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해부
로렌스 골드스톤 지음, 임옥희 옮김 / 레드박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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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수천 명의 목숨이 달려 있는 문제란 말일세. 문자 그대로 수천 명의 목숨 말이야. 그가 과거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네. 그가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이지가 관건이니까. 그는 인류 역사상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의학적 진보를 이룰 사람이네."

 

"수천 명의 목숨이요……. 그러면 한 사람의 목숨은 어쩌죠?"



부제 '인류를 구원한 천재 외과의사의 두 얼굴'. 원제 <The Anatomy of Deception>. 의학, 과학, 기술, 예술 등의 분야에서 눈에 띄는 천재들은 있게 마련이죠. 사실 다른 분야는 위의 대화가 불편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의학에 있어서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다수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한 개인의 목숨을 소홀이 다루어도 될까? 의학 기술의 진보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평범한 사람의 목숨은 어찌돼도 상관없지 않을까? 로렌스 골드스톤의 <죽음의 해부>는 그런 과학과 (생명) 윤리 사이의 딜레마를 파헤친 (리얼) 의학 팩션 미스터리입니다. 해부학, 마취제, 임신중절수술, 약물중독, 과학과 종교의 대립(처음에는 해부학이 사람들의 관심과 공감을 이끌지 못했죠. 특히나 종교계의 반발이 심했던 것 같아요. 신이 주신 몸을 인간인 의사들이 마음대로 파헤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죠) 등 (의학) 미스터리 팬 분들에게 무척 호기심이 날만한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수술용 고무장갑의 개발 및 사용, 지금 저희가 사용하고 있는 아스피린의 역사 등 무척 흥미로운 의학적 사실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토머스 에이킨스, <에그뉴 박사의 임상강의 The Agnew Clinic>, 1889, 펜실베니아 대학

우선 흥미로운 그림부터 감상을 하시죠. 책의 표지의 그림은 토머스 에이킨스의 <그로그 박사의 임상강의(1875)>입니다. 위의 그림은 설명되어 있듯이 <에그뉴 박사의 임상강의>이고요. 실존 인물의 실존 그림입니다. 위의 두 그림을 비교하는 재미도 꽤 쏠쏠합니다. 1875년 당시만 해도 의사들이 코트를 입고 수술을 했는데, 1889년에는 수술복을 입고 수술을 하죠. 토머스 에이킨스는 소설 속에서도 등장합니다. 누드 파문을 일으켜서 교수직에서 해임되기도 하였더군요(자신의 정면 누드사진을 찍기도 했다고 하니). 누드는 예술일까요? 외설일까요? 암튼 그 당시에는 꽤 파격적이었을 누드에 대한 이야기도 양념으로 살짝 나옵니다. 재미있습니다. 이런 (흥미 위주의) 역사적 사실은 언제나 재미있는 것 같아요.

이야기의 배경은 19세기 후반, 정확하게는 1889년의 미국 의학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해부학 실습 도중 젊고 촉망받는 의사인 캐롤은 아름다운 소녀의 시체를 발견하게 됩니다. 실습의 주체자인 현대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오슬러와 동료 의사 터크는 시체를 보자마자 놀라운 표정을 보입니다. 오슬러는 수업을 거부하기도 하고요. 그 후 동료 교사 터크가 시체로 발견되는 사건을 목격하게 되고, 캐롤은 이제 이 죽음 뒤에 숨겨진 음모를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제게는 새로운) 의학적 지식이 쏟아져 나오느라 지루하지는 않더군요. 마취제의 효과를 검증하기 위하여 스스로 약물중독자가 되어버린 천재 외과의사 윌리엄 홀스테드(실존 인물)의 이야기도 무척 흥미진진하고, 혼외임신 때문에 임신중절 수술을 하는 도중에 벌어지는 더러운 뒷거래들, 비위생적이고 막무가내 식으로 진행되는 수술 장면들(제왕절개의 경우 치사율이 80%였다고 합니다. 이건 뭐 죽기 위해 하는 수술이나 마찬가지네요), 과학과 윤리의 대립, 과학과 종교의 대립, 사람의 목숨을 놓고 벌어지는 다양한 인간들의 추악한 얼굴과 진신들(각자의 이익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고, 의술을 이용하고, 명예와 부를 이용하는 인간군상들의 얼굴들), 부유층과 뒷골목의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리고 지금 현대의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실존 의사들의 등장 등등 정말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습니다. 여태까지 의학을 다룬 팩션 소설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 면에서는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대부분의 팩션 소설들이 (왕 중심의) 역사를 다루고 있잖아요. 그리고 작가의 프로필에서 알 수 있듯이 흥미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리얼 다큐멘터리 의학 팩션'이라는 설명이 정말 딱 들어맞는 작품입니다. 단지 조금 아쉽다면 (의학 미스터리 소설적인 측면에서) 사건 해결 과정에서 오는 긴장감이 조금 부족하더군요. 극적인 사건도 없고, 범인의 추적 과정이 조금 평이하게 진행됩니다. 따라서 반전이나 충격을 기대하기는 힘들고요(물론 반전이 있어야 좋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오락적인 요소가 조금 아쉽더군요. 그래도 확실히 흥미로운,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무척 많습니다. 의학 스릴러, 의학 미스터리, 의학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이 읽으시면 좋으실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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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없는 살인의 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윤성원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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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본의 대표적인 추리소설 작가. 최고의 작품과 보통의 작품은 있으나 최하의 작품은 없는, 고른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주는, 게다가 빠른 집필 능력(20년이 넘는 작가 생활 동안 60여 편에 달하는 작품 발표)과 흡입력과 가독성까지 최고.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그런 작가의 단편집이 국내에 소개가 되었습니다. 1990년에 발표된 단편집 《범인 없는 살인의 밤》. 사실 굉장히 좋아하는 작가이기는 하나 수준 미달의 작품도 마구 소개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고, 게다가 1990년에 발표된 소설들. 사실 20여 년 전의 추리소설이라면 조금 식상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는 있었습니다. 사실 근래에 조금 그런 작품들이 없지 않아 있었고요. 이 소설은 그냥 추천부터 날립니다. 우려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한 일곱 편의 단편들이 실려 있습니다.

국내에 소개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이 아닌) 단편집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뉩니다. 취향에 따라 골라 드세요. 우선 히가시노 게이고의 프로필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블랙 유머 소설집입니다. 바로 <흑소소설>, <독소소설>, <괴소소설>입니다. 제목 그대로 어둡고, 독하며, 괴기스러운 유머들이 아주 작렬합니다. 블랙 유머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추천. 다음으로 유가와와 구사나기 콤비가 등장하는 시리즈입니다. 바로 <예지몽>과 <탐정 갈릴레오>(참고로 장편으로는 나오키상을 수상한 <용의자 X의 헌신>이 있습니다). 이 시리즈의 특징은 초자연적인 현상과 관련된 사건들을 과학적인 추리로 풀어낸다는 점입니다. 또한 두 콤비의 개그도 유쾌하고요. 유머가 깃든 트릭 위주의 추리소설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추천. 마지막으로 이번 단편집 <범인 없는 살인의 밤>입니다. 이 단편집은 (장편에 비유하자면) <백야행>, <악의> 등의 사회파 미스터리 계열에 속합니다. 물론 트릭이나 반전이 없으면 히가시노 게이고가 아니죠. 20년 전에 소설이라고요? 읽지 않으셨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표제작이자 마지막에 실린 단편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의 트릭과 반전은 정말 훌륭합니다. <작은 고의(故意)에 관한 이야기>는 학원 미스터리로 <방과 후>나 <동급생>의 작품들이 떠오릅니다. 사회파 미스터리 계열의 추리소설이기는 하지만 결코 트릭이나 반전에 소홀하지 않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 대표작들을 응축시켜 놓았다고 할까요? 작품의 밀도가 매우 높습니다.

<범인 없는 살인의 밤>에는 <작은 고의(故意)에 관한 이야기>, <어둠 속의 두 사람>, <춤추는 아이>, <끝없는 밤>, <하얀 흉기>, <굿바이, 코치>, <범인 없는 살인의 밤>의 총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소재 자체가 독자의 궁금증을 자아낼 만큼 무척 매력적입니다. <작은 고의(故意)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학교 옥상에서 우등생이 자살을 합니다. 왜? 친구가 사건의 내막을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은퇴한 양궁 선수가 자살하면서 남긴 비디오 유서에 남긴 비밀은? 등등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재미가 없습니다. 인간의 악의, 사건의 의외성, 선의가 악의가 되는 아이러니, 반전과 트릭, 반전의 반전(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의 특징이죠. 간단하지 않은 사건의 해결도 다시 뒤집는 치밀함), 사건 해결 뒤에 오는 씁쓸함. 이번 단편집 <범인 없는 살인의 밤>에 대해서는 "사회파 미스터리와 본격 미스터리의 절묘한 조화"라는 간략한 평을 내리고 싶네요. 이번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에서 정말) 의외의 수확이었습니다(사실 기대를 많이 안 했거든요). 추천 한방 과감하게 날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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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 플랜 모중석 스릴러 클럽 19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 / 비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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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에 세종서적에서 출간된 스콧 스미스의 데뷔작 <심플 플랜>이 비채의 모중석스릴러클럽에서 재출간되었습니다. 스콧 스미스는 작년에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 <루인스(The Ruins)>의 원작 <폐허>의 작가이기도 합니다. 13년 동안 단 두 편의 작품으로 스릴러의 거장이라는 소리를 들었죠(스티븐 킹이 참으로 좋아하는 후배 작가이기도 하고요. "일단 읽어라!" - 스티븐 킹). <폐허>와 <심플 플랜>을 일단 읽어보세요. 진정한 스릴러의 매력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이블데드>, <스파이더맨>의 샘 레이미가 만든 영화 <심플 플랜>도 꼭 보세요. 영화 정말 재미있습니다. 이 영화와 함께 코엔 형제의 <파고>도 함께 보시면 좋고요.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자기 영혼을 판 사람 같은 겁니다. 나쁜 짓 하나를 했는데, 그것 때문에 더 나쁜 일이 일어나고, 그렇게 계속 불어나고 불어나죠. 그래서 결국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기가 밑바닥입니다." (pp.509-510)

눈 덮인 산의 경비행기 안에서 현금 4백 40만 달러를 발견합니다. 범죄의 냄새가 나는 돈. 언론이나 경찰에서는 이 돈에 대한 얘기도 전혀 없습니다. 심지어 돈에 표시조차 되어 있지 않습니다. 돈을 발견한 얼치기 세 명(주인공 '행크', 그의 형 '제이콥', 제이콥의 친구 '루'. 그런데 사실 얼치기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커다란 돈 앞에서는 평범한 사람도 그냥 얼치기가 되는 것 같아요)은 이 돈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격 급한 루는 자기 몫의 돈을 계속 달라고 하고, 그냥 발견한 돈을 6개월 정도 숨겼다가 쓰면 되는 간단한 계획은 점점 걷잡을 수 없게 복잡하게 흘러갑니다. 큰돈에 대한 두려움, 서로에 대한 의심, 범죄를 들키지 않으려고 하는 치밀함에서 오는 압박감, 그로 인해 대수롭지 않게 저지르는 살인, 점점 더 자신들의(인간으로서의) 본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결국 돈은 그들의 행복을 보장하는 도구가 아닌 그들을 점점 파멸로 몰아갑니다. 이러한 과정이 굉장히 무미건조하게, 때로는 공허하게, 그리고 빠르게 진행됩니다.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끝나버리는 악몽과도 같은 심플 플랜,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인간의 나약함, 두려움, 탐욕, 죄책감, 불신 등의 인간 심연에 자리 잡고 있는 어두운 본성을 이렇게 단순한 이야기 구조 속에 담기가 쉽지 않을 텐데도 스콧 스미스는 정말 멋지게 해 냅니다. 그의 데뷔작이 극찬을 받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주요 등장인물 4명, 한정된 장소, 그리고 돈을 놓고 벌어지는 주인공들의 다툼과 그로 인한 사건들. 돈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불태우게 될 것인가? 이들은 상대방을 믿고 끝까지 이 단순한 계획을 지킬 수 있을까? 불필요한 묘사 없이 사건이 빠르게 흘러갑니다. 그리고 이 단순한 계획은 점점 복잡해지고 거대해져서 이제는 손을 뗄 수도 없을 정도로 되어버립니다. 쉽게 읽히고 쉽게 이해되며 그러면서 재미있습니다. 과연 이들은 4백 40만 달러를 가질 수 있을까요? 인간의 욕심과 탐욕의 끝은 어디일까요? 단순함 뒤에 숨은 거대한 불행은 그들이 치러야 할 대가치고는 너무 크지 않았나 싶네요. 그래서 이 바보들의 돈을 놓고 벌어지는 한바탕의 소동극은 씁쓸함만 남긴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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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벳의 악마
존 딕슨 카 지음, 유소영 옮김, 장경현 감수 / 고려원북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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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5년 6월 10일 바로 이 저택에서 한 사람이 독으로 죽었어. 느리고 잔인한 살인이었지."(p.8)

1925년, 58세의 역사학 교수는 저택에서 벌어지는 이런 '느리고 잔인한 죽음'을 막기 위해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납니다. 이유 불문곡직하고 노교수는 이렇게 과거 영국으로 타임슬림을 합니다(참고로 소설은 1951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시기상으로는 <세 개의 관>이나 <화형법정> 등의 밀실트릭 추리소설 이후에 쓰인 작품). 아, 작가에 대한 설명이 늦었네요. 이 작품은 바로 밀실트릭의 거장 존 딕슨 카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존 딕슨 카의 역사 미스터리소설이기도 하고요(또한 존 딕슨 카가 좋아했던 작품이며, 베스트 목록에 오른 작품이기도 하고요). 사실 국내에 소개된 존 딕슨 카의 소설은 대부분 읽었고, 또한 서양 추리작가 중에서도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보다 더 좋아하는 작가임에도 그가 역사 미스터리의 선구자(창시자)라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네요. 역시나 우리나라에서는 '존 딕슨 카=밀실트릭'의 공식이 강한 것 같아요. 암튼 좋아하는 작가의 이런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즐거운 일이 아닌가 싶네요.

오컬트, 괴기, 불가능 살인, 밀실트릭 등이 존 딕슨 카의 본격 추리소설의 대표적인 특징들이죠. 그러니까 조금은 비현실적인 설정과 상황들이 많다고 할까요? 그러니 이번 작품 <벨벳의 악마>의 상황들도 존 딕슨 카의 기존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전혀 낯설거나 그러지는 않죠. 그럼에도 확실히 이번 작품의 SF적인 설정과 상황들은 조금 당황스럽기는 합니다. 악마와의 거래를 통한 과거로의 시간여행, 확실히 조금 낯설잖아요? 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독살사건의 범인을 찾고, 살인을 막는 것. 이 부분은 지극히 '존 딕슨 카'다운 미스터리한 설정이죠. 독자들의 궁금증과 기대감을 극대화시키는 방법. 과연 독살사건의 범인은 누구일까? 궁금증을 안고 이야기를 읽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이야기는 독살사건의 범인에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밀실트릭 미스터리 소설도 아니고요(물론 마지막에 이 살인사건에 대한 깜짝 놀랄만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기는 합니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는 익숙하고 식상한 설정이기는 하지만요. SF소설에서 흔히 발견되는 그런 소소한 설정들). 17세기 중반 영국의 정치, 문화, 생활, 연애 등의 대한 광범위하면서 축약된 형태의 보고서(?)입니다.

사실 소설을 읽기 전 뒷부분에 있는 해설을 읽는 것에 대해서 무척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작품에 대한 선입견이 생길 수 있어서 말이죠. 특히나 추리소설은 더더욱 그런 것 같아요. 존 딕슨 카의 이번 작품 역시 해설은 책을 다 읽은 후에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만큼은 존 딕슨 카의 주석과 추리소설 평론가 장경현 씨의 해설을 먼저 읽기를 권합니다. 단, 17세기 중반 영국의 정치, 문화, 생활 등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패스해도 상관은 없지만요. 왕정복고, 청교도혁명, 지방당, 궁정당, 찰스 2세, 섀프츠베리, 교황과 왕권, 크롬웰, 가톨릭 음모 사건 등 세계사 시간에 잠깐 배운(암기가 대부분이었지만) 정보들이 나오는데, 어렵더군요. 그 시대에 대한 배경 지식이 전혀 없으니 소설이 조금 어렵더군요(그렇습니다. 세계사에 대해 무척 무지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소설은 독살사건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한 노교수 펜튼이 닉 경이 되어 정치적인 사건과 음모에 휘말리면서 헤쳐 나가고 사랑하는 여인과 로맨스를 펼치는 그런 모험담이 주입니다. 그런 사건과 모험에서 드러나는 그 당시의 문화들을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한 그런 작품입니다. 따라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으면 조금 즐기기에 한계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몰라도 작품을 읽는데 크게 상관은 없지만, 불편하기는 하더군요. 무엇보다 재미있는 것은 그 당시 문화에 대한 방대한 정보들입니다. 검술, 의상, 식사, 관습, 화법 등에 대한 존 딕슨 카의 자료 조사는 정말 대단하더군요. 물론 눈으로는 보이지만, 가슴으로 느껴지지는 않는 단점은 있지만요. 특히나 현대(1920년대)에 사용하는 화법과 과거(1675년)에 사용하는 화법의 차이를 잘 모르겠습니다(언어적인 차이가 크겠죠. 번역된 언어로 느끼기에 한계도 있을 테고요). 또한 도둑이 사용하는 은어(실제로 표기까지 되어 있습니다)도 차이를 잘 모르겠고요. 그 외에도 자잘한 생활/문화 부분에서 국내독자가 공감하기에는 조금 낯선 유머나 그런 것들이 많습니다. 이 점은 무척 아쉽더군요. 다른 나라의 역사와 문화, 그것도 과거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소화하기에는 확실히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우스운 상황 같기는 한데, 웃음은 나오지 않는 아이러니가 안타깝네요.

존 딕슨 카의 <벨벳의 악마>는 역사 미스터리입니다. 존 딕슨 카의 밀실트릭은 잊으세요. 존 딕슨 카의 기존의 밀실트릭을 생각하고 이 작품을 읽는다면 조금 후회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 작품은 밀실트릭의 존 딕슨 카 팬들보다는 역사 미스터리소설의(<다빈치 코드>나 <장미의 이름>) 팬들이 더 좋아할 만한 작품이지 않을까 싶네요. 특히나 17세기 중반의 영국 역사에 관심이 많은 그런 분들. 물론 존 딕슨 카의 팬들도 재미있게 읽을 만한 요소가 많습니다('존 딕슨 카=밀실트릭'이라는 선입견만 버린 다면요). 기드온 펠 박사(존 딕슨 카의 밀실트릭 추리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탐정)처럼 조용한 성격을 기대했는데, 펜튼 교수 장난 아니게 육체적인 활동을 좋아하네요. 싸움하는 장면이 무척 많이 등장합니다. 말도 거칠게 하고요. 사고도 많이 치고 정치적인 성향도 강하며, 암튼 주인공 캐릭터가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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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습의사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6-2 리졸리 & 아일스 시리즈 2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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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쿡 이후 이렇게 흥미진진한 의학 스릴러는 테스 게리첸이 처음이지 않나 싶어요. 사실 의학 스릴러 소설이 유행이 지나서인지 국내에 많이 소개되고 있지도 않은 현실이고요. <외과의사>의 후속 <견습의사>를 뒤늦게 읽었습니다. <외과의사>에 비해 충격적인 쇼크는 조금 덜하지만, 도덕/윤리적인 측면에서는 더욱 더 충격적이네요. <외과의사>에서 외과의사로 불리는 앤드루 캐프라는 여성의 배를 갈라 자궁을 척출해 살해한 극악무도한 살인마였죠. 미마취 상태에서 배를 갈라 자궁을 척출한다는 것은 고통보다는 충격이 더욱 큰 무시무시한 살해 기술이 아닐까 싶어요. <견습의사>는 그만큼 잔인하지는 않지만, 그 살해 과정이 무척 비윤리적입니다.

<견습의사>에서는 <외과의사>의 외과 의사만큼이나 독특한 살인마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지배하고 싶어 하는 바로 '지배자'가 등장합니다. 또한 시간(屍姦, 시체와의 성교)을 즐기기도 하고요(Necrophilia, 시체 성교 애호증이라 불리죠). 여자를 죽인 후 섹스를 통해 쾌락을 느끼는 종족입니다. 또한 관객 앞에서 섹스를 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남편이 보는 앞에서 그의 아내와 섹스를 합니다. 살해 기술은 외과의사에 비해 떨어지지만 그 과정은 꽤나 충격적이고 무시무시하죠. 그러니까 묘사되는 잔인함은 덜하지만 상상을 통해 그려지는 모습은 꽤나 잔인합니다. 암튼 <견습의사>의 매력은 바로 이 비윤리적인 살인 쾌락에서 오는 섬뜩함, 그리고 충격이 아닐까 싶네요.  


<외과의사>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쳤던 외과의사가 다시 등장합니다. 교도소에서 의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탈출을 합니다. 외과의사와 지배자의 만남, 피를 나눈 형제. 그들의 더욱더 치밀하고 잔인한 살해 행각이 벌어집니다. 관객이 필요한 지배자와 관객이 되고픈 외과의사, 스승과 제자 사이의 친밀감. 필요충분조건이 해결되는 셈이죠. 외과의사의 관점에서 서술되는 이야기는 (보통은 여형사 리졸리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정말 이 살인마가 얼마나 끔찍하고 영리한지 보여주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 둘의 결합은 더욱더 소름이 끼칩니다.

<외과의사>의 토머스 무어 형사와 캐서리 코델 박사가 은퇴(이 시리즈에서)를 합니다. 여형사 리졸리와 FBI 요원 게이브리얼 딘, 뉴턴 경찰 빈스 코삭, 그리고 여자 법의관 미우라 아일스 박사가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킵니다(법의관 마우라 박사는 <바디 더블>에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사건의 주요 희생자로 등장하죠). 리졸리 형사와 딘 FBI 요원의 대립과 경쟁, 사랑도 꽤나 볼만합니다. 특히 리졸리 형사의 내면에 대한 묘사가 전편 <외과의사>에 비해 풍부하게 묘사되어 그녀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남성 조직에서 뒤쳐지기 싫은 여형사 리졸리(그리고 외과의사에게 크나큰 상처를 입었던 트라우마까지)의 고군분투 기대하셔도 좋을 듯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법의관 마우라 박사를 무척 좋아합니다. '죽은 자들의 여왕'이라 불리는 얼음여왕, 범죄 관련 사장자의 시체 검사를 통해 여러 가지 단서를 알아내는 재능은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정말 매력적인 인물인데, 아쉽게도 이번 작품에서는 그다지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지는 않네요.

오래 전부터 과학수사를 활용한 범죄소설은 인기가 많았죠. 의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한 과학소설도 역시나 그렇고요. 테스 게리첸은 전직 의사출신입니다. 상당한 의학적 지식들이 나옵니다. 그런 의학적 지식과 과학적 기법들을 기반으로 한 형사들의 수사는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일반 독자로서는 전혀 생소한 것들이니까요. 이러한 점도 이 소설의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극악무도한 연쇄살인마 지배자의 과거를 파헤쳐 올라가면서 드러나는 추악한 진실들(물론 지배자의 살인 동기에 대해 그럴 듯한 이유를 찾는 것은 아닙니다. 그 자식은 그냥 잔인한 살인마입니다), 엔딩의 이러한 결말도 그럴듯하고요. 단, 외과의사와 지배자의 마지막 발악이 없다는 점이 조금 아쉬울 뿐. 보통은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면서 살인마가 잡히는데, 이 소설은 조금 싱겁게 살인마들이 잡힙니다. 그래도 마지막 외과의사의 대사는 참으로 서늘합니다. 집념이라고 할까요? 결코 포기하지 않는 외과의사의 집념과 열정, 아무리 살인마라고는 하지만 그 점에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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