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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광 ㅣ 아토다 다카시 총서 2
아토다 다카시 지음, 유은경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미키코는 어떤 신의 변덕 때문이었는지 양갓집에서 태어났고, 양갓집의 딸로 자랐다. 하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아무런 불평도 할 수 없는 반평생이었다. 앞으로도 분명 그럴 것이고 지금 옆방에서 잠들어 있는 유키코도 분명히 그런 삶을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 바깥쪽에 혜택 받지 못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지 마키코에게는 불투명 유리창의 건너편을 보는 것처럼 어느 것 하나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단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들이 자신들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것-어쩌면 증오에 가까운 선망을 품고 있을 것이라는 것,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라는 것 정도였다.
(<뻔뻔한 방문자> 중에서)
중간고사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친한 친구에게 자랑을 하며 축하해 주기를 은근히 기대를 합니다. 친한 친구는 웃는 얼굴로 "어떻게 만점을 받았냐? 정말 대단하다. 정말, 정말 축하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 친한 친구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것일까요? 아니면 부러워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보다 머리도 나쁘고, 공부도 하지 않은 친구가 만점을 받았다는 사실에 증오를 느낄까요? 아토다 다카시의 단편집 《나폴레옹광》에는 이런 느낌의 단편소설들이 많습니다. 뒤틀린 대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공포라는 이름으로 얼굴을 들이 내밉니다. 불쾌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고, 참고나면 더 불쾌해지고 기분 나빠집니다. 인간의 내면은 언제라도 터질 수 있는 그런 불쾌감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그 불쾌감은 분노일 수도 있고요.
단지 '이 검은양복 정도는 새 것으로 사 줄 수 없을까? 최소한 엉덩이의 구멍 정도는 내가 먼저 말하지 않더라도 알아서 신경을 써 주면 좋을텐데.'- 불만이라고 해야 기껏 이 정도일 뿐이다.
(<창공> 중에서)
분노, 증오, 공포와 함께 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소소한 불만입니다. 소소하다고는 하지만 그런 소소한 욕구조차 해결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분노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죠. 오히려 당연한 것인데도 아무도 당연하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을 때 그에 따른 분노와 허무감, 쓸쓸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지이 않을까 싶어요. 기본적인 것, 그 기본적인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사람은 정말 폭발하죠. 검은 양복을 입은 까마귀를 연상 시키는 사내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아토다 다카시의 《나폴레옹광》의 소설들이 모두가 이런 느낌은 아닙니다. 그러나 소설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욕구를 해결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짜증스러움이요. 작가 스스로가 엄청난 편집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대부분의 작품들이 인간 내면의 어두운 심리를 집요하게 파헤치네요. '너희들 사실은 이렇잖아? 안 그런 척 살아가고는 있지만 마음속에는 온갖 사악함이 가득하잖아? 위선 떨지 마, 너무 간사하잖아.' 단편소설 하나하나가 정말 재미있습니다. 그러니까 심각한 소설은 절대 아닙니다. 블랙유머(키득거리면서 웃게 되는 묘미)와 허를 찌르는 통쾌한 결말은 이 소설이 정말 웃긴 소설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물론 내용 자체도 (오래 전 소설임에도) 신선하고 재치 있으며 재미있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에 섬뜩한 공포(사악함, 분노, 증오, 불쾌감 등등)를 숨겨 놓고 웃으면서 즐길 수 있도록 한 작가의 배려(?)에 오히려 소름이 돋더군요. 장편도 아닌 단편소설에 이런 느낌들을 담아내기가 힘들 텐데,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이>라는 작품은 9페이지의 단편소설입니다. 마지막의 한 줄로 인해 엄청나게 소름 돋는 소설이 되어버립니다. 바로 그 한 줄 때문에 말이죠(어떤 내용이냐고요? 읽어보시면 알게 될 거에요. <뻔뻔한 방문자>도 그렇습니다. 섬뜩한데 웃을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 <뻔뻔한 방문자>는 제목 자체가 최고입니다. 작명 센스에 정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나폴레옹광》에는 총 13개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습니다. 13개 단편의 색깔이 모두 다를 뿐더러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모두 다릅니다. <밧줄-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가의 창작에 대한 내용입니다. 화려하게 데뷔를 하기는 했는데, 다음 작품이 도저히 써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편집자를 피해 모텔로 도망을 갑니다. 우연히 만난 옆방의 자살하려는 여자. 밧줄은 자살을 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은 집요하게 찾아와서 결국 자살하게 만든다는 떠도는 이야기. 결국 여자는 밧줄에 의해 목이 졸려 죽습니다. 이러한 기이한 체험이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를 소설로 발표하는 작가. 그리고 역시나 마지막의 한 줄로 전혀 다른 느낌의 소설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니까 한 작품 내에서도 느낌이 달라지는데, 13개의 단편소설의 전체적인 느낌을 글로 표현하기에는 역시나 무리인 것 같아요. 암튼 한편 한편이 색다르고, 재미있고, 웃기며, 허를 찌릅니다. <투명 물고기>, <광폭한 사자>, <사랑은 생각 밖의 것>, <나폴레옹광>, <딱정벌레의 푸가> 등 정말 재미있는 단편소설이 많습니다. 단편소설은 바로 이런 것이다,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는 작품집이지 않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