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시간이 없었다. 병원에서는 10여 년 정도 시력이 남아있을 거라고 진단했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손에 닿는 대로 책을 꺼내 활자를 눈에 담았다. 당시 나는 무지했다.
책은 눈으로만 읽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계문학전집을 모두 읽고 싶었다.그래야만 내 현실을 견딜 수가 있었다
p16

열다섯 살의 내가 가장 두려웠던 사실은 앞으로 세상을 못 볼 거라는 선고보다 당장
이 사실을 어떻게 엄마에게 말해야 할지였다

며칠을 끙끙 앓다가 엄마에게 몽땅 털어놓았을 때 엄마는 질 나쁜 농담을 들은 것처럼 믿지 않으려 했다. 엄마를 대동해 다른 병원에 가서 처음부터 검사를 다시 했다. 결과는 같았다. 엄마는 나보다 더 절망에 빠졌다. 내 담담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는 뭐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 이 철딱서니야! 너 이제 장님 된다잖아!” p 22


극복‘이라는 말처럼 오만한 단어가 있을까?

장애를 극복하고, 가난을 극복하고, 불합리한 사회를 극복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나는 영원히 내 장애를 극복하지 못할 거라고. 나는 단지 자주 내 장애를 잊고 산다. 잊어야지만 살 수가 있다. 그래서 누구보다 빨리 체념한다. 그것이 나를 지키는 방법이다


각자의 삶에서 ‘참 지랄맞다‘ 싶은 날들이 존재한다. 삶을 버티고 나아가는 모두에게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는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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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26-02-24 1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런.... 읽자마자 깜짝 놀랐습니다만..... p.16을 보고는 휴...

나와같다면 2026-02-24 20:07   좋아요 1 | URL
아.. 오후에 망막 레이저 시술을 받고 왔어요. 조금 위험한 상태였다고
ㅠㅠ 그나마 빨리 발견하고 치료받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오래도록 책을 읽을 수 있기를..

차트랑 2026-02-24 20:24   좋아요 1 | URL
아 네...
신속한 치료를 받으시게 되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나와같다면님!
빠른 쾌유를 빌며
오래도록 정말 많은 책을 읽으실 수 있기를 저의 온 마음으로 기원드리겠습니다!!

편안한 저녁되십시요 !!

 

우리는 왜 가짜 정의에 열광하는가

한국 사회는 기계적 공정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크다. 기계적 공정은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해야 하니 약자나 소수자를 배려하는 모든 일을 불공정으로 간주해 반대하는 견해를 말한다 p117


한국 사회에 가짜 정의가 넘쳐나는 이유를, 많은 사람들이 ‘공정‘을 곧 ‘정의‘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공정‘이란 단어는 듣기에는 정의로워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공정은 언제나 불평등한 출발선 위에서 시작된다. 겉으로 보기엔 같은 규칙이 적용되는 것처럼 보여도, 출발선 자체가 다르면 공정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공정함은 오히려 불공정을 가리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정의로운 공동체를 바라는 모든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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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나 혼자만을 위한 영화관
이 완벽한 공간에서 나 혼자 영화를 봄
다시는 못 할 신기한 경험
웰컴 와인도 한 잔

만약에 우리 Once We Were Us
구교환(은호) 문가영(정원)

그때 내 집이 되어줘서 정말 고마웠어 은호야

(에릭이 제인을 못 찾으면 어떻게 돼? 새드엔딩 이잖아) 세상이 흑백이 되어버려

내가 너를 놓쳤어


이 영화를 보면서 제일 슬픈 사람은 누군가를 절절하게 사랑하다 놓쳐버렸거나 서로에게 가는 마음의 길이 엇갈려 헤어졌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젊은 날을 다 바쳐 심장을 줄 만큼 사랑했던 사람이 아무도 떠오르지 않는 사람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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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2-02 20: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코로나때 우연히 들른 독립영화관에서 혼자 ‘아비정전‘을 본 기억이 나네요. 마침 그때가 왕가위 특별전이었거든요. 어둡고 적막한 공간에 혼자라는 느낌이 뭔가 영화를 더욱 아련하게 보게 했던 것 같아요.

나와같다면 2026-02-02 20:42   좋아요 0 | URL
아.. 잉크냄새님과 저는 특별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네요. 오롯이 영화와 저만 있는 시간과 공간이 저를 깊이 치유하는 느낌이였어요
 

어떤 진실은 기존 세계의 균열 사이로 비치는 또 다른 세계에 들어서야만, 나를 갈라 나를 꺼내야만 만날 수가 있다

나는 전쟁, 질병, 범죄, 가난을 겪는 사람들, 부서진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의도적으로 누락된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초인적인 영웅 한 명에 의해 벼락이 떨어지듯 바뀌지 않는다. 그보다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미세한 변화를 통해 조금씩, 천천히 바뀐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기꺼이 행동하는 쪽을 택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어떻게 만들어 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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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림을 잘 못하지만 조림을 잘하는 척 했습니다. ‘척‘ 하기 위해 살아왔던 인생이 좀 있었습니다. 나를 위한 요리에서까지 조림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한테 좀 위로를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매일 막 이렇게 다그치기만 했는데
90초도 써 본 적이 없습니다. 저를 위한 요리로. 뭐, 이런 가상 세계에서 해 보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만드는 과정 자체가 상당히 고된 깨두부는 팔리지 않고 남아있고 식당에서 남은 닭뼈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구워서 넣은 기억
차게 먹는 응식인 깨두부와 성게를 국물요리로 낸건 영업 후 남은 재료를 처리하는 하나의 방식이었겠지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일을 끝낸 후 마시는 독한 소주. 빨뚜의 낭만

나만 그렇게 아둥바둥 ‘척‘ 하며 살아온 것이 아니라고, 괜찮다고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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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6-01-28 1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전 흑백요리사 즌1보다 이번 즌2를 더 재미있게 봤어요 최신 기억의 오류일까요? ㅎㅎㅎ 어쨌거나 마셰코에 이어 또 최강록이 최강록했네요

나와같다면 2026-01-29 18:50   좋아요 1 | URL
더할 나위 없이 감동적인 서사였어요.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이런 위로를 받을 줄이야.. 최강록님이 나중에 나이 들어 하고 싶다는 국수집에 가보고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