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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나라의 제도문화풍습은 오랜 기간에 걸쳐 성립된 것이지 갑작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처럼 어떤 나라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대한민국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였다고는 해도 우리 주변을 돌아보라어디서든지 유교 문화를 발견할 수 있으며 같은 유교라 할지라도 중국하고 일본의 그것과는 다른 독특한 측면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를 잘 알려면 국사를 배우는 것은 기본이다다른 나라들이 왜 국사 교육에 공을 기울일까국사가 가지고 있는 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국사는 국민에게 국가 정체성을 확립시켜줌은 물론이려니와 애국심을 길러주고 국가 공동체 의식을 갖게 하는데 탁월한 효능을 지니고 있다물론 오늘날 세계는 글로벌 사회이고 개인의 인권을 강조하는 시대이니 꼭 국사를 교육시켜야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들 수 있다그러나 우리의 성장과정을 한번 생각해보자인간이 홀로 성장하는 존재는 아니지 않는가우리는 가족이라는 공동체더 나아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공동체가 아니었다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이다또한 지금의 나로 성장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나와 가족국가 공동체는 결코 떼어낼 수 없는 그런 관계이다그러므로 이러한 공동체에 귀속될 필요는 없지만 애착을 갖는 것은 당연하고 국사 역시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대학 입시의 관문이 수능에서 국사는 푸대접 받고 있으며자라나는 청소년들은 우리나라 역사에 무지하기 그지없다

(http://media.daum.net/society/view.html?cateid=1067&newsid=20100821220631431&p=imbc)

  이런 상황에서 국가에 대한 충성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더 나아가 대한민국이 과연 10년 뒤에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뉴라이트에서 만든 교과서를 보면 안중근과 김구를 테러리스트로 소개하고 있다물론 이 두 분의 방식이 테러와 유사하다는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일본과 정면으로 대결할 수 없는 현실에서 선택한 최후의 수단이었을 뿐이고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테러가 아닌 한일병합에 앞장선 일본 정치인을 표적으로 했다는 점에서 테러리스트라고 낙인찍는 것은 불합리하기 그지없다백번 양보해서 테러리스트라고 하더라도 그들 덕분에 지금 존재할 수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렇게 말하면 안될 것이다.

  지금은 뉴라이트에서 만들어진 교과서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란 법은 없다이대로 역사가 선택과목으로 유지되고 역사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면 언젠가 우리 후손들은 뉴라이트의 교과서 내용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중국의 동북공정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등 우리 주변의 국가들은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자신들의 이득을 쟁취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그러나 우리나라의 일부 세력들은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다른 나라에게 이득을 내주고 싶어서 안달하는 것 같다이러나다 우리 후손들이 아니라 우리부터 왜곡된 역사를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른다이미 그러한 조짐은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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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있어 관계란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아주 소수의 극단적인 사례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같은 인간과 어울려 이 세상을 살아 나간다. 

때문에 인간이란 누구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관계를 잘 풀어 나가는 사람은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고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행복함을 그만큼 덜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관계가 행복의 중요한 요인이라고 해도, 일반인들의 경우 그 관계로 인해 치명적인 상처를 지속적으로 입는 경우가 드물다. 물론 살다 보면 잘못된 관계를 맺거나 관계가 깨지는 경우가 있긴 하다. 그러나 정 맘에 안 맞으면 안보고 살면 그만이다. 굳이 스트레스 받아가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살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대학생 이상 어른들에게만 해당된다. 고등학생 이하의 경우 학교라는 그다지 개방적이지도 자유롭지도 못한 공간에서 어쩔 수 없이 만나면서 살아가야하기 때문에 관계가 잘못 맺어진다면 매우 큰 문제가 된다. 

이런 문제가 아주 극단적으로 나타나는게 바로 왕따현상이다.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기에 이 현상은 단순하게 접근해서는 안된다. 성급하면서 배려없는 접근은 도리어 피해자가 입은 상처를 치료한답시고 헤집는 것과 별 다를바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보통 이러한 일이 일어나면 가해자 훈계 및 처벌, 피해자 상담 및 보호라는 방법을 통하여 해결한다. 물론 이러한 해결방법이 전혀 효과가 없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이 방법은 근본적으로 어른들이 더 큰 힘으로 아이들의 세계에 관여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를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할 정도로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이상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 피해자가 찌질이로 낙인찍혀 더 지속적이고 은밀한 괴롭힘을 받게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이 방식은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와 달리 지속적으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일회성 현상이 아니다. 따라서 그동안 학교에서 고수해온 방법은 문제해결이 아니라 임시처방에 불과하다. 

http://ebs.daum.net/knowledge/episode/1214 이 영상을 참고하면 이야기를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문제는 학교에 만연한 '서열'이라는 이름의 문화다. 공포와 억압을 근본 동력으로 하는 이 문화를 똑같은 공포와 억압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은 넌센스다. 그러나 학교 행정의 움직임 역시 이를 하나의 동력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은 지금도 애용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학교가 문제를 감추는데 급급하는 경우도 꽤 있다는 것이다. 

유럽의 경우 학교폭력문제를 학교나 교사의 문제로 몰지 않는다. 때문에 이를 감추는 일이 없으며 또한 학교폭력 문제를 사회 모두의 책임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학교에 상담사, 복지사 등등 다양한 지원인력이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학교와 교사에 대한 책임추궁이 먼저 이뤄지기 때문에 사건을 감추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 문제가 커지는 경우가 많아지자 학교폭력자치위원회를 통한 해결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교사가 방관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학교폭력문제는 그 학급 구성원 모두의 문제다. 기존에는 가해자와 피해자만의 문제로 봤지만 이러한 일이 학급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그 학급 구성원들이 피해자를 돕기보다는 방관하는 위치를 고수했기 때문이다. 만약 피해자를 도우려는 방어자가 3~4명만 있었더라도 학교폭력문제가 지금처럼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볼 때 학교폭력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상담사인가? 상담사의 조력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상담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학교폭력문제는 학급의 문제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심은 교사가 잡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학급의 고착화된 위계질서를 민주적으로 바꾸는 것은 교사의 의지도 필요하지만 적절한 방법 더 필요하다. 

이 어려운 문제는 이미 노르웨이나 핀란드 같은 선진국에서도 일어났던 일이다. 노르웨이의 경우 올베우스 프로그램, 핀란드의 경우 키바 코울르 프로젝트 같은 제도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 제도들을 본받아 한국에 맞게 조정한 평화쌤 프로젝트가 대두되고 있다. 

급선무는 교사가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단순히 애들끼리의 일로 여기면 곤란하다. 교사가 적극적으로 방어자 역할을 수행해야 하고 더불어 학생들의 문화를 괴롭힘으로 가득한 서열 피라미드에서 서로간의 어려움을 보살펴주는 민주적인 문화로 바꿔야 하다. 즉 방관자의 역할을 고수하고 있는 학생들을 방어자로 전환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때로는 신체적인 폭력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신체적인 폭력도 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를 근본으로 두고 있다. 학교의 경우 폐쇄적인 공간에 가깝기 때문에 그 위험도가 현실화하기 딱 좋다. 이러한 학교의 폐쇄성과 위계질서는 피해학생을 자살로 몰고 있다. 더 최악은 이러한 문화가 기존의 방관적인 학생들도 가해자로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더 이상 임기응변의 처벌과 보호만으로 해결하는 것은 이제 지양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학급의 전체적인 관계, 즉 문화 또는 분위기다. 결코 폭력이 용납되지 않으며 괴롭힘 당하는 학생들을 도울 수 있는 문화를 구축할 수 있는 방법을 학교 전체가, 사회전체가 머리를 모아 강구해야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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