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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우연의 음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8월
평점 :
판매중지
매번 폴 오스터의 작품을 읽고서 감상을 나름 깔끔하게 정리하는데 실패해 왔지만 이번에는 나름 풀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한마디로 섬뜩하다.
폴 오스터... 만만치 않다.
우연의 음악이라는 말은 다르게 표현하면 즉흥 연주를 뜻하는 애드리브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음악에서의 애드리브는 음악을 더 아름답게 하고 풍부하게 만들어주건만 우연의 음악에서의 애드리브, 즉 인생에서의 즉흥적인 선택은 인생을 파멸로 이끌지도 모르는 위험한 함정만 같다.
우연의 음악에서는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선택, 즉 ‘보통의 삶‘이라는 노선으로부터 탈주한 결과가 (사실상) 강제 노역을 하는 노예가 되는 것에서부터 자살에 이르기까지 치명적인 결과로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
인생에서의 즉흥적 선택이라는 게 그렇게 위험하고 부정적인 것일까?
어느 광고 카피나 자기 계발서의 문구처럼 인생은 실패하면서, 또는 쓸데 없는 짓을 하면서 배우고 성숙해가는 것이 아니었던가?
우리는 어쩌면 그런 일탈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 사회에 너무 길들여져버린 건 아닐까?
사실은 사회가 정해놓은 ‘보통의 삶‘이라는 것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치명적인 결과로 보상받도록 만들어진 이 사회야말로 끔찍스럽고 무섭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얘기를 살짝 돌려보자.
우리는 모두 살아가기 위해서 돈을 필요로 한다. 그 돈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어려서부터 무시무시할 정도의 지식을 쌓고 가혹하리만치 치열한 경쟁도 마다않게 자라왔다.
그렇게 돈이 필요한 이유는 뭘까?
삶을 영위하는데 돈이라는 게 필수불가결한 것이 현실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걸 넘어서 그 돈을 통해 뭔가 하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에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나쉬의 경우, 우연찮게 거금을 손에 넣고서 그가 하게 된 것은 ‘운전‘이었다.
다른 어떤 목적도 의도도 없이 운전을 즐겼기 때문에 그건 순수하게 행복을 추구한 것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나쉬에게 계속해서 ‘돈‘의 압박이 가해진다. 그리고 그 압박은 수중에 있는 돈이 줄어들수록 강력해지고 거대해진다. 돈은 끊임없이 그 자신을 불려가도록 재촉하고 압박하며 우리를 바로 그 돈의 노예로 만든다. 그리고 그 돈의 지배와 압박은 그 돈이 적어질수록 집요하고 강력해진다.
나쉬가 운전을 하는 동안 나쉬의 수중에 남은 돈에 대한 서술이 고집스럽게 자세하게 이어지는 것 때문에 나는 ‘우연의 음악‘을 읽는 내내 그 돈의 강력하고 무서운 압박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매일 같이 수입, 생활비, 지출, 저축 등으로 골머리를 앓게 되는 그 ‘돈의 압력‘이 소설 속에서 무시무시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전작인 달의 궁전에서 마르코가 키티 우와 짐머의 사랑과 우정으로 인해 구원을 받은 것과는 달리 짐 나쉬에게는 탈출구도, 구원도 나타나지 않는다. 몸부림치면 몸부림 칠수록 수렁으로 빠져들 뿐.
노역을 통한 빚 탕감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루하루의 일과가 자세히 묘사되면 될수록 하루치의 빚이 얼마씩 탕감되어 가는지를 끊임없이 의식할 수 밖에 없는 나쉬의 상황은 돈으로 쌓아올려진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그것이다.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은 매번 잔인하게 좌절된다.
그 감옥(스톤의 모형이기도 한)을 만든 이들, 즉 플라워와 스톤이 특별한 삶의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돈으로 돈을 더 벌어들일 뿐인 탐욕 그 자체라는 사실은 이들이 바로 돈의 감옥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는 장본인이며 이 상황이 폴 오스터가 바라본 미국 사회의 무시무시한 축소판이라는 사실을 깨닿게 해준다.
물론 소설이 발표되던 1990년의 미국의 현실이 작금의 한국에도 이식되어 있을 것은 자명한 것이고 그게 이 소설이 무엇보다 섬뜩하게 다가온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