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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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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은 그곳에 머물기로 갑작스레 마음을 굳혔다. 어쩌면 저 위, 탄광촌 입구에서 카트린의 맑은 눈동자를 다시 본 것 같아서였을까. 어쩌면 르 보뢰 탄광에서 반란의 기운이 실린 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자신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는 갱 속으로 다시 내려가 고통받고 싸우기를 원했다. 그리고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본모르 영감이 들려준 사람들의 이야기와, 땅속에 웅크린 채 인간을 포식하고 있는 신을 떠올렸다. 만 명이 넘는 굶주린 사람들은 정체도 모르는 그 신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고 있었다.

 

 

에밀 졸라의 이름을 들을 때만 해도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느꼈다. 나는 도저히 에밀 졸라의 작품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부정적인 예감. 그만큼 에밀 졸라의 이름에서 주어지는 압박은 어마어마했다. <제르미날>을 선뜻 집어들 수 없는 까닭도 그 압박 때문이었다.

 

자연주의 문학가 중 한 사람으로서 에밀 졸라가 적은 작품은, 개인보다는 집단을 하층민의 삶을 주로 표현되었다고 한다. <제르미날>은 노동자들의 파업을 여실히 보여준 작품으로, 그들의 삶은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어 저 위로 향하려는 어떤 몸짓을 담고 있었다. 탄광에서 일하는 수천 명의 노동자들의 삶이 <제르미날>에 담겨 있었다. 어디 인간뿐이겠는가. 탄광에서 탄차를 운반하는 말들의 인생 또한 담겨 있으며, 탄광 주위를 감싸는 운하를 비롯한 산사나무, 떡갈나무와 같은 나무의 생도 함께 담겨 있다.

 

<제르미날>이 뜻하는 단어는 혁멱령인 '7월'을 뜻하는 단어라고 한다. 그가 왜 이 작품의 제목을 <제르미날>이라 지었는지는 책을 읽어봐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노동자들의 파업을 담은 이야기지만 각 개인으로 들어가면 사랑, 질투, 야망과 같은 온갖 것들이 담겨 있는 대서사시인 것이다. 기계공이었던 에티엔이 르 보뢰 탄광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런 예감을 느낄 수 있다. 에티엔의 성격은 불 같은 성정을 드러내다가도 이내 인간적이고 착실하고 성실한 면모를 보인다. 에티엔의 모습은 <제르미날>에서 보인 노동자들의 모습을 닮았다. 그들은 쉽게 분노하다가도 어느 힘 앞에서 두려움을 보이면서 고개를 숙인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어 언제고 다시 폭발할지 모른다는 그런 예감을 보인다. 에티엔은 자신의 안에 있는 유전자적인 살인충동을 어쩌지 못해 노동자들을 인솔한다. 그는 싸우고 싶었고 싸우기 위해 지도자가 되었다. 그가 지식이 짧아, 비록 그들을 온전히 이끌지 못하였다고는 하나, 그는 그들에게 씨앗을 던져주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 씨앗이 조금씩 틔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역사가 격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에밀 졸라에 대해 알지 못한다. <제르미날>을 읽으면서 에밀 졸라에 대해 찾아보기도 하고 그가 말하는 자연주의에 대해서도 이해하려고 했지만 결국 나는 <제르미날>로 돌아와 에티엔과 마외, 르 마외드, 카트린, 샤발과 같은 인물들을 요목조목 뜯어보기 시작했다. 결국 <제르미날>은 르 보뢰 탄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담은 이야기므로 노동자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들이 파업을 해야만 했던 이유는 굶어죽지 않아서였다. 헌법 제 10조에서는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을 규정하고 있다. 결국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들은 싸움을 택한 것이다. 저 밑바닥에 있다고 짓밟히기보단, 자신들이 직접 무기를 들어 생존권을 주장한 것이다. 프랑스에 있었던 시민혁명처럼 그들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빵을 달라!"라고 노동자들은 외쳤다. 그들은 부르주아가 사는 곳으로 향하면서 그리 외쳤지만 그들이 정작 싸우고 싶었던 자는, '신'이 아니었나 싶다. 신에 의해 계급이 정해지고 신에 의해 가난한 자와 부자가 정해진 것이라면 억울한 일이지만, 그들이 부르짖었던 혁명은, 저 하늘 위에 존재하는 신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신의 위대한 힘 앞에서 그들은 고꾸라지고 말았고 탄광이 무너지면서 대자연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라나고, 자라나 결국 그들을 굶주리게 한 적을 굴복시킬 것이다.

 

처절하면서도,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었다. 자연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은 하나로 뭉친다. 네그렐이 갱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노동자들을 구하기 위해 손수 앞으로 나섰던 장면은 결코 잊히지 않는다. 그들은 적이었지만 자연 앞에서는 별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함께 뭉쳐서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싸운다는 것, 생존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게 아닌가 싶다. 노동자들이 굶주리지 않기 위해 부르주아를 상대로 싸우듯, 죽지 않기 위해 자연을 상대로 싸우듯, 싸움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비록 무너진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패배한 것이 아니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렇게 인간은 자라나는 것이다.

 

 

 

이제 하늘 높이 떠오른 4월의 영광스러운 태양이 생명을 배태하고 있는 대지를 따사롭게 비추고 있었다. 출산의 기운을 머금은 산허리에서 삶이 솟아나오고 있었다. 나무의 새순들이 기지개를 활짝 켜면서 초록빛 나뭇잎을 터뜨리고, 새로운 풀들이 대지를 뚫고 나올 때마다 들판 전체가 가늘게 떨렸다. 사방에서 따뜻한 기운과 갈망하는 씨앗들이 부풀어오르고 키가 자라면서 땅을 뚫고 들판 위로 솟구쳤다. 속삭이는 소리와 함께 나무의 수액이 넘쳐흘렀고, 싹트는 소리는 뜨거운 입맞춤 소리가 되어 널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또다시, 여전히, 땅과 가까워지는 것처럼 동료들이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더 또렷이 들려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햇살이 비치는 젊은 아침에 전원이 잉태한 것은 바로 그 소리였다. 사람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복수를 꿈꾸는 검은 군대가 밭고랑에서 서서히 싹을 틔워 다가올 세기의 수확을 위해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머지않아 그 싹이 대지를 뚫고 나올 것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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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문학동네 시인선 60
강정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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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죽었다. 죽어서 귀신이 되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나는 다음 생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전생의 기억을 가진 내가 저승으로 갈 수 있을 리 없다. 나는 귀신이 되었고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 귀신은 죽은 존재인가, 살아있는 존재인가. 스쳐지나가는 풍경은 많은데, 물에 떨어지다가도 하늘로 솟구치고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이 되다가 어느 여인의 음부로 들어가는 생명이기도 하는데, 이는 내가 귀신이기에 보이는 풍경인가.

 

아니다, 아니다. 나는 오늘 살았다. 살아서 귀신이 되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나는 다음 생을 포기했다. 포기해서 전생을 되짚기로 한다. 도깨비불이 되어, 어딘가로 달려가는 사슴이 되어, 후회로 점철된 인생을 맹렬하게 추격하기로 한다. 나는 여인의 음부를 찢고 나오는 귀신, 그대 앞에 선 허여멀건한 도깨비불. 유리의 눈으로 세상을 볼 것이라오. 불길은 거세지고 날카로운 파편은 살을 찢으며 고통을 보인다. 살아 있기에 고통은 더욱 끔찍하고 현실은 잔혹하다. 나는 어느 숲으로 가고 싶다. 고통 받지 않고 내 삶을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곳으로. 그곳에서 나는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최초의 책으로 태어나고 싶다.

 

그러나 살아 있지도 않고 죽어 있지도 않은 세상에 서 있다. 나는 그곳에서 오르페우스를 만났다. 에우리디케를 잃어버린 오르페우스는 나와 같은 귀신이 되어버렸다. 그는 죽은 아내를 살리기 위해 저승으로 향했다. 하데스에게 에우리디케를 건네받고, '지상에 도착할 때까지 뒤를 절대 돌아보지 않는 조건'으로 저승을 빠져나가게 되었지만 그만 그는 에우리디케를 돌아보고 말았다. 무엇이 그를 돌아보게 했을까. 어쩌면 그는 그때 무언가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도깨비불과 같은 것. 자신이 잡고 있는 손이 에우리디케의 손이 아닐지도 모른단 불신. 결국 에우리디케는 다시 저승으로 끌려가게 되었고 오르페우스는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오르페우스는 '죽음'을 맞딱뜨렸고 그 결과 '살아있는 귀신'이 되고 말았다. 그는 살아있으며 죽어있었고 죽었으면서도 살아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에우리디케는 하얀 꽃 같은 사슴이었는데, 사슴이 불길에 휩싸여 죽고만 것이다. 에우리디케가 명계로 끌려가는 것은 오르페우스의 영혼을 죽게 하였고, 후에 트라키아 여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그의 육신을 죽게 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잃었는가. 무엇을 잃어 귀신이 되어야만 했는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몰라 헤맨다. 물가에서 서성이기도 하고 어느 나무 아래로 가보기도 한다. 창가에 가서 어느 여인의 흔적을 찾아보기도 하고 물구나무를 서서 지나간 추억을 회상하기도 한다. 그것은 모두 귀신이 된 내가 한 행동. 나는 누군가를 잃었기에 귀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누구인가. 누구이기에 이렇게 선명하면서도 모든 것을 가릴 듯 흐려진단 말인가.

 

어쩌면 삶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자들을 찾아 헤매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두 최초의 여자에게서 태어났고 죽음에 의연했다. 살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은 귀신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제 몸을 흐리게 함으로써 세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귀신이 된 나는, 아니, 우리는, 아니, 그들은, 귀신이 되면서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살아있기에 희망을 가지는 것이다.

 

 

 

물위에서의 정지

 

날아오르기 직전일 수도

떨어져내리기 직전일 수도 있다

 

나는 물을 보고 있었다

그림자와 실체 사이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가라앉는 것과 떠오르는 것 사이의 정물이 되어 있었다

 

물 표면에 뜬 그림자가 움직인다

 

지나가는 것일 수도

다시 돌아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내가 움직일 때

그림자는 고요히 멎은 채

어느 먼 곳의 파도 소리를 이끌고

물위에 뜬 작은 꽃잎들의 일상 속에서 지분댄다

 

물위에서 멎은 것과

물속응로 움직이는 것 들 사이에서 울려나오는

깨알 같은 총성

물방울들의 내밀한 화간

 

죽어가는 순간일 수도

다시 깨어 다른 물체가 되는 순간일 수도 있다

 

바람은 꽃잎에 내려앉아 투명한 옷을 벗는다

 

꽃이 꽃이라 불리기 전에 태어났던 물고기들이

허공에 멎은 나를 본다

 

그림자는 그물처럼 물위를 휘저어

물고기 잇자국 명료한 그날의 해골을 건져올린다

 

웃고 있는 흰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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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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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다 한가운데 있는 것을 상상한다.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처럼. 어디로 향하는지도,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른 채 나는 그저 바다 한가운데에서 전부를 드러내고 있다. 내 발밑에는 까마득한 어둠을 벌리고 있는 바닷물만이 있고 내 머리 위로는 창창하게 별이 쏟아지는 하늘이 펼쳐져 있다. 세상의 끝에 서서 바라보았다면 아름다웠을 풍경은, 바다 한가운데라는 현실로 돌아와 춥고 시리고 외로움만을 부가시킨다.

 

백수린의 소설은 그 바다를 떠올리게 하였다. 깊고 푸른 바닷물 한가운데에 표류하고 있는 어떤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것. 고독하고 슬프고 괴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구원과도 같은 것을 예감하게 한다. 잃어버린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잃어버린 것을 찾을 수 있다고 예감한다. 누군가는 떠나가겠지만 다른 누군가가 함께 할 수 있다고 말해준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백수린은 진실된 목소리로 말한다. 엇나간 단어의 의미를 가진 여자에서부터, 동거인이든 동거인의 남자친구이든 갈망을 하는 여자에서부터, 교포를 사랑해야만 했던 여자에서부터, 베를린으로 훌쩍 떠나버린 여자에서부터, 착각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모를 곳에서 아이를 잃어버린 여자에서부터, 이국의 여자를 통해 옛여인을 떠올리는 남자에서부터, 프랑스에서 홀로 유학을 떠난 여자에서부터, 유령이 출몰하는 곳에서 사는 어느 남녀에서부터, 말과 함께 하는 여인이 말을 잃어버린 남편과 함께 하면서부터 무언가 스러지고 무언가 생겨나는 것을 백수린은 나지막이 말해준다.

 

새벽이 오기까지는 참으로 멀다. 출렁이는 몸에는 절망만이 가득하다. 그렇지만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 허우적대야 한다. 삶이란, 그런 절망을 끌어안고 허우적대는 것이다. 절망이 바스러질 때까지 허우적대고 바동거리고, 저항을 하다가 어느 끝에 가서야 발견되는 희망을 찾는 것. 감자와 신념과 개를 잘못 알고 있는 그녀가 마지막에 그녀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발견했듯이 말이다.

 

바로 가까이에서 본 절망은 <자전거 도둑>의 그녀다. 안나, 아름답지 않았을 안나가 P를 만나고서 얼마나 아름다워졌는지. 모든 불행의 탓이 자전거 때문이라고 하지만 모든 불행은 P가 등장하고서부터다. 그녀는 안나를 질투하고 P를 질투하고 제이를 질투한다. 절망의 끈적끈적한 감정 안에서 안나의 가계부를 훔쳐보고 안나의 립스틱을 바르고 안나의 자전거를 훔치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안나의 자전거에 체인을 단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는 질투하기를 그만둔다. 절망의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자신과 같이 하는 존재만 있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 존재를 간단히 찾을 수 있을까. 폴이 그런 존재라고 그녀는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한국어 강사로 폴과 늘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폴은 너무나 간단하게 유리꼬에게 가버렸다. 아니, 간단한 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폴에겐 아버지라는 산이 존재했고 유리꼬와 함께 하기엔 그 존재가 거대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만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폴은 철저하게 미국인으로 살길 바라던 아버지는 폴이 한국인이란 사실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대륙 너머까지 결혼을 하겠다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미국인이란 껍질이 얼마나 허무한지 알게 될 것일 거다. 폴은 폴답게 살아야 했으므로. <폴링 인 폴>을 읽으면서 나는 내내 하 진 작가의 <자유로운 삶>을 떠올렸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주인공이 아들에게만큼은 중국의 처절한 역사를 보이지 않으리란 각오로, 시민권을 따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한다. 시를 적고 싶었지만 미국에서 정착을 하기 전에는 그럴 수 없었던 주인공. 자유로운 삶이란 대체 무엇이었는지, 그것을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들은 오랜 시간을 고민했다. 폴도 그러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있어서 자유로운 삶이란 무엇이었는지 고민을 하고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도 폴도, 유리꼬도 방황을 했던 것이라고.

 

그렇다면 절망 속에서 견디는 것은 무엇일까. 삶은 견디는 것이다. 베를린까지 유학을 갔지만 그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래도 그를 따라잡고 싶었다. 역사와 같은 학문에 있어서 눈을 반짝이면서 대하는 그를 따라잡고 싶어서, 첼로를 그만두고 음악사를 공부하러 베를린까지 왔다. 그러나 결국 그녀가 마주한 것은 나이가 들어버린 그였다. 너무나 쉽게 지치고, 너무나 쉽게 피로해하는 남자. 그렇지만 그녀는 견뎌내야 함을 안다. 유태인 박물관에서 포로수용소 체험을 하는 동안 끈질기게 버텨냈던 그 어둠처럼. 언젠가 절망은 끝이 나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았던 것일까.

 

정말 끝이 날까. 어쩌면 그것은 누군가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계속 존재했던 현실이었는지도 모른다. 수족관에 딸과 함께 들어갔지만 아이를 잃어버린 그녀는, 아이를 찾기 위해 여러 곳을 둘러보지만 정작 아이가 언제 자신과 함께 있었는지 기억하질 못한다. 유명한 스타라는 그녀의 남편. 결국 경찰서까지 가서 실종신고를 하려 하지만 경찰은 그녀에게 터무니없는 진실을 들려준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는 것은 현실일까, 환상일까. 그녀가 환상에 빠지는 순간일까,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일까. 어떤 것이든 그녀는 절망할 것이다. 아이가 허구이든, 아이를 진실로 잃어버린 것이든. 절망은 되돌아오는 화살처럼 그녀의 심장을 관통한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있다면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어둠으로 가라앉는 나에게 손을 내뻗는 존재가 있다면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리는 킴이 그런 존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자신과 함께 한 것도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한국으로 귀국한 후에야 그것은 자신의 말도 안 되는 환상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궁에서 다른 외국인을 찾아냈지만 그것도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천 년을 버틴 은행나무 사이에 앉아 있는 까마귀들은 그의 허망한 꿈을 알아낸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푸른 창공에 펄럭이는 까만 날개는 얼룩처럼 남아, 리의 현실을 괴롭힌다.

 

그래도 결국, 누군가 함께 해줄 것이다. J선배를 찾아 유령이 출몰하는 곳으로 간 그처럼 말이다. 점점 작아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J선배를 떠날 수 없었다. 유령이 출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실체화된 절망일 것이다. 모든 것을 불태운다는 것은, 그들의 삶이 재기할 수 없도록 모든 것을 없애버린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그들은 서로를 떠날 수가 없다. 서로 함께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함께 한다는 것은 깊은 어둠을 견디게 하는 힘이다.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말을 잃어버린 남편이지만 그녀는 남편의 옆에 남는다. 점점 사라져가는 남편의 얼굴은, 그녀가 가진 죄악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이대로 사라지면 좋겠다는 그녀의 바람. 그렇지만 그녀는 남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오래도록 잃어버린 것은 비단 말뿐만은 아닐 것이다. 어떤 애정과도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저 멀리 치워버린 희망일지도 모른다. 삶을 버틴다는 것은 어떤 절망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라고, 이 책은 말해주었다. 절망을 외면하기보단 절망을 사랑하라고, 프란시스의 잠의 시처럼 말이다.

 

결국 새벽은 온다. 통이 터오는 아침이 오면 바닷속에 있다 하더라도 덜 외로울 것이다. 그 한 줌의 햇살을 위해 우리는 살아가고 있노라, 그들은 말해주었다. 그렇기에 포기할 수 없는 삶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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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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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가 있다. 죽은 자가 있다. 남자를 잘 만나겠다고 한 여자가 있다. 나이가 든 할아버지를 돌봐야 하는 청년도 있다. 갱년기를 피하고 싶은 여인이 있다. 시골에서 잘 살아보고 싶은 아이의 아빠가 있다. 범죄를 침묵해버린 대리운전기사가 있다. 잠을 갈망하는 여인이 있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하나의 의문을 품고 살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무엇이 나은 삶인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나를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이 인생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무기력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집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죽어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저 편해지고 싶은 마음뿐일 텐데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게 하고 그리운 이를 만나게 하고, 결국에 자신의 죽음을 마주하게 한다. 절망은 그렇게 반복된다. 누구보다 좋은 남자를 만나야겠다고 단짝친구와 경쟁을 하고 결국 아이를 가졌지만 남자가 떠나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맞이하기도 한다. 절망은 그렇게 반복된다. 자고 싶은데, 정말 자고 싶은데 잘 수 없어서 괴로워한다. 나는 자고 싶은데, 잠을 자고 싶은데 밤마다 들려오는 소리에, 누군가 죽었다는 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다. 절망은 그렇게 반복된다. 인생 별 거 있나, 한판 살다 가는 거지, 하고 호기롭게 살아왔는데 나이가 들어 몸이 쇠약해지고 점점 하루 벌어 살아가는 세월이 버거워진다. 빚까지 져서 결국 끝까지 절망적이 된다. 절망은 그렇게 반복된다. 나이가 든다는 게 두렵다. 언제까지나 젊어지고 싶은데, 세월을 피할 수 없다. 스러진다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죽어버린 왕들 앞에서 죽음은 그렇게 의연하게 버티고 서 있다. 하지만 절망은 그렇게 반복된다. 원한 것은 단란한 시골생활이었다. 어쩌면 낙원을 꿈꿨는지도 모르겠다. 돼지 축사만 아니었더라면, 그놈의 개만 아니었더라면 조금은 나았을지도 모른다. 전원의 꿈은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그렇게 절망은 반복된다. 겨울은 춥다. 대리운전으로 살아가기도 퍽퍽한 세상이다. 일이만원 때문에 새벽 늦게까지 운전을 해야 한다. 핑크색 옷을 입은 뚱뚱한 여자는 은밀하다. 그리고 그 비밀을 알아버린 남자는 더 은밀하다. 절망은 그렇게 반복된다. 봄은 왜 그렇게 따스한가. 모든 것을 녹아버릴 것만 같은 빛깔은 가난을 더 두드러지게 한다. 어둠을 더 짙게 만든다. 할아버지와 살아가야 하는 젊은 청년은 그 안에서 무기력을 느낀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느낀다. 절망은 그렇게 반복된다.
 
그러나 그 절망은 정녕 모든 것을 앗아가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모두 싸웠다. 불가항력적인 죽음은 물론이요,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는 싸움에서, 삶이라는 거센 파도 앞에서, 잠이라는 끈적끈적한 존재 앞에서, 외로움, 근심, 수렁텅이와 같은 질척한 삶 앞에서. 그들은 평범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도 같지 않다. 하루하루 벌어 사는 사람에게 편안함이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꾸역꾸역 버텼다. 버티는 게 그들의 싸움법이다. 결국, 누군가를 죽이고 무언가를 불태워버리긴 했지만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음을 그들은 알고 있다. 그게 엿 같은 방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그들이 살아있다고 나타내주는 증명이기도 했다. 저항, 그들은 저항했다. 거세게 몰아오는 인생의 파도 앞에서 악다구니를 쓰며 저항한 것이다. 
 
너는 그렇게 살 수 있는가.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너는 절망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희망을 찾아낼 수 있는가. 또 다른 이가 물어왔다. 도망치기만 하는 건 인생이 아니다. 다른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절망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유쾌함을 찾아낸다면 그것은 결코 절망적인 삶이 아닐 것이다. 천명관의 소설은 그것을 보여주었다.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빛을 찾아낸 것이다. 그것은 혈육이거나, 아니면 한 마리의 칠면조이거나, 이혼한 마누라이거나, 이미 죽어버린 아이이거나 하는 것들이다. 노동자가 살아가는 힘은 자기 가까운 곳에 있다. 그것을 잃어버린 순간 그들은 망가져버린다. 그렇기에 필사적이 되는 것이다. 지키기 위해, 지키기 위해, 또한 살기 위해. 
 
인생 별 거 있나. 거칠게 한판 살다 가는 거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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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도를 사랑한다 - 경주 걸어본다 2
강석경 지음, 김성호 그림 / 난다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2014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바다 깊숙이 수많은 영혼이 가라앉았고 세계 곳곳에서 내전의 소식이 들렸다. 비참하고 슬픈 소식을 접하면서 나는 내 나라에 대해, 내 자신에 대해 생각을 해야만 했다. 내가 진정 돌아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나는 어디에서 나와 어디로 흘러가야 할 것인가. 도대체 어디로 회귀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그때 만난 책이 강석경 작가님의 <이 고도를 사랑한다>였다. 경주를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한 한 소설가는 이 책에서 이렇게 밝힌다.

 

 

자연인 듯 이지러져 천오백 년 전 고분이 도심에 솟아 있는 풍경은 근원적이었다. 김씨 왕들의 거대 능을 산책하며 내 속에 유목민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알았고, 비로소 한국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다._6p

 

어느 도시에서 자신의 근원을 밝힐 수 있다면, <이 고도를 사랑한다>의 저자인 강석경 선생님은 실로 행복한 사람이다. 나는 아직 인생이 짧아 근원이라는 것을 추구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지만 경주를 역사에서부터, 자연에서부터, 어떤 영혼에서부터 밝히는 글을 읽고 나니 내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알 것 같았다. 나의 부모님을 넘어, 내 핏줄이 있게 해준 조상들을 넘어, 멀고 멀고, 길고 긴 어떤 시작점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그것은 내가 평생을 함께 한 자연이었음을.

 

어릴 때부터 내 옆에는 푸른 녹음과 활짝 핀 꽃과 잠자리와 매미와, 호박 덩굴이 함께 했다. 내가 사는 곳은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는 외지였고 산골이었고, 겨울이 되면 등교시간이 아닌데도 새벽 일찍 학교에 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늘 조용한 자연을 마주했는데 그때 당시엔 그것이 나와 함께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어릴 때에는 늘 함께 있던 나무와 꽃과 새들이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학교를 다녀오면 아이들과 어떤 도구도 없이 그저 산을 누볐다. 길이 있으면 길을 따라 길이 없으면 나무와 나무 사이를 지나쳐, 모든 것을 눈에 담으려고 했다.

 

경주는 그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한때 경북 영덕에서 산 적이 있다. 그때 학교에서 소풍으로 경주를 찾은 적이 있다. 불국사, 석굴암, 그리고 천마총이 있는 거대한 고분. 산처럼 우뚝 솟은 능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세상이 펼쳐졌다고 여겼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며 책을 읽었다. 역사와 현재가 어우러져 살아 있으니 신화의 나라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싶었다. 박혁거세의 신화부터 시작하여 김유신과 삼국통일을 했던 문무왕까지. 오랜 신화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곳이 바로 경주였다. 그 경주를 잊고 있었다는 게, 어릴 때 좀 더 유심히 살피지 못한 게 후회로 남았다.

 

도시에는 숱한 이야기가 숨어있다. 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당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도시 곳곳에 공기처럼 흩어져 숨을 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층 아파트가 지어질 것이라는 경주의 도시에서, 아주 오래된 것들이 사라지면 경주는 어찌 될 것인가. 경주 곳곳에 뿌리를 내린 자연의 모습이 사라지면 우리들의 회귀는 어찌 될 것인가. 신라인의 정기가 어려 있고, 자유로운 유목민의 영혼이 숨쉬는 경주에서 나도 몸을 누이고 싶다.

 

경주는 과거가 녹아들어 현재를 탄생시킨 곳. 아직도 그곳에는 신라인들의 향수가 젖어 있을지도 모른다. 거대한 능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곳에서라면 잃어버린 상상력을 찾을 수도 있겠다. 인간이 가진 위대한 유산은, 어쩌면 자연에게서 물려받았던 게 아닐까. 숨을 쉬면 들이마시는 공기처럼 경주에 가면 고대인들의 상상을 들이마시리라. 경주에서 나 역시 근원으로 회귀를 시작하리라.

 

모든 것을 채우기보단 비우는 삶처럼, 나 또한 자유를 알아가리라. 그것이 경주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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