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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해부
로렌스 골드스톤 지음, 임옥희 옮김 / 레드박스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수천 명의 목숨이 달려 있는 문제란 말일세. 문자 그대로 수천 명의 목숨 말이야. 그가 과거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네. 그가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이지가 관건이니까. 그는 인류 역사상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의학적 진보를 이룰 사람이네."
"수천 명의 목숨이요……. 그러면 한 사람의 목숨은 어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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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인류를 구원한 천재 외과의사의 두 얼굴'. 원제 <The Anatomy of Deception>. 의학, 과학, 기술, 예술 등의 분야에서 눈에 띄는 천재들은 있게 마련이죠. 사실 다른 분야는 위의 대화가 불편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의학에 있어서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다수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한 개인의 목숨을 소홀이 다루어도 될까? 의학 기술의 진보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평범한 사람의 목숨은 어찌돼도 상관없지 않을까? 로렌스 골드스톤의 <죽음의 해부>는 그런 과학과 (생명) 윤리 사이의 딜레마를 파헤친 (리얼) 의학 팩션 미스터리입니다. 해부학, 마취제, 임신중절수술, 약물중독, 과학과 종교의 대립(처음에는 해부학이 사람들의 관심과 공감을 이끌지 못했죠. 특히나 종교계의 반발이 심했던 것 같아요. 신이 주신 몸을 인간인 의사들이 마음대로 파헤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죠) 등 (의학) 미스터리 팬 분들에게 무척 호기심이 날만한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수술용 고무장갑의 개발 및 사용, 지금 저희가 사용하고 있는 아스피린의 역사 등 무척 흥미로운 의학적 사실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토머스 에이킨스, <에그뉴 박사의 임상강의 The Agnew Clinic>, 1889, 펜실베니아 대학
우선 흥미로운 그림부터 감상을 하시죠. 책의 표지의 그림은 토머스 에이킨스의 <그로그 박사의 임상강의(1875)>입니다. 위의 그림은 설명되어 있듯이 <에그뉴 박사의 임상강의>이고요. 실존 인물의 실존 그림입니다. 위의 두 그림을 비교하는 재미도 꽤 쏠쏠합니다. 1875년 당시만 해도 의사들이 코트를 입고 수술을 했는데, 1889년에는 수술복을 입고 수술을 하죠. 토머스 에이킨스는 소설 속에서도 등장합니다. 누드 파문을 일으켜서 교수직에서 해임되기도 하였더군요(자신의 정면 누드사진을 찍기도 했다고 하니). 누드는 예술일까요? 외설일까요? 암튼 그 당시에는 꽤 파격적이었을 누드에 대한 이야기도 양념으로 살짝 나옵니다. 재미있습니다. 이런 (흥미 위주의) 역사적 사실은 언제나 재미있는 것 같아요.
이야기의 배경은 19세기 후반, 정확하게는 1889년의 미국 의학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해부학 실습 도중 젊고 촉망받는 의사인 캐롤은 아름다운 소녀의 시체를 발견하게 됩니다. 실습의 주체자인 현대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오슬러와 동료 의사 터크는 시체를 보자마자 놀라운 표정을 보입니다. 오슬러는 수업을 거부하기도 하고요. 그 후 동료 교사 터크가 시체로 발견되는 사건을 목격하게 되고, 캐롤은 이제 이 죽음 뒤에 숨겨진 음모를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제게는 새로운) 의학적 지식이 쏟아져 나오느라 지루하지는 않더군요. 마취제의 효과를 검증하기 위하여 스스로 약물중독자가 되어버린 천재 외과의사 윌리엄 홀스테드(실존 인물)의 이야기도 무척 흥미진진하고, 혼외임신 때문에 임신중절 수술을 하는 도중에 벌어지는 더러운 뒷거래들, 비위생적이고 막무가내 식으로 진행되는 수술 장면들(제왕절개의 경우 치사율이 80%였다고 합니다. 이건 뭐 죽기 위해 하는 수술이나 마찬가지네요), 과학과 윤리의 대립, 과학과 종교의 대립, 사람의 목숨을 놓고 벌어지는 다양한 인간들의 추악한 얼굴과 진신들(각자의 이익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고, 의술을 이용하고, 명예와 부를 이용하는 인간군상들의 얼굴들), 부유층과 뒷골목의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리고 지금 현대의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실존 의사들의 등장 등등 정말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습니다. 여태까지 의학을 다룬 팩션 소설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 면에서는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대부분의 팩션 소설들이 (왕 중심의) 역사를 다루고 있잖아요. 그리고 작가의 프로필에서 알 수 있듯이 흥미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리얼 다큐멘터리 의학 팩션'이라는 설명이 정말 딱 들어맞는 작품입니다. 단지 조금 아쉽다면 (의학 미스터리 소설적인 측면에서) 사건 해결 과정에서 오는 긴장감이 조금 부족하더군요. 극적인 사건도 없고, 범인의 추적 과정이 조금 평이하게 진행됩니다. 따라서 반전이나 충격을 기대하기는 힘들고요(물론 반전이 있어야 좋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오락적인 요소가 조금 아쉽더군요. 그래도 확실히 흥미로운,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무척 많습니다. 의학 스릴러, 의학 미스터리, 의학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이 읽으시면 좋으실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