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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 행복한 사회 재건의 원칙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비아북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세계대전 전후 지식인들의 회의과 고민이 담긴 저작들이 참 많다. 그들은 인간본성에 대해, 민족성에 대해, 인간의 행동양식에 대해 고민했고 정치와 경제 체계의 문제에 대해 반성했으며 어떻게 하면 이 처참한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을까 길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했고,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생존경쟁과 불의에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고민은 그들만의 고민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고민이기도 하다.
이 책은 버틀란드 러셀이 1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 켁스턴 홀에서 <사회재건의 원칙>이라는 주제로 총 8차례에 걸쳐 강연한 내용을 엮은 것이다. 그는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데에 의식적인 목적보다 충동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전제아래 전쟁의 원인을 고찰하고, 긍정적 충동인 창조적 충동을 성장시키는 방향으로의 우리 사회의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나는 가장 훌륭한 삶은 창조의 충동이 가장 주된 동인이 되는 삶이고 가장 나쁜 삶은 소유욕이 가장 주된 동인이 되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20세기 초는 의식과 합리에 묶여있던 무의식적 충동과 욕망이 표현되고 분출되기 시작한 시기였던 것 같다. 프로이트의 출현은 특별하다기보다는 그저 대표적 상징에 불과했다고 생각될 정도로 이미 분위기는 생동하는 우리의 욕망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러셀이 말하는 '충동'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한 술 더떠서 러셀은 욕구보다 더 순간적이고 강력한 충동이 인간의 삶에 더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러셀이 주장한 충동은 창조적 충동과 소유의 충동으로 나뉜다. 창조적 충동은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에너지지만, 소유의 충동은 타인의 충동과 양립할 수 없는 이기적이고 제한이 필요한 에너지이다. 러셀은 창조적 충동이 좌절되고, 소유의 충동이 폭주하면서 전쟁이 발생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창조적 충동이 표현되도록 격려하면서 소유의 충동이 득세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을 정치, 경제, 교육, 가정, 종교적 측면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군주에 대한 충성심에서 유래한 동족의식, 외부적인 위험에 대한 공포심, 그리고 종교적인 양상을 띄는 애국심, 이를 토대로 현대 국가는 막대한 권력을 불필요하고 해로운 방향으로 행사한다. 이런 국가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러셀은 국가의 권력을 축소하고 자발적인 조직에 권력을 이양해서 정치적 행위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창조적 충동을 키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일종의 이익집단이나 시민단체의 권력을 키워주자는 것인데, 국가의 역할은 그들 사이의 중재자로써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에 덧붙여 위생이나 전염병의 예방, 의무교육, 아동정책, 학문연구, 경제적 격차의 축소의 역할을 국가가 해야 한다고 말한다. 요즘 신자유주의 바람이 불면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여러가지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부분과 좀 상통하는 면이 있는 듯 하다. 불필요한 권력은 버리되 복지에 대한 문제는 충분히 개입해야 한다는 식이 아닌가 싶다. 20세기 초의 고민과 21세기 초의 고민이 같다는 것도 해결책으로 나오는 것도 비슷하다는 것도 참 흥미롭다. 그렇다면 경제문제는 어떨까?
어떤 경제 체제의 효율성을 검증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은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드느냐 또는 분배적 정의를 보장하느냐가 아니라 사람들의 본능적 성장을 가로막지 않느냐이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경제 체제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인간의 개인적인 감정을 억누르지 말아야 하고, 둘째 창의적인 충동을 배출할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많이 제공해야 한다.
경제 정책에서 성장과 분배의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고민과도 같다. 성장 일변도의 시대적 분위기를 규탄하고 같이 먹고 살자는 식으로 진행되는 듯 하다가도 다시 어쩔 수 없이 있는 사람 위주로 흘러가곤 한다. 러셀은 성장이나 분배냐 하는 것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 내부에 있는 충동을 들여다 보고 그것을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의적 충동을 제공하고 무조건 소유하고자 하는 충동을 억제하는 것.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러셀은 협동조합 운동과 생디칼리즘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결국 자발적인 흐름을 키워가자는 것이고 국가는 그 흐름을 막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가능할까. 어디까지 조합이 성장할 수 있을까? 국가는 그 성장을 충분히 보호해 줄 수 있는가. 러셀은 이 모든 자발적 흐름이 단기간에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교육을 통해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교육은 무조건적 수용 대신에 건설적인 의문과 지적 탐구심, 진취적인 태도가 승리를 거둔다는 세계관, 사고의 대담성을 조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는 태도, 정치적인 목적에 순종하는 태도는 정신적인 요소에 대한 무관심으로 기인하는 것으로 앞서 말한 해로운 습성들을 야기하는 직접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이런 원인들 뒤에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교육을 학생들의 성장을 돕는 수단이 아니라 학생들을 지배하는 권력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태도이다.
교실에서 일어나는 경쟁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사회에서 경험하는 생존 규칙을 그곳에서 철저하게 답습한다.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아이들은 교과서와 선생님 말씀에 순종적이어야 하며, 지나친 회의로 자신을 괴롭혀서는 안된다. 그리고 더 높은 성적과 인정을 향한 욕심을 가져야 한다. 아이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성인들과 다르지 않다. 몇몇 설문조사에서 아이들이 되고 싶어하거나 갖고 싶어하는 것들이 매우 물질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었다. 우리가 그것을 강요했던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소유하려고 한다. 내 뜻이 아이들에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하고 따라주지 않으면 그것을 비정상적이라고 여긴다. 그들을 자유롭게 존중하는 것, 선택권을 허락하는 것. 그것이 교육의 본질이라고 러셀은 말한다. 그들을 자유롭게 한다고 해서 그들이 고삐풀린 망아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자신이 어릴 때를 생각해보라.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졌다면 과연 어른들이 걱정하는 것 만큼 폭주했을까? 학교 교육에 대한 개혁은 중요하나 문제는 개인이 단기간에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변화의 시작은 가정일 수 밖에 없다.
서로의 인생관을 존중하고 전체 인류의 삶에 비하면 자신은 하찮은 존재임을 자각하는 남성과 여성은 자유를 훼손하는 일 없이 동료가 될 수 있고, 지적인 생활과 영적 생활에 해를 끼치는 일 없이 본능의 화합을 이룰 수 있다.
결국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존중의 문제인 것같다. 서로의 존엄을 지켜주는 것. 가정에서의 충돌은 결국 소유욕 때문인 경우가 많다. 내 규칙을 주장하고 상대방이 내 규율 내에 오기를 원한다. 즉 내가 그의 권한을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른 것을 인정하는 것, 그 사이에서 접점을 찾는 상상력과 창의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지낼 수록 절절히 느낀다. 충돌의 상황에서 모두가 만족할 새로운 활로를 찾는 창의력. 그런 노력들이 가정 내에서 연습되다 보면 사회에서의 갈등 상황도 비슷하게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마지막으로 러셀이 말한 것은 영적인 생활이다.
영혼은 본능에서 비롯한 사랑을 확장하고 일반화 한다. 영혼은 본능적인 생활에 포함된 집요하거나 무자비하거나 개별적인 요소들을 제어하고 정화한다.
'나'를 생각하는 삶에서 '우리'를 생각하는 삶, 그리고 '인류'를 생각하는 삶으로의 진화는 인간의 지평을 넓혀준다. 우리는 본능에서 지성으로 그리고 영혼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름으로써 우리가 가진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그곳에서 찾은 가치는 우리를 공허하게 하지 않고 의미있는 삶을 만들어주며, 우리를 더욱 풍요롭게 한다. 결국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나와 내 주변에만 국한된 것에 머무르지 않고 전체를 바라봄으로써 소유의 한계를 인식하고 타인을 포용하며, 생명의 길로 가는 것. 그 길이 바로 우리가 싸우지 않는 길이 아닐까.
러셀의 글은 깔끔하다. 너무 깔끔해서 내가 혹 뭔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러셀의 이미지가 고집센 영감같아서 그럴 수도 있고, 그가 지나치게 확신에 차서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고 그것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통해 나름의 합리적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해답은 성장을 향한 자발적인 움직임과 그것들을 억제하지 않고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닐까 싶다. 문제는 부정적인 충동들을 우리가 얼마나 잘 조절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그것은 부정적 에너지에 대한 두려움 보다는 긍정적 에너지의 건강한 분출로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낙관적인 믿음을 붙잡고 싶다. 우린 계속 이런식으로는 안된다고만 하는데, 그것을 다른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반대하는데에 에너지를 쏟는 것보다는 긍정적인 흐름에 힘을 더 실어주는 것. 우리는 싸우지 않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