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지식 생태계에는 대격변이 일어났다. 승리, 생산성, 기쁨, 행복, 번영, 자본이라는 군림의 언어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다정함, 안전, 우정, 친구, 슬픔, 반성, 후회 등 심리 자원의 근원을 파고드는 돌봄의 언어가 지식 갯벌 위로 고개를 들었다


한여름 저녁에 영화 <달콤한 인생>을 다시 보는건 이병헌의 목소리와 음악 때문이다.
인생은 달콤한가, 씁쓸한가, 아름다운가, 슬픈가, 나는 강한가, 다정한가, 잔인한가.
쏟아지는 물음표를 음표에 쓸어 담은 채 유키 구라모토는 피아노 건반 위를 유유히 나아간다. ˝삶엔 그 모든 속성이 다 있어요˝
손가락으로 속삭이듯


‘소심이‘는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버럭이‘는 이용당하지 않게 보호해 주지만, ‘슬픔이‘의 힘은 더 거대합니다. 슬픔은 연민을 자극해 서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느끼게 해주죠. ‘슬픔이‘가 없었다면 <인사이드 아웃>은 망했을지도 몰라요


수전 케인으로 인해 ‘슬픔을 공부하는 기쁨‘을 배웠다. 이제야 유년기 어린 지수가 왜 그토록 해질녘에 떠나고 싶어 했는지, ‘태어나기 전 세상‘을 고향처럼 갈망했는지,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아버지와 딸 사이에서 뭉텅이째 사라진 시간과 블랙홀의 랑데부에 몸을 떨었는지, 나이 들수록 왜 ‘사무침‘이 용서의 단서가 되는지.. 비밀이 풀렸다. 땡큐, 슈전 케인. 그리고 단조 음악과 검은 옷을 사랑하는 나의 소울 프렌드, 모든 내향인들에게 축배를!


˝나를 키운 8할은 친구였다˝ 나에게 친구는 안전한 병풍이었고 신나는 유원지였다.
그래서일까.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나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볼때도 내 눈에 잡히는 부러운 장면은 죄다 훈훈하고 인심 좋은 친구들이었다. 서로의 목숨을 지켜내는 제주 해녀 삼춘들도, 바닷가 한집에 같이 살며 늙어가던 김혜자와 고두심도, 벼락 치듯 정신없는 생사의 틈바구니에서도 ‘슬의생‘의 5인방 의사 친구들도 한결같이 보여준다.
‘친구와 우정이 인생의 전부‘라고. 결국 다정한 인간이 살아남는다고

˝잠깐 통화할 수 있어?˝ 나의 외로움과 불안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SOS 칠 때마다 수화기 너머로 저벅저벅 조용한 장소로 이동하는 친구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 그럼. 얘기해 봐.˝ 나를 구하러 오는 이 도시의 앰뷸런스. 세상 금은보화를 다 준다 해도 더 나은 세상으로 함께 손잡고 나갈 모험심과 아량 넘치는 이 친구와 바꿀 생각은 없다. 다행히 신은 인간을 스스로 강해지도록 창조하지 않았다. 당신과 나는 ‘돕는 자‘로, ‘친구‘로 지음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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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중에는 말재간이 없어 말을 더듬거나
음식 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수룩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실력을 발휘하며 순항했고 그는 결국 마쉐프 최종 우승을 차지했다

엉뚱하지만 독특한 그의 모습은 말하기 전에 가지는 그의 깊은 생각 때문이 아닐까 싶다

최강록 어록 중 하나인 ‘지나갑니다 파이팅... 시간이 지나갑니다.‘ 는 그가 사람들에게 부담을 덜어주고 힘을 실어주기 위해 외친 말이지만 왠지 어색하고 웃기다

그러나 그가 사람들에게 ‘진심‘을 전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비록 조금 어수룩하지만 누구보다도 진심을 다한다
아마 ‘지나갑니다‘ 는 힘든 이 시간들도 곧 지나갈 것이라는 위로를 보내기 위한 말
이었을 것이다

최근 흑백 요리사에서도 ‘결국 이 세트는 철거가 되기 때문에 다 떠날거예요.‘ 라고 말했다. 갑자기 세트장 철거를 얘기하니 엉뚱하다고 생각이 들지만, 마셰코에 출연
했던 경험에 따라 모두 지나가는 순간이기 때문에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각자 할 일을 하면 된다 라는 숨겨진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최강록씨 초밥왕을 보고 요리를 시작했다고 했죠



그 초밥왕에 나오는 표현들 화려하지 않나요
어떤 문구가 있나요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두리둥실 춤을 춘다
최강록 씨 고로케가 그런 맛이었어요
정말 맛있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자리로 돌아가세요


11년 전 요리 서바이벌 예능에서 주고받았던 강레오와 최강록의 대화

내가 원하는 낭만은 이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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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 2025-01-29 2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마셰코에서 최강록님 정말 좋아했어요.
거기 나오셨던 모든 분들 다 떠오르네요ㅠㅠ
‘지나갑니다 파이팅! 시간이 지나갑니다.‘ 그 장면만 수백번 본 것 같아요.
동료들에게 힘을 주기 위한 말인데, 강레오님이 무엇이 지나가는지 다시 되묻지 않았다면,
그런 유쾌하고 감동적인 장면은 나오지 않았겠죠.
강레오님과 최강록님의 케미는 진짜 말씀하신 것처럼, 낭만 그 자체입니다.
‘모두 지나가는 순간이기 때문에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각자 할 일을 하면 된다‘는 말씀이 정말 많은 힘이 됩니다.
남은 설 연휴 즐겁게 보내시길 바래요^^

나와같다면 2025-01-30 14:23   좋아요 1 | URL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 한강

이 시가 겹쳐졌습니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 버렸다고˝ 무엇을 인지했을 때 그것은 현재가 아니라 이미 과거이겠죠

맨날 말 더듬고 어리숙하던 사람이 탈락면제권을 자기도 아닌, 위태로운 팀원한테 주며, 팀원이 싫다고 하니까 말 하나도 안 더듬고 ˝올라가 빨리˝ 에서 진짜 이 사람은 그냥 인기가 많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구나를 깨달았습니다

전야제님 평안하고 의미있는 새해 맞이하시길 기원합니다

전야제 2025-01-30 14:38   좋아요 1 | URL
‘올라가 빨리‘도 진짜 기억에 남는 장면이었죠ㅠㅠ
자기 혼자만 생각하지 않는 아름다운 사람들..
한강 작가님의 시도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서곡 2025-02-04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강레오 최강록 조합 좋아하는 일인입니다 ㅋㅋ 두 셰프님이 콘텐츠 자주 많이 만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와같다면 2025-02-05 17:47   좋아요 1 | URL
강레오가 왜 그렇게 사랑했는지 알 수 있을것 같아요 ❤️ 자기 일에 진심이고 선한 사람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하자마자 국회 앞으로 달려가 맨몸으로 총 든 군인을 막은 시민들에게, 여의도에서 응원봉을 흔들며 윤석열을 탄핵하라고 외친 수백 만 시민들에게, 남태령에서 농민들과 함께 밤을 새운 시민들에게, 한남동에서 한파와 폭설을 무릅쓰고 ‘키세스‘ 초콜릿 같은 모습으로 밤을 지낸 시민들에게, 커피숍과 음식점에 선결제하여 현장에서 싸우는 시민들에게 음식과 온기를 나눠 준 또 다른 시민들에게 감사한다

한국 민주주의와 계엄에 관한 내 이야기가 책이 되어 세상에 나올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이들 시민의 덕이다

4.19, 5.18, 6.10 등 역사의 주요 변곡점마다 많은 시민이 목숨을 걸고 불의에 맞섰다. 그들이 현재의 시민들을 불의가 자행되는 역사의 현장으로 불러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운 것이다. 과거에 진 빚을 갚을 도리는 없다. 우리 세대가 과거 세대에게 진 빚은 미래 세대에게 갚아야 한다. 이제는 현재가 미래를 도울 차례다

이 내란의 끝이 어떨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우리 세대가 과거로부터 진 빚을 제대로 청산한다면, 내란이 끝난 지점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건 분명 한층 성숙한 ‘민주사회‘ 일 것이다

- 2025년 1월 14일 전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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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
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1977년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구리로 만든 LP판 모양의 ‘골든 레코드‘를 보이저 1호와 2호에 실어서 우주로 보냈습니다

˝안녕하세요? 지구인입니다˝

이 골든 레코드는 서로 다른 쉰다섯 개의 언어로 녹음한 인사말과 인류가 사랑한 음악과 사진을 품은 채로, 지금 이 시간에도 우주를 유영하고 있을 터인데, 칼 세이건의 그 소망처럼 우리는 언젠가 새로운 우주를 만날 수 있을까

˝그들은 분명히 알 것이다. 우리가 희망과 인내를… 그리고 우주와 접촉하고자 하는 뚜렷한 열의를 지닌 종이었다는 사실을˝
- 칼 세이건 [지구의 속삭임]

과학을 전공한 SF작가 김초엽은 작품을 통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바로 곁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말조차 귀 기울이지 않는 반면에, 또다시 새로운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서 수많은 비용과 노력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하는 것이죠.
작가는 어느 시대와 공간을 살아가든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 이라고 말합니다

˝안녕하세요˝ 한국어로도 녹음이 되어 있는 보이저호의 실린 지구인의 인사말. 그러나 천문학자들에 따르면 그 메시지가 실제로 외계생명체에 닿을 확률은 매우 희박합니다

˝이 메시지는 지구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 문홍규 (한국천문연구원 책임 연구원)

그것은 오히려, 오늘을 사는 우리, 지구인 스스로를 향해 존재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을 꿈꾸고 소망하지만, 우리가 우주를 향하여 어차피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는 것‘ 이라면 먼저 나의 옆 사람에게 당도하라는... 그것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피폐한 것인가


2019.12.26 JTBC 앵커브리핑


어차피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는 것‘ 이라면 먼저 나의 옆 사람에게 당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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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서 책을 찾는다 - 이 폐허를 응시하라

재난속에서 타인을 도우며 공동체를 돌보는 선한 사람들. 폐허 속에서, 잿더미 속에서, 공동체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헌신했던 이들의 이야기가 지금 나에게 필요했다


레베카 솔닛은 대지진, 대공습, 테러 등 재난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우애와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지를 입체적으로 관찰한다.
소수 권력자나 대중매체는 재난 속에서 인간은 야만으로 돌변한다고 강변하지만,
정작 시민들은 지옥 속에서 ‘꽃’을 피워낸다. 이타주의, 연대, 즉흥성, 창의성이 어우러진 자율적 공동체를 조직한다는 것이다. 솔닛은 “재난은 지옥을 통과해 도달하는 낙원”이라고 말한다


재난의 당사자에게는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던 현실의 참모습이 보인다. 현실을 감추고 있던 비밀의 뚜껑이 열리고 그 안에 감춰져 있던 현실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봉인이 풀리면 사람으로 보이던 자가 좀비이고, 광인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이 선각자로 다시 인식된다. 필연이던 것이 우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우연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사실은 필연을 넘어 운명 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만약 최악의 순간에 낙원이 이따금 우리 사이에서 섬광처럼 번쩍인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지옥의 문턱에서 우리가 그것을 본다면? 이 섬광들은 …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고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에게는 맨몸으로 떨어져 내려도 치명상을 입지는 않을 정도의 쿠션감이 내 주위를 감싸고 있다는 믿음이 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들의 충격을 감싸주리라고 다짐한다


이 책을 읽으며 지금 이 폐허를 응시할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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