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가죽소파 표류기 - 제3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정지향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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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울고 말았을까. 당신의 소설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있을 때였어. 한없이 슬픈 기분이 들어 페이지를 넘기다 말고 그대로 울고 말았지. 소리 없는 울음이었어. 가끔 그렇게 울음이 나올 때면 나는 어쩔 수 없는 기분이 되어버려 내가 어딘가로 표류하고 있다고 느꼈지.

아주 어릴 때에는 내가 아주 먼 별에서 왔다고 생각했어. 짧은 생으로의 여행을 하다가 지루해질 즈음엔 다시 내가 왔던 별로 간다고. 그 별의 이름은, 사람들마다 부르는 게 다르겠지만 나는 언제나 그 별의 이름을 감춰뒀었지. 당신의 소설은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어. 어린 시절에 했던 생각조차도. 소설을 통해 어딘가로 가고 있다고 나는 다시금 느꼈어.

당신의 소설에서 만난 요조와 민영, 그리고 '나'는, 표류하고 있었지. 나는 표류하다가 그들을 만난 기분이었어. 그들은 각기 저마다의 소파를 갖고 있었는데, 나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갖고 있을 소파를 나 혼자만 갖지 못한 건 아닌가 불안한 마음이 들었어. 눈물이 난 건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디로 갈지 모르는 시간 속에서, 모두 한번쯤은 자신의 소파를 내줄 텐데, 나는 그러지 못하겠단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런 생각은 사람은 한없이 외롭게 하거든. 별이 떨어지는 순간이 세상에서 가장 외롭게 느껴지는 것처럼.

그리움은 그날의 시간에만 있기 때문에 그리워할 수 있는 거야. 언젠가 홍대 거리를 걷다가 교복을 입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소년을 보았어. 소년은 밝은 얼굴로 리듬을 맞추듯 고개를 까닥이며 노래를 불렀지. 그가 부른 노래는 처음 듣는 곡이었지만 들리는 목소리가 거리 곳곳으로 퍼지는 걸 보았어. 한번쯤은 누군가 걸음을 멈춰 그 노래를 들었을 거라 생각해. 누군가는 어느 날 그날 보았던 풍경을 기억하겠지. 그날에만 존재하는 기억이 있기 때문에 그날의 그리움이 생겨난 것이라면 당신의 소설은, 당신이 가진 그리움만이 존재하는 공간이 된 게 아닌가 생각했어. 당신의 소설은 당신이 아주 오래전부터 간직해온 그리움이 담긴 이야기라고 말이야. 요조와 민영이었을 누군가를, 당신이 소설에서 말한 당신이란 존재를.

어떤 기억은 생각만 해도 곧장 풍경과 함께 떠오르기도 하지. 어떤 기억은 아주 오래도록 고민해야 떠오르기도 해. 당신이 남긴 소설은, '나'가 부끄럼 없이 다른 누군가와 함께 하게 될 때에도 요조를 떠올린단 말처럼, 소파만 봐도 떠올릴 것 같아. 나는 거리를 지나가면서 지나치는 가구점에 진열된 소파에서 민영과 요조와 '나'가 나눈 대화를 떠올릴 거야. 앞으로 자신들이 살아갈 공간에서, 하나씩 소파를 살 것이란 말들. 사람들이 지나가지 않을 어두운 밤거리에서도 그들이 서로의 발걸음을 새기며 걸어갔던 것처럼 나도 그러리란 것을. 붉게 그어져 가는 지평선 너머에서 사라져가고 있을 여명의 빛깔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했던 시간들을 아로새길 거야.

당신은 '그날의 사랑은 그날에만 있다'고 했지. 나는 그 말이 당신이 쓴 소설 그대로라는 걸 알았어. 그날 할 수 있는 사랑처럼 그날 살 수 있는 삶이 있다고 말이야. 어정쩡하게 흘러가던 시간들은 사실 그대로의 시간이었어. 민영이 입양아로서 여기저기 여행을 하고 여행을 하다가 '나'를 만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을 거야. 어떤 시간과 어떤 시간은 만날 운명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아.

요조가 살아온 시간들은 그가 새긴 발자국이야. 민영이 여행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도 민영의 발자국이지. 그들 모두 자신의 시간을 살고 있지만 나는? 나를 돌아보게 한 글이었어. 내 스무 살은 어땠는지, 아주 오래 생각했던 것 같아.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민영을 떠올릴 거야. 민영이 뿌리를 내렸다가 거두고 사라졌던 여행의 흔적과도 같은 삶을 그리워하면서 앞을 바라볼 거야. 나는 당신의 소설에서 보인 성장통이 아직도 진행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날의 시간에 머무는 그리움이 점점 커지듯, 나의 시간도 점점 커져서 언젠가 민영과 요조처럼 어떤 그리움을 남기겠지. 당신이 남긴 소설처럼 말이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은 무한정으로 펼쳐져 있어 때론 부딪치기도 하고 때론 돌아가기도 하지만 결국 그날에 머물러 있다는 걸, 나는 이제 알게 된 것 같아.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리움이 머무는 곳에서 한 발씩 멀어지면 새로운 그리움을 쌓아갈 테야. 그러니까 그날까지 당신도 안녕.

*

<초록 가죽소파 표류기>의 화자의 방식을 모방하여 적은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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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 모파상 - 비곗덩어리 외 6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9
기 드 모파상 지음, 최정수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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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기 드 모파상의 <목걸이>를 본 적이 있다. 그때 읽었을 땐 이야기 자체가 오싹하다고 느꼈다. 왜 그렇게 느꼈을까. 사실 <목걸이>는 알고 보면, 친구에게 빌린 목걸이에 얽힌 이야기였을 뿐이다. 지금 다시 읽고서도 그다지 오싹하다고 느낄 건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땐 왜 그런 두려움을 느꼈을까.

나에게 항상 기 드 모파상은 오싹한 작가로 남아 있다. <목걸이>뿐 아니라 다른 단편도 그리 느꼈다. 하지만 이번에 현대문학에서 출간된 <기 드 모파상>이라는 기 드 모파상의 단편집을 읽으며, 오싹하지 않다고 느꼈다. 물론 <비곗덩어리>와 같은 단편은 오싹하기 그지 없다. 직접적으로 무섭거나 잔인한 장면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사람의 심리를 아주 무섭도록 잡아낸 글이라 여겼다. 눈이 와서 굶주렸던 부분부터 시작하여, 프로이센 장교에게 여인을 바치는 부분까지. 사람은 얼마나 본성에 충실한가.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은 어찌 보면 잔혹하다. 동물보다도 잔혹하다. 그 잔혹미를 <비곗덩어리>가 드러냈다. 제목이 말하는 비곗덩어리는 단순히 창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리라. 우리는 모두 같은 비곗덩어리라는 것을 풍자한 이야기리라.

그러나, 그와 반대로 잔잔한 이야기도 있다. 사랑 이야기도 있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도 있다. <전원 비화>는 얼마나 우스꽝스럽던지. 두 집안이 서로 반대의 상황이 되어갈 때의 모습은 폭소가 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인생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어 어쩔 땐 행복하다가 어쩔 땐 불행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선택을 잘못하여 행복해질 수 있었던 상황을 놓친 거라면, 그건 누구를 원망해야만 하는 걸까. 원망할 수 있는 것이긴 할까.

기 드 모파상이 그려내는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추하진 않다. 그는 인간의 깊은 곳까지 다가가 그 마음을 드러내고 때론 주위에 존재하는 세상을 펼쳐 보인다. 나는 이 단편집을 읽으면서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 프랑스의 1800년대 상황, 그리고 당시 프랑스 사람들의 생활을 볼 수 있다고 여겼다. 사실적인 묘사는 물론이요, 오감까지 충족되어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기 드 모파상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가 묘사하는 사랑은 얼마나 슬픈지. <의자 고치는 여자> 이야기는, 사람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도무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남자인데도 그녀는 그를 평생 사랑했다. 평생. 평생토록. 평생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목숨까지 걸 수 있다는 것이다. 목숨을 건다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인가. 아름답기에 슬프다. 그녀의 사랑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게 슬프다. 때론 이런 사랑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도 같았다. <미스 해리엇>은, 나이가 들어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다. 나이는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닌데,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외로움이란,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어찌 그것을 이겨낸단 말인가. 고독에 휩싸여 죽은 사랑은 너무나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 드 모파상>에 사랑 이야기가 많은 것은, 작가가 사랑을 어찌 바라보는지 알려주는 이야기라 생각한다. 사랑은 할수록 행복해지는 것, 버림을 받아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런 사랑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것이라고.

글을 읽으면 이미지가 빠르게 스쳐지나가는데 <기 드 모파상>은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듯 볼 수 있었다. 기 드 모파상이 주는 즐거움은 단순히 활자에 있지 않았다. 활자를 통해 그 시대로 날아가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나는 프랑스로 갔고 프랑스의 문화를 보았고 역사 책에서나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것들을 보았다. 기 드 모파상의 작품에서는 그때 당시의 프랑스를 아주 긴밀하게 볼 수 있었다. 그 자체로도 기 드 모파상의 단편집은 가치 있다. 물론 이뿐 아니라 기 드 모파상이 그려낸 인간상도 제대로 볼 수 있다. 욕심 많은 인간, 가여운 인간, 질투하는 인간, 두려워하는 인간, 불가사해한 인간, 외로운 인간. 다양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이 세상을 담아낸 것만 같은 단편집. 펼치기만 하면 나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듯 소설 속에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기 드 모파상이 그려내는 세상은 현실이다. 그 현실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고민하게 해준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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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 용산 걸어본다 1
이광호 지음 / 난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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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도시에 대해 생각해보자. 나는 한때 살았던 충청북도 영동에 대해 말해보자면, 그곳은 난계 박연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중학교 다닐 때 난계국악박물관으로 소풍을 자주 갔다. 그리 크진 않지만 학교에서 가깝단 이유로 걸어다녔다. 매해 박연을 기리는 축제를 한다. 난계국악축제. 감이 유명한 곳으로 감아가씨를 선발하기도 했지만 <포도밭 그 사나이>란 드라마를 황간에서 촬영한 후로, 포도 축제로 바뀌었다. 영동은, 현대사적으로 볼 때 가슴 아픈 곳이기도 하다.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 일었던 사건은, 아직도 그 흔적이 있다. 황간면으로 봉사활동을 갈 때 그 다리를 보았다. 총알이 박힌 자국이 남아 있다고 황간면에 살던 친구가 일러준 적이 있다. 이현수 작가님의 <나흘>에서도 노근리 사건을 다루고 있다. 어떤 도시건 그 역사는 길고도 어떤 상흔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용산은 호남선이 출발하는 곳이다. 작년이었나, 재작년이었나 노트북이 고장나 AS를 받겠다고 용산을 간 적이 있다. 용산전자상가가 유명하다고도 하고 AS 센터가 용산전자상가에 있다고도 하여, 구경도 할겸 방문했다. 용산역이 종착역이라 기차를 타고 그곳까지 간 후, 내렸는데 생각보다 큰 역의 모습에 놀랐다. 아니, 왜 의외의 모습이었다고 놀란 건지 모르겠다. 용산이 주는 이미지는 그렇게 부정적이었나 싶기도 하고. 서울역보단 작을 것이라 생각했던 탓일까. 극장도 있고 백화점도 바로 옆에 있는 것을 보고 솔직히 놀랐다.

하지만 번쩍번쩍한 용산역의 모습과 달리 전자상가로 향했을 때의 모습은 그다지 아름답단 느낌은 없었다. 전자상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건물과 건물을 잇는 통로는 참신했다. 햇빛이 강렬해 그늘로 다닐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전자상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전자제품을 파는 곳이 많았다. 그러나 바로 거리 맞은편의 건물은 낡고 허름했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공존하는 곳처럼 느껴졌다, 용산이란 곳은. 어떤 건물은 화려하고 번쩍하지만 어떤 건물은 다 쓰러져갈 것만 같이 위태하다. 그런 이질감이 용산에 존재했다. 어찌저찌 AS센터까지 갔을 때도, 건물 근처에 롯데시네마의 건물이 있었다. 롯데시네마 바로 맞은편에는 글자의 페인트칠이 다 벗겨진 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에만 몰락의 시간이 존재했다. 그런 이질감은 용산을 으스스하게 만들었다.

내가 아는 용산은 이게 전부다. 의외의 모습을 가지면서 어쩐지 모르게 으스스한 분위기를 가진, 그런 공간. 그렇기에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가 출간되었을 때, 이 책이 용산을 다룬다는 것을 알았을 때 호기심이 생긴 것은 당연했다. 용산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어마어마한 역사를 지녔고 다채롭고, 때론 어딘지 모르게 스산한 구석이 있었다. 책을 읽고 나서야 용산에 대해 이제 제대로 좀 알게 된 기분이었다. 어떤 곳은 낭만적이지만 어떤 곳은 낭만을 잃어갔다. 그런 정반대적인 성향을 지닌 곳이 용산이라고 생각했다. 한남동과 이태원의 분위기가 다른 것처럼.


용산.
모든 시간이 휘몰아치는 곳.
풍경이 지나가는 곳.
빛이 반짝이다 사라지는 곳.
그리움이 쌓여가는 곳.
낯선 시선이 느껴지는 곳.
역사와 역사가 만나는 곳.
서로 다른 세상이 맞물려 흘러가는 곳.
너와 나의 발걸음이 마주치다 스쳐가는 곳.
네가 사라지는 곳.
내가 사라지는 곳.

용산이란 이름의 시詩는 언제나 그곳에 존재했다. 어느 누군가가 적었기 때문에 시가 되었던 게 아니다. 용산은 처음부터 많은 시간과 그리움과 사람들의 발걸음이 스쳐지나갔다. 일제 감정기 때 일본군인이, 미군 부대가 있었을 때엔 미군이, 이태원의 외국인 골목에서 오고 간 수많은 이국적인 풍경들. 누군가 그 풍경을 오래도록 지켜볼 때 용산은 시로 태어나 시로 남았다.

이태원의 역사가 처음부터 이국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태원의 역사가 아직도 상흔처럼 남아있다. 비구니에게 잔인한 상처를 남겼던 곳이 외국인들이 오고 가는 장소가 되었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용산의 여러 장소는 근현대사의 상처가 산재해 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많은 사람들이 스쳐가는 곳이니 그 빠른 발걸음 속에서 용산의 깊은 상처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는 용산이란 도시를 알기에 충분하다. 대한민국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일독하길 권한다. 단순히 '도시'라는 테마를 뛰어넘어 오랜 시간의 흔적을 찾아가는 문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가슴에 어떤 감정을 남길 수 있는 책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당신은 오래도록 용산을 잊지 못할 것이다. 용산에 들를 적에 책의 구절을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파문을 일으키는 물은 시선에 오래 머문다. 용산이란 도시의 낯선 감각은 현재 존재하는 시간에 파문을 일으킨다. 그 파문은 고요하고 잔잔하지만 꽤 멀리 퍼졌다. 도시 아래 깊숙이 깔린 과거의 시간은 한번쯤은 뒤돌아보게 한다. 그게 역사의 현장이 될 때, 당신은 그 도시에 붙박힌 듯 존재하게 될 것이다. 실체가 존재하지 않아도, 당신의 마음은 용산에 머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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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의류 수거함 - 제3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40
유영민 지음 / 자음과모음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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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마법의 나라로 간 게 아니라, 밤에 괴도로 변신하는 이야기는 꽤나 구미를 당겼다.
도로시가 터는 것은 의류수거함. 사람들이 의류수거함에 놓고 간 옷은 의외로 상태가 좋았고 꽤나 쏠쏠한 수입 원천이 되었다. 외고 입시에 실패하여 호주로 가는 것이 꿈인 그녀는 열심히 돈을 모으기로 한다. 그녀의 지인에는 중고 옷을 사고 파는 마녀 님이 있는데 그녀는 의류수거함에서 훔친 옷을 마녀에게 판다. 그다지 수긍이 가는 분배는 아니지만 그녀는 의류수거함을 털면서 호주로 가는 꿈을 부푼다.

한창 공부를 하고 있어야 할 고등학생 소녀가 밤마다 의류수거함을 터는 모습을 상상하기라 쉽지 않다. 입시에 대한 좌절을 도둑질로 풀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걸어가는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사연을 들쳐보면, 도로시가 '의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녀는 의류수거함을 털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노숙자, 북한에서 온 카스 삼촌, 마녀가 자주 가는 식당 주인 마마, 그리고, 그녀의 인생에서 어떤 확신을 안겨주었던 195. 거리에서 만난 인연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폐지를 줍고 다니는 할머니에게 선의를 베풀게 한다.

상냥한 마음을 안겨주는 글이란 무엇일까. <충사>나, <나츠메 우인장>을 보면서 늘 그런 생각을 했다. 이 만화들은 상냥함을 기억하게 한다고. <오즈의 의류수거함>이 그러했다. 각각의 사연을 펼치면 그다지 행복하지도 않지만, 그런 기억을 토대로 모두 저마다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숙자 씨는 알코올 중독자인데, 술을 그만 마시라는 도로시의 말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봐, 무언가에 중독되지 않고서 어떻게 이 누더기 같은 세상을 버티겠어. 때로는 중독도 살아가는 힘이 된다구."(58p)

교양과 지식을 겸비한 숙자 씨의 삶은, 어딘지 모르게 피곤함이 묻어 있다. 아내와 함께 수의사가 되어 좋아하는 동물과 함께 살아갈 삶을 꿈꾸지만, 구제역으로 인해 살처분을 해야 했던 과거는 바로 현재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최근에 조류독감으로 인해 살처분을 당한 오리와 닮을 떠올렸다. 이 글을 보면서, 내가 살처분을 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심정을 인터뷰한 기사를 떠올렸다. 그것은 사랑하는 것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었다. 좋아하던 동물과 이별을 하는 것이었다. 동물에 대한 강한 애정이 있기에 숙자 씨의 아내는 그렇게 세상을 떠난 것이겠지. 이별을 감당할 수 없어 숙자 씨는 거리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삶을 택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는 바야. 아니, 이미 뇌가 없는지도 모르지. 하루하루 생각 없이 보내니까. 그런데 재밌는 건, 생각이 없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는 거야. 나란 인간은 생각이란 걸 하게 되면 추락하게 되거든."(62p)

도로시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상처를 지니고 있다. 주인공인 도로시조차 그렇다. 입시의 좌절로 인한 자살충동. 그러나 자살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던 그녀. 그러나 같은 상처를 가져도 밝고 희망찬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다. 카스 삼촌이 그러했다. <자유로운 삶>에서 공산주의의 삶을 살짝 엿보았지만 <오즈의 의류 수거함>에서 다시 접한 북한의 실상은 동정을 뛰어넘어 분노마저 일었다. 계급이 아직 존재하는 세상, 맛있는 것도 먹지 못하고 굶어야만 했던 삶. 부잣집 친구 집에서 배 부르게 먹고 와서 그걸 모두 토해내 가족을 먹였다던 카스 삼촌. 그러나 남한도 그다지 행복한 세상은 아니었다. 돈이 없으면 멸시를 받아야 하는 일종의 계급 사회였다. 그렇지만 카스 삼촌은 자신이 먹고 싶은 라면이나 맥주를 맘껏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내 자신을 시키는 대로 일만 하는 기계라고 생각하면 됩네다. 기계는 아무것ㄷ 느끼지 못하잖습네까? 분노도, 슬픔도, 고통도."(88p)

한국의 현실을 무서우리만치 꼬집는 글이었다. 어딜 가도 계급은 존재한다. 학교에 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런 무서운 현실에서 뒤쳐지지 않으려고 바동거린다. 모든 것이 경쟁이고 약탈이다. 그런 세상에서 이 글은, 어찌 보면 작은 싹과 같은 글일지도 모르겠다. 상냥함을 틔우는 싹. 작지만 미미하지만 언제고 쑥쑥 자라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들 그런 상냥함 같은 글. 그렇기에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보듬어주고, 서로의 말을 들어주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그리움마저 든다.

도로시가 의류수거함을 털다가 찾은 어느 자살예고자의 모습. 그것은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누군가의 목숨을 중히 여기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누군가 죽겠다고 하는데, 그것을 모르는 척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때에 따라 달라지겠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도로시는 그를 찾아나섰다. 195를. 부족함 없이 자랐지만 마음에 자리잡은 공허함으로 약물중독이 되어버린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도로시가 만나자고 하자 수수께끼를 냈다. 하얀 건물이 있고, 사람이 평생 두 번 드나드는 역. 그곳에서 만나자고 했다.

도로시는 195에게 3달만 함께 의류수거함을 털자고 제안한다. 그는 흔쾌히 수락하고, 그러면서 그는 자연스레 의류수거함 멤버로 합류하게 된다. 잘생기고 공부도 잘한 그가 무엇이 부족하여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행복은 누군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는 것, 스스로 찾아나서야 한다는 것을 이 글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어느 누구도 내 행복을 결정짓지 못한다. 의류수거함을 털면서 도로시는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냈고 스스로 행복함을 만들어냈다. 그 반짝거리는 것은 밤하늘의 별처럼 또렷하여 어떤 어둠에도 물들여지지 않는 확신과도 같았다.

195의 이야기로 빠져들면서 마마의 사연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195가 살기를 바랐고 그 진심이 그에게 전해졌다. 195는, 자존심만 강했지 자존감이 부족했었다고 조심스레 고백을 했다.

"굳이 설명하자면 자존감은 포용이란 토양에서 자라나고 자존심은 경쟁이란 토양에서 자라나지. 자존감이 이타심이란 열매를 맺는 반면, 자존심은 이기심이란 열매를 맺어."

사람에게는 언젠가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것을 버티고 나아가느냐, 아니면 주저앉아 모든 것을 포기하냐는 본인의 몫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군가가 내밀어준 손이 때로는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195에겐 도로시가, 함께 의류수거함을 털면서 만난 사람들이 그래주지 않았을까. 혹은 도로시도, 마마도, 숙자 씨도, 마녀도, 카스 삼촌도 알게 모르게 지탱을 받지 않았을까. 그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선한 마음으로 폐지 할머니의 집을 고쳐주고 보일러를 놓아준 것도 이해가 되었다. 도움을 받았기에 도움을 주는 것, 그들은 그렇게 정했다. 비록 그들이 고급 주택에 있는 의류 수거함을 턴 건 옳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이 글은 크게 보면, 도로시의 여행과도 같다. 의류수거함을 털면서 만난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 그들이 갖고 있는 상처. 그러나 작게 보면 어느 한 목숨이 구원받은 이야기였다. '자살'이라는 무서운 유혹을 뿌리치고 자신만의 길을 가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 생명을 중히 여기고 그 생명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상냥함이란, 어쩌면 아주 작고 미미하지만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요괴에게 상냥한 나츠메가 요괴의 사랑을 받듯, 벌레에게 배려를 한 깅코가 벌레들의 배려를 받듯. 그들이 한 행동은 어찌 보면 사소할 수도 있지만 사소한 것 하나로 인해 많은 것이 변하기도 한다. 기적이란 작은 사소한 행동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게 아닐는지.

도로시가 밤길을 나서면서 만난 사람들, 그간 놓쳤던 풍경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도 나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도 내가 놓친 건 없는지,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상냥해질 수 있는지를 돌아보며 이 글을 쓴 작가에게 무한한 감사함을 느끼게 되었다.

청소년 문학이란, "전문 작가가 청소년을 독자대상으로 하여 청소년들의 삶의 문제를 직간접으로 다룬 문학작품"(315p)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이 글은, 사전적 의미 그대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글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청소년기를 거친 어른들도 읽어야 하는 글이 되지 않을까. 상냥함을 가진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필요하니까. 최근에 울산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보면서, 사람들이 점점 분노를 제어하지 못한단 느낌을 받았다. 누구든 삶에 극단적으로 몰려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조금 상냥해지자, 조금 나를 배려하자. 조금 남을 사랑하자.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문학엔 청소년 대상이든 청소년 대상이든 그런 경계는 필요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오즈의 의류 수거함>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글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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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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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훌륭하고 고귀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절로 좋아하고 존경하게 된 거다.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나기를 그랬던 것 같다. 그들은 나의 뿌리이고 울타리이고 자랑이다. 나는 그들이 정말 좋다. 지금도 그렇다. 눈을 감으면 언제든 복숭아꽃 살구꽃이 환하게 핀 고향의 집에서 어머니가 나 오기를 기다리며 마당에 서 있는 게 보인다. 형님은 하모니카로 <클레멘타인>을 불고 아버지는 가마니를 짜고 새끼를 꼬고 있다. 어서 와, 어서 와. 누나들은 산나물이 담긴 바구니를 옆에 끼고 나를 향해 손짓한다. 할아버지의 글 읽는 소리, 할머니의 다정한 말소리. 동생들이 달려나온다. 석수다. 옥희다. 나는 마주 달려간다.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난다. 햇볕이 따뜻하다. 소가 운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내 아들 태석이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린다. 앞치마를 한 아내가 손을 닦으며 나를 바라다보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 다 있다. 보인다. 지금 같은 순간이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내가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 기쁨이 내 영혼을 가득 채우며 차오른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느낌, 개인의 벽을 넘어 존재가 뒤섞이고 서로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다를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진짜 나다."(365p~366p)



삶은 때론 어떤 의미로 처절하다. 가볍다가도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상승과 하락이 반복된다. 살면서 그걸 깨닫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삶을 버티느냐, 무게에 깔려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하느냐는 본인의 선택이다. <투명인간>은 한 인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해 보이고, 어느 누군가에게는 처절해 보이는 삶. 김만수의 삶은, 삶이란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한다. 기억하게 만든다.

이 글은, '투명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이 왜 투명인간이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을 알기 위해선 투명인간이 된 사람을 알아야 한다. 그가 김만수다.

김만수의 역사는 실로 엄청나다. 만석꾼이었던 집안이 할아버지의 일로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졸지에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개운리로 오면서 할아버지는 소를 사서 키우고 농사에 대하여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는 등 개운리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김만수의 아버지는 일자무식으로 농사만 아는 양반이었다. 할아버지와 뜻이 달랐다. 그래서 무조건 일만 했다. 그러나 술을 먹으면 성질이 사나워진다. 할아버지는 상냥하고 다정했으며 손주들에게 많은 지혜를 베풀었다.

김만수가 태어났을 때부터 머리는 크고 몸을 말라, 허약한 체질이었으니 부모의 걱정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발육도 느리고 말이 트는 것도 느려, '사람 노릇'을 할지 걱정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할아버지의 말을 무조건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아이였고 식구들을 위해 제 한 몸 희생하는 아이였다. 말이 트고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그는 무모하기까지 하고 바지런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김만수는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누나들을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노력했다. 석수가 자신을 무시하고 깔봐도 하하 웃으면서 동생에게 잘해주려고 했다.

그의 인생은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증언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형, 큰누나, 석수, 명희, 옥희, 친구들과 선생님, 어쩌면 김만수와 인연이 닿지 않았을 사람들까지. 태어나면서부터 자라고, 어른이 되어 투명인간이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김만수와 얽혔다. 그리고 그의 삶을 이야기했다. 김만수가 어떤 인간인지 철저하게 파헤쳤다.

정작 김만수 본인의 입으로 하는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 즈음에 그의 말이 독백처럼 존재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의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다. 그 점이 또 특별하다. 김만수 본인의 입으로 말하는 김만수의 삶이 아니라 주위에서 말하는 김만수의 삶. 이를 통해 삶이란, 어느 한 사람만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같다.

나는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삶의 파도를 느꼈다.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는 내 안을 휘저어, 삶을 다시 적었다. 김만수가 가족을 위해 치른 희생은 희생이었는가. 그의 행보는 전율케 했으며 때로는 복잡한 기분이 들게 했다. 자기만의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자기를 위한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이기적으로 자기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인가. 그가 동생들을 위해 제 한 몸을 깎아 만든 돈은, 분명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 그 한 몸 몸바쳐 일하고 일하고 일을 했다. 그렇지만 막상 또 돌아서서 생각하면 김만수가 원한 삶이 그러한 게 아닌가 싶었다. 부도가 난 공장을 지키겠다고 한 것이 불법이 되어버려 엄청난 빚이 떠안겨졌을 때, 그는 그것을 모두 갚겠다고 했다. 그때 식구들은 얼마나 힘들어했는가. 동생의 아이를 포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자신의 아이처럼 돌보았다. 송진주는 어찌 되었는가. 그의 삶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그 자신대로 열심히 살았다. 남들보다 배는 열심히 살았다. 그것은 위대하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어딘지 모르게 가슴이 서늘해지는 부분이 있다.

<투명인간>이 전해주는 그 서늘한 감각은, 어찌 보면 이 글 전반에 깔려 있는 사회문제 때문일 것이다. 김만수가 살아오면서 거친 수많은 정치상황, 노동현실,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져 온 상황들. 그것들이 맞물려 가난한 자들은 비참해지는 상황까지 가버리고 말았다. 성석제 작가가 말하는 <투명인간>이란,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지 못한 채 바스러져 간 사람들의 모습이다. 김만수가 결국 투명인간이 된 것은, 지배층에 의한 피지배층의 희생이다. 그것을 놓고 보면 투명인간이 되는 삶은, 지금 현실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태석이가 왜 투명인간이 되었을까. 그는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열심히 피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시를 받고 외면받았다. 태석이 바라는 건, 그저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그런 진심을 외면했다. 태석은 투명인간이 되어서야 그 존재를 인정받았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엄청난 빚을 떠안기도 한다. 삶은 얼마나 불공평한가. 세상은 얼마나 불공평한가. 여전히 이 시대에선 투명인간이 넘쳐나고 있다. 다리에서 떨어져 투명인간이 되는 사람, 손목을 그어 투명인간이 되는 사람. 그들은 투명인간이 되어서야 행복해지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더 고통스러워지는가. 성석제 작가가 말하는 '투명인간'은 소외되어 가는 현실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나. 독거노인, 고아, 가난한 사람들, 노숙자들과 같은 그런 삶. 삶은 모두에게 평등하다. 평등하기에 모두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불공평하다. 불공평하기에, 외면받는 현실이 벌어진다. <투명인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외면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 누군가의 삶을 외면하면 그는 바로 투명인간이 된다. 존재하지도 않는 이름을 붙잡으며 살아갈 이는 아무도 없다. 허상의 이름을 오래도록 생각할 사람은 없다. 투명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내 존재를 증명해야만 한다.

그 존재를 증명하는 길은, 김만수의 말처럼, 살아야 할 것이다. "아픔도 슬픔도 없이 모두가 평등한(367p)" 삶이 투명인간의 삶이라면 "아픔도 슬픔도 존재하고 모두가 불평등한 삶"이 지금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어찌할 수 없이 만들어지는 차등은 사람들을 비참하게 하고 비굴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지만 이것을 이기는 방법은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남는 것이다.


"죽는 건 절대 쉽지 않아요. 사는 게 오히려 쉬워요. 나는 포기한 적이 없어요."(369p)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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