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영혼 1 뫼비우스 서재
막심 샤탕 지음, 이세진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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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악의 3부작'을 여는 첫 번째 작품. 사실 처음에는 띠지에 있는 홍보문구 프랑스판 <살인의 추억>이라는 문구를 보고는 의아했습니다. 주변에서 듣던 소문하고 영화 <살인의 추억>하고는 많이 달랐거든요. 역시나 책을 읽어보니 여성의 연쇄살인이라는 소재만 비슷할 뿐 느낌이 굉장히 다릅니다(구구절절한 설명은 생략). 암튼 <악의 영혼>은 (살인마의 살해 수법이나 목적) 굉장히 지독하면서 (형사들의 수사 기법) 굉장히 치밀합니다. 발로 뛰는 수사가 아닌 발로 뛰는 작가의 취재가 작품의 결과로서 무척 돋보였던 작품이 아닐까 싶네요.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과학적인 수사기법에 대해 검색을 해보니 이치와 논리에 맞더군요(예를 들면, 폴리아크릴아미드 젤 전기영동, 기체 크로마토그래피 등등). 부검 과정도 꽤 사실적으로 묘사가 되어있던데, 이 부분은 제가 검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서 뭐라 할 수는 없겠네요. 그래도 몇 가지 용어들을 찾아보니 정확하더군요. 물론 실제 부검에 사용되는지는 잘 모르지만요. 암튼 꽤나 사실적인 묘사가 풍부한 추리소설이었습니다.

미드 <C.S.I 과학수사대>를 연상시키는 그런 소설이었습니다. 이런 과학적이고 사실적인 수사 및 묘사(프로파일링, 부검, 증거 확보 등등)에도 불구하고 살인범의 살해 수법은 굉장히 오컬트적(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적, 초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살해한 여자의 피부 일부분을 가져가는 것이나 머리에 문구를 새겨 넣은 후에 산으로 녹여 없애는 점 등 암튼 굉장히 주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그런 행위를 저지릅니다. 과학적인 수사를 해야 하는 형사들에게 이런 비과학적인 살인자는 굉장히 어렵죠. 쉽게 표현하면 바로 '사이코'거든요. 미치광이 사이코를 과학적인 수사로 체포하기에는 정말 어렵죠. 그런데 이 살인자 사이코이면서 사이코패스이기도 합니다. 사이코패스는 일반적인 정신병 증세와는 달리 일반적인 감정이나 자각능력에는 문제가 없죠. 거짓말에도 능하고요. 그러니까 아무나 그냥 죽이는 그런 사이코와는 다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면서 살해 방식은 무척 잔인하고 충동적인 그런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요? 암튼 FBI 출신의 젊은 수사관 조슈아 브롤린은 프로파일러 기법(스스로 살인마가 되어 사건을 재구성합니다)을 활용하여 그런 범인(악의 영혼으로 묘사됩니다)에 맞서 싸우기 시작합니다.

'잠깐이었지만 그는 xxxx의 눈동자에서 시뻘건 불길을 본 것 같았다. 그 짧은 순간에 그 죄수의 영혼을 본 것이다. 악의 영혼을'

사실 이 소설은 초반부터 독자의 흥미를 유발합니다. 포틀랜드 인간백정이라 불리는 연쇄살인마가 분명히 머리에 총을 막고 죽었는데, 1년 후 그와 비슷한 살인이 벌어집니다. 바로 모방범이죠. 그런데 모방범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죽어버린 연쇄살인마 포틀랜드 인간백정이라고 할 만한 증거들이 너무나 많이 나옵니다. 악의 영혼일까요?(그러고 보면 제목 참 잘 지은 것 같아요) 암튼 이미 죽어버린 포틀랜드 인간백정의 영혼의 정체도 찾아야 하고, 여성 연쇄살인사건도 더 이상 벌어지지 않게 막아야 합니다. 그리고 경찰들을 조롱하는 까마귀의 정체도 하루빨리 알아내야 하고요. 암튼 해결해야 할 사건은 많은데 범인의 흔적조차 알 수가 없으니 미칠 노릇입니다.

악의 영혼. 악이란 무엇이고 선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반대로 인간은 정말 선할까요? 아무런 동기도 아무런 원한도 없이 그렇게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일 수 있을까? 인간으로서의 도덕심이나 양심 뭐 암튼 이런 것을 기대하는 건가요? 저는 개인적으로 순자의 '성악설'을 조금 옹호하는 입장입니다. 인간은 절대 선하지가 않아요. 그리고 인간의 잔인함의 끝 역시 없다고 생각하고요. 인간의 선함은 결국 대다수의 인간이 원하는 이상향이 아닐까 싶어요. 이유 없는 살인, 이유 없는 증오, 이유 없는 악의 등등. 인간과 매우 절친한 이런 행동이나 감정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악의 영혼, 결국 그것은 인간의 근원이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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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불임 클리닉의 부활
가이도 다케루 지음, 김소연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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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도 다케루의 신작으로 산부인과 의료 체제의 문제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스터리적인 요소도 거의 없고, 다쿠치와 시라토리 시리즈처럼 포복절도의 유머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척 진진한 의학소설이라고 불러야 할 듯싶네요. 그러니까 <바티스타 수술팀의 영광>의 그런 웃음과 미스터리를 기대했다면 조금 실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산부인과 의료 체제, 대리모, 저출산 대책, 불임 등 간과하가 쉬운 그런 의료의 문제점을 전문가를 통해 들을 수 있다는 점에 만족해야 할 듯싶네요.

<마리아 불임클리닉의 부활>에는 얼음공주가 아닌 얼음 마녀가 등장합니다. 얼음마녀의 마리아클리닉에서의 임부 치료와 도쿄의 대 병원(관료 체제에 찌든) 데이카대학에서의 강의 진행이 교차로 진행됩니다. 마리아클리닉에서는 다섯 명의 임부들의 불임과 대리모, 출산 등 굉장히 일상적인 일들에 대해 다루고 있고, 데이카대학에서는 후생노동성이나 대학병원, 낡은 관료 체제 등에 대해서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산부인과가 이렇게 버림받게 되었는지 예리하고 날카롭게 파헤칩니다. 무엇보다 출산 자체를 너무나 당연시하는 대다수의 사람들(한 생명이 태어나기까지의 그 과정과 난관은 정말 엄청나더군요)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정말 한 생명이 정상적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겠더군요.

그러나 <마리아 불임클리닉의 부활>은 소설입니다. 의료 보고서나 논문이 아니고요. 개인적으로 너무 의학적인 부분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닌가 싶더군요. 이야기로서의 재미는 다소 떨어집니다.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잘 알겠으나 의학미스터리를 기대하고 읽은 제게는 조금은 심심한 소설이었습니다. 물론 산부인과 의료 체제의 문제점 결코 쉬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리고 정말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고요(가이도 다케루도 그래서 이런 조금은 진지한 이야기를 소설로 발표한 것이 아닌가 싶네요). 따라서 이런 어려운 문제를 무조건 흥미 위주로만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야기로서의 재미 부분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 않을까요? 저는 논문을 읽고 싶은 것이 아니라 소설을 읽고 싶었는데, 이야기는 그런 부분은 그냥 넘어가네요. 물론 이 소설을 읽고 산부인과 의료 체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 현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만 있네요. 소설로서의 재미는 너무 '나몰라' 한 것이 아닌가 싶네요. 개인적으로 그런 부분에 있어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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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콘택트 Nobless Club 7
박치형 지음 / 로크미디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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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국내 작가가 쓴 전쟁소설입니다. 바로 잠수함 전쟁입니다. 잠수함만큼 흥미롭고 스릴 넘치는 소재도 없죠. 단 그만큼 쓰기도 힘들 것 같더군요. 전문성이 필요함에도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루트가 많지가 않으니까요. 국방에 관련된 문제는 그만큼 접근하기가 힘들고, 사실성 있게 다루기도 그래서 힘든 것 같아요. 암튼 그래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우선 작가는 수중음향을 공부한 분이시더군요. 잠수함과도 조금은 관련성이 있는 분야라 선택한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요즘도 무척 시끄러운 독도 문제를 다루고 있고요. 소설 속에 그려진 독도의 해저 자원을 둘러싼 전쟁이 허구의 가상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군요. 지금의 일본에서 행하고 있는 짓거리들을 보면요. 무엇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해군력이 얼마나 강할까요? 소설과는 별개로 확실히 심각한 문제이기는 합니다. 우선 이런 경각심을 일께워주고, 잠수함이라는 다루기 힘든 소재로 이야기를 만든 작가 분에게는 작은 박수를 보내고 싶네요.

우선 이 소설에서 무척 중요한 해저 자원, 바로 메탄하이드레이트(methane hydrate. 해저나 빙하 아래서 메탄과 물이 높은 압력으로 인해 얼어붙어 얼음 형태의 고체상 격자구조로 형성된 연료)는 네이버에서 검색을 해보니 전혀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아니더군요. 그 외에도 이런 저런 전문적인 용어들이 나오더군요. 그러나 잠수함 매니아(밀리터리 매니아) 분들은 허풍이 많이 심하다고 하네요. 저야 뭐 이런 쪽으로는 자세히 몰라서 뭐라 말하기 힘들지만, 일반 독자들에게는 크게 눈에 거슬리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모르는 분야니까, 이야기의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문제가 없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그렇다고 순전히 거짓으로 이야기를 꾸미면 그것도 문제이기는 하지만(이런 이야기의 전문성은 조금 필연적인 것 같기도 하고요), 첫 작품이고 접근하기가 조금 어려운 만큼(물론 조사를 치밀하게 하지 않은 이유도 있겠죠. 이런 분야의 장르소설은 그만큼 조사가 치밀해야 하는데 말이죠) 그냥 넘어가기로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문적인 분야를 제외하고) 이야기 자체의 구성의 허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네요.

이 소설을 보면 떠오르는 여러 가지 영화가 있습니다. 소재가 다르기는 하지만 강우석 감독의 <한반도>가 떠오르더군요. 사실 영화 <유령> 정도만 되도 그렇게 아쉽지는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한반도>라니. 그렇습니다. 무능한 대통령, 일본의 위협, 속수무책인 정부, 그리고 희생을 강요당하는 소수의 영웅. 상황(이야기)을 그런 식으로 몰아갑니다. 굉장히 위험하기도 하지만(국가를 위해 개인이 희생을 당하는 것을 조금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고방식), 굉장히 진부하고 식상하기도 합니다. 소설을 읽지 않고 이야기만 듣고도 그림이 대략적으로 그려지거든요. 잠수함과 독도, 메탄하이드레이트라는 소재만 새로울 뿐 기존의 이런 스타일의 이야기(거슬러 올라가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그렇죠)와 전혀 차별되는 점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그 점이 무척 아쉽더군요. 물론 잠수함이나 전쟁 뭐 이런 국가적 차원의 소재를 다룬 이야기는 한계가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일본과 미국, 혹은 북한을 상대로 전쟁을 하는 그런 소설은 결국 지거나(그런 이야기는 독자들도 싫어하겠죠), 이기는 거죠. 그렇다면 어떻게 이기느냐? 소수의 영웅이 거대한 적을 상대로 힘겹게 이겨내는 이야기가 역시나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요(이 소설 역시 그런 감동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형성을 탈피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우리나라의 전쟁소설은 이런 전형성을 탈피하지 못하는 한 앞으로의 장래는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소재만 새롭다고 해서 변화가 되는 것은 아니죠. 소재의 참신함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스토리텔링이 우선시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소수의 영웅 이야기가 아닌 그럴듯한 (참신한) 구라가 무척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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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함의 주파수
오츠 이치 지음, 채숙향 옮김 / 지식여행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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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쓸쓸함의 주파수>는 <GOTH> 이후 가도카와 쇼텐에서 출판한 단편집입니다. 보통 취미생활로 글을 쓴다는 오츠이치가 그 이전에 정해진 주제를 받아서(돈 때문에) 쓴 글로 조금은 억지로 쓴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GOTH>나 <ZOO>, <암흑동화> 같은 작품에 비해 미스터리소설(이나 공포소설)로서의 재미는 다소 부족합니다. 그래도 워낙 좋아하는 작가라서(요즘에는 오츠이치가 일본작가 베스트 3에 들어갈 정도로 좋더군요)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래도 역시나 오츠이치는 취미로 글을 쓰셨으면 좋겠네요. 뭐든지 자유롭게 쓰는 글이 좋은 글이 되는 것 같아요.

<쓸쓸함의 주파수>에는 '미래예보', '손을 잡은 도둑', '필름 속 그녀', '잃어버린 이야기' 이렇게 4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쓸쓸함의 주파수>의 주제는 소통, 쓸쓸함, 애절함이 아닐까 싶어요. 무서운 이야기보다는 조금은 슬프고, 아련한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니까 공포스럽고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기대하신 분들에게는 조금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네요. 물론 저 같이 오츠이치를 좋아하는 팬 분들에게는 이번 작품집이 오츠이치의 또 다른 면을 보고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작품일 수도 있고요. 그러나 역시 마지막의 짧고 강렬한 반전이 없는 것은 다소 아쉽네요(특히나 '잃어버린 이야기'라는 작품은 마지막에 뭔가 있을 것 같았는데, 쓸쓸하면서도 조금은 감동적이게 이야기가 마무리되네요).

'미래예보'는 미래를 예보할 수 있다는 한 친구에 의해서 원래부터 친하지는 않았지만 더 어색한 관계로 되어버린 남녀의 애잔한 러브스토리입니다. 한 친구의 미래예보에 의하면 이 둘은 부부가 되거나 아니면 둘 중 한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로에게 호감이 있음에도 그들은 서로에게 다가가지는 못합니다. 결국 현실에서의 그들의 사랑은 미완성으로 끝나지만, 그 이후에도 그들은 항상 함께하지 않을까 싶어요. 암튼 이런 애잔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츠이치의 경험이 반영된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로 남자 주인공(고이즈미)의 성격이나 프리터로 살아가는 삶,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이 작품 속에 녹아들어가 있습니다. 부유하는 젊은이들의 쓸쓸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이 (제게는) 많이 전해지더군요. 오히려 잔잔한 러브스토리라는 기둥 줄기보다는 이런 곁가지 이야기가 제게는 더 많이 와 닿더군요.

'손을 잡은 도둑'은 가장 ‘오츠이치’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우선 상황 자체가 그렇습니다. 구멍 뚫린 벽을 사이에 두고 주인과 도둑이 손을 맞잡고 있습니다. 도둑은 방에 있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찾아야 하고, 여자 아이는 신고를 하거나 그 도둑에게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이러니한 상황이죠. 저는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오츠이치의 재능이 가장 빛을 발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그런데 역시나 마지막 반전은 없습니다(보통 마지막은 앞의 상황을 뒤집는 반전이 나오는 것이 그의 매력인데, 그 점은 아쉽더군요). 그냥 흐뭇하게 웃으면서 책장을 덮을 수 있는 그런 결말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런 흐뭇함도 뭐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요.

'필름 속 소녀'는 호러소설입니다. 오츠이치는 미스터리소설 뿐만 아니라 호러소설에도 재능이 참 많은 작가죠. 물론 따로따로가 아니라 미스터리와 호러장르가 뒤섞인 그런 이야기들이 많죠. 무언가 말하고 싶은. 억울하게 죽은 소녀가 필름을 돌릴 때마다 필름 속에서 점점 몸을 틉니다. 과연 그녀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요? 7년 전 무슨 사건이 있었던 것일까요? 암튼 나름대로 끔찍하면서 애잔한 이야기입니다.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작품이었습니다.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남편)이 교토사고로 오른팔만 남긴 채 모든 몸의 기능이 마비가 됩니다. 그러나 의식만은 살아남습니다. 청각, 시각, 촉각 등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오른팔의 촉각의 기능만 남긴 채 말이죠. 정말 엄청나게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이죠. 시간의 흐름도, 사랑하는 딸의 얼굴도, 창가 사이로 비치는 햇살도, 식욕도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의식은 깨어 있어 그런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계속 상기시킵니다. 의식은 깨어 있으나 자신의 의사는 전달할 수 없고, 또한 상대방의 말도 들을 수 없는 그런 극한 상황. 아내의 병문안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딸이 성장해서 말을 하고 자신의 오른팔에서 피아노를 치는 것도 느끼게 됩니다. 긴 시간이 흐른 후 아내와 딸은 더 이상 방문하지 않습니다. 이미 죽었는지도 모르죠. 그럼에도 나의 의식은 계속 깨어 있습니다. 10년, 아니 100년 후에도 그는 살아남을까요? 개인적으로는 무척 무서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공포의 감정이 부부 사이의 정, 부녀간의 정으로 희석되는 느낌이라 강렬하지는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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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순간
빌 밸린저 지음, 이다혜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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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목이 거의 잘려진 상태로 간신히 목숨을 구한 후 기억을 잃어버린 채 병원에서 눈을 뜨게 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사는지, 왜 목은 잘렸는지 기억이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제부터 빅터 퍼시픽이라 불리는 이 남자의 자아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똑같은 시간과 똑같은 장소에서 '빅터 퍼시픽'이라는 남자가 시체로 발견되어 경찰의 시체안치소로 옮겨집니다. 동일인물인데 어떻게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시체로 발견되기도 할까요? 도대체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는 누구이고, 시체로 발견된 남자는 누구인가? 암튼 이제부터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교차 서술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추리소설을 읽어보신 분들에게는 아마 신선하고 충격적인 반전은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미야베 미유키 <레벨 7>이 이런 이야기 구조를 띄고 있죠(미야베 미유키가 빌 S. 밸린저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더군요. <쓸쓸한 사냥꾼>에서는 <이와 손톱>에 대한 노골적인 작품 홍보도 하거든요^^). 그리고 <기나긴 순간> 이전에 소개된 <이와 손톱>도 그렇고요. 그 외에도 빌 S. 밸린저에게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많지 않을까 싶어요(교차 서술 미스터리의 최초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참고로 이 작품은 1957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암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교차 서술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소설을 읽어 본 적이 없는 분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지 않을까 싶어요. 영화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소설만의 매력이 있거든요. 물론 이 소설의 이런 충격적인 반전을 알고 있는 분들에게도 역시 재미있습니다. 교차 서술 미스터리가 이 소설의 전부는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이 소설만의 매력은? 우선 읽기 편한 문장이 좋더군요. 분명히 이야기 구조는 복잡한데,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은 무척 단순명료합니다. 그냥 작가가 쓴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깔끔한 문장이 저는 무척 좋더군요. 그리고 빅터 퍼시픽이라는 인물에 대한 묘사가 참 좋습니다. 기억을 잃어버린 한 남자가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또 다른 세계를 알게 되는 그 장면이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정말 그 남자에게는 기나긴 순간이고, 또한 환상의 세계가 아닌 남자와 여자의 세계를 최초로 경험하게 되니까요. 그런 빅터 퍼시픽이라는 인간의 내면의 황폐함이 무언가로 점점 채워지는 그런 과정이 무척 좋았습니다.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들. 그리고 마지막의 묵직한 한방!! 깔끔하게 이야기를 마무리 짓습니다. 암튼 소설 전체가 군더더기가 없고, 박진감도 넘치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도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무엇보다 기억을 잃어버린 한 인간에 대한 빌 S. 밸린저옹의 깊은 이해가 마음에 와 닿아서 좋더군요. 회환의 감정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쓱 빠지는 느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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