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내일이 올거야
이시다 이라 지음, 이규원 옮김 / 작가정신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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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내일이 올거야는 금융위기 이후의 일본을 덮쳐온 고용불안을 시작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젊은 네 사람의 무단 해고 아니 무단 해고라고 하기에는 제도적으로 그런 시스템을 갖춘 일본의 파견회사 법률에 대한 항의를 시작으로 이들이 우연히 시작한 일이 세상의 관심과 주목을 받으면서 이야기는 갈등을 만들어 내고 갈등 속에서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 낸다. 주인공 네 사람이 가진 독특한 성격 그리고 이력만큼이나 작가인 이시다 이라는 많은 것을 책에서 다루고 싶었던 것 같다.

 

먼저 이시다 이라는 일본의 파견회사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계약직 사원과 같은 제도인 것 같다. 이런 제도가 가진 불합리성, 종신고용이 장기였던 일본의 근로제도와는 달리 쉽게 해고가 가능한 제도에 관한 의문을 다루고 있다. 젊은 사람들이 미래를 꿈꿀 수 없게 만드는 제도 속에서 이들이 가질 희망은 없어 보인다. 두 번째 작가는 국가와 인종에 대한 차별을 다루고 있다. 멤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출신에 대한 차별, 아마도 일본이 가진 중국에 대한 감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가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듯이 때로는 선의의 피해자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세 번째 사람의 이기적인 마음에 대한 질문이다. 자신에게 필요한 경우는 우리가 되지만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될 상황이면 등을 돌리고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약간의 경고라고 생각될 정도를 따뜻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이 부분에서 나는 많은 울림을 받았으니 나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 버리는 그런 삶을 살았던 모양이다. 마지막 이 부분이 조금 아쉽기도 하고 가상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지만 SNS의 힘이다. 블로깅이 가져다준 힘이 일본 열도를 들썩이게 하였다는 점은 신드롬 같은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나 시련의 시간은 있다. 그 시간을 보내고 대하는 자세는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그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은 이들이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어떤 준비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시작점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 것을 결정하는 중심에는 아마도 자신의 마음이 이야기하는 것을 따라야 한다는 옛말을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 같다. 이들 넷이 선택한 마지막 방향은 그들이 기다리는 후생노동성의 준비된 환영식이 아닌 그들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공원의 한 복판을 선택하였듯이 말이다. 앞으로의 선택은 준비된 형식이 아니라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는 마지막 부분이었다.

 

무작정 시작한 도보여행 600Km, 이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삶의 아주 작은 부분이었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삶의 축소판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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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언제나 바보 늙은이였던 건 아니야
알렉상드르 페라가 지음, 이안 옮김 / 열림원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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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는 다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다. 지금 보다 나이가 더 들었을 때 내가 회상하는 나의 인생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만든다. 죽기 살기로 누군가와 경쟁을 해야 했던 학창 시절에도 그 속에서 친구를 얻었고 그 친구가 평생을 같이 아니 지금까지 같은 인생의 한 자락을 붙잡고 같이 살아가고 있으며, 항상 불안했던 사회생활은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같은 불안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객기나 용기 혹은 패기라고 말하는 것들을 지금에 와서는 많이 잃은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그 속에서 내가 얻었던 것은 무엇인지 아니면 크게 후회하는 일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주인공인 파네크 레옹은 자신의 삶과 현재의 삶을 오버랩하면서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다. 가족에 대한 기억 그리고 힘들게 살았던 젊은 시절 가장 인상 깊었던 어쩔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이야기의 흐름에서 나를 잠깐 붙잡아 놓았다. 모두에게 그렇겠지만 삶이 행복한 기억으로 가득 찰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파네크의 인생은 굴곡이라기보다는 험난함을 그대로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자신을 위해 신념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털어 놓는 울분의 자리에는 젊은이의 객기가 보이기도 했다. 가족을 가져 보지 못한 그에게 그리고 막 살았다고 하기보다는 험하게 살았던 그에게 인생은 경쟁을 즐기는 삶이 아니라 그의 말대로 경쟁의 결과물을 찾아서 살아가는 삶이었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그런 그가 불의 사고로 찾아오게 된 요양원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를 간병하는 마를린과의 에피소드는 노인이기에 혹은 세상을 오래 살아온 사람이기에 전해 줄 수 있는 그런 말들이 흘러나온다. 다만 따뜻한 말과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배워 보지 못한 그런 말투와 성격은 오해를 일으키지만 그 속에서도 친구는 만들어진다.

 

그냥 노인에 대한 한 풀이 같은 소설로 생각이 되었다. 아니 그런 것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 소설은 뭔가 다른 느낌이 든다. 늙는 다는 것이 세상을 이해하는 일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 세상을 더 이해하고 사람을 이해하고 자신의 오만을 반성해 가는 그런 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아니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맞다 해야 할 것 같다.

 

일흔 여덟이라는 나이가 되었더라도 자신을 정확히 알기는 어려운 가 보다.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질 수는 있지만 자신을 파악하는 눈은 평생을 두고 길러야 하는 것인가?

 

자네는 누구인가, 레옹?”

나는 아직도 내가 과연 그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레옹이라는 존재는 무수히 많았으니까. Page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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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행복하기로 결심했다 - 쇼펜하우어의 행복 수업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임유란 엮음 / 문이당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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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가 행복을 이야기 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아서 일까? 쇼펜하우어의 말들은 어쩌면 행복을 찾는 길이라기보다는 자신을 다듬어 행복을 마음속에 담아두는 이야기에 대한 고찰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은 느낌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행복의 중심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편집의 묘미인지 아니면 쇼펜하우어가 강종한 것의 순서인지는 모르지만 처음에는 사랑에 대한 고찰과 사색이 나온다. 사랑 그냥 일반적인 사랑이 아니라 철학자가 말하는 사랑은 개념적 측면에서 조금 깊이가 있다. 사랑의 궁극적 목적은 자기 존재의 회복이라는 것을 전재로 시작을 한다. 이성적인 것을 강조하는 철학자의 입장에서 사랑은 본능적인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을 보면 쇼펜하우어의 생각이 진보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면서 그는 남자와 여자에 대한 깊은 성찰의 말들을 전해준다. 남자의 특징, 사랑을 하면서도 한 눈을 파는 그런 특징까지 세세하게 짚어 준다. 정말 세밀하다. 그리고 사랑은 완전한 자신을 만들기 위한 본능적이며 자기 완성의 행위라는 설명까지 한다. 나에게 사랑이 그런 것이었나? 다시 질문을 해보지만 그냥 어느 순간 나는 그렇게 되었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네. 역시 철학은 어려운 부분이 있어..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강조한 것은 현재 이다. 미래에 대한 근심으로 현재를 충실하게 보내지 못하는 삶에 대한 충고를 집중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 항시 저울의 한 쪽에는 희망을 그리고 다른 한 쪽 끝에는 경계심을 담아 놓아야 한다는 말로 그냥 방탕하게 지내는 것을 경계한다. 그런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이 그의 말 속에는 욕망이라는 것의 실체와 그 것이 가져다주는 목마름에 대한 이야기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렇게 찾아가는 행복의 길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다. 역시 쇼펜하우어는 그런 질문이 나올 것을 예상하였는지, 행복은 자신 안에 있다는 말로 그의 설명을 이어간다. 역시 행복은 같은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개인적인 인식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부분이다. 어쩌면 그것이 행복의 근원적 질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럼 소박하기만 한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행복에 가깝게 가는 길일까? 아니다. 작은 꿈들 즉 자신이 성취할 수 있는 꿈들을 조금씩 이루어나가는 행복을 버리지 말라고 하고 있다. 그 것은 어쩌면 지금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두에게 꼭 필요한 말일 지도 모른다. 드라마를 보거나 매체를 보면 엄청난 부와 행복을 가진 것처럼 사람들이 묘사되는 데, 이런 현상은 부자는 권태와 싸울 때 가난한 사람들은 고통과 싸운 다는 말로 대변해 주고 있다. 부자가 모두 행복할 것이라는 것은 오해라는 말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현실적인 부는 행복을 위한 뒷 받침은 되지만 많은 부가 행복을 대변하지는 않는다는 말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아무리 읽어도 결국 행복은 내 안에 달려 있다. 내가 어떤 생가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그리고 현실에 내가 소소한 행복을 잘 감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스스로 정하지 않으면 언제나 행복은 남의 일이 될 것이닌 말이다. 그 것이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행복의 길에 하나의 방편이 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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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의 기생충 콘서트 - 지구의 2인자, 기생충의 독특한 생존기
서민 지음 / 을유문화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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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의 입담이 돋보이는 책이다. 기생충이라는 조금은 혐오스러운 재료를 부담감 없이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묘한 매력은 그가 서문에서 밝힌 대로 글 솜씨로 만회하는 느낌이다. 책은 기생충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옆집 아저씨 그러니까 조금 친안 아저씨 혹은 단골 술집에 친한 사장님이 전해주는 손님들의 뒷 담화 같은 느낌이 든다. 기생충이 착한 놈, 나쁜 놈, 독특한 놈으로 구분이 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지만 나름 그렇게 구분한 이유를 대고 있는 서민의 사연은 그야말로 말이 안 되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서민이라는 사람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마도 책을 훑어보다가 알게 된 것 같다. [서민적 글쓰기]로 기억한다. 소설가도 아니고 에시이스트도 아니고 잘 모르는 사람인데 글쓰기 책을 냈네 하면서 지나갔던 기억이 있는데, 이 책을 보니 기생충 학자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그냥 서평을 쓰거나, 에세이를 쓰는 사람 혹은 소설을 쓰는 사람인데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려니 하고 제목만 보고 그냥 지나갔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온다. 기생충 학자라니?!

 

기생충은 우리 지구 위를 살아가는 많은 생물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벌레를 말한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지구위의 2인자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삶의 방식이 독특하다 못해 강한 생존력을 가졌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먼저 서민의 분류 식으로 보면 착한 녀석들로 분류 된 것을 보면, 어류의 혀를 갉아 먹고 대신 혀 역할을 하고 있느 기생충인 시모토아 엑시쿠아라는 녀석은 사실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서 어류의 혀를 계속해서 소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서민의 해석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없어진 어류의 혀 노릇을 해 주는 착한 녀석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구충이라는 녀석은 면역 체계 이상에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다면 일부러 키우는 산업이 발전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예쁘게 생긴 람블편모층은 점막을 손상시키지도 않고 그냥 기생만 하는 기생충이라고 하니 그렇게 미워 할 수도 없고, 그렇게 서민식의 분류법을 보면 착한 기생충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독특하게 자신의 삶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기생충, 인간에게 많은 해악을 끼치는 기생충이 있다는 것을 보면 기생이라는 기본적인 단어는 느끼는 그대로 좋은 느낌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생충의 역사가 재미있는 것은 우리 주변에 항상 있으며, 언제나 감염의 위험이 있음에도 생활이 발전하고 위생이 조금 낳아지면서 우리 생활에서는 멀어져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기생충의 생존력을 바탕으로 연구하여야 할 학문들, 그리고 유기농을 선호하면서 다시 기생충이 인간과 공존하려고 하는 움직임들, 의학이 해결하지 못한 각종 면역 반응에 대한 치료에 대한 힌트를 기생충이 주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서민의 고민대로 기생충학을 어떻게 우리 일상과 연관시켜서 발전시켜 나갈 것인지 고민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때로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몸속에서 10년이 지나야 그 반응을 알 수 있는 녀석들도 있고, 숙주의 공격을 버텨 내면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독특한 생존법을 만들어낸 기생충의 일생을 우리는 더 세밀하게 관찰 하면서 우리의 생존법을 찾아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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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독 - 10인의 예술가와 학자가 이야기하는, 운명을 바꾼 책
어수웅 지음 / 민음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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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탐욕을 부리면 부릴수록 다른 사람의 눈에 가장 좋게 보이는 행동 중에 하나는 독서가 아닐까 한다. 책을 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글을 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글을 탐하는 사람들 활자중독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저자는 열 명의 사람들을 만나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글을 쓰는 사람도 있고, 사회학자도 있고, 무용수도 있으며, 심지어 요리 연구가도 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책에 대한 회고는 어떤 모습일까? 이전에도 많은 비슷한 책들이 있었겠지만 이런 이야기에 끌리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 그들은 그 책에 그렇게 감동을 받았을까? 인생이 바뀔만한 책이 인생에 있기는 한 것인가? 아니면 작위적인 선택은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지 못한데 내가 이상한 것은 아닌가? 아니면 책을 읽는 방법이 다른 것은 아닐까? 뭐 이런 별의별 의문을 책을 읽기 전에 던져 놓고 시작한다. 아니 책을 읽기위한 타당성을 부여하는 나만의 방법인 것 같다.

 

책을 모두 읽은 지금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다. 내 인생의 책 한 권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독서는 꾸준히 자신을 조금씩 변화시킬 수도 있고, 자신이 처한 상황과 의식에 따라서 딱 한 권이 평생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수도 있다. 정유정처럼 1980년 광주에서 세상이 불안하여 나가지도 방안에서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동생의 옆에서 여섯 장만 읽으면 잠이 올 것이라 믿고 읽기 시작한 책 한 권이 새벽녘에야 손을 놓을 수 있었다면 그 책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김중혁처럼 그가 쓴 글이 인생을 바꿀 만큼의 임팩트 있는 글이 아니라 다 읽고 나면 살짝 바뀐 것 같다는 느낌 정도가 들 정도의 독서의 연륜이 싸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여러 가지 이유로 책을 읽고 인생을 실천하며 살고 있지만 아마도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자신을 조금씩 아주 미세하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 시키고 있다는 의견에 나는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들이 그렇게 자신의 꿈을 이루는 모든 것의 바탕에는 독서가 있다. 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마다 고 신영복 선생의 말이 생각난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그리고 가슴에서 발까지의 비유가 생각난다. 나는 아직 가슴까지 내려 보내지 못하고 있는데, 이 글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발까지 내려간 것 같다. 읽고 느끼고 공감하고 실천하는 모습. ROTC 장교의 길을 포기하고 이병으로 군대를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고, 마흔이 넘어서 글을 시작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도 없애주고, 열심히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것에 대한 자존감을 가지게 할 만큼 나의 꿈은 이 늦은 나이에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독서를 탐하는 것인지 책을 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글을 읽고 있는 순간을 즐기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것이 찾아지는 그날까지 그렇게 읽고 또 읽고 읽으면서 즐겁게 사는 것이 어쩌면 나의 꿈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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