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신념 종종 기만의 얼굴로 구현된다. 누구보다 잘, 그 여자에 대하여 안다는 믿음 역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 P310

시간이 이별을 앞둔 연인들의 말줄임표처럼 흘렀다. - P314

문영광은 한숨을 안으로 삼켰다. 이런 부류의 여자를 가끔 보았다. 다른 모든 것은 안중에 없고 오로지 자신의 순간적인 감정만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것들. 독기 어린 혀를 날름거리며 종일 제 몸을 쓰다듬는 것들. 새삼 구역질이 났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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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기억을 만지작거리고 있자면....



가을하늘이 파란 사탕 껍질처럼 펼쳐진 날...


영화 속에 흔히 등장하는 장면 하나. 여자 두 명이 함께 길을 걸어간다. 남자 주인공은 천진하게 걸어오는 그녀들을 발견한다. 두 여자 중 더 알려진 배우가 맡게 되는 여성 캐릭터는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고, 다른 한 여자는 어딘가에 홀로 남는다. 연수와 다닐 때면 ‘다른 한 여자‘의 역할은 항상 내 차지였다. 사랑에 빠지는 여자와 혼자 남는 여자,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여자가 있었던 것이다. - P47

그런 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라고.언젠가 자신이 신을 찾게 될 거라는 믿음이나 언젠가 예술을 하게 될 거라는 예감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확신하게 되는. 영혼에 새겨진 주름 같은 것이라고.
(...)
믿음이란 상대가 자신을 해치거나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안심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 P98

나는 당신이 자라면서 겪어야 했던 일들에 책임 있게 나서준 적이 없었고, 아버지의 경우는 굳이 떠올리고 싶지도 않지만 쥐어짜려야 쥐어짜낼 기억조차 없다. 따라서, 당신이 아이를 위해 하는 모든 일은 어쩌면 아이를 위하는 그 이상으로 당신 자신을 위하는 길이기도 했다. (...) 타인에게서는 보상받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당신을 위한 것. 당신은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의식하며 아이를 사랑한다. 그렇기에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면서, 동시에 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믿는 것이다. - P206

로그라인. 영화의 주제와 줄거리는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말로 할 수 있었다면 말로 했지. 구태여 영화로 말하려고 하지 않았겠죠. 한마디로 될 일이었으면 그냥 한마디로 말하면 되잖아요"라고 말하고싶었으나, 늘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로 요약되기를 거부하는 말이었고,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어째서 이야기를 그렇게 써야 하냐고 반문하는 이야기였는데.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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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좁은 야채 칸에 꼭 붙어서 뭉그러져 가는 애기 감자 두 알처럼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가끔 발작적으로 그에게 알려주고 싶기도 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열하고 졸렬한 방법으로.
(...)
그러나 말하지 않았다. 말없이. 고향 마을 지도처럼 익숙한 그 손을 꼭 잡고 잠들었다. 그때는 그런 것이 복수라고 생각했다. - P231

그녀가 아는 한 그는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까발려 햇빛 아래 드러내느니, 진회색 방수천으로 덮어 응달을 창고에 넣어두는 것이 낫다고 믿는 사람일 것이다. 창고의 문을 밖에서 잠그곤 열쇠를 꿀꺽 삼켜 버리는 것이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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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진실의 외피를 둘러쓴 악의로 가득 차 있다는 것.
...타인을 겨냥한 악의는 어쩌면 입구를 단단히 동여맨 풍선 같았다.
(...)
입술을 열면 예기치 못한 말들이 딸려나올까봐서 혀를 동그랗게 오므렸다.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 말들을 작은 어금니로 오독오독 깨물었다. - P163

예술가로 타고난 영혼이라면 마땅히 그럴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친구는 없어도 괜찮다고 아이는 결심하고 있었다. 그 마음은 방패이자 과녁, 빌헬름 텔 아들의 머리 위에 놓인 사과 한 알처럼 딱딱했다. - P164

다희는 언제나처럼 단정적이고 단호한 투로 말했다. 내용이 무엇이든, 그 아이의 말을 듣고 있는 순간에는 그 의견이 세상에서 가장 타당한 것처럼 느껴진다. 스스로가 하는 말이 옳다고 굳게 믿고 있는 자만이 내뿜는 특유의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 P175

어느 보슬비 내리던 봄날, (...) 그때야말로 솔직히 털어놓기에 알맞은 순간이었노라고 이제야 그는 생각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아득하게 멀어져 간다. 그것이 거짓말의 속성이었다. - P178

다희의 말을 듣고 있으면 이 세상이 아주 쉽고 단순한 질서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흰 스케치북 위에 4B연필로 반듯하게 내리그은 몇 개의 선들과, 그 사이사이에 듬성듬성 찍힌 소박한 작은 점들. 그리고 웬일인지 그 점들과 선들을 미치도록 수긍하고픈 심정이 된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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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열세개의 창이 달린 집

목 끝까지 블라우스 단추를 꽉 채우고 도수 높지 않은 날렵한 뿔테안경을 걸친 품이, 열정적인 커리어우먼의 분위기를 풍기고 싶어 안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 P128

첫인상과 달리(...) 그는 반성했다.  공연한 선입견 때문에 오판했다. 오직 객관적 사실만을 믿어야 했다. 의지할 대상은 팩트뿐이었다. 주관적 감정을 개입시켜 한 인간을 판단하면 자칫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위험하다는 걸 잘 알면서도 좀처럼 고치지 못하는 습성이었다. - P130

언제든 제 발로 떠날 수 있는 곳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 그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빼도 박도 못하고 한 곳에 꼼짝없이 붙들려 있다는 절망감만큼 끔찍한 건 또 없을 거였다. - P134

타인의 입을 통해 확인할 때, 현실의 고통은 더 가혹하게 일깨워지는 법이었다. - P137

여자는 얄따란 티슈를 한 장 뽑아 눈언저리를 지그시 눌렀다. 울음 속으로 도망가지 않겠다는 듯이 단호한 동작이었다. - P148

그늘진 골짜기에서 자라난 2월의 꽃나무처럼 우울한 인상이 도드라졌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 본인의 의지는 아닐 것이다. 소년이랄 수도 없고, 아직 청년이라 부르기도 모호한 나이.
(...)
소년은 종종 위험하다. 참는 게 더 나은 한 순간을 참지 못한다.
(...)
묻는 말에만 대답했으며, 말수가 적고 느렸다. 가장 나쁜 유형의 참고인이었다.
(...)
엉뚱한 소리를 마구 늘어 놓는 축보다 한결 골치 아팠다.
(...)
명문대 의대생이라는 학벌, 허여멀끔한 외모, 돈 많은 아버지까지 두루 갖추었으니 또래 여자애들 사이에서 인기가 꽤 많을 터였다. 세상은 공평한 곳이 아니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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