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에 대하여] 열여섯 살 생일을 사흘 앞둔 어느 날, 낮에 아버지와 여동생을 살해하고, 저녁에 같은 학교 친구들을 학살한 케빈.
그 아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고 이 영화는 말한다
케빈을 소시오패스라고 규정해버리면
이 이야기는 ‘낳고 보니 아들이 소시오패스인‘ 한 불행한 엄마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그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공포와 연민의 감정뿐이다. 게다가 그 규정은 사실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이 서사에서는 저주와 극복의 주체가 불안정하게 엉킨다. 낳아보니 자식이 케빈이라는 사실이 에바에게 저주였다고 주장 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태어나보니 엄마가 에바였다는 것은 케빈에게도 불운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에바가 케빈을 극복해야 했던 것처럼 케빈도 에바를 극복해야 했다
첫 번째 장면,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케빈과 어쩔 줄 몰라하는 에바의 모습이 보인다. 이어서 케빈을 유모차에 태운 에바가 거리를 걸어가는데 이때도 케빈은 떠나갈듯 괴성을 지른다. 에바는 케빈이 지르는 괴성을 견디다 못해 공사장 근처에 유모차를 세운다. 케빈의 괴성을 더 큰 소음으로 덮어버리기 위해서다. 케빈이 공사장의 소음에 물리적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는 위험을 에바는 잊었거나 무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에바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말을 케빈에게 하고 만다.
˝엄마는 네가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어.˝
케빈은 불가피하게 하나의 태도를 습득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이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견뎌내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사랑받지 못하는 게 당연한 존재로 만드는 일이다.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비참한 아들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엄마에게 지독하게 구는 나쁜 아들이 되는 것이 더 견딜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그저 서로를 ‘정상적으로‘ 사랑하는 데 실패한 두 사람의 이야기다. 한 사람은 덜 사랑했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다른 한 사람은 너무 사랑했다.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둘은 노력했다. 엄마는 아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는 척했고, 아들은 엄마를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