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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3
우타노 쇼고 지음, 현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본격 미스터리를 읽으면서 흥분과 스릴을 느끼기는 (조금 오버하면) 오랜만이네요. 우타노 쇼고의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는 정말 재미있는 추리소설입니다.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 「생존자, 1명」, 「관館이라는 이름의 낙원에서」중편 분량의 세 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무엇하나 버릴 게 없는 알짜배기 작품들만 수록되어 있습니다. 세 편의 작품은 모두 폐쇄된 공간에서의 밀실 트릭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살인사건의 무대(장소)는 너무나 식상한 곳입니다. 눈으로 뒤덮은 신장, 외부와 단절된 섬, 그리고 저택(관). 그러나 식상한 장소를 캐릭터나 상황에서의 유머와 밀실 트릭 자체, 그리고 허를 찌르는 반전으로 가볍게 날려버립니다. 살인사건 발생에 살짝 흥분하다가, 추리소설의 공식(정형성)을 비꼬는 작가의 유머에 감탄하고 웃다가, 마지막에는 숙연해지는 묘한 감정의 변이를 겪습니다. 추리소설(작가나 독자나 모두)을 실컷 비꼬다가 그런 추리소설에서 인생의 지혜(삶의 교훈)를 끄집어내서 툭 던지는 작가의 시크함 무척 멋지네요.
"만약 자네가 유화 그리기를 즐긴다고 하세. 하지만 작품 수준이 시 콩쿠르에서조차 입상할 수 없는 레벨이라고 하고. 그렇지만 앞으로 한 달 남은 목숨이라는 선고를 받았다면, 내일이라도 긴자의 화랑을 빌려서 개인전을 열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겠나? 내가 하려고 했던 일도 같은 것이라네.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꿈을 이루고 싶다. 탐정소설의 세계에서 죽어가고 싶다." (p.319)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는 사방이 눈으로 뒤덮인 하기노미아 장의 1층 홀에서 아라가키 사장이 죽는 사건을 다룹니다. 물론 홀은 밀실입니다. 그리고 산장 밖은 눈이 와서 (추리소설에서는 너무나 식상한) 발자국이라는 증거가 남죠. 1층 홀 밖에는 증인이 있고, 홀 안에서 싸우는 소리도 듣습니다. 그러나 홀(밀실)에 들어가니 죽은 시체만 있고 범인은 없습니다. 과연 범인은? 이 때 등장하는(아니 처음부터 등장했던) 명탐정. 시니컬합니다. 현실 속 탐정과 소설 속 탐정의 차이를 주구장창 떠들어 됩니다. 그리고 끼어드는 과거(어느 등장인물의 초등학교 시절) 하기노미아 장에서의 유령이 사라지는 사건. 과연 유령의 정체는? 그리고 현재로 돌아와서 아라가키 사장을 죽인 범인은? 유령의 정체와 아라가키 사장을 죽인 범인을 알아맞히면 유유히 퇴장하는 명탐정? 아타노 쇼고입니다. 절대 긴장을 늦추지 마세요. 단, 아쉬운 점은 유령이 사라지는 사건의 트릭입니다. 작년에 모출판사에서 나온 트릭과 유사합니다(여기까지만). 그래서 놀람이 조금은 반감될 수도 있는데, 모르는 분들에게는 나름 신선할 듯싶네요. 물론 이 트릭을 제외하더라도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생존자, 1명」은 (개인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설정들이 마구마구 나오는 작품입니다. 사이비 종교집단의 오**역 폭파사건. 사이비 교주의 배려로 외딴 섬(가바네지마 섬)으로 도피를 합니다(당연히 이 섬은 밀실입니다. 배가 거의 지나다니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유일한 탈출 수단인 그들이 타고 온 배는 없어지고요). 그런데 하루하루 지날수록 사람이 한 명씩 줄어듭니다. 범인 외부설, 내부설에 대한 탁상공론이 시작되고, 또 사람은 없어집니다. 범인은 누구일까요? 범인 맞추는 재미가 꽤 쏠쏠합니다. 이 추리소설은 조금 머리를 쓰고, 차분히 추리하면 대략적인 범인은 유추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작품과 마찬가지로 절대 긴장은 늦추지 마세요.
「관館이라는 이름의 낙원에서」는 『시계관의 살인』, 『십각관의 살인』, 『기울어직 저택의 범죄』 등 관(館)이 등장하는 모든 작품에 대한 헌사이자 오마주이고, 그런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을 위한 애프터서비스이며, (조금 뜬금없지만) 추억에 젖어 사는 올드 추리소설 팬에 대한 애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 마디로 끝내줍니다. 우선 트릭의 복잡함. 기억력이 좋지 못하다면 연필을 준비해야 합니다. 현실 속에서의 밀실트릭도 풀어야 하지만,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비슷한 이야기의 밀실트릭도 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왜 관의 주인은 대학시절 친구들을 불러와서 이런 시답잖은 게임을 하는지 이유도 알아야 하고요. 당연하게도 대학시절 친구들은 미스터리 동호회 친구들입니다. 이들 앞에서 유치한 추리게임은 돌 맞기 딱 좋습니다. 쓸데없는 묘사로 채워진 300페이지 분량의 장편 추리소설만큼이나 내용이 알찹니다. 그리고 (장편에 비해) 짧습니다. 군더더기도 없습니다. 중편임에도 장편을 읽는 듯한 느낌. 그리고 포만감과 개운함. 추리소설 독자들을 위한 작가의 따뜻함도 전해집니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추리소설 작가와 독자들에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