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기업, 로마에서 배운다 (반양장) - 로마인에게 배우는 불멸의 경영법칙 22
김경준 지음 / 원앤원북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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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리뷰>

   년이라는 시간은 꽤나  시간이다 시간동안 하나의 제국이 유지된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일이다 놀라운 일을 해낸 나라가 바로 로마다팍스 로마나 시간동안  넓은 영토를 평화롭게 통치해온 비결은 무엇일까?

  “위대한 기업로마에서 배운다 로마의 강인함과 견고성을 경영적 관점으로 해석하여 설명한 책이다 책에서 말하는 경영법칙들은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합리적 분업 구조라든지 개방적 인재 등용노블리스 오블리주  오늘날 관점에서 살펴봐도 로마는 배울  많은 나라다.

  경영적 관점에서 해석한 거지만  경영자가 아니더라도 읽을만 하다역사적 이야기는 교훈이 아니더라도 재미있으며 현실 사례와 연결한 것은 역사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준다.

  다만  책을  저자가 자본주의적 기업가 마인드에 지우쳐 있음은 경계하고 읽을 필요가 있다파업이나 복지에 대한 저자의 관점은 너무 나이브하다기업에 대한 비판도 있긴 하지만  비판은 너무 상식적인 수준이라 비교해보면 기업 쪽에  호의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 해도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에 선정된 책답게 배울 점이 많다건강한 조직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시사점을 얻고자 한다면  책은 일독할 가치가 있다.

 

<구절>

뼈아픈 실패경험을 성공하기 위한 무형자산으로 만드느냐아니면 책임자를 찾아 응징하는 푸닥거리로 만드느냐의 기로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실패할 때는 창조성이 자극되게 마련이다. -  게이츠 <미래로 가는 >

등반기 초반의 처절한 실패는 나를 힘만 믿는 청년에서 겸손함을 아는 강인한 사나이로 만들었다. - 엄홍길 대장

인간은 쉬운 싸움에서 이기는 것보다 어려운 싸움에서 패배하면서 비로소 성장한다. - 산악인  베스

조직의 속성상 실패자를 영웅으로 만들 수는 없지만그렇다고 범죄자를 만들어서도  된다.

로마인에게 있어 신이란 인간의 행동을 규율하는 절대자가 아니라 최선을 다한 인간을 도와주는 후원자였다.

정의나 평등 같은 추상적 가치는 필연적으로 해석자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기업이란 ‘생존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시장이라는 도로 위를 ‘이익이라는 연료를 태우면서 달리는 자동차와 같다.

역량 있는 지도자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이러한 군중심리를 적절하게 활용할  아는 사람이다.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개인적 신념에만 충실하면 되는 보통사람과는 처지가 다르다는 점을 개닫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듯이 조직이란 지도자를 중심으로 조직원들이 동심원을 그리면서 돌아가는 소우주다.

우수한 조직원으로 구성된 조직이라도 저급한 인간이 지도자가 되면 금세 저급한 조직으로 변모한다.

권력에 빌붙어 이익을 얻는 집단이 만들어내는 관성 때문에 저급한 지도자라도 교체하기는 쉽지 않다.

혈연 단계를 벗어난 사회를 규율하기 위한 기준은 문화에 따라 독자적으로 발전했다그리스인은 철학이었고 유대인은 종교였으나 로마인은 법률이었다.

 개인으로서는 아들의 죽음에 눈물 흘렸으나 동시에  아들을 죽인 죄로 고발된 피고에게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변명할 기회가 주어질 것을 보장한다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내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이  슬픔도 국민들의 온갖 목소리도 모두 무시하고 재판에 임해주는 것이다. - 로마 2 황제 티베리우스

분명한 원칙이 없는 미봉책은 갈등의 불씨만 남기고   문제를 잉태할 뿐이다.

용병에게 있어 참전이란 거래관계에 불과하지만 시민군에게는 공동체에 대한 명예로은 의무였기 때문이다.

전쟁에 나가 희생된다고 해도 재수 없어 죽었을  공동제가 인정하지도 기억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의무를 이야기하는 것은 허망하다.

현장과 멀리 떨어진 본부에서 시시콜콜 간섭하는 것은 현장책임자를 속박하고 조직을 관료주의에 물들게  뿐이다.

인간이란 권한을 주고 책임을 물으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게 되지만권한과 책임이 모호하면 자기보호본능이 발동해 수동적인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

달콤한 과실은 지도층이 맛보면서 조직원에게 희생만 요구하는 조직은 유지될  없다.

지도층이 보통사람들에게는 가장 소중한 목숨과 돈을 국가를 위해 바치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군대 가고 세금 내는 사람들은 국가가 아니라 몇몇 지도층의 안락한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헌신하는 것에 불과하다.

좋은 시절에 단맛만 즐기면서 어려워졌을  쓴맛은 보지 않겠다고 한다면 이미 타인을 이끌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시스템과 메뉴얼을 사람과 결합시키는 것이 바로 리더십이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면 자신의 능력이 기본이 돼야 한다.

사람은 자기 소유물을 빼앗겼을 때보다 부친이 죽은 쪽을  빨리 잊어버리는 법이다. - 마키아벨리(군주론)

노예와 자유민의 차이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태어난 뒤에 만난 운명의 차이에 불과하다. - 세르비우스(로마의 6대왕)

개인의 역량이나 의지와 상관없는 차별이 존재하면 조직 역량의 약화는 불가피하다.

로마인들은 전통적으로 명예를 중시했는데명예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인정이었다.

로마인들은 전통적으로 법률 명칭에 제안자의 이름을 넣을 정도로 명예를 중시해왔다.

협력해서 손해를 보는 쪽이 있는데도 협력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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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 근현대 편 - 마키아벨리에서 아렌트까지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구민정.권재원 엮고 해설함 / 휴머니스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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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설사 공화정이 아니라 왕정을 주장한다 할지라도 신의 명령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근거를 통해 왕정을 정당화해야만 하였습니다. 신이 퇴장한 자리에 인간의 이성이 자리 잡게 되었으며, 이는 결국 인간의 이성을 통해 합리적인 정치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하는 계몽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정치공동체에서 지배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통치권을 정당화해야 한다. 과거 통치자들은 어떤 정치체제든 자신의 통치권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신이나 하늘 같은 초월적인 존재들을 끌어들였다. 서양의 왕권신수설이 그것이며 동양의 전제군주들이 다 자신들을 하늘의 자손, 천손이라 부른 것도 그러하다. 일본 같은 경우 2차 세계대전 패망 이전까지도 천황을 신의 후예로 신토라는 종교의 중심으로 삼았다. 오늘날에도 사이비 종교에 휩쓸리는 사람들을 보면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은 여전히 우리 관념에 막강한 영향을 주는 모양이다.

그러나 근대 과학이 형성되고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면서 신은 통치권을 정당화시키는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자유와 평등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니체의 표현처럼 신을 죽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온전히 퇴장한 건 아니었지만, 단순히 신이 부여했다는 설명만으로는 통치권을 정당화시킬 수 없었다. 여기서 근대 계몽사상이 태동하게 되고 마키아벨리, 홉스, 로크, 루소 등 계몽사상가들이 등장하게 된다. 홉스의 경우 왕권을 정당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리바이어던이란 책을 펴낸 거지만 그 메세지는 오늘날 민주주의하고도 맞닿아 있다. 

"군주정과 그 체제로부터 받은 폐해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생생한지라 가두정을 전복시킨 자들은 군주정의 재수립 대신 민주정에 주의를 돌렸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 체제는 자유의 남용에 이르게 되었다. 이 상태에서는 공공의 권위도 타인에 대한 존중도 사라지며, 개인들이 제멋대로 살면서 날마다 갖가지 악행을 저지르게 되었다. 급기야 그들은 어떤 훌륭한 사람의 제안에 따라, 혹은 그러한 남용에 질려서 다시 군주정으로 회귀하였다.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사태가 진행되었다."

민주주의는 굉장히 복잡하고 역동적인 체제다. 그렇기 때문에 군주정, 과두정과 달리 이 체제는 쉽게 붕괴될 수 있다. 나폴레옹 3세가 그러하며 나치의 히틀러가 그러하다. 이 둘은 민중의 지지에 의해 독재권력을 손에 쥐었다. 마키아벨리가 위 문단에서 지적한 것처럼 자유를 감당하지 못한 인민은 그 자유를 남용하게 되며 개인만 존재할 뿐 공동체를 스스로 붕괴시킨다. 그 결과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미 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보았다. 그 지도자는 엄밀히 말하면 그 아버지의 대리인 격이지만. 다행이라면 아버지보다 한참 못한, 아니 일반인보다도 못한 모습에 그 아버지의 신화까지 침몰시켰다는 것이다. 현재 그 잔존세력은 더 이상 박정희를 호출하지 않는다.

지금은 어떠할까? 대통령은 만능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시민 중 하나로 전체 시민의 뜻에 따라 최고 지도자로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정부만 있을 뿐 예전에 있던 작은 공동체들을 모두 잃었다. 시민단체는 시민을 상대한다기보단 정부를 상대하는 데 더 집중하는 거 같다. 정부권력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중심에는 정부만 오롯이 있을 뿐이다. 이제 풀뿌리 정치란 말은 화제가 되지도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한 번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에 있을까.

"이처럼 중앙 권력에 지나치게 의존하도록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때때로 그 권력의 대표자를 선출하라고 불러내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치 습관을 완전히 포기한 사람들이 그들의 통치자를 적절히 선출할 수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비굴할 정도로 복종만 일삼는 국민이 선거를 통해 자유롭고 지혜로우며 정력적인 정부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 아닐까. 지방자치제가 시행되고 있다 하나 자립률이 저조한 대다수의 지방자치단체는 중앙 정부의 교부금에 의존할 수 밖에 없고 굴종 또는 타협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사람들은 자기 지역의 이야기보다는 중앙정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더 관심이 많다. 그만큼 지방이 중앙에 예속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그 지역을 정말 아끼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어떻게든 그 지역에 필요한 예산을 중앙에서 따올 수 있는 권력자에게 마음이 기운다. 이전 지방선거에서 아파트 값을 올려주겠다고 대놓고 말한 후보도 있었다. 그 천박함에 누리꾼들은 비판을 하였으나 이게 비판만 해서 될 일일까. 그 후보는 어떻게 보면 현실에 딱 맞는 주장을 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정치가 교육의 종착점이자 목표이다. 유럽의 경우 정치의 주요 목적은 사람들을 사생활에 안주시키는 데 있다. 유럽에서는 흔히 사생활의 사고방식과 습관이 공무에 도입된다. 반면 미국인은 공공 생활의 습관을 사생활에 적용한다."

토크빌의 이 말은 그 시기를 고려해서 걸러들어야 한다. 오늘날 미국인들이 이러하다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이 말은 주의 깊에 새겨들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아이들을 정치소비자로 길러내고 있는가 아니면 정치참여자로 길러내고 있는가. 이 점에 대해 나는 잘 모르겠다. 중앙권력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일상생활에서는 공동체적 가치를 가볍게 무시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건 위험하다. 목소리는 크나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속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저 벗어났다고 믿을 뿐.

"부르주아는 자신들이 지배권을 얻어낸 곳에서는 어디서나 모든 봉건적.가부장적.목가적 관계를 파괴하였다. 부르주아는 태어나자마자 얽매일 수밖에 없는 온갖 봉건적 속박을 가차없이 토막 내어 버렸다. 그리하여 사람들 사이에는 노골적인 이해관계와 냉혹한 '현금 계산' 외에는 아무런 관계도 남지 않게 되었다."

오늘날 파편화되어 개인만 덩그러니 남은 사회에는 자본주의의 영향을 뺄 수가 없다. 홉스, 로크와 같은 계몽사상가들이 이야기한 민주주의는 사적소유의 완전한 보호가 핵심에 있다. 부르주아들은 이전에 있었던 모든 봉건적 체제를 박살냈다. 이 점은 그들의 공로가 틀림없고 마르크스도 인정하고 칭송하는 바다. 그러나 그 결과 사람들 사이에는 오로지 이해관계 밖에 남지 않게 되었고 자본의 지배가 시작됐다. 

자본의 지배가 얼마나 가혹한지는 그래도 잘사는 국가인 대한민국에서도 알기 어렵지 않다. 아이들의 진로를 물어보면 대다수가 '사'자가 들어가거나 뭔가 멋있거나 주류에 속한 직업을 이야기한다. 청소부나 생산업을 이야기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이건 아이들의 탓이 아니다. 주류에 속하지 않으면 어려운 삶을 영위해야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본성 때문이다. 

물론 '자본' 자체는 잘못이 없다. 자본을 도구가 아니라 목적으로 두고 신앙하는 사람과 사회가 문제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다시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흐름이 생겨나고 있지만 그 흐름조차도 자본에 자유롭지 않다. 이러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는 또 어떻게 살아가도록 가르쳐야 할지는 각자의 신념과 고민이다. 

"공공업무에 대한 무관심과 정치 문제에 대한 중립성만으로 전체주의 운동의 발생 원인을 충분히 제시할 수는 없다. 부르주아 사회는 경쟁적이고 탐욕스러워서 원래 공적 생활에 대한 무관심, 심지어 적의까지 수반하였다. 부르주아의 세계관은 무자비한 경쟁에서 개인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하는 문제가 중심을 이루기 때문에 시민의 의무와 책임은 안 그래도 제한된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쉽다. 이런 부르주아의 태도는 공공 업무라는 성가신 책임을 강한 사람이 스스로 떠맡는 모든 형태의 독재에 매우 유용하다."
"사생활을 보호하는 데만 정신이 팔린 사람들의 프라이버시와 사적 도덕보다 파괴하기 쉬운 것은 없었다."

한나 아렌트의 지적처럼 오늘날 자본주의는 경쟁의 자유를 신봉한다. 우리나라 보수우익들이 말하는 자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이 자유 외의 자유에 대해서는 회피하거나 궤변으로 합리화한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은 파편화되어 유리된다. 이렇게 홀로된 개인을 다루는 것은 국가 입장에서 아주 쉬운 일이다. 이번 비트코인 사건만 봐도 우리나라 사람들 상당수의 정치의식은 개인의 이득을 그 근거로 삼는다는 게 확실하다. 부동산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진보적 주장을 해댔을 사람들이 비트코인에 대해서는 정 반대로 이야기한 경우가 많다. 즉 공공의식에 의해서 개혁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의 자유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 자유는 유대관계를 배제한 단절되고 고립된 개인주의로는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 쓸데없는 오지랖과 꼰대질은 곤란하겠지만 홀로 자유로운 인간이란 그저 호모 사피엔스라는 하나의 종일 따름이다. 

한나 아렌트의 통찰대로 전체주의는 짐단주의보다 원자화된 개인주의가 더 중요한 원인이다. 토크빌의 말만따라 자발적인 결사체, 지역공동체가 없을 때 인민은 다수의 여론이 휩쓸리게 되고 그 결과가 전체주의다. 민주주의 정치제재에서도 전체주의는 얼만든지 나타날 수 있다. 

청소년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지만 어른들이 읽어도 좋을 책이다. 옛날 사상가들의 그 당시의 통찰이 지금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세상이 계속 발전해왔지만 인간의 본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아직 우리가 갈길이 멀다는 것, 그리고 교육과 정치가 결코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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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부모는 이 기술을 통해 자신의 자녀들이 우수한 형질을 갖고 태어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부모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불평등한 출생, 혹은 생물학적 차별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 기술을 시행할 것인지 아니면 금지할 것인지를 정해야 하는 시점은 바로 오늘이다. 누군가가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그 일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순간, 우리는 ‘아니오, 그 일은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때는 너무 늦은 시점이 될 것이다.” - <2018~2028 핫이슈 빅트렌드, 트렌즈지 특별취재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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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현대 과학과 유럽 제국주의 사이의 연대를 구축했을까? 19세기와 20세기에는 기술이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근대 초기에는 기술의 중요성에 한계가 있었다. 핵심요인은 식물을 찾는 식물학자와 식민지를 찾는 해군장교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데 있었다. 과학자와 정복자는 둘 다 무지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이들은 “저 밖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고 말했다. 이들은 둘 다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발견을 해야겠다는 강박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새로운 지식이 자신을 세계의 주인으로 만들어주기를 둘 다 희망했다.

사피엔스 | 유발 하라리, 조현욱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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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심지어 그때도 유럽은 아시아 강대국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유럽이 어찌어찌 미 대륙을 정복하고 바다의 패권을 획득한 것은 주로 아시아의 강대국들이 그런 지역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은 덕분이었다. 근대 초기는 지중해의 오토만 제국, 페르시아의 사파위 제국, 인도의 무굴 제국, 중국의 명과 청 왕조의 황금시대였다. 이 제국들은 영토를 크게 확장했으며, 인구와 경제가 전대미문으로 성장했다. 1775년 아시아는 세계 경제의 80퍼센트를 차지했다. 인도와 중국의 경제 규모를 합친 것만으로도 세계 총생산의 3분의 2에 이르렀다. 이에 비해 유럽은 경제적 난쟁이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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