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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초승달, 천년의 공존 -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극적인 초기 교류사
리처드 플레처 지음, 박흥식 외 옮김 / 21세기북스 / 2020년 4월
평점 :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극적인 초기 교류사
전쟁, 외교, 순례, 기술, 사상, 예술… 중세의 질서를 만든 두 세계가 있었다!
그들은 왜 끝끝내 서로를 이해하는 데 실패했는가
저자는 중세사를 연구한 저명한 학자로 이 책이 나온 것은 2003년 이나 역자가 유학중 서점에서 발견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이제야 국내번역본이 나오게 되었다. 이제야 라고 표현했지만 여전히 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내용이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듯 보이므로. (다행히 저자는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서술하고 있어서 종교와 관련없이 역사서로 읽기에 충분했다)
스티븐이 말했다. '역사는 제가 거기서 깨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일종의 악몽입니다' (…) 만일 저 악몽이 당신에게 뒷발질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2장 네스토르 중에서
로 시작하는 책의 첫페이지에서부터 확 끌렸다. 이 책의 내용과 관계없이 [율리시스]를 꼭 읽어야 겠구나 다시한번 다짐하게 하는 문장으로 다가왔다^^;;;
이슬람은 단일한 경전을 믿는 종교다. 그와 대조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여러 경전을 묶은 [성서]를 신앙의 근거로 삼는다. 이 같은 단일 경전과 복수 경전의 신앙 사이의 차이는 세계사에서 광범위한 영향을 미쳐왔다. 이슬람의 경전 [꾸란]은 하느님이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계시한 내용이다. 이 책은 무함마드가 사망한 서기 632년 이래 약20년에 걸쳐 정통 이슬람 전통에 따라 편집되어 최종본이 확정되었다. 그리스도교 경전들은 [성서]라 불리던 한 권의 책 속에 함께 묶인 채 발견되었다. [성서]를 지칭하는 영어 단어 '바이블bible'이 서고 書賈'라는 뜻의 라틴어 '비블리오테카bibliotheca'에서 기원했다는 데서 그 성격을 명확히 할 수 있다. (p. 17)
그리스도교 경전들, 특히 예수와 그의 초기 추종자들의 가르침을 담은 서신들과 이야기들의 이 같은 다양성과 차이는 아주 초창기부터 그리스도교 역사에 토론, 논쟁, 의견 차이가 발생하는 요인을 제공했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교의 역사란 서로 다른 조류들과 분파들이 배태되고 시끌벅적한 논쟁과 규탄, 속임수가 난무하는 가운데 작은 파벌로 나눠졌다가 다시 재편되곤 하는 과정이었다. (p. 18)
한편 이슬람 체제에서는 이 같은 교리 논쟁이 가능하지 않다. [꾸란]이 간직하고 있는 엄격한 신학 교리들은 애매하거나 난해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슬람은 그와 성격이 다른 싸움을 전개했다. 예언자가 사망한 후 채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이슬람 공동체 내에서 권위의 원천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다툼이 생겼다. 결국 공동체는 순니파와 쉬아파로 갈라져 다시는 화해하지 못했다. (p. 19)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사이의 이 같은 근본적인 차이들은 상호간 너그러운 이해와 화합에 도움이 되는 대화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슬람의 준엄한 일신교는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와 성육신 교리를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불쾌해한다. 그리스도교 종파들은 전통적으로 무슬림 관찰자들에게 비웃음거리였다. 그리스도교 세계 내의 교회화 국가(혹은 사회) 사이에 긴장이 존재했다면, 이슬람하에서는 그럴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권위와 신자 공동체의 조직 즉 정치에 대한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으로 이끌었다 (p. 21)
본문을 시작하는 첫문장부터 단도직입적이다. 1부의 첫 장 제목이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의 차이] 다. 그리고 5페이지로 간략하고 명쾌하게 차이를 정리해 낸다. 이렇게 다르니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게 당연한거 아닌가 싶을 정도다.
두 종교는 같은 하느님을 모신다.(유대교는 논외로 두고) 그리스도교는 예수탄생을 기점으로 다양한 종파의 난립 속에 합의의 종교를 만들어 왔다. 하나의 신에서 삼위일체라는 세부분의 신성을 함께 존중한다. 이슬람교는 일신교이다. 무함마드는 신이 아니라 신의 말씀을 전해준 예언자였을 뿐 신으로 받들어지진 않았다. 하나의 신성은 나누어질 수 없다. 유대교가 유일신앙으로서 그리스도교와 합쳐질 수 없었듯이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시작부터 근본부터 완전히 달랐다. 같은 인간인데 남과 여가 천지 차이이듯이 이 두 종교도 같은 신을 숭배하지만 전혀 다르다고나 할까.
아랍의 무슬림 군대는 비잔티움과 페르시아 사이의 오랜 갈등으로 인해 극심한 파괴를 경험했던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의 지방 주민들에게 가산족의 계승자로 간주되었다. 가산족은 황제와의 조약에 의해 그들의 보호자가 되었기 때문에 타협하는 데 신중했었다. 한편 박해받던 시리아와 이집트의 단성론 그리스도인에게는 무슬림이 해방자로 생각되었다. 이는 박해받던 에스파냐의 유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p. 37)
페르시아로 대표되던 아랍지역과 로마제국이 무너지고 난 후의 비잔티움과의 경계지역에서 완충지 역할을 했던 가산족에게 비잔티움은 언제부턴가 소홀해지기 시작했고 때마침 정복해들어온 무슬림 군대는 이전의 지배세력들보다 오히려 더 포용적이고 더 우호적이었다. 기꺼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단으로 박해받던 단성론 그리스도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도교는 끊임없는 종파싸움이 있어왔다. 세력을 잡은 자들에게 내쳐져 이단종파로 판정받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수는 생각보다 상당히 많았다. 역사적으로 이슬람의 급속한 성장에 있어 이단종파들의 포용과 이후 그들이 이슬람화 되는 것이 큰 영향을 끼쳤을 거라는 생각을 처음 깨달았다. 초기 기독교 세력이 우세했던 북아프리가 지역이 지금은 다 이슬람교를 믿게 됐다는 것이 새삼 의미있게 다가왔다.
당대인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슬람이 '하나의 새로운 종교'일 수 있다는 관념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며, 당연히 수용할 수도 없었다. (p. 40)
무함마드와 그의 분파는 단성론자나 그 외 다른 사람들처럼 결정적인 교리 문제에서 길을 잃은 종교적 이탈자의 또 다른 물결이라고 그럴듯하게 설명되었다. (p. 41)
당시 기독교인들은 본인들의 종교가 유일신 종교인 유대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고 이단으로 여겼듯이 같은 신에서 출발한 이슬람교도 그저 이단종파의 하나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들의 종교적 요소들은 자신들과 너무나 비슷했다. 그래서 더욱 이단이었다. 이단은 처단의 대상일뿐 존중할 가치가 없는 세력이었다.
무슬림 정복자들은 그들이 발견한 이같은 체제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달리 대안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인력도 기술도 충분하지 않았으며 세금 수입도 필요했다. 그러므로 정복한 지역을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단지 지배자만 바뀌었을 뿐이다. (p. 47)
신흥 권력집단인 무슬림 정복자들이 기독교인들의 지역을 정복했을때 그들은 기존의 체제를 그대로 수용하고 관리인원들도 그대로 존속시켰다. 이슬람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 정복자들에게 저항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소외받던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더욱.
'성서의 백성'은 납세자, 관료, 기술자로서 유용했을 뿐 아니라 긴요했다. 그렇지만 그 정도에서 그쳤으며 그외에 다른 필요를 느끼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미 광대한 문명을 이루고 있기에 탐구가 필요하지 않았다.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이슬람에 냉담할 수 없었다. (p. 57)
그리스도인들은 이슬람을 이단이라 생각했으나, 이슬람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무관심 했다. 이슬람인들은 자신들의 세계가 더 발달했다고 생각했고 자신들의 종교가 더 완전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신성을 셋으로 나누냐며 그리스도인들의 종교는 이슬람교에 비해 미개하다고 무시할 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동상이몽은 점점 격차가 더 크게 벌어진다.
이슬람 개종자들은 아랍 씨족의 일원, 달리 말하면 한 후견인의 피보호자(아랍어로는 마울라, 복수로는 마왈리)로 받아들여져야만 했다. 마왈리는 공동체의 완전한 구성원 자격을 누릴 수 없었으며 재정적인 측면 등에서 어느 정도 차별을 겪는 2등 시민에 머물렀다. 여기서 시작된 분노와 사회적 긴장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이들이 압바스 혁명의 가장 강력한 지지 세력이었다. 압바스 왕조의 성립으로 이들 마왈리는 고대하던 것을 얻게 되었다. 사회적 처우의 평등이 인종보다는 종교와 문화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 다시 말해 '아랍'사회가 아닌 진정한 '이슬람' 사회가 선언되었다. (p. 67)
여기서 이 책을 읽으며 처음 느낀 두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로마!
이슬람 사회의 발달에서 로마가 보였다. 로마사회에 클리엔테스와 파트리키의 관계가 떠올랐다. 사회가 성장하면서 로마시민의 범위가 넓어졌던 것이 떠올랐다. 로마가 로마시를 넘어 로마제국이 되는 과정이 떠올랐다. 고대그리스부터 아랍지역과는 서로 반목하면서도 사실 끊임없는 교류가 있었다. 로마제국의 영토는 흑해연안까지 확장됐었다. 로마문화가 아랍지역에 생소했을리는 없다. 알렉산더대왕이 퍼뜨린 헬레니즘의 물결을 따라 로마제국의 문화도 어디까지 흘러갔는지는 알수 없는 거 아닐까, 그렇게 아랍지역에도 섞여 있지 않았을까?
중세 초 서양 그리스도교 세계는 압바스 왕조 시기에 부상하던 이슬람 사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전했다. 다르 알-이슬람이 정기 교역을 통해 연결된 도시들의 세계였던 반면, 서양은 압도적으로 농업 경제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도시들은 규모가 작고 널리 흩어져 있었다. 교역은 대체로 국지적인 범위로 국한되었으며 그 규모도 미미했다. 상인 역시 사회에서 영향력이 크거나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 통합된 법 체제, 세금 제도, 관료제, 상비군 등 예전 로마제국을 떠받치고 있던 하부 구조를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p. 90)
더구나 이들의 식자 識字수준도 그리 높지 않았다. 서유럽에서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이슬람 세계에서만큼 가치 있게 평가되지 않았던 탓이다. 고대 고전의 과학과 철학 지식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의 매개 수단인 그리스어도 거의 잊혔다. 그것을 대체한 것은 주로 [성서]와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라틴 교부들에 기반을 둔 지식문화였다. 이 문화는 본질적으로 과거 지향적이며 철저히 보수적이었다. 그러고 보면 압바스 시대의 무슬림들이 서양 혹은 라틴 그리스도교 세계에 대해 그토록 적은 관심을 보인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로부터 제공받을 만한 것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p. 91)
압바스 시대의 이슬람 세계는 여러 방식으로 자기 충족적이었다. (p. 94)
고대지식을 받아들이고 해석해서 더 발달시키고 있던 이슬람에게 그리스도교 세계는 오히려 변방이었다. 교류할 매력이 없는.
나도모르게 서양인의 세계사적 관점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슬람이 유럽을 무시했을 수 있다는 관점을 이 책을 통해 처음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해봄직한 관점이었다.
로마 시대 이래로 서유럽에서 가장 두드러진 도시들의 성장이 루앙, 링컨, 요크, 더블린 등 스칸디나비아 상인들이 자주 드나들고 정착했던 거점들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중동 이슬람의 경제적 견인이 그 같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서유럽 시민계층의 성장을 촉진했다. 북유럽과 관련해보자면 피렌 테제는 반박되었다. 지중해가 '이슬람의 호수'가 되었으며, 그리스도인 상인들이 그곳에서 추방되었다는 피렌의 판단은 과장되었다. 앞서 서술한 이슬람 이전의 경제적 혼란은 그 기원이 흑사병에 의한 인구감소에 있었다 (p. 110)
'피렌테제' 라는 말은 몰랐지만 피렌테제의 내용들은 세계사적 책들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관점이었다. 그리고 그 익숙한 관점 또한 이 책을 통해 반박의 근거를 얻을 수 있었다.
대외교류를 멈추고 땅을 경작하며 문맹으로 그리스도교에 갇혀있던 유럽의 중심이 아닌 지역에서는 종교성이 약한 정착민이 늘면서 외부와의 교역이 활발했고 그 대상들 중에는 이슬람도 있었으며 그렇게 새로운 도시들이 발전하고 있었다.
유럽의 역사를 기독교암흑천년으로만 봐서는 안될 곳이 있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러한 새로운 도시들이 있었기에 르네상스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문명의 이질적인 성격을 고려할 때 꽤 의아스러운 점은 양측 모두 상대 문명의 종교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단적인 이스마엘의 후손들에게 언짢은 적의를 유지했다. 무슬림드른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과학적 지식이나 생필품의 풍부한 원천을 발견했지만, 그 외에는 가치 있는 것을 찾지 못해 무시했다.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은 서로 종교적 반감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상태에서 어울리며 공존했다. 그 같은 상황에서 누군가 종교적 열정을 내세우며 격렬하게 선동한다면 폭력적인 대결로 발전하는 것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p. 113)
두 문명은 서로가 서로를 무시했지만 차단벽을 쌓아 올렸던 것은 아니다. 나름의 영역을 인정하며 교류도 하며 공존했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한쪽의 세계가 불안정해지면 안정을 찾기 위해 외부에서 폭력성으로 풀어내야 했다. 어느쪽이 먼저였는지를 따질 의미가 없을만큼 서로간에 끊임없는 공방전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서양사는 그것을 십자군전쟁이라는 종교전쟁으로 포장해왔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음을 이 책을 통해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알렉시오스 1세가 기대한 것은 비잔티움 장수의 지휘 아래 통제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적당하면서, 세밀한 군사 임무에 배치되는 데 필요한 무장과 훈련까지 갖춘 전사 집단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등장한 것은 열성적이기는 하나 훈련이라고는 거의 받지 못한 거대한 오합지졸이었다. 비잔티움 영토를 시끄럽게 가로지르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까지 내달려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해버린 이 싸움꾼 무리를 보통 '제1차 십자군'이라고 부른다. (p. 132)
중세 그리스도교 세계는 십자군에 엄청난 관심을 기울였고 이를 지속적으로 진지한 관심을 가져 마땅한, 도덕적 무게감과 위엄을 지닌 주제로 여겼다. 그런데 이 점은 중세 이슬람의 경우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이슬람권에서는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생산된 것과 같은 십자군 원정 관련 사료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대의 이슬람 화자들에게 십자군 원정은 이슬람 세계의 주변부를 성가시게 한 소규모 접전에 지나지 않았다. 십자군은 이를테면 한때 왔다가 떠난 이들이었다. (p. 143)
십자군에 대한 무관심은 중세 이슬람 세계가 그리스도교 세계의 문화 전반에 얼마나 무관심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요소이다. (p. 144)
중세 하면 십자군 전쟁 아닌가? 그런데 이슬람사에서 십자군은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니... 한마디로 웃기지 않은가? 혼자 북치고 장구친 느낌?!;;;
거대 종교전쟁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전쟁은 이슬람교와 전면전을 치룬적도 없는 자기들만의 리그였다. 그들이 처단하려고 했던 쪽에서는 그들이 그런 원대한 전쟁을 걸어왔다는 것을 무시했을 정도로.
구원자를 자처하던 십자군들이 그들이 도울 대상이었던 동방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기껏해야 미심쩍은 눈초리만 받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서방인들 역시 동방 그리스도교인들을 거만하고 매력 없는 먼 친척으로 간주하면서 특이한 관습과 전통에 대해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을 최선으로 여겼다. 이에 비하면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이국적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한 태도가 차라리 더 관대했다. (p. 157)
도와달라고 한적도 없지만 도와주겠다고 온 사람들이 사실은 그리 반가운 대상이 아닐때, 그리고 그들이 없애려고 했던 그들의 적이 더 우호적일때 그 난감함이란;;; 그런데도 그들은 자꾸 원정을 왔다. 승리하지도 못할 전쟁을 자꾸 일으키는 배경에는 종교가 아니라 정치가 있었다. 그리고 몽골의 등장은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다.
1050년에서 1250년 사이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무슬림-유대인-그리스인이 차지하고 있던 기존의 상업적 헤게모니를 점진적으로 잠식해갔다. 물론 이러한 헤게모니는 훗날 오스만 제국의 팽창 등으로 여러 번 위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서유럽의 상업적 우위는 결코 완전히 전복되지 않았고 이는 광범위한 결과를 낳게 된다. 지중해의 상업이 북부 유럽의 해상 교역과 연결되고 여기에 재정 기법과 여러 기반구조의 발전이 더해지면서 훗날 세계를 지배하게 될 유럽의 상업 자본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p. 180)
십자군원정이 해내지 못한 것을 자본이 해냈다. 종교는 승리하지 못했으나 돈은 승리할 수 있었다. 사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늘 표면적으로는 다른 명분을 내세운다. 여전히.
철학 혹은 과학 문화와는 달리, 종교 문화와 관련해서는 지적 교류의 상황이 다소 달랐다. 이슬람의 식자층은 그리스도교에 대해 여전히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어쩌면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그들은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주어진 계시가 모세나 예수와 같은 이전 시기의 예언자들에게 주어진 부분적인 계시를 넘어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이미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로 추월당해 불필요해진 신앙의 신조를 연구할 유인이 없었다. 따라서 다른 종교 연구는 오로지 신앙과 관련한 논쟁에 참여할 때만 수행되었다. (p. 209)
1515년 술찬은 포고령을 통해 인쇄 기술을 습득하려는 무슬림은 그 어떤 자라도 사형에 처하리라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p. 250)
이슬람 신학자들이 [꾸란]의 인쇄를 신성 모독적인 행위로 규정했던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오직 '필사자들의 손'에 의해서만 그것도 가능한 한 최고의 필체로만 전승되어야 했다. 인쇄술과 관련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사이의 문화적 차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다르 알-이슬람, 즉 이슬람 세계는 그리스도교 세계로부터 무언가 배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세계에 대한 경멸이 그 어느 때보다 강했다. (p. 251)
고인물은 썩는다. 이슬람 초기에는 그토록 열성적으로 선진문물을 습득하던 그들이 어느때부터인가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지면서 더이상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고 그저 무시와 경멸어린 태도로 일관하게 됐을때 바깥 상황은 서서히 역전되고 있었다.
중국이 떠올랐다. 고대 중국이 왜 고대유럽과 교류하지 않았는지 그들이 자신들의 왕국에 만족하며 원정을 접음으로써 어떻게 갇힌 세계가 되었는지 역사는 알려준다. 그리고 그같은 오만은 결국 수치스러운 침략을 당하게 했다. 이슬람이 스스로 완전하다고 배울거 다 배웠으니 외부는 그저 무시해도 된다고 오만하게 된 순간 역사는 거꾸로 덮칠 준비를 했다.
인쇄술의 거부는 [내 이름은 빨강] 이라는 소설을 생각나게 했다. 이슬람 전통의 세밀화가들을 통한 시대적 변화를 깨닫게 하는 오르한 파묵의 소설...
무슬림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이 하느님의 마지막이자 가장 완전한 계시를 받은 선택된 민족이라는 확신으로 인해 더할 나위 없는 자부심으로 고취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불가피하게 그리스도인들을 경멸의 대상으로 낮춰봤다. 게다가 다르 알-이슬람은 지상에서 하느님이 베풀어 준 은총과 섭리로 그리스도교 세계보다 훨씬 광대한 지역을 차지했다. 바그다드의 시선에서 봤을 때, 900년 경 그리스도교 세계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환경에 머물러 있으면서 혼란을 야기하는 이단 분파들과 작은 왕국들로 구성된 무질서한 혼합에 불과했다. 이슬람 공동체는 신앙은 물론 부와 기술, 학식과 문화에서 경쟁할 상대가 전혀 없었다. 무슬림들이 당시 그리스도인에 대해 오만한 태도를 취한 이유는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 마치 암반처럼 오래전에 저변을 구축한 이러한 태도들은 그 이후 여러 세기 동안 그들의 도덕적 환경을 형성해 왔다. 이는 경시해서는 안 되는 일종의 인간관계의 지질학이라 할 수 있다. (p. 261)
유럽의 헤게모니는 근대 초에 아무 기반 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의 힘줄과 근육은 중세가 진척되던 중에 눈에 띄지 않는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의 주변부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발전했다. (p. 262)
그리스도교 세계에 대한 무슬림의 냉담은 당대에 진행되던 변화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슬람의 서양에 대한 경멸이 그와 같이 변화하는 상황을 간과하도록 했던 것이다. (p. 263)
역사의 반복적 순환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역사의 물결은 약해질 수도 있고 거세어질 수도 있으나 약해졌다고 멈춰있지 않고 거세졌다고 위험한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는 끊임없이 흐르지만 반복적인 교훈을 준다. 그 교훈을 무시할 때 역사는 바로 뒷발질을 할 것이다. 정신차리라고.
이 얇은 책에서 이토록 거대한 시각을 배우게 될줄 미처 몰랐다. 새로운 깨달음과 새로운 물음표들을 함께 던져준 좋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