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득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4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사랑은 가혹하다. 댓가를 치르지 않으면 손에 쥘 수 없다. 눈물이 흐르고, 피가 마르는 듯한 안타까움에 온 몸을 떨다가도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 극과 극을 오가며 자신의 정체를 잃어가고, 다른 사람을 위해 나의 전부를 걸 수 있는 용기마저 얻을 수 있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카타르시스.
<오만과 편견>의 작가, 제인 오스틴의 마지막 소설이다. 잃어버린 사랑을 기억하며 후회하는 건, 그 사랑을 상처로 얼룩지게 만든다. 오해는 또다른 오해를 낳고, 편견과 왜곡된 판단이 관계를 악화시킨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가슴이 아픈 만큼, 그 사랑을 더욱 갈망하게 된다. 앤과 웬트워스의 사랑은 손에 땀을 쥐게 하다가도 힘이 빠져 맥이 풀리게 한다. 더이상의 희망을 엿볼 수 없어서 포기할 무렵, 사랑의 흔적을 더듬게 되고, 새로운 희망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엘리엇 가와 머스그로브 가를 오가며 아기자기하게 이루어지는 이야기의 매력은 달콤하다. 돈과 명예를 쫓는 귀족들이 신분의 높고 낮음에 목숨을 걸고 자존심을 지키고자 발버둥치는 모습이 매혹적이면서 우스꽝스럽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려고 미친듯이 발버둥치는 백조처럼 겉과 속이 다른 인간들의 잔치가 열린다. 더 나은 신랑감을 찾기 위해, 우아하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더욱 넉넉하고 푸짐하게 나누고 싶은 허영때문에 서로를 탐색한다. 그들의 사랑은 충분히 계산적이다. 고혹적이고 아름답지만 때로는 천박하고 촌스럽다.
현재 그의 목표는 결혼이었다. 부자가 되어 뭍으로 돌아왔으니, 적당히 마음이 동하기만 하면 그 즉시 정착을 하리라 굳게 마음먹은 터였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자신의 냉철한 사고와 예리한 취향이 허용하는 한 최대한 빨리 사랑에 빠질 요량이었다. (84쪽)
그런 사랑에 언제까지 만족할 수 있을까? 그렇게 찾아 온 사랑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사랑이 맞을까? 과연 사랑이 맞는 걸까?
고전소설의 묘미를 맛볼 수 있다. 나타나야 할 사람이 바로 그 때 등장하고, 하필 그 순간 사건이 터지고, 딱 시간에 맞춰 마주치게 되고.만들어진 듯한 인물들이 정해진 규칙에 따라 행동하고 대화한다. 결말도 뻔히 짐작할 수 있을 듯했는데, 역시 제인 오스틴은 마음을 마구 흔든다. 예상은 빗나가고 엉뚱한 상황이 펼쳐지고, 자칫 놓쳐버릴 것 같아 안타깝고, 도대체 어떤 상황으로 마무리가 될지, 혼란스러워진다. 루이자와 사랑에 빠질 듯 말 듯한 상황에서 사고가 일어나고, 웬트워스의 운명은 억지로 이어질 듯한 아쉬움이 생기는 순간, 상상도 못했던 상황이 툭 튀어나온다. 너무 엉뚱해서 어리둥절 하다가 그만 마음을 푹 놓게 된다. 다행이다. 앤 엘리엇에게도 희망이 있구나.
바스로 옮겨 가면서 이야기는 흥미진진해진다. 엘리엇 씨의 등장은 앤과 웬트워스의 관계를 흐트러지게 하는 듯 보인다. 오해는 미움을 낳고, 용기를 앗아가며 결국 포기하게 만든다. 너무 안타까워 책을 덮어버릴까..하는 순간, 스미스 부인이 툭 튀어나오고...엘리엇 씨의 비밀이 드러난다. 설마 했는데, 혹시나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앤에게 기회가 생기는 걸까. 아니면 영원히 노처녀로 살아가야 하나.마지막에 웬트워스가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쓴 편지를 보는 순간 가슴이 방망이질을 시작한다. 두근거리고 떨리고, 편지를 읽고 나면 상황이 끝나버릴 것 같아 망설여지게 된다. 그래도 읽었다. 아! 사랑은 위대하다. 그토록 자존심을 세우며 지키려고 노력했 건만, 한순간 무너지며 더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
이런 편지를 읽고 금방 평온을 되찾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반시간 정도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면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온갖 제약을 받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오기전까지 십 분 남짓한 시간 안에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매 순간 새로운 흥분이 몰려왔다. 온몸이 행복감으로 휩싸였다. (315쪽)
밀고 당기는 사랑, 먼저 마음을 내보이면 괜히 손해보는 것 같아 망설이게 된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기회가 왔을 때 우물쭈물하다 놓치면 사랑은 떠난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내 마음은 살짝 보여주고 상대의 마음을 알고자 염탐한다면 사랑을 추억하며 가슴 아파하는 비련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혹시나, 설마, 다음에 하면 되지 않을까, 여유를 부리면 안된다. 알 듯 모를 듯, 망설이는 순간 냉큼 잡아야 하지 않을까.
제인 오스틴은 앤과 엘리자베스 중 누구와 닮았을까? 또 엉뚱한 상상에 빠진다.
한 장 한 장 아까워서 매일 조금씩 읽었다. 오늘은 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앤의 마음을 빼앗을까. 엘리엇 씨가 나타났을 때 잠깐 기대해 보기도 했지만, 기대와 다른 상황이 또 펼쳐지고...책을 펼칠 때마다 설레었다. 영화로 만들어지면 누가 웬트워스가 되고 누가 앤이 될까. 엘리엇 씨는 누가 맡으면 좋겠다. 혼자 신나게 상상에 빠졌다. 사랑을 잃어버렸던 안타까운 순간을 떠올리면서, 그 때 내가 좀 더 용기를 부렸다면, 자신있게 나서서 손을 내밀었다면 어떤 인생이 펼쳐졌을까.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들뜬다. 사랑을 한번 겪고 나면 인간은 성숙한다. 이루어진 사랑은 가정을 이루며 자라고, 잃어버린 사랑은 새로운 사랑으로 더욱 커진다. 그래서 사랑은 아름답다. 잡을까 말까 고민하는 이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우선 잡고 보라고, 놓쳐 버린 사랑은 후회만 남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