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터드 카본 1 밀리언셀러 클럽 88
리처드 K. 모건 지음, 유소영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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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멍청이들, 자기 머리로는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서 신념 체계를 통째로 삼켜 버린 저런 멍청이들도 언제나 있을 거고. 버튼 하나만 누르면 프로그램대로 착착 돈을 벌어들이는 가와하라나 뱅크로프트 같은 사람들도 있을 거야. 게임이 문제없이 잘 돌아가는지, 규칙을 너무 자주 깨뜨리는 건 아닌지 감시하는 당신 같은 사람도 언제나 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칙을 깨뜨리고 싶을 때, 메트족들은 트렙이나 나 같은 사람을 보내서 대신 시킬거야. 그게 진실이야, 크리스틴. 내가 150년 전에 태어났을 때도 그랬고, 역사책에서 읽은 내용을 보면 과거에도 그리 다르지 않았어. 이런 진실에 익숙해지는 게 좋아."

* 메트족: 가와하라, 뱅크로프트 모두 메트족입니다. 메트족은 엄청난 경제력과 권력으로 몸을 계속 갈아입으며 불로불사를 누리는 소수의 지배자를 뜻합니다.

 

* 트렙(이나 주인공 '나) : 살인청부업자나 메트족에 명령(또는 돈, 권력)에 의해서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윤리나 도덕, 책임의식은 없습니다. 돈을 받고 명령에 따라 사람을 죽일 뿐.

마지막 코바치(소설 속 주인공, 특파부대 요원 출신)의 이 마지막 말은 굉장히 시사 하는 바가 큽니다. 장르를 굳이 구분하자면 SF소설인데, 소설 속에 묘사되어 있는 모습은 현재의 우리나라(또는 다른 나라)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가 않습니다. 소수의 지배자와 그에 빌붙은 기생충 같은 인간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죽지도 않으면서(끈질기게 대를 이으면서 그 생명력을 유지하죠) 계속 되풀이되죠. 그래서 코바치의 마지막 대사 "이런 진실에 익숙해지는 게 좋아."는 무척 슬프게 들립니다. 진실을 외면해야만 하는 현실이 슬프더군요.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그리고 역사책에도 달라지지 않는 진실이죠. 코바치는 특파부대 요원입니다. 잔인한 인간이고, 무수하게 많은 인간들을 죽였습니다. 전쟁이라는 허울뿐인 명분 앞에서 말이죠. 그렇다면 그런 코바치가 메트족을 처단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그리 좋은 인간은 아닙니다(개인적인 이유로 아무런 해도 없는 인간들을 무참히 살해하기도 하거든요). 그러나 스스로 각성하고 반성하는 모습은 보입니다. 물론 마지막에는 좋은 일도 하고요("뭔가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일이"). 암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소설은 꽤나 통쾌한 소설입니다. 공고한 기득권 세력(메트족)이 한 사이코패스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되어질 때의 그 쾌감, 꽤나 짜릿합니다. 반체제, 혁명 소설치고는 꽤나 흥미롭습니다. 꽤나 정치적입니다. 역시 SF소설은 이런 주제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얼터드 카본>이 혁명 소설이라고? 물론 고리타분한 소설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제가 인상 깊었던 내용이 그런 내용일 뿐, 이 소설은 SF, 고어, 하드보일드, 느와르, 미스터리, 사이버펑크 등 다양한 장르의 잡종 교배입니다. 탐정은 아니지만 (탐정의 임무를 부여 받은) 까칠한 코바치가 메트족 뱅크로프트의 자살 원인을 밝히는 것이 기본적인 스토리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흡혈귀 같은 뱅크로프트가 자살을? 말이 안 되죠. 암튼 그 자살 원인을 밝히는 도중 의문의 존재들에게 죽음의 위협을 느낍니다.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이죠. 그런데 사건을 추리하는 도중에 겪게 되는 상황들은 SF적입니다. 코바치라는 인간 자체가 그렇거든요. 의식만 코바치일 뿐 몸뚱이는 악질경찰(?)이자 파트너인 여자경찰 오르테가의 남자 친구입니다. 그리고 300년이나 산 할머니는 20대 초반 여성의 몸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가상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고문들과 섹스들. 암튼 SF소설이나 영화에서 봤음직한 익숙한 설정들도 보이지만 좀 더 변태적이고 자극적입니다(이건 뭐 개인적인 취향입니다. <데몰리션맨>에서도 육체가 아닌 의식으로 섹스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조금 얌전하죠).

과연 뱅크로프트는 스스로 자살을 한 것일까요? 만약 자살이라면 그 이유는 엄청난 것이겠죠? 그들의 사고방식은 확실히 기득권자의 사고방식과 비슷한 것 같아요. 돈으로 육체를 사고, 인간들을 장난감 다루듯이 가지고 놀다 필요 없으면 그냥 버리죠. 암튼 나중에 밝혀지는 진실은 몹시 씁쓸합니다. 그나저나 제임스 맥테이그 감독(<브이 포 벤데타>)에 의해 영화화될 예정이라고 하네요. <브이 포 벤데타>를 재미있게 봐서 영화도 무척 기대가 됩니다. 가상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장면이 쉽게 상상이 안 되어서 영상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거든요. 하드보일드 탐정소설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색다른 재미를 안겨주지 않을까 싶네요. 그나저나 메트족 부럽기는 부럽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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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코스모스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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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의 소설은 이상하게 바로 읽고 싶은 마음은 들지가 않아요. 또한 이상하게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읽게 되는 것 같고요. 사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가 않을 정도로 평범해요. 온다 리쿠의 <초콜릿 코스모스> 역시 천재와 노력형 두 여배우의 엄청난 연극의 주연을 따내기 위한 오디션 경쟁이 기본 줄기입니다(<유리가면>의 오마주라는데 <유리가면>이 뭔지는 잘 모르겠네요. 검색을 해 봤더니 만화이고, 스토리도 조금은 비슷하더군요). 연극 사실 좋아하지도 않고, 여배우들의 오디션 경쟁이라는 소재도 평소에 전혀 관심이 없음에도 온다 리쿠의 소설이라는 이유만으로 읽게 되는 힘(온다 리쿠의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내용 보다는 그 내용 속에 흐르는 어떤 분위기), 중독성이 아닐까 싶어요.

이 소설은 연극을 소재로 다룬다는 점에서 온다 리쿠의 전작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과 조금 비슷한 면이 있기도 하지만, 이번 작품은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에 비해서는 좀 더 이해하기 쉽고, 구체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네요. 사실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은 도대체 무엇을 읽었는지 모를 정도로 (제게는) 조금 난해했습니다. 미스터리한 느낌은 강하게 풍겼지만 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니 어찌 보면 조금 불친절한 소설이 아닐까 싶네요. <초콜릿 코스모스>는 우선 쉽습니다. 두 번의 오디션을 놓고 (물론 아즈마 교코라는 배우는 직접 오디션에 참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두 여배우의 치열한 경쟁이 무척 알기 쉽게 묘사되어 있어서 연극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더군요. 사실은 오디션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연극 <열린 창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더 흥미롭더군요. 특히나 <열린 창문>의 마지막 반전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의 블랜치라는 늙은 알코올 중독자 여자의 독백은 정말 소름이 돋더군요. 온다 리쿠의 소설을 읽고 <열린 창문>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사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워낙 유명한 영화라 제목이 많이 들어봤지만 어떤 내용인지도 몰랐거든요), 실제 연극이 보고 싶을 정도로 소설 속에서 정말 매력적으로 묘사됩니다. 물론 평범한 오디션은 아닙니다. 사실 이 소설의 재미는 바로 그 평범하지 않은 오디션을 천재 여배우들이 어떻게 연기할 것인가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아역 스타 출신의 노력형 천재 배우 '아즈마 교코', 연기 초보자이지만 엄청난 연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두 놀래키는 선천적인 재능을 타고난 천재 배우 '사사키 아스카' 오디션을 놓고 벌어지는 이 두 명의 여배우들의 치열한 경쟁은 정말 긴장됩니다. 오디션과 천재 여배우, 그리고 소설 속 두 편의 연극. 온다 리쿠의 전작들에 비해 미스터리한 요소는 없지만, 긴장감 하나는 정말 끝내주네요. 거짓말 조금 보태서 정말 손에 땀을 쥐고 읽었네요.

글을 써 본 적이 없어서 소설 속에 연극(희곡)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것이 쉬운지 어려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소설과 희곡은 조금 다르다고 배웠고(국어 시간에 얼핏 배운 것 같은데), 또한 소설 속에 희곡을 집어넣는 것이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닐 것 같은데,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에 이어 또 이런 작업을 했네요. 사실 소설을 읽었는지, 연극을 본 건지 헷갈리네요. 연극을 감상하면서 연기를 하는 배우들의 심리까지 소설로 읽으니 느낌이 묘합니다. 연극의 똑같은 장면을 다양한 여배우들이 연기를 하는 장면(배우들 나름대로의 해석과 심리 상태)에서의 긴장감은 정말 최고더군요. 연극을 본 적은 없지만, 정말 저렇다면 정말 재미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배우들의 연기하는 모습이 정말 생생했습니다. 물론 온다 리쿠만의 판타지일 수도 있지만요. 여배우들만의 오디션 장면만으로 이런 색다른 재미와 긴장감을 줄 수 있다니, '역시 온다 리쿠의 명성이 허황된 것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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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신경립 옮김 / 창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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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 온다 리쿠, 미야베 미유키는 이제 국내에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에는 변함없지만 모든 작품이 고르게 재미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전작주의도 물론 좋지만 결국은 소개되지 않을 작품도 소개됨으로써 국내 일본 추리소설 시장에 악영향을 미치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네요. 단도직입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급생>은 조금 실망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같은 작가의 <방과 후>와 비교를 하자면 <방과 후>에 더 손을 들어주고 싶네요. 그럼에도 온라인서점 교보문고, 알라딘, 예스24의 별 다섯 개(만점)는 사실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별 다섯 개를 줄 소설은 아니거든요. 물론 저 혼자만 이 소설을 재미없게 읽은 것일 수도 있지만요. 요즘 소개되는 일본 추리소설(신간)과 비교해도 트릭이나 동기가 무척 약합니다. 학교나 교사의 비리나 부정부패라는 소재가 조금은 식상할 수도 있지만, 가슴에 확 와 닿는 그런 분노(교육제도에 대한)는 생기지가 않네요. 물론 사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회문제(개인적인 문제일 수도 있지만)도 주인공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의 무게와 동등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요. 그 부분이 제게는 조금 동기가 약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소설이 발표된 시기를 감안하고 읽었을 때 트릭 자체가 나쁘지 않습니다. 학교 내의 물건들을 활용한 트릭도 나름대로 신선했고요. 그리고 살인사건의 범인 및 동기도 나름대로 독자들의 허를 찌르고 있고요. 사실 모두가 경찰에게 진실을 이야기했으면 사건의 비밀은 바로 밝혀졌을 텐데, 사춘기 학생들이 주인공인 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감추고 싶은 비밀로 인해서 범행 동기나 범인을 찾기가 무척 힘들다는 것, 이런 부분은 무척 좋더군요. 사실 진실은 바로 코앞에 있었는데, 사건에 관계된 인물들이 무언가 숨기고 있는 작은 진실 때문에 점점 더 복잡하게 전개된다는 것. 이 부분의 트릭은 나름대로 높게 평가해 주고 싶네요. 그러나 초기작이라서 그런지 범행의 동기나 트릭이 조금 약한 느낌은 들더군요. 따라서 감동도 충격도 별로 느끼지를 못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의 브랜드를 버리고서라도 조금 아쉬움이 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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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광 아토다 다카시 총서 2
아토다 다카시 지음, 유은경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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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코는 어떤 신의 변덕 때문이었는지 양갓집에서 태어났고, 양갓집의 딸로 자랐다. 하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아무런 불평도 할 수 없는 반평생이었다. 앞으로도 분명 그럴 것이고 지금 옆방에서 잠들어 있는 유키코도 분명히 그런 삶을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 바깥쪽에 혜택 받지 못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지 마키코에게는 불투명 유리창의 건너편을 보는 것처럼 어느 것 하나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단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들이 자신들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어쩌면 증오에 가까운 선망을 품고 있을 것이라는 것,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라는 것 정도였다.

(<뻔뻔한 방문자> 중에서)

중간고사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친한 친구에게 자랑을 하며 축하해 주기를 은근히 기대를 합니다. 친한 친구는 웃는 얼굴로 "어떻게 만점을 받았냐? 정말 대단하다. 정말, 정말 축하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 친한 친구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것일까요? 아니면 부러워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보다 머리도 나쁘고, 공부도 하지 않은 친구가 만점을 받았다는 사실에 증오를 느낄까요? 아토다 다카시의 단편집 《나폴레옹광》에는 이런 느낌의 단편소설들이 많습니다. 뒤틀린 대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공포라는 이름으로 얼굴을 들이 내밉니다. 불쾌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고, 참고나면 더 불쾌해지고 기분 나빠집니다. 인간의 내면은 언제라도 터질 수 있는 그런 불쾌감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그 불쾌감은 분노일 수도 있고요.

단지 '이 검은양복 정도는 새 것으로 사 줄 수 없을까? 최소한 엉덩이의 구멍 정도는 내가 먼저 말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신경을 써 주면 좋을텐데.'- 불만이라고 해야 기껏 이 정도일 뿐이다.

(<창공> 중에서)

분노, 증오, 공포와 함께 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소소한 불만입니다. 소소하다고는 하지만 그런 소소한 욕구조차 해결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분노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죠. 오히려 당연한 것인데도 아무도 당연하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을 때 그에 따른 분노와 허무감, 쓸쓸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지이 않을까 싶어요. 기본적인 것, 그 기본적인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사람은 정말 폭발하죠. 검은 양복을 입은 까마귀를 연상 시키는 사내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아토다 다카시의 《나폴레옹광》의 소설들이 모두가 이런 느낌은 아닙니다. 그러나 소설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욕구를 해결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짜증스러움이요. 작가 스스로가 엄청난 편집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대부분의 작품들이 인간 내면의 어두운 심리를 집요하게 파헤치네요. '너희들 사실은 이렇잖아? 안 그런 척 살아가고는 있지만 마음속에는 온갖 사악함이 가득하잖아? 위선 떨지 마, 너무 간사하잖아.' 단편소설 하나하나가 정말 재미있습니다. 그러니까 심각한 소설은 절대 아닙니다. 블랙유머(키득거리면서 웃게 되는 묘미)와 허를 찌르는 통쾌한 결말은 이 소설이 정말 웃긴 소설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물론 내용 자체도 (오래 전 소설임에도) 신선하고 재치 있으며 재미있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에 섬뜩한 공포(사악함, 분노, 증오, 불쾌감 등등)를 숨겨 놓고 웃으면서 즐길 수 있도록 한 작가의 배려(?)에 오히려 소름이 돋더군요. 장편도 아닌 단편소설에 이런 느낌들을 담아내기가 힘들 텐데,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이>라는 작품은 9페이지의 단편소설입니다. 마지막의 한 줄로 인해 엄청나게 소름 돋는 소설이 되어버립니다. 바로 그 한 줄 때문에 말이죠(어떤 내용이냐고요? 읽어보시면 알게 될 거에요. <뻔뻔한 방문자>도 그렇습니다. 섬뜩한데 웃을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 <뻔뻔한 방문자>는 제목 자체가 최고입니다. 작명 센스에 정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나폴레옹광》에는 총 13개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습니다. 13개 단편의 색깔이 모두 다를 뿐더러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모두 다릅니다. <밧줄-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가의 창작에 대한 내용입니다. 화려하게 데뷔를 하기는 했는데, 다음 작품이 도저히 써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편집자를 피해 모텔로 도망을 갑니다. 우연히 만난 옆방의 자살하려는 여자. 밧줄은 자살을 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은 집요하게 찾아와서 결국 자살하게 만든다는 떠도는 이야기. 결국 여자는 밧줄에 의해 목이 졸려 죽습니다. 이러한 기이한 체험이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를 소설로 발표하는 작가. 그리고 역시나 마지막의 한 줄로 전혀 다른 느낌의 소설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니까 한 작품 내에서도 느낌이 달라지는데, 13개의 단편소설의 전체적인 느낌을 글로 표현하기에는 역시나 무리인 것 같아요. 암튼 한편 한편이 색다르고, 재미있고, 웃기며, 허를 찌릅니다. <투명 물고기>, <광폭한 사자>, <사랑은 생각 밖의 것>, <나폴레옹광>, <딱정벌레의 푸가> 등 정말 재미있는 단편소설이 많습니다. 단편소설은 바로 이런 것이다,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는 작품집이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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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흙 혹은 먹이
마이조 오타로 지음, 조은경 옮김 / 학산문화사(만화)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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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죽으면 어차피 연기나 흙, 혹은 먹이죠."

"무슨 의미?"

"불에 타서 연기가 되거나, 매장되어 흙이 되거나, 자칫하면 동물에게 먹혀버리는 겁니다."

제19회 메피스토 상 수상작품. 마이조 오타로의 데뷔작 <연기, 흙 혹은 먹이>을 포함해서 메피스토 상 수상작을 네 작품 읽었는데, 메피스토 상은 정말 모르겠네요. 조금 어수선하고, 어지럽기도 하고, 아동틱한 면도 있는 것 같고, 잔인하며, 때로는 참신하기도 한데, 읽고 나면 그냥 "멍~"한 느낌입니다. 암튼 메피스토 상 수상작(지금까지 읽은 것 중에서는) 이 작품이 가장 어지럽네요. 물론 스토리가 복잡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뭐랄까, 읽고 나서 답답하다고 할까요? 사실 <아수라 걸>도 무척 어지러웠는데, 나름대로 재미는 있어서 이번 작품에도 도전을 했는데, 역시나 모르겠네요.

센디에이고의 구명외과 나츠카와 시로가 어머니가 '연쇄 주부 구타 생매장' 사건에 피해자라는 소식을 듣고 일본으로 돌아와 범인을 추적하는 이야기가 기본 스토리이고, 나츠카와 집안(특히 아버지 '마루오'와 형 '지로')의 폭력의 반복과 확산, 그리고 상처에 대한 이야기가 범인을 추적하는 이야기 중간 중간에 묘사됩니다. 자식을 때려야만 하는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에게 대들고 맞아야만 하는 자식, 그리고 그들의 폭력을 방관하는 가족들. 아버지가 자식을 욕하고 때리며, 자식은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그리고 형제간의 상하관계는 없고, 부자간의 복종관계만 있는 이상한 집안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몹시 불편합니다. 폭력의 순환은 뭐 끝이 없으니까요. 서로 간의 어긋남이 결국 폭력을 불러일으키는데, 해답은 없네요. 물론 해답은 스스로 찾아야 하겠지만, 마이조 오타로의 <연기, 흙 혹은 먹이>에서의 가족 간의 화해 방법은 무척 무시무시하네요. 고리타분하게 설교하는 방식보다는 그래도 이런 과격한 방식이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암튼 나츠카와 집안은 대단합니다. 아, 물론 나츠카와 집안에 얽힌 미스터리한 사건도 살짝 던져줌으로써 지긋지긋한 폭력으로부터 잠깐 숨 돌릴 틈을 주기는 합니다. 바로 할아버지의 자살 사건과 형 '지로'의 삼각 창고(창고의 모양이 삼각형입니다. 참고로 밀실입니다)로부터의 탈출입니다. 힌트는 제가 설명한 부분에 다 있네요. 물론 단순한 트릭이기는 하지만요, 재미있습니다.

아,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소설은 나츠카와 시로가 어머니를 폭행하여 의식불명 상태로 만든 '연쇄 주부 구타 생매장' 사건의 범인을 추적하는 사건입니다. 연쇄 살인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연결고리를 바탕으로 추적을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조금 어려웠습니다(범인에 대한 힌트를 전혀 모르거든요. 일본어나 점자, 심지어는 ‘도라에몽’까지). 이 부분은 사실 그냥 넘어갔습니다. 사실 중요하다면 중요한 부분인데 모르고 넘어가도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그냥 '그렇구나!' 알고만 있으면 그만. 마지막에 주인공 시로가 범인을 잡기는 잡는데, '끝내준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하도 나츠카와 집안의 폭력에 시달려서요. 여기서 진을 다 빼서 나중에 범인이 잡혀도 쾌감은 별로 느껴지지 않더군요. 암튼 힘들었습니다. 그나저나 마이조 오타로 참 재미있는 작가 같아요. sin과 cos이라는 수학공식을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네요. 여기서 재미있다는 것은 굳이 이 소설에서 ‘sin과 cos이라는 수학공식을 꼭 넣을 필요가 있었냐?’ 하는 것입니다. 그냥 그 소용돌이 그래프만 보여주어도 될 것을(약간의 설명을 곁들어서), 오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암튼 요런 세세한 부분에서 조금은 작가의 오버하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재기발랄한 것일까요? 암튼 재미있는 작가입니다. 그러나 소설은 재미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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