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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벳의 악마
존 딕슨 카 지음, 유소영 옮김, 장경현 감수 / 고려원북스 / 2009년 4월
평점 :
"1675년 6월 10일 바로 이 저택에서 한 사람이 독으로 죽었어. 느리고 잔인한 살인이었지."(p.8)
1925년, 58세의 역사학 교수는 저택에서 벌어지는 이런 '느리고 잔인한 죽음'을 막기 위해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납니다. 이유 불문곡직하고 노교수는 이렇게 과거 영국으로 타임슬림을 합니다(참고로 소설은 1951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시기상으로는 <세 개의 관>이나 <화형법정> 등의 밀실트릭 추리소설 이후에 쓰인 작품). 아, 작가에 대한 설명이 늦었네요. 이 작품은 바로 밀실트릭의 거장 존 딕슨 카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존 딕슨 카의 역사 미스터리소설이기도 하고요(또한 존 딕슨 카가 좋아했던 작품이며, 베스트 목록에 오른 작품이기도 하고요). 사실 국내에 소개된 존 딕슨 카의 소설은 대부분 읽었고, 또한 서양 추리작가 중에서도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보다 더 좋아하는 작가임에도 그가 역사 미스터리의 선구자(창시자)라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네요. 역시나 우리나라에서는 '존 딕슨 카=밀실트릭'의 공식이 강한 것 같아요. 암튼 좋아하는 작가의 이런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즐거운 일이 아닌가 싶네요.
오컬트, 괴기, 불가능 살인, 밀실트릭 등이 존 딕슨 카의 본격 추리소설의 대표적인 특징들이죠. 그러니까 조금은 비현실적인 설정과 상황들이 많다고 할까요? 그러니 이번 작품 <벨벳의 악마>의 상황들도 존 딕슨 카의 기존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전혀 낯설거나 그러지는 않죠. 그럼에도 확실히 이번 작품의 SF적인 설정과 상황들은 조금 당황스럽기는 합니다. 악마와의 거래를 통한 과거로의 시간여행, 확실히 조금 낯설잖아요? 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독살사건의 범인을 찾고, 살인을 막는 것. 이 부분은 지극히 '존 딕슨 카'다운 미스터리한 설정이죠. 독자들의 궁금증과 기대감을 극대화시키는 방법. 과연 독살사건의 범인은 누구일까? 궁금증을 안고 이야기를 읽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이야기는 독살사건의 범인에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밀실트릭 미스터리 소설도 아니고요(물론 마지막에 이 살인사건에 대한 깜짝 놀랄만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기는 합니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는 익숙하고 식상한 설정이기는 하지만요. SF소설에서 흔히 발견되는 그런 소소한 설정들). 17세기 중반 영국의 정치, 문화, 생활, 연애 등의 대한 광범위하면서 축약된 형태의 보고서(?)입니다.
사실 소설을 읽기 전 뒷부분에 있는 해설을 읽는 것에 대해서 무척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작품에 대한 선입견이 생길 수 있어서 말이죠. 특히나 추리소설은 더더욱 그런 것 같아요. 존 딕슨 카의 이번 작품 역시 해설은 책을 다 읽은 후에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만큼은 존 딕슨 카의 주석과 추리소설 평론가 장경현 씨의 해설을 먼저 읽기를 권합니다. 단, 17세기 중반 영국의 정치, 문화, 생활 등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패스해도 상관은 없지만요. 왕정복고, 청교도혁명, 지방당, 궁정당, 찰스 2세, 섀프츠베리, 교황과 왕권, 크롬웰, 가톨릭 음모 사건 등 세계사 시간에 잠깐 배운(암기가 대부분이었지만) 정보들이 나오는데, 어렵더군요. 그 시대에 대한 배경 지식이 전혀 없으니 소설이 조금 어렵더군요(그렇습니다. 세계사에 대해 무척 무지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소설은 독살사건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한 노교수 펜튼이 닉 경이 되어 정치적인 사건과 음모에 휘말리면서 헤쳐 나가고 사랑하는 여인과 로맨스를 펼치는 그런 모험담이 주입니다. 그런 사건과 모험에서 드러나는 그 당시의 문화들을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한 그런 작품입니다. 따라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으면 조금 즐기기에 한계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몰라도 작품을 읽는데 크게 상관은 없지만, 불편하기는 하더군요. 무엇보다 재미있는 것은 그 당시 문화에 대한 방대한 정보들입니다. 검술, 의상, 식사, 관습, 화법 등에 대한 존 딕슨 카의 자료 조사는 정말 대단하더군요. 물론 눈으로는 보이지만, 가슴으로 느껴지지는 않는 단점은 있지만요. 특히나 현대(1920년대)에 사용하는 화법과 과거(1675년)에 사용하는 화법의 차이를 잘 모르겠습니다(언어적인 차이가 크겠죠. 번역된 언어로 느끼기에 한계도 있을 테고요). 또한 도둑이 사용하는 은어(실제로 표기까지 되어 있습니다)도 차이를 잘 모르겠고요. 그 외에도 자잘한 생활/문화 부분에서 국내독자가 공감하기에는 조금 낯선 유머나 그런 것들이 많습니다. 이 점은 무척 아쉽더군요. 다른 나라의 역사와 문화, 그것도 과거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소화하기에는 확실히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우스운 상황 같기는 한데, 웃음은 나오지 않는 아이러니가 안타깝네요.
존 딕슨 카의 <벨벳의 악마>는 역사 미스터리입니다. 존 딕슨 카의 밀실트릭은 잊으세요. 존 딕슨 카의 기존의 밀실트릭을 생각하고 이 작품을 읽는다면 조금 후회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 작품은 밀실트릭의 존 딕슨 카 팬들보다는 역사 미스터리소설의(<다빈치 코드>나 <장미의 이름>) 팬들이 더 좋아할 만한 작품이지 않을까 싶네요. 특히나 17세기 중반의 영국 역사에 관심이 많은 그런 분들. 물론 존 딕슨 카의 팬들도 재미있게 읽을 만한 요소가 많습니다('존 딕슨 카=밀실트릭'이라는 선입견만 버린 다면요). 기드온 펠 박사(존 딕슨 카의 밀실트릭 추리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탐정)처럼 조용한 성격을 기대했는데, 펜튼 교수 장난 아니게 육체적인 활동을 좋아하네요. 싸움하는 장면이 무척 많이 등장합니다. 말도 거칠게 하고요. 사고도 많이 치고 정치적인 성향도 강하며, 암튼 주인공 캐릭터가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