조각들을 가리킨다. 은은 바이킹 시대에 주요 통화를 구성했다. 약탈로 더 많은 은을 손에 넣는 것이 부를 얻는 효율적 방법이었다 (p. 173)

요크에서 발견된 성 베드로의 페니는 아마도 바이킹 시대의 가장 유명한 동전일 것이다. 앞면에 십자가, 칼, 그리고 토르의 망치 묘사가 문구와 함께 적혀 있다. 이것은 종교적 통합 또는 토르와 성 베드로의 융합을 의도한 듯한데, 이는 대중적 개종을 용이하게 만들려는 의도된 전략이었다. (p. 181)

스칸디나비아 양식에 더해, 오스만과 다른 유럽 내륙의 문화 역시 국제 연결성의 결과로 북해 세계를 통해 모방되었다. 그러나, 바이킹 시대 최후의 주요 교역항들은 쇠락하고 있었다. 이런 변화에는 환경 변화가 한몫을 했다. 비록 핵심 촉매는 증가하는 중앙집권화와 새로운 '도시'종교였지만, 그것은 기독교 였다. 1000년 무렵, 덴마트, 스웨덴, 그리고 노르웨이 왕들은 모두 자신들을 기독교인으로 선포했다. 기독교, 도시화 그리고 중앙집권화는 손에 손을 맞잡고 스칸디나비아 전역에서 발달했다. (p. 196)

은관련 유물은 상당히 많이 발견되었다. 작은 조각들이 많았는데 무게로 잰 은은 굳이 동전이 아니어도 화폐로 통용되었다. 왕이 자주 바뀌는 시대에 왕의 얼굴이 박힌 동전보다는 무게 자체로 거래되는 은조각 들이 더 화폐가치가 있었을 것도 같다. 약탈로 시작했지만 거래가 되고 교류가 되면서 많은 것들이 표준화되기 시작했다. 토속신앙과 합쳐지면서 자리잡은 기독교는 중앙집권화를 가속시켰고 교역의 발달로 인한 도시화또한 국가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그렇게 도적때들은 시민이 되기 시작했다.

이 인상적인 뿔피리는 코끼리 엄니로 만들어지고 이탈리아 살레르노에서 조각되었다. 공예가들은 상아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이슬람 조각가들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p. 240)

노예는 바이킹 경제의 주요한 원동력이었지만, 노예제의 고고학적 증거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찾기 힘들다. (p. 243)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 커다란 뿔피리 유물사진을 보면서 정교하게 새겨진 문양들이 이슬람조각들이 한 것이라는 설명을 읽으니 역시 바이킹이 성장하던 시기가 얼마나 열려있던 사회였는지 다시한번 느껴졌다. 하지만 어느시대의 역사를 보더라도 간과하는 부분이 바로 노예제 이다. 고대부터 중세, 그리고 근대까지도 노예가 없던 적이 없었다. 노예는 사회와 문화발달의 근간이었다. 인간의 역사에서 인간취급을 받지 못했던 노예의 역사가 얼마나 밝혀질 수 있을지 갑자기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여하튼 역사를 읽으며 늘 기록에 남지 않은 존재들을 기억하며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역사는 알면알수록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분야인것 같다.

그동안 중세역사에 대해 좁은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을 최근 읽었던 책과 이 책을 통해 새롭게 확장시킬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참 좋았다.

무엇보다, 직접 보지 못하더라도 큼직하게 다양한 유물사진을 컬러풀하게 설명과 함께 책으로 읽는 다는 것이 요즘 같은때 얼마나 감사한지 새삼 느낄 수 있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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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를 위로하는 중입니다 - 상처를 치유하고 무너진 감정을 회복하는 심리학 수업
쉬하오이 지음, 최인애 옮김, 김은지 감수 / 마음책방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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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서가 심리서가 참 많이 나오는 세상이다.

끊임없이 나오는 그런 책들이 끊임없이 많은 이에게 읽혀지는 것은 끊임없이 위로가 필요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그저 마음을 진정시키고 주의를 환기시키며 힘내라고 응원해주는 책들이 많았다면 언제부턴가는 그냥 이대로도 괜찮다고 굳이 힘내서 또다시 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아주는 책들이 많아진 것 같다. 그렇게 오롯이 자기자신에게 집중하도록... 그럴 때 필요한 문장,

"지금 나를 위로하는 중입니다"

 

기억도 추억도 가물해지더라도 머릿속에선 지워졌더라도 마음속에는 남아있는 그런 것들이 있다. 그것이 상처일 경우에는 더욱 진하게 각인되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이 계속 나를 찌르고 기생하도록 그렇게 내가 숙주가 되어 말라비틀어질때까지 나를 내버려 둘수는 없는거 아닌가

 

내가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나아닌 다른 존재 먼저 생각해주느라 숙주로 살아야 겠는가. 누구나 자기 인생밖에 감당하지 못한다지 않는가. 아니, 자기 인생 하나 오롯이 감당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니 일단 나와 화해해야 한다. 누구를 용서하고말고를 떠나 일단 나에게는 스스로 손내밀어줘야 한다.

 

나를 어떤 모습으로라도 온전히 받아줄 수 있는 것은 결국 나 뿐이다.

 

그러니 소확행이 되었건 나를위한선물이 되었건 때로는 내가 나를 위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옮긴이의 글이 이 책에 대한 내 마음과 닮아서 뭘 더 덧붙일 필요가 없어졌다.

각 에피소드마다 정리된 '효과' 들은 감정을 객관적으로 보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고 심리적 상식으로 알아두어도 좋을 내용들이다.

매 장마다 가려뽑은 문장들이 인상적이었고, 정리된 단락들이 읽으면서 정리하게 해주어서 편했다. 가끔 등장하는 그림들도 긴문장과는 또다른 느낌으로 시선을 끌었다.

이 책은 실제사례와 저자의 따듯한 마음이 함께 하면서 공감과 위안을 주는 책이다. 가족이건 연인이건 친구건 지인이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늘 다양한 감정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러한 감정이 버거울때, 그렇게 때로는 필요한 위로를 담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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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초승달, 천년의 공존 -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극적인 초기 교류사
리처드 플레처 지음, 박흥식 외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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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극적인 초기 교류사

전쟁, 외교, 순례, 기술, 사상, 예술… 중세의 질서를 만든 두 세계가 있었다!

그들은 왜 끝끝내 서로를 이해하는 데 실패했는가

표지 中

 

 

저자는 중세사를 연구한 저명한 학자로 이 책이 나온 것은 2003년 이나 역자가 유학중 서점에서 발견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이제야 국내번역본이 나오게 되었다. 이제야 라고 표현했지만 여전히 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내용이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듯 보이므로. (다행히 저자는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서술하고 있어서 종교와 관련없이 역사서로 읽기에 충분했다)

스티븐이 말했다. '역사는 제가 거기서 깨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일종의 악몽입니다' (…) 만일 저 악몽이 당신에게 뒷발질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2장 네스토르 중에서

 

로 시작하는 책의 첫페이지에서부터 확 끌렸다. 이 책의 내용과 관계없이 [율리시스]를 꼭 읽어야 겠구나 다시한번 다짐하게 하는 문장으로 다가왔다^^;;;

이슬람은 단일한 경전을 믿는 종교다. 그와 대조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여러 경전을 묶은 [성서]를 신앙의 근거로 삼는다. 이 같은 단일 경전과 복수 경전의 신앙 사이의 차이는 세계사에서 광범위한 영향을 미쳐왔다. 이슬람의 경전 [꾸란]은 하느님이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계시한 내용이다. 이 책은 무함마드가 사망한 서기 632년 이래 약20년에 걸쳐 정통 이슬람 전통에 따라 편집되어 최종본이 확정되었다. 그리스도교 경전들은 [성서]라 불리던 한 권의 책 속에 함께 묶인 채 발견되었다. [성서]를 지칭하는 영어 단어 '바이블bible'이 서고 書賈'라는 뜻의 라틴어 '비블리오테카bibliotheca'에서 기원했다는 데서 그 성격을 명확히 할 수 있다. (p. 17)

그리스도교 경전들, 특히 예수와 그의 초기 추종자들의 가르침을 담은 서신들과 이야기들의 이 같은 다양성과 차이는 아주 초창기부터 그리스도교 역사에 토론, 논쟁, 의견 차이가 발생하는 요인을 제공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교의 역사란 서로 다른 조류들과 분파들이 배태되고 시끌벅적한 논쟁과 규탄, 속임수가 난무하는 가운데 작은 파벌로 나눠졌다가 다시 재편되곤 하는 과정이었다. (p. 18)

한편 이슬람 체제에서는 이 같은 교리 논쟁이 가능하지 않다. [꾸란]이 간직하고 있는 엄격한 신학 교리들은 애매하거나 난해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슬람은 그와 성격이 다른 싸움을 전개했다. 예언자가 사망한 후 채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이슬람 공동체 내에서 권위의 원천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다툼이 생겼다. 결국 공동체는 순니파와 쉬아파로 갈라져 다시는 화해하지 못했다. (p. 19)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사이의 이 같은 근본적인 차이들은 상호간 너그러운 이해와 화합에 도움이 되는 대화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슬람의 준엄한 일신교는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와 성육신 교리를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불쾌해한다. 그리스도교 종파들은 전통적으로 무슬림 관찰자들에게 비웃음거리였다. 그리스도교 세계 내의 교회화 국가(혹은 사회) 사이에 긴장이 존재했다면, 이슬람하에서는 그럴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권위와 신자 공동체의 조직 즉 정치에 대한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으로 이끌었다 (p. 21)

 

본문을 시작하는 첫문장부터 단도직입적이다. 1부의 첫 장 제목이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차이] 다. 그리고 5페이지로 간략하고 명쾌하게 차이를 정리해 낸다. 이렇게 다르니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게 당연한거 아닌가 싶을 정도다.

두 종교는 같은 하느님을 모신다.(유대교는 논외로 두고) 그리스도교는 예수탄생을 기점으로 다양한 종파의 난립 속에 합의의 종교를 만들어 왔다. 하나의 신에서 삼위일체라는 세부분의 신성을 함께 존중한다. 이슬람교는 일신교이다. 무함마드는 신이 아니라 신의 말씀을 전해준 예언자였을 뿐 신으로 받들어지진 않았다. 하나의 신성은 나누어질 수 없다. 유대교가 유일신앙으로서 그리스도교와 합쳐질 수 없었듯이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시작부터 근본부터 완전히 달랐다. 같은 인간인데 남과 여가 천지 차이이듯이 이 두 종교도 같은 신을 숭배하지만 전혀 다르다고나 할까.

아랍의 무슬림 군대는 비잔티움과 페르시아 사이의 오랜 갈등으로 인해 극심한 파괴를 경험했던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의 지방 주민들에게 가산족의 계승자로 간주되었다. 가산족은 황제와의 조약에 의해 그들의 보호자가 되었기 때문에 타협하는 데 신중했었다. 한편 박해받던 시리아와 이집트의 단성론 그리스도인에게는 무슬림이 해방자로 생각되었다. 이는 박해받던 에스파냐의 유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p. 37)

페르시아로 대표되던 아랍지역과 로마제국이 무너지고 난 후의 비잔티움과의 경계지역에서 완충지 역할을 했던 가산족에게 비잔티움은 언제부턴가 소홀해지기 시작했고 때마침 정복해들어온 무슬림 군대는 이전의 지배세력들보다 오히려 더 포용적이고 더 우호적이었다. 기꺼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단으로 박해받던 단성론 그리스도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도교는 끊임없는 종파싸움이 있어왔다. 세력을 잡은 자들에게 내쳐져 이단종파로 판정받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수는 생각보다 상당히 많았다. 역사적으로 이슬람의 급속한 성장에 있어 이단종파들의 포용과 이후 그들이 이슬람화 되는 것이 큰 영향을 끼쳤을 거라는 생각을 처음 깨달았다. 초기 기독교 세력이 우세했던 북아프리가 지역이 지금은 다 이슬람교를 믿게 됐다는 것이 새삼 의미있게 다가왔다.

당대인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슬람이 '하나의 새로운 종교'일 수 있다는 관념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며, 당연히 수용할 수도 없었다. (p. 40)

무함마드와 그의 분파는 단성론자나 그 외 다른 사람들처럼 결정적인 교리 문제에서 길을 잃은 종교적 이탈자의 또 다른 물결이라고 그럴듯하게 설명되었다. (p. 41)

 

당시 기독교인들은 본인들의 종교가 유일신 종교인 유대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고 이단으로 여겼듯이 같은 신에서 출발한 이슬람교도 그저 이단종파의 하나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들의 종교적 요소들은 자신들과 너무나 비슷했다. 그래서 더욱 이단이었다. 이단은 처단의 대상일뿐 존중할 가치가 없는 세력이었다.

무슬림 정복자들은 그들이 발견한 이같은 체제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달리 대안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인력도 기술도 충분하지 않았으며 세금 수입도 필요했다. 그러므로 정복한 지역을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단지 지배자만 바뀌었을 뿐이다. (p. 47)

신흥 권력집단인 무슬림 정복자들이 기독교인들의 지역을 정복했을때 그들은 기존의 체제를 그대로 수용하고 관리인원들도 그대로 존속시켰다. 이슬람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 정복자들에게 저항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소외받던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더욱.

'성서의 백성'은 납세자, 관료, 기술자로서 유용했을 뿐 아니라 긴요했다. 그렇지만 그 정도에서 그쳤으며 그외에 다른 필요를 느끼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미 광대한 문명을 이루고 있기에 탐구가 필요하지 않았다.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이슬람에 냉담할 수 없었다. (p. 57)

그리스도인들은 이슬람을 이단이라 생각했으나, 이슬람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무관심 했다. 이슬람인들은 자신들의 세계가 더 발달했다고 생각했고 자신들의 종교가 더 완전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신성을 셋으로 나누냐며 그리스도인들의 종교는 이슬람교에 비해 미개하다고 무시할 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동상이몽은 점점 격차가 더 크게 벌어진다.

이슬람 개종자들은 아랍 씨족의 일원, 달리 말하면 한 후견인의 피보호자(아랍어로는 마울라, 복수로는 마왈리)로 받아들여져야만 했다. 마왈리는 공동체의 완전한 구성원 자격을 누릴 수 없었으며 재정적인 측면 등에서 어느 정도 차별을 겪는 2등 시민에 머물렀다. 여기서 시작된 분노와 사회적 긴장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이들이 압바스 혁명의 가장 강력한 지지 세력이었다. 압바스 왕조의 성립으로 이들 마왈리는 고대하던 것을 얻게 되었다. 사회적 처우의 평등이 인종보다는 종교와 문화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 다시 말해 '아랍'사회가 아닌 진정한 '이슬람' 사회가 선언되었다. (p. 67)

여기서 이 책을 읽으며 처음 느낀 두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로마!

이슬람 사회의 발달에서 로마가 보였다. 로마사회에 클리엔테스와 파트리키의 관계가 떠올랐다. 사회가 성장하면서 로마시민의 범위가 넓어졌던 것이 떠올랐다. 로마가 로마시를 넘어 로마제국이 되는 과정이 떠올랐다. 고대그리스부터 아랍지역과는 서로 반목하면서도 사실 끊임없는 교류가 있었다. 로마제국의 영토는 흑해연안까지 확장됐었다. 로마문화가 아랍지역에 생소했을리는 없다. 알렉산더대왕이 퍼뜨린 헬레니즘의 물결을 따라 로마제국의 문화도 어디까지 흘러갔는지는 알수 없는 거 아닐까, 그렇게 아랍지역에도 섞여 있지 않았을까?

중세 초 서양 그리스도교 세계는 압바스 왕조 시기에 부상하던 이슬람 사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전했다. 다르 알-이슬람이 정기 교역을 통해 연결된 도시들의 세계였던 반면, 서양은 압도적으로 농업 경제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도시들은 규모가 작고 널리 흩어져 있었다. 교역은 대체로 국지적인 범위로 국한되었으며 그 규모도 미미했다. 상인 역시 사회에서 영향력이 크거나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 통합된 법 체제, 세금 제도, 관료제, 상비군 등 예전 로마제국을 떠받치고 있던 하부 구조를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p. 90)

더구나 이들의 식자 識字수준도 그리 높지 않았다. 서유럽에서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이슬람 세계에서만큼 가치 있게 평가되지 않았던 탓이다. 고대 고전의 과학과 철학 지식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의 매개 수단인 그리스어도 거의 잊혔다. 그것을 대체한 것은 주로 [성서]와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라틴 교부들에 기반을 둔 지식문화였다. 이 문화는 본질적으로 과거 지향적이며 철저히 보수적이었다. 그러고 보면 압바스 시대의 무슬림들이 서양 혹은 라틴 그리스도교 세계에 대해 그토록 적은 관심을 보인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로부터 제공받을 만한 것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p. 91)

압바스 시대의 이슬람 세계는 여러 방식으로 자기 충족적이었다. (p. 94)

 

고대지식을 받아들이고 해석해서 더 발달시키고 있던 이슬람에게 그리스도교 세계는 오히려 변방이었다. 교류할 매력이 없는.

나도모르게 서양인의 세계사적 관점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슬람이 유럽을 무시했을 수 있다는 관점을 이 책을 통해 처음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해봄직한 관점이었다.

로마 시대 이래로 서유럽에서 가장 두드러진 도시들의 성장이 루앙, 링컨, 요크, 더블린 등 스칸디나비아 상인들이 자주 드나들고 정착했던 거점들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중동 이슬람의 경제적 견인이 그 같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서유럽 시민계층의 성장을 촉진했다. 북유럽과 관련해보자면 피렌 테제는 반박되었다. 지중해가 '이슬람의 호수'가 되었으며, 그리스도인 상인들이 그곳에서 추방되었다는 피렌의 판단은 과장되었다. 앞서 서술한 이슬람 이전의 경제적 혼란은 그 기원이 흑사병에 의한 인구감소에 있었다 (p. 110)

'피렌테제' 라는 말은 몰랐지만 피렌테제의 내용들은 세계사적 책들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관점이었다. 그리고 그 익숙한 관점 또한 이 책을 통해 반박의 근거를 얻을 수 있었다.

대외교류를 멈추고 땅을 경작하며 문맹으로 그리스도교에 갇혀있던 유럽의 중심이 아닌 지역에서는 종교성이 약한 정착민이 늘면서 외부와의 교역이 활발했고 그 대상들 중에는 이슬람도 있었으며 그렇게 새로운 도시들이 발전하고 있었다.

유럽의 역사를 기독교암흑천년으로만 봐서는 안될 곳이 있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러한 새로운 도시들이 있었기에 르네상스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문명의 이질적인 성격을 고려할 때 꽤 의아스러운 점은 양측 모두 상대 문명의 종교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단적인 이스마엘의 후손들에게 언짢은 적의를 유지했다. 무슬림드른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과학적 지식이나 생필품의 풍부한 원천을 발견했지만, 그 외에는 가치 있는 것을 찾지 못해 무시했다.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은 서로 종교적 반감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상태에서 어울리며 공존했다. 그 같은 상황에서 누군가 종교적 열정을 내세우며 격렬하게 선동한다면 폭력적인 대결로 발전하는 것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p. 113)

두 문명은 서로가 서로를 무시했지만 차단벽을 쌓아 올렸던 것은 아니다. 나름의 영역을 인정하며 교류도 하며 공존했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한쪽의 세계가 불안정해지면 안정을 찾기 위해 외부에서 폭력성으로 풀어내야 했다. 어느쪽이 먼저였는지를 따질 의미가 없을만큼 서로간에 끊임없는 공방전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서양사는 그것을 십자군전쟁이라는 종교전쟁으로 포장해왔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음을 이 책을 통해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알렉시오스 1세가 기대한 것은 비잔티움 장수의 지휘 아래 통제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적당하면서, 세밀한 군사 임무에 배치되는 데 필요한 무장과 훈련까지 갖춘 전사 집단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등장한 것은 열성적이기는 하나 훈련이라고는 거의 받지 못한 거대한 오합지졸이었다. 비잔티움 영토를 시끄럽게 가로지르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까지 내달려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해버린 이 싸움꾼 무리를 보통 '제1차 십자군'이라고 부른다. (p. 132)

중세 그리스도교 세계는 십자군에 엄청난 관심을 기울였고 이를 지속적으로 진지한 관심을 가져 마땅한, 도덕적 무게감과 위엄을 지닌 주제로 여겼다. 그런데 이 점은 중세 이슬람의 경우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이슬람권에서는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생산된 것과 같은 십자군 원정 관련 사료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대의 이슬람 화자들에게 십자군 원정은 이슬람 세계의 주변부를 성가시게 한 소규모 접전에 지나지 않았다. 십자군은 이를테면 한때 왔다가 떠난 이들이었다. (p. 143)

십자군에 대한 무관심은 중세 이슬람 세계가 그리스도교 세계의 문화 전반에 얼마나 무관심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요소이다. (p. 144)

 

중세 하면 십자군 전쟁 아닌가? 그런데 이슬람사에서 십자군은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니... 한마디로 웃기지 않은가? 혼자 북치고 장구친 느낌?!;;;

거대 종교전쟁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전쟁은 이슬람교와 전면전을 치룬적도 없는 자기들만의 리그였다. 그들이 처단하려고 했던 쪽에서는 그들이 그런 원대한 전쟁을 걸어왔다는 것을 무시했을 정도로.

구원자를 자처하던 십자군들이 그들이 도울 대상이었던 동방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기껏해야 미심쩍은 눈초리만 받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서방인들 역시 동방 그리스도교인들을 거만하고 매력 없는 먼 친척으로 간주하면서 특이한 관습과 전통에 대해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을 최선으로 여겼다. 이에 비하면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이국적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한 태도가 차라리 더 관대했다. (p. 157)

도와달라고 한적도 없지만 도와주겠다고 온 사람들이 사실은 그리 반가운 대상이 아닐때, 그리고 그들이 없애려고 했던 그들의 적이 더 우호적일때 그 난감함이란;;; 그런데도 그들은 자꾸 원정을 왔다. 승리하지도 못할 전쟁을 자꾸 일으키는 배경에는 종교가 아니라 정치가 있었다. 그리고 몽골의 등장은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다.

1050년에서 1250년 사이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무슬림-유대인-그리스인이 차지하고 있던 기존의 상업적 헤게모니를 점진적으로 잠식해갔다. 물론 이러한 헤게모니는 훗날 오스만 제국의 팽창 등으로 여러 번 위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서유럽의 상업적 우위는 결코 완전히 전복되지 않았고 이는 광범위한 결과를 낳게 된다. 지중해의 상업이 북부 유럽의 해상 교역과 연결되고 여기에 재정 기법과 여러 기반구조의 발전이 더해지면서 훗날 세계를 지배하게 될 유럽의 상업 자본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p. 180)

십자군원정이 해내지 못한 것을 자본이 해냈다. 종교는 승리하지 못했으나 돈은 승리할 수 있었다. 사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늘 표면적으로는 다른 명분을 내세운다. 여전히.

철학 혹은 과학 문화와는 달리, 종교 문화와 관련해서는 지적 교류의 상황이 다소 달랐다. 이슬람의 식자층은 그리스도교에 대해 여전히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어쩌면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그들은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주어진 계시가 모세나 예수와 같은 이전 시기의 예언자들에게 주어진 부분적인 계시를 넘어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이미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로 추월당해 불필요해진 신앙의 신조를 연구할 유인이 없었다. 따라서 다른 종교 연구는 오로지 신앙과 관련한 논쟁에 참여할 때만 수행되었다. (p. 209)

1515년 술찬은 포고령을 통해 인쇄 기술을 습득하려는 무슬림은 그 어떤 자라도 사형에 처하리라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p. 250)

이슬람 신학자들이 [꾸란]의 인쇄를 신성 모독적인 행위로 규정했던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오직 '필사자들의 손'에 의해서만 그것도 가능한 한 최고의 필체로만 전승되어야 했다. 인쇄술과 관련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사이의 문화적 차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다르 알-이슬람, 즉 이슬람 세계는 그리스도교 세계로부터 무언가 배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세계에 대한 경멸이 그 어느 때보다 강했다. (p. 251)

 

고인물은 썩는다. 이슬람 초기에는 그토록 열성적으로 선진문물을 습득하던 그들이 어느때부터인가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지면서 더이상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고 그저 무시와 경멸어린 태도로 일관하게 됐을때 바깥 상황은 서서히 역전되고 있었다.

중국이 떠올랐다. 고대 중국이 왜 고대유럽과 교류하지 않았는지 그들이 자신들의 왕국에 만족하며 원정을 접음으로써 어떻게 갇힌 세계가 되었는지 역사는 알려준다. 그리고 그같은 오만은 결국 수치스러운 침략을 당하게 했다. 이슬람이 스스로 완전하다고 배울거 다 배웠으니 외부는 그저 무시해도 된다고 오만하게 된 순간 역사는 거꾸로 덮칠 준비를 했다.

인쇄술의 거부는 [내 이름은 빨강] 이라는 소설을 생각나게 했다. 이슬람 전통의 세밀화가들을 통한 시대적 변화를 깨닫게 하는 오르한 파묵의 소설...

무슬림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이 하느님의 마지막이자 가장 완전한 계시를 받은 선택된 민족이라는 확신으로 인해 더할 나위 없는 자부심으로 고취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불가피하게 그리스도인들을 경멸의 대상으로 낮춰봤다. 게다가 다르 알-이슬람은 지상에서 하느님이 베풀어 준 은총과 섭리로 그리스도교 세계보다 훨씬 광대한 지역을 차지했다. 바그다드의 시선에서 봤을 때, 900년 경 그리스도교 세계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환경에 머물러 있으면서 혼란을 야기하는 이단 분파들과 작은 왕국들로 구성된 무질서한 혼합에 불과했다. 이슬람 공동체는 신앙은 물론 부와 기술, 학식과 문화에서 경쟁할 상대가 전혀 없었다. 무슬림들이 당시 그리스도인에 대해 오만한 태도를 취한 이유는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 마치 암반처럼 오래전에 저변을 구축한 이러한 태도들은 그 이후 여러 세기 동안 그들의 도덕적 환경을 형성해 왔다. 이는 경시해서는 안 되는 일종의 인간관계의 지질학이라 할 수 있다. (p. 261)

유럽의 헤게모니는 근대 초에 아무 기반 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의 힘줄과 근육은 중세가 진척되던 중에 눈에 띄지 않는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의 주변부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발전했다. (p. 262)

그리스도교 세계에 대한 무슬림의 냉담은 당대에 진행되던 변화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슬람의 서양에 대한 경멸이 그와 같이 변화하는 상황을 간과하도록 했던 것이다. (p. 263)

 

역사의 반복적 순환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역사의 물결은 약해질 수도 있고 거세어질 수도 있으나 약해졌다고 멈춰있지 않고 거세졌다고 위험한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는 끊임없이 흐르지만 반복적인 교훈을 준다. 그 교훈을 무시할 때 역사는 바로 뒷발질을 할 것이다. 정신차리라고.

이 얇은 책에서 이토록 거대한 시각을 배우게 될줄 미처 몰랐다. 새로운 깨달음과 새로운 물음표들을 함께 던져준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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