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색의 수수께끼 -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 작가 18인의 특별 추리 단편선 밀리언셀러 클럽 90
나루미 쇼 외 지음, 유찬희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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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노자와 히사시를 제외하고는 모두 처음 들어본 작가의 흑색(?) 같은 작품이 실린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 작가 작품집 <흑색의 수수께끼>는 사실 특정 색깔(그러니까 작품의 성향)을 논하기에는 조금 밋밋한 느낌이었습니다. 본격 추리소설, 사회파 미스터리, 드라마(사람 사는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 작가 작품집에 실리기에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작품도 있었습니다(나무리 쇼의 <화남>이라는 작품이 그랬습니다). 이번 작품집은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조금 어둡습니다(마지막 작품 <가을날 바이올린의 한숨>은 조금 코믹한 느낌이 나기는 하지만). 작품의 색깔로만 보면 흑색이라는 제목도 그다지 나쁜 것 같지는 않네요. 그리고 (사실 이런 얘기는 되도록이면 하고 싶지 않은데) <흑색의 수수께끼>는 조금 번역과 오탈자 문제가 심한 것 같더군요. 특히 <화남>이라는 작품은 문장이 무척 부자연스럽더군요. 번역소설이라도 마치 우리나라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화남>은 정말 번역된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들더군요. 암튼 개인적으로 이 점은 무척 아쉽더군요.

<화남>은 이혼한 남자를 직장 상사로 둔(그래서 삶이 피곤한) 한 집안의 가장(렌지) 이야기입니다. 중이염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데, 후에 종양으로 밝혀집니다. "혹시 치료를 안 하면"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치료란 (다른 의미에서) 암세포(생명체)를 파괴하고 죽여 버리는 행위이니까요. 이는 아내 히사요의 유산이란 문제(심장박동이 약하게 들려서 결국은 죽여 버립니다)와 연결되는 지점 같기도 해요. 삶과 죽음이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싶네요. 전체적인 이야기의 구성은 나쁘지 않은데, 이번 작품집에 실리기에는 조금 안 어울리는 작품이 아닐까 싶네요.

<저벅저벅>은 <연애시대>의 노자와 히사시의 작품입니다. 우선 제목부터가 마음에 들더군요. 뭔가가 조용히 다가오는 듯한 느낌. 사회파 미스터리로 분류가 될 수가 있겠네요. 물론 마지막의 충격적인 반전도 기다리고 있습니다(일본의 추리소설에서나 가능한 그런 반전, 한마디로 사이코). 열 살의 여름을 악몽으로 만들어버린 남자(그래봤자 중학생)에 대한 30년 가까운 한 여성의 고통과 증오가 지독하게 그려진 소설입니다. 찌는 듯한 더위, 남자 중학생이 헛간 비슷한 곳으로 데려가 음부를 만지고 관찰을 합니다.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느낌. 그 때의 기억과 고통이 사회에서 정상적인 연애생활을 하는데 방해를 합니다. 암튼 그런 고통이 잔잔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 다음 이야기가 더 재미있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여기까지만. 암튼 이번 작품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소설입니다. 추천!!

<목소리>는 한편의 잔잔한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또한 성장소설이기도 하고요. 낚시를 좋아하는 아버지가 어느 날 사고로 목숨을 잃습니다. 그 아버지를 대신하여 소년은 강가에 매일 나가서 낚시를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강가에서 죽으려고 하는 죽은 아버지의 옛 친구를 만나고, 아버지의 숨겨진 비밀(거창하지는 않습니다)을 알게 됩니다. 부모자식간의 애틋한 정을 그린 소설이라고 할까요? 읽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그러나 역시 이번 작품집에는 그다지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네요.

마지막으로 <가을날 바이올린의 한숨>은 본격 미스터리입니다. 천재 물리학자 앨버트 아이슈타인이 등장하는 소설입니다. 아이슈타인이 아끼던 바이올린 도난사건이 발생합니다. 와세다 대학 언어학 교수 도도로키와 그의 조수 이노우에가 사건을 담당하게 됩니다. 왜 범인은 바이올린을 바꿔치기 했을까? 그리고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웠음에도 뭔가 논리에 맞지 않는 범인의 행동도 의심스럽습니다. 암튼 그러한 사건을 추리하는 소설인데, 가볍게 읽기에는 괜찮을 듯싶네요. 물론 트릭이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아기자기한 맛이 느껴지는 추리소설이랄까요. 그냥 무난하게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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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있어 다행이야 - 삶의 멘토가 된 이들의 가슴 따뜻한 희망 에세이
고도원 외 지음, 이원태 그림 / 창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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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네가 있어 다행이랴"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고, 또한 누군가에게 "네가 있어 다행이야"라는 말을 해 본 적도 없는 것 같네요. 사실 인생의 좌우명(이라고 부를만한 거창한 것은 아니고)은 "누가 나에게 피해를 주지 마라, 나도 당신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을 테니까"이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적도 없고, 또한 도와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습니다. 어린 시절 공부하다고 너무 어려운 것을 만나게 되면 선생님에게 가르쳐 달라고 하지를 않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친구들에게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고요. 힘들면 힘든 대로 그냥 버티면서 살았던 것 같아요. 사실 이러한 삶이 올바른 삶인지는 아직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네가 있어 다행이야>라는 책은 그런 도움을 주고받는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나눔, 희망, 극복 등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까요? 물론 희망과 행복 뒤에는 무수한 고통이 있었고, 그네들의 지금의 성공(?)은 결코 성공이라 부를만한 것도 아니에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니까요.

"역경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성공 스토리를 많이 보고 듣고는 하지만, 사실은 그 주인공들은 역격을 '이겨 낸' 것이 아니라 그 앞에도, 그 뒤에도 하루하루 날마다 역경을 '이겨 내고' 있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가수 김창완의 '좌절과 용기는 왼발과 오른발' 중에서)

무척 공감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이겨 낸' 것이 아니라 아직도 '이겨 내고' 있는 것이죠. 이런저런 성공스토리는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고깝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물론 정신적/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또한 많은 비장애인들의 불편한 시선을 감수하면서 성공한 분들에게는 이런 말 자체가 부끄럽지만요(저는 정치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는 자서전을 쓰면서까지 자신의 성공 스토리를 까발리고 싶어 하는 일부 몰지식한 인간들을요). 장애를 극복하고 성공한 분들은 당당하게 자랑 해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이런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책은 계속 나와 주어도 상관없고요(참고로 이 책의 판매수익은 푸르메재단 재활전문병원 건립기금으로 쓰인다고 합니다). 책의 내용도 무척 좋습니다. 좌절과 희망에 대한 고리타분한 설교는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없이 마음 훈훈하게 해주는 그런 이야기도 아니고요. 그냥 살아가면서 지나치기 쉬운 그런 작은 깨달음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나눔'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 현재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것. 작은 깨달음. 누군가에게 선물하기에 딱 좋은 책이 아닐까 싶네요(남녀노소 누구에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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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키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오근영 옮김 / 창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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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이라는 SF적인 소재와 내용으로 가족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작품으로 돌아왔네요. 사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서는 가족애(부성애, 모성애, 자식애 등등)가 많이 등장하는 것 같아요. 미스터리적인 이야기 구조에 그런 감성을 듬뿍 담아서 독자들이 머리로는 이야기 구조를 따라가게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그런 감성적인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것 같아요. 물론 그러한 감성 자체가 고루하고, 식상하고, 조금은 촌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나쁘지는 않죠. 본격 추리소설도 사회파 미스터리소설도 확실히 이런 감성을 자극하는 추리소설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장점을 발휘하는 것 같아요. <비밀>, <아내를 사랑한 여자>, <용의자 X의 헌신>, <변신> 등 그의 대표작인 대부분 이런 부류이지 않나 싶어요.

17살의 도키오가 죽는 순간 23살의 철없는 아버지를 만나러 과거로 옵니다. 물론 도키오가 아닌 그의 아버지가 원해서 미래에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한 것이지만요. 사실 시간여행을 다룬 소설은 많죠. 그런데 부성애와 자식애를 시간여행의 소재로 이용해서 신파로 자극하는 그런 SF소설은 조금 드물지 않나 생각해요. 사실 시간여행과 자식애(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닌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는 조금 언발란스 하기도 하잖아요. 시간여행이라는 정말 무궁무진한 소재를 이제는 정말 진부하다 못해 식상하기도 한(그만큼 보편적인 주제이기도 하지만) 가족애라니. 사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 열광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 그의 뻔뻔함에는 정말 열광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앞서 언급한 그의 대표작들도 사실 조금 뻔하잖아요. 그런 뻔한 소재로 이야기를 만들 생각을 할까? 그런데 그게 뻔하고 식상함에도 재미가 있어요. 알고 속으면서도 이야기의 매력에 빠져들게끔 만드는 재주(비록 미스터리 소설로서의 기발함이나 참신성은 없더라도), 그게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계속 읽게끔 만드는 것 같아요.

SF적인 설정, 그리고 자식과 부모의 애증, 그리고 연인에 대한 질투와 연민. 무엇보다 과거의 철없는 아버지가 미래의 아들을 만나게 되면서 겪게 되는 심리적 변화와 성장. 이러한 소설의 대략적인 내용을 보고 읽어보고 싶습니까? 사실 저는 아니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식상하잖아요. 진부하기도 하고요. 그런데도 읽고 싶습니다. 걸작은 아니더라도 우선 그의 소설은 재미가 있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미스터리소설은 아니지만 미스터리적인 요소는 많습니다. 그의 모든 소설에서는 미스터리적인 요소가 있지 않나 싶어요. 바로 궁금증. 진부하다면 진부한 이야기임에도 그런 미스터적인 요소 때문에 다음 장을 읽어보고 싶은 게 아닌가 싶어요. 우선 도키오의 아버지 다쿠미의 이제는 헤어진 여자 친구 치즈루의 얽힌 내막이 계속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그녀를 쫒는 인간들은 누구이며, 왜 그녀는 그(아버지)를 버렸을까? 그리고 도키오의 아버지의 부모님들은 왜 그(아버지)를 버린 것일까? 무슨 사연이 있어서? 암튼 요런 소소한 궁금증, 예측은 가능하지만, 반전이 아닌 인간의 내면에 얽혀 있는 사연이라 아무래도 궁금해지더군요. 그리고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이 맞물리면서 연결되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런 이야기 구조도 나름대로 괜찮더군요. 식상한 감동일 수도 있지만, 잘 읽히고, 나름대로 미스터리적인 요소도 있어 긴장감도 유지되면서 재미도 있습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 그리고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애틋함, 그리움), 이런 가을에 한번 쯤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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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 사랑을 담아 아토다 다카시 총서 1
아토다 다카시 지음, 유은경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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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공포라는 것은 상상력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공포의 연구> p.431)

마지막에 실려 있는 단편소설 <공포의 연구>는 바로 위의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아토다 다카시가 추구하는 문학이 바로 저 짧은 문장에 가장 잘 드러난 것 같아요. 일상적이고 평온한 상황에서 시작되던 이야기는 마지막의 반전으로 서늘하고 오싹한 공포를 주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둔갑을 해 버립니다. 둔갑이라고 하면 조금 오버일까요? 1970년대 후반에 발표된 소설임에도 아토다 다카시의 이야기는 현대에도 유효합니다. 가장 일상적인 것이 가장 무서울 수는 있다는 것은 진리 아닌 진리이잖아요. 옆집에 살고 있는 친근한 아저씨가 어느 날 추운데 고생한다면서 따뜻한 커피에 독을 타서 줄 수도 있잖아요? 또는 옆집 할머니가 바쁜 주부를 위해 아기를 봐준다고 하면서 죽일 수도 있고요. 현대사회의 공포는 바로 선한 얼굴 뒤에 숨은 악의가 아닐까 싶어요. 선과 악은 하나다. 그런 뫼비우스의 띠 같은 잔잔한 이야기와 충격적인 반전이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정신없이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암튼 일본의 많은 단편소설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마지막의 한 문장을 통해 서늘하고 오싹한 공포감을 안겨주는 단편소설 작가로는 최고이지 않나 생각해요. 정말 그 짧은 소설에 이런 반전을 숨길 수가 있는 건지. 물론 현대사회의 공포를 담고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하나, 마지막의 반전이 신선하다고는 말할 수 없겠네요. 여기저기서 조금 들어본 이야기일 수도 있고, 조금만 생각하면 쉽게 예측이 가능하기도 하거든요. 그 당시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요즘처럼 반전소설이 넘쳐나는 시대에는 조금 촌스럽기는 합니다. 사실 반전도 나름대로 재미있지만, 이 소설은 반전보다는 그 반전에 숨겨진 서늘한 공포를 즐기는 것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싶네요.

<냉장고에 사랑을 담아>는 표제작입니다. 사실 표지와 제목만 보면 사랑 이야기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분홍빛 냉장고에 있는 작은 물건을 자세하게 보지 않으면 정말 사랑 이야기로 속겠더군요. 암튼 <냉장고에 사랑을 담아>는 (반전이 있는 소설이라 뭐라 말하기가 힘든데) 마지막이 정말 소름 돋더군요. 사업에 실패하고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런 자신의 무능력으로 아내를 의심하는 한 초라한 남성의 어긋나버린 정신 상태를 보여주는 작품인데, 그럴 수도 있겠다는 현실감에서 오는 서늘한 공포가 아주 잘 녹아들어 간 작품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행복통신>은 조금 따뜻한 이야기인데, 그러한 결말에 다다르기 까지 작가가 깔아놓은 복선이 아주 재미있게 그려져 있습니다. 사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초자연적인 공포를 다룬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조금 우연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인과관계가 뚜렷한 이야기이네요. <취미를 가진 여자> 이 작품도 아주 걸작입니다. 누구나 쉽게 생각하는 예상을 뒤집는다고 할까요? <기묘한 나무>는 오히려 요즘 현대사회와 더 잘 어울리는 소설이 아닐까 싶어요. <최후의 배달인>은 어디선가 보거나 들은 이야기 같아서 신선함은 조금 떨어졌습니다(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나거든요). <나는 먹는 사람>은 결말이 예상 가능한 작품이지만, 결말 그 자체보다는 인간의 기이한 욕망이 주는 서늘한 공포가 무척 소름 돋게 다가 온 작품입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인 인간을 기이한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결말 자체가 저는 참으로 불쾌하고 기분이 나쁘더군요. 사실 그건 소설 속의 그가 아닌 제 자신일 수도 있거든요.

아토다 다카시의 <냉장고에 사랑을 담아>에는 총 18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일일이 언급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네요. 반전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고 해서 느낌 자체를 말하는 것도 역시나 그렇고요. 제목과 표지에 속지 마세요. 말랑말랑한 소설은 절대 아니거든요. 블랙유머라고 해야 할까요? 암튼 서늘한 공포와 웃음이 함께 떠오르는 작품입니다. 18편의 단편 하나하나 재미있습니다. 이야기 자체도 재미있을뿐더러 마지막의 반전과 그리고 그 반전에 숨겨져 있는 서늘한 공포, 그리고 독자 스스로 그 결말을 상상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또 다른 공포. 상상하는 것의 즐거움을 주는 단편소설들이지 않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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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감옥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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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시>, <천둥의 계절>의 쓰네카와 고타로의 신작입니다. 그리고 장편이 아닌 단편소설로 찾아왔습니다. 타임 슬립(시간 이동)을 다룬 '가을의 감옥'을 시작으로 공간의 이동(초가집의 이동)을 다룬 '신가(神家) 몰락', 마지막으로 환술(환상을 현실로 보이게끔 하는 능력)을 다룬 '환상은 밤에 자란다'까지 초지일관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를 끊임없이 배회하는 그런 작품들로 찾아왔습니다. 쓰네카와 고타로는 지금의 현실을 좋아하지 않는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다룬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하네요. 노스탤지어와 판타지가 만나면 이런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그 판타지의 세계는 두려운 세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보고 싶은, 또한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기 싫은 묘한 매력이 있는 세계이기도 해요.

‘가을의 감옥’은 11월 7일의 수요일을 계속 반복해야 하는 리플레이어들의 일상을 다룬 소설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삶이란 어떤 느낌일까? 행복할까? 아니면 불행할까? 몸을 다치거나 죽어도 하루 자고 나면(다시 11월 7일이 반복되면)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갑니다. 돈을 지불하고 물건을 사도 다음날 물건은 사라지고 돈은 지갑 속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매일, 돈을 써도 다시 지갑 속에 채워지는 매일, 앵무새처럼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하는 친구. 그러나 내일은 없습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고, 불륜의 아내는 매일 지켜봐야 합니다. 분노에 죽였던 아내를 매일매일 죽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일은 알 수 없습니다. 행복함 뒤에는 이런 두려움과 불안함이 공존하는 것 같아요(기타카제 백작이 그러합니다).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리 나쁜 하루는 아니었다." 불안하고 두려운 미래라도 꼭 나쁘지만은 않을거에요.

‘신가(神家) 몰락’은 일정한 주기로 세상을 이동하는 오키나 가면의 집(초가집)에 우연히 갇힌 한 남자의 후회, 분노, 안타까움, 깨달음 등 심리의 변화를 다룬 판타지소설입니다. '가을의 감옥'과 형식이나 주제 면에서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갇혀서 지내기는 하지만 주기적으로 세상을 여행할 수 있고, 동안 상태를 유지시켜 주는 맛있는 망고감자 과일, 그리고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로움, 물론 사람을 죽이기도 쉬워요. 과연 신가(오키나 가면의 집) 안에서 갇혀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일까? 아니면 신가 밖에서의 현실적인 삶이 행복한 것일까? 신의 집이라 불리는 곳에 갇혀 있다 탈출하고, 결국 재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한 남자의 현실도피, 무릉도원의 삶에 대한 좌절과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애잔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외롭고 슬프지만 그런 곳을 동경해야만 하는 현대인의 우울한 일상을 들여다 본 것 같아 씁쓸한 여운이 남네요.

‘환상은 밤에 자란다’라는 작품은 이번 작품집에서는 조금 독특한 위치에 있는 작품입니다. 앞의 작품들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 위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는 인간들의 내면을 따라가는 이야기였다면, 이 작품은 환술(환상)이라는 것이 가혹한 현실에 의해서 무참하게 깨져나가는 과정을 어린 소녀(?)의 시점으로 그린 소설입니다. 모두에게 숨겨야만 하는 환술, 그러한 환술이 친구들에게는 괴물로 인식되고, 종교 집단에게는 돈 벌이 수단으로 전락 해 버립니다. 환술은 내면에 숨기고 평범하게 살고 싶었으나 억제되어 있던 환술은 점점 커져버려 괴물이 되어버립니다. 억눌림과 무시, 차별, 이용당하고 버림받음으로써 그러한 환상(환술)은 현실에서 끔찍한 괴물이 되어버립니다. 이번 작품집에서 가장 우울하고 씁쓸한 이야기였습니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정신이 파괴된다. 그리고 뇌는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육체에 죽음을 명한다. 나는 격렬한 환희에 몸을 떨며 웃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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