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30분 혼자 읽기의 힘 - 아이의 미래를 바꾸는 습관
낸시 앳웰 지음, 최지현 옮김 / 북라인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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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린 학생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나갈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자신의 삶을 가꾸기 위해서 일기를 쓸 수도 있을 것이고 다양한 지식을 습득할 수도 있다. 그 중에서도 누구나 강조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책을 읽는 것, 즉 독서다.

물론 독서는 간접경험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가급적 직접 부딪혀보고 좋은 스승을 만나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직접경험은 제약이 많다. 직접 경험하기에는 시간과 자금이 부족할 수도 있고 원하는 사람을 바로 만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독서를 하지 않고 지식과 경험을 쌓는 사람은 그 생각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결국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쌓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바로 독서다. 때문에 교사는 물론이려니와 학부모, 일반 시민들도 학생들이 훌륭한 독서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그러니 계속해서 독서지도를 하는 것이고 이를 권장하는 것 아니겠는가? 국가에서도 독서이력을 모아 포트폴리오로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으니 아이들이 열심히 책을 읽기를 얼마나 사람들이 바라는지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난립하고 있는 다양한 독서방법론들은 아이들을 독서인으로 만들기보다는 책을 기피하도록 만들고 있다. 출판되는 책의 양은 세계 순위권이라지만 가만 보면 대다수가 수험서이고 교양을 위한 서적들은 잘 팔리지 않는다. 게다가 요즘은 자기계발이라는 장르가 대세로 정말 이야기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책은 인기가 없다.

왜 국가와 어른들이 이렇게 정성을 쏟는데 아이들은 책을 싫어할까? 스마트폰 때문일까? 아니면 TV? EBS에서 방영된 읽기혁명에서는 본래 인간의 뇌는 책을 읽는 것을 싫어한다고 주장한다. 확실히 책 그 자체가 좋아서 읽기 보다는 출세 또는 성공을 위해 책을 읽는 경우가 많은 대한민국을 보면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운에 맞기고 그냥 포기해야만 하는가?

하루 30분 혼자 읽기의 힘의 저자 낸시 앳웰은 아이들을 훌륭한 독서인으로 기를 수 있는 방법을 자신의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낸시 앳웰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을 스스로 골라서 읽게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주장은 도날린 밀러의 훌륭한 책 수업 중 15분 행복한 책읽기에서 주장하는 바와 일치한다. 교사가 아이들에게 독서를 하기 위하여 해야 할 것은 한 아이 당 20권 이상의 책을 준비하고 그들이 책을 읽는 것을 격려하는 것뿐이다. 그 외 특별한 전략을 아이들에게 전수하고 그에 맞추어 책을 읽게 하는 것은 도리어 아이들의 독서를 방해한다.

이러한 사례가 책에 등장하는데 자신의 독서지도방법을 체계적으로 만들기 위한 욕망에서 그녀가 저지른 실수였다. 그녀가 적용했던 이해전략이라 불리는 독서 방법은 아이들을 포스트잇 붙이는 작업에 집중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아이들이 리딩존에 들어갈 수 없게 만들었다.

마치 노자의 무위를 독서로 풀이한 것과 같은 그녀의 독서지도는 확실히 느슨해 보이지만 그만큼 효과가 있다. 아이들이 100권 이상의 책을 읽고 책을 읽는 것을 사랑하는 모습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은 평생 독서인을 만드는 것 아닌가? 문제 풀이는 어디까지나 그 과정에 불과하다. 비록 평가가 가지는 사회적 힘 때문에 그 관계가 역으로 바뀌긴 했지만 교사인 우리는 그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녀는 이야기와 글의 힘이 강한 책을 아이들에게 읽혀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논픽션을 선호하는 지라 그동안 사 모았던 책들도 그런 종류가 많았는데 조금 후회가 된다. 이야기의 힘에 대해서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았기 때문에 실수를 저지른 셈이다. 요즘 스토리텔링이 각광을 받는데 이야기의 힘을 나 먼저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홀리데이, 챌린지, 저스트라잇이라 불리는 도서 수준 분류법도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학교에서는 학년별 권장목록이 있어 책을 학년 수준에 맞추어 분류하였다. 이 방법은 학생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러야 하는지 알려주는 지침으로 가치가 있긴 하지만 아이들 입장을 전혀 고려한 것이 아니어서 실용성이 떨어졌다. 반면 낸시 앳웰의 학교 CTL에서 사용하는 이 분류법은 아이들의 읽기 수준에 따라 분류한 아이들 시선에서 바라본 기준이기 때문에 독서지도에 더 유용하다.

그 외에도 교환일기 방식을 적용한 것과 독서편지, 북토크 같은 독서지도법이 소개가 되어 있다. 하나하나 읽어보면 그녀가 얼마나 노력하는 교사인지 알 수가 있다. 또한 독서지도에 필요한 지식 3가지가 제시되어 있는데 이 부분도 잘 볼 필요가 있다. 독서지도에 대한 의욕만 있을 뿐 여전히 그에 필요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읽고 뭐가 필요한지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하루 15분 책읽어주기다음으로 나온 책이다. 개인적으로 하루 15분 책읽어주기도 좋았지만 이 책은 부모가 주 독서대상인 만큼 이번에 읽은 책을 1학기에 읽어야 되지 않나 싶다. 독서지도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길을 만들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이다. 교사가 직접 실천해보고 얻은 결과를 실은 책인 만큼 그 의미가 더 크다. 독서지도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부터 다시 되짚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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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쓰기 어떻게 시작할까 살아있는 교육 13
윤태규 지음 / 보리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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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초등학생이던 시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써서 선생님께 제출했다. 그리고 검사를 맡은 후 다시 가져갔었다. 그 당시에는 그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잘 몰랐다. 그저 선생님이 시키셔서 혼나지 않기 위해서 일기를 썼었다. 그래서 그런지 일기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고 일기에 대한 어떤 특별한 기억도 없으며 그 당시 썼던 일기장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 일기장 노트를 다 썼을 때마다 버렸을 것이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나는 특별히 일기를 쓰라고 하지는 않지만 대다수의 학교와 우리 학교에서도 대다수의 학급은 일기 숙제를 내주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상당수의 선생님들께서 일기를 꼼꼼하게 검사하시는 것 같다. 때로는 그럴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일 그 많은 학생의 일기장을 검사하시는 선생님들의 노력에 감탄하기도 한다.

일기를 꼭 써야만 할까? 일기는 따지고 보면 개인 기록이다. 원론적으로 개인 기록을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읽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물론 교사는 교육적인 의미에서 이를 행하니 만큼 이 원칙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읽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학생인권문제가 대두되면서 일기검사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대다수의 학생들은 일기는 과거의 나처럼 강제로 쓴다. 일기를 쓰고 싶어서 쓰는 게 아니라 쓰지 않으면 남아서 쓰고 가얀다던가 혼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쓰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교육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아이들의 인권을 부분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교권이다. 때문에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할 필요가 있다. 만약 강제성이 있더라도 일기를 쓰는 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강제적으로 일기를 쓰는 게 교육적이지 않고 크게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일기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해봐야 한다.

이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일기 지도가 필요하다. 이번에 읽은 윤태규 선생님께서 지으신 일기쓰기 어떻게 시작할까가 그 해답이 될 수 있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일기에 대한 기존의 내 생각이 너무 단편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일기 쓰기가 교육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아이들이 일기를 잘 쓰든 못 쓰든 오랜 기간 써도 글쓰기 실력이 느는 것 같지도 않고 밑에 도움말을 써도 읽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떤 여학생의 경우 어머니가 꼬박꼬박 답글을 달아주면서 꾸준히 일기를 쓰긴 했지만 이 경우는 예외적인 경우로 이 경우는 도리어 일기 지도 문제는 가정에 달린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게다가 일기 검사는 인권의 문제와도 직결되기 때문에 더 시큰둥했었다. 어떤 개인에게 자기 기록을 쓰라고 강제하는 것도 문제고 이를 내가 보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내가 보는 줄 뻔히 아는데 누가 솔직히 일기를 쓰겠는가 하는 생각도 있었다. 솔직히 쓰지 않으면 그건 일기가 아니다. 그럴 바에야 따로 글쓰기 지도를 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겠냐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 생각은 너무 단순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일기에 대한 어떠한 교육철학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기에 대해 회의적 입장만 유지했을 뿐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지 못했고 일기를 보고 밑에 답 글 달아주는 것이 일기 지도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게 바로 나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점을 명확히 알 수 있었고 일기는 언어지도나 글쓰기 지도가 아니라 삶을 가꾸는 아주 좋은 방법임을 깨닫게 되었다.

책에는 일기지도에 대한 다양한 방법과 사례가 실려 있다. 그 중에는 내가 아는 상식과 전혀 다른 내용도 있었다. 보통 저학년은 그림일기를 쓰게 한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기 때문에 언어능력이 부족함으로 그림으로 보충하게 하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 역시 이를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렇게 때문에 1학년도 그림일기보다는 처음부터 글로 일기를 쓰는 것이 좋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든 반 상식적인 내용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 보면 저자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 어휘력이 부족해서 그림일기를 써야 한다면 아이들이 말을 할 때도 그림을 그리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적은 단어로도 얼마든지 말을 할 수 있다. 마찬가지고 적은 단어로도 일기를 쓸 수 있다. 그동안 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생각해왔던 상식은 고정관념이고 글은 완벽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비롯한 것이다.

또한 일깃감 고르는 3가지 잣대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고 꼭꼭 숨겨두고 싶은 이야기도 좋은 일깃감이 된다는 이야기도 놀라웠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가 좋은 글감이 되긴 하지만 교사가 매일 보는 일기에 쓸 수 있다는 상상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이야기는 보통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글로 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 놀라웠다. 물론 저자가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그 조건은 교사와 학생간의 깊은 믿음이다. 그러한 깊은 믿음 하에서 억울하고 답답하고 속상한 이야기도 일기로 쓸 수 있고 자신의 약점이나 숨기고 싶은 비밀도 쓸 수 있는 것이다.

책의 모든 지면에서 강조하는 것은 일기는 국어공부나 글쓰기 공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일기는 삶을 가꾸는 것이다. 때문에 교사는 일기를 지도해야 하지만 지나치게 간섭해서는 안 되며 아이들이 일기 쓰는 일을 즐겁게 자발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려운 일이지만 책의 저자는 교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기를 쓰면서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을 치유하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되고 생각하는 능력도 절로 자라게 된다. 그리고 글을 쓰는 힘도 생겨난다. 교육적 효과가 확실하고 교사와 아이들 사이의 믿음이 굳건하다면 인권의 문제는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도리어 일기를 쓰게 하는 것이 더 인권적인 교육이다.

요즘 아이들은 자신의 삶을 가꾸지 못하고 있다. 맞벌이 부부가 많아지고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많아지면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삶을 가꾸기 보다는 부모가 만들어준 것을 수용하기만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그대로 학교에 옮겨져 와 아이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교사가 알려주는 지식만 받아들일 뿐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틀림없이 성적은 우수한데 먼 이유를 물어보면 몰라요라고 답하는 학생이 요즘 눈에 띄고 있다.

이런 아이들에게 삶을 가꾸고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게 하기 위해서 일기쓰기 지도는 필요한 것 같다. 책에는 다양하면서도 구체적인 방법들이 들어있으면서 여러 가지 사례를 실어 놓고 있다. 이 책만 가지고도 일기지도 계획을 구상할 수 있을 정도로 길잡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책이다. 이미 2학기가 시작한지 많은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책의 내용을 지금 적용하기는 아마 힘들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안 되면 내년이라도 아이들의 삶을 가꿀 수 있는 일기지도를 해보고 싶다. 나부터도 그래야 하겠다. 부디 작심삼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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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평화 - 자연과 놀고, 사람과 놀고, 역사와 놀고, 노래와 놀며 캐낸 평화 이야기, 평화의 상상력
홍순관 지음 / 탐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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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인간이 꿈꾸던 세상은 아주 평화로운 곳이었다. 동양의 신선들이 산다는 무릉도원이 그러하고, 기독교인들이 꿈꾸던 천국이 바로 그런 곳이다. 이는 인간이 평화를 갈망하는 강한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시기보다는 전쟁이 벌어진 시기가 더 많다. 비록 휴전이라곤 해도 전쟁이 벌어지지 않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잘 모를 수 있지만 아프리카와 같은 지역에서는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어린 아이들이 총을 들고 싸우고 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참극이 여전히 이 지구상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인류는 항상 전쟁과 함께 해왔다. 평화를 갈망하면서도 왜 이렇게 모순 적인 역사를 만들어 왔을까? 우리가 자랑하는 인류의 문명과 발전이라는 것은 상당수가 전쟁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특히 의학의 경우가 그렇다. 문명을 만들고 발전시키는 것도 인간의 주된 특성 중 하나이니 따지고 보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은 평화를 갈망한다. 문명과 인류의 발전이라는 것도 평화가 보장되어야 비로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가 지금까지 저질러 왔던 실수 중 최악의 사건을 거친 다음 인류는 UN이라는 국제기구를 세우고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해왔고 지금도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도 전쟁의 소리는 멈추지 않고 있으며, 우리나라 역시 터지지 않았을 뿐 언제든지 평화가 깨질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다.

 

왜 전쟁이 멈추지 않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언제나 공동체를 만들어 왔으며 그 덕에 다른 동물들과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이 공동체가 커져서 최종적으로 국가라는 형태까지 갖추게 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아무래도 공동체가 커지면 개인은 물론이고 집단, 지역 간에 이해관계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보니 같은 국가 내에서 서로 부딪히는 일이 생긴다. 때문에 과거 군주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강력한 법을 만들었으며 또 종교의 힘을 빌어 민심을 안정시키고 결속하여 국가를 유지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방법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모습만 바뀌었을 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유지된 평화는 최소한의 평화에 불과하다. 어디까지나 공존만 가능할 뿐 이들이 진정 평화를 누린다고 볼 수 없다. 물론 전쟁 중인 상황보다야 훨씬 낫다. 하지만 언제나 깨어질 수 있는 또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척하는 세상이 인간이 꿈꾸는 평화로운 세상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그렇지 않은가?

 

우리 학급도 마찬가지다. 평화샘 프로젝트를 도입하고 나서 직접적으로 괴롭힘이 있거나 왕따를 시키거나 또는 폭력을 휘두르는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면을 보면 여러 가지로 갈등이 존재하고 있으며 학급이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지 못하다. , 공존은 가능하지만 서로 어울리는 그런 평화를 만들지는 못한 것이다.

 

책의 저자 홍순관 님이 말하는 춤추는 평화는 그런 최소한의 평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평화란 좀 더 적극적인, 각자의 색깔이 어우러진 조화와 배려, 상호존중이 넘치는 비유하자면 비빔밥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가 인간과 세상에 대해 매우 섬세한 감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말하는 쌀 한 톨의 소중함. 쌀 한 톨에 우주가 담겨있다는 이야기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쌀 한 톨에 우주가 담겨있다면 우리 인간은 얼마나 존엄한 존재란 말인가? 이렇게 존엄한 존재가 이익에 눈이 멀어 다른 사람과 세상을 해코지 한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우리 세상이 그러하다.

 

경제학의 기본 법칙인 수요-공급법칙에 따르면 수요가 많고 공급이 적으면 가격이 오르고, 수요가 적고 공급이 많으면 가격이 내린다고 한다. 이는 희소성의 법칙과 밀접하게 관련 있는데 사람이 많아진 반면 사람이 필요한 부분은 적어진 탓인지 인간이 귀히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물론 같은 국가에 산다고 해서 다 아는 사람은 아니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 숫자로 환원되고 기계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 모습을 보면 왠지 씁쓸하다. 저자가 지적하는 상업주의에 물든 세상이 바로 오늘날 대한민국이다.

 

오늘날 극단화되어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이 상업주의는 모든 가치를 화폐로 환원해버린다. 인간도 화폐로 그 가치가 결정된다. 타고 다니는 차에 따라 사람 대접이 달라진다는 이야기는 너무 흔하지 않은가? 10개 교과에서 유독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만 강조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대학진학과 관련되기 때문 아닌가?

 

이러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황금만능주의를 신봉하게 되고 돈만 벌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려고 한다. 화폐로 통일된 세상. 어떻게 보면 그 때문에 국가가 유지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세상은 평화롭지 못하다. 겉보기에는 다툼 없이 공존하고 있지만 서로 시기·질투하고 다른 사람과 경쟁해서 이기는 사람만 모든 것을 가지는 승자독식 사회가 평화롭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전교1등을 못했다는 황당한 이유로 자살하는 어린 영혼들이 생기는 지금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는지 의문이다.

 

저자의 말만 따라 이익을 쫓아서는 평화를 만들 수도 누릴 수도 없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고 불필요한 것을 비운 사람만이 평화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 여유 있는 사람과 바빠서 여유 없는 사람을 돌아보자. 여유 없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과 부딪힐 가능성이 높다.

 

 

지난번에 예비군 훈련을 받으면서 안보 강연을 들었는데 강정 해군기지 이야기도 나왔다. 강사 분은 북한과 일본의 침입에 맞서기 위해서 해군기지가 필요하다며 이를 막는 사람들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평화를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계속 강조하였다.

 

나는 해군기지가 필요하다면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주도가 평화의 섬이라는, 구럼비 바위가 천연의 자연보고라는 반대 논리는 힘과 힘이 맞부딪히는 국제 사회를 헤쳐 나가야 하는 입장에서 너무 원론적이고 무의미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일단 공존이 가능하려면 안타깝지만 힘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일제강점기를 통하여 평화를 외치는 목소리가 얼마나 쉽게 뭉개지는지 확인하였다. 세계가 통합된다면 모를까 국가가 최대단위인 지금 힘을 갖추는 것은 자국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라는 이유만으로 해군기지를 굳이 강정에 만들어야한다는 논리 역시 원론적이고 반민주적인 이야기다. 지금 언론에서는 해군기지만 가지고 이야기할 뿐 왜 해군기지를 강정에 건설해야하는지,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군사학적 지식을 갖추지 못한 입장에서 이에 대해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해군기지 건설을 찬성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필 꼭 강정에 건설해야 하는가?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라면 한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견쯤은 묵살해도 되는 것인가? 이러한 논리가 계속 확장되면 그게 바로 파시즘이다.

 

평화를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필요하다. 상호간의 존중이 있을 때 비로소 배려와 나눔이 있을 수 있고 진정한 하나는 모두를 위해, 모두는 하나를 위한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 나도 학급을 그런 공동체로 만들고 싶다. 나는 본래 자유주의자이고 개인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못했지만 그동안 보지 못했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보이는 이상 본래 가지고 있던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방향이 옳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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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 과학이라 불리는 비과학의 함정
마시모 피글리우치 지음, 노태복 옮김 / 부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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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과학은 최고의 권위를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으며 그 콧대 높은 종교조차도 과학이라는 이름을 빌어 자신을 합리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특히 과학기술의 부진으로 인해 나라를 빼앗겼던 대한민국으로서는 더더욱 과학이라는 이름이 권위를 가지고 있다.

과학의 발전은 인간 지성의 승리를 의미한다. 과학의 발전을 통해 우리는 과거에는 꿈꾸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급부로 과학이라는 이름을 사칭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과거에 과학이 많은 것을 설명하지 못했을 때는 몰라도 우주의 탄생을 엿보고 있는 지금에 와서도 점성술이나 관상, 창조론 같은 이야기에 사람들이 혹하는 것은 과학이 무엇인지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데서 비롯한 것이다. 게다가 이런 사이비 과학들은 인간의 직관에 비추어볼 때 꽤 그럴듯하게 들리기 때문에 정상적인 과학자들을 곤란케 하고 자신들의 이야기가 마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 양 위장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과학이 무엇인지, 과학과 철학의 경계선은 무엇인지, 그리고 제일 중요한 사이비 과학의 특징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말미에 사이비 과학을 경계하기 위하여 언제나 헛소리 탐지키를 켜놓으라고 주문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과학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과학의 발전사를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았다. 뉴턴의 인간성이 더러웠다는(?) 사실과 과학이 어떤 식으로 오류를 수정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더불어 내가 잘 몰랐던 과학에 뿌리를 둔 유사과학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특히 끈이론과 외계지적생명체 탐사가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꽤 충격적이었다.

난 그동안 이 두 분야를 과학의 범주에 든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 두 분야는 거의 과학에 속한다. 과학의 최고봉이라는 물리학과 천문학에 둥지를 틀고 있지만 이 두 분야를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이야기다.

일단 끈이론의 경우 수학적으로는 완벽하다고 한다. , 이론상 맹점은 없다는 이야기다. 아마 그 때문에 최종이론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올라있으며 많은 과학자들이 이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물리는 수학이 아니다. 수학이라는 언어를 활용하는 것이지 물리는 기본적으로 우리 실제 세상에 관한 학문이다. 수학적으로 완벽하다 할지라도 수학의 특성상 공리만 세워지면 어떤 논리든 가능하기 때문에 공식이 맞아 떨어진다고 해서 실제로 그 일이 그런 방식으로 일어났다 확신할 수는 없다.

문제는 끈이론을 검증한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진화생물학의 경우 과거의 일이지만 분자생물학의 도움을 받아 이론을 검증할 수 있고 또 많은 화석이 발굴되고 있으며 이론을 토대로 그에 맞는 추측도 꽤 들어맞고 있다. 따라서 이는 비록 연성과학이라 불릴지는 몰라도 분명한 과학이다. 그러나 끈이론의 경우 수학적 해석만 난무할 뿐 이게 확실하다는 검증방법이 없다. 물론 경쟁상대인 평행우주론도 마찬가지다. 거물급 물리학자들이 관찰가능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입증하려 시도하는 현실은 꽤나 아이러니컬하다. 끈이론, 평행우주론은 현재 우주론의 최첨단에 속해있지만 실은 철학적 탐구에 가까우며 언젠가 사이비과학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불안전한 과학이다. 때문에 저자는 거의 과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외계지적생명체 탐사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수많은 프로젝트가 있었지만 성과는 전무했다. 물론 이 넓은 우주에 지적생명체가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마찬가지고 지적생명체가 있으리라는 보장 역시 없다. 이것은 확률문제인데 검증할 방법이 없다고 봐도 된다. 따라서 이 역시 거의 과학에 속한다. 이 분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야속한 소리겠지만.

앞에서 과학의 발전은 인간 지성의 승리를 의미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과학이 결코 완벽한 것은 아니다. 저자는 과학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이유과 사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과학자 역시 사람이다 보니 명성이나 돈 때문에 사기를 펼치거나 우생학과 같은 과학의 탈을 쓴 이데올로기적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때문에 과학에 대한 공격 역시 존재한다. 현재 과학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일단 대표적으로 창조과학(창조과학의 경우 스스로 과학이라 칭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공격하는 것은 아니다.)이 있으며, 그 외 많은 과학 비판가들이 존재한다.

창조과학의 경우 더 이상 언급할 가치가 없다. 성경의 많은 일들은 초자연적인 개입을 인정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과학은 초자연적인 개입을 인정하지 않는다. 보통 초자연적인 개입을 부정하면 무신론자라고 여기지만 이러한 부정이 과학은 참이고 성경은 거짓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신을 믿는 과학자들도 많으며 학문 활동에서 초자연적인 개입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면 왜 교회는 건물을 지어달라고 기도를 드릴 것이지 세속적인 방법으로 헌금을 모아 건설회사에 일을 맡기는지 모를 일이다. 일상생활에서도 신의 역사를 믿고 따라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종교인들도 일상생활에서 신의 임재를 고백할지언정 행동은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따르고 있다.

사실 창조과학의 목적은 성경이 사실이라고 입증하는데 있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를 어떻게 입증한단 말인가? 더불어 성경에는 공룡에 대한 언급도 없다. 혹자는 베히모스와 리바이어던이 그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해석이며 베히모스라는 이름 자체가 히브리어로 짐승의 복수형이다. , 이를 공룡으로 취급한 근거는 없으며 설령 공룡으로 취급한다 한들 성경에 묘사된 모습 그대로라면 어떻게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더불어 상당수의 공룡들은 초식이 아니라 육식이었다.

칼뱅과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신학자들은 창세기에 대해 현명한 말들을 했다. 그들은 창세기를 과거 사람들이 보이는 데로 적은 것으로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방인들에게 오해를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 창세기의 ‘6을 우리가 생각하는 6일로 여기면 곤란하다고 말하였다.

최근까지 대두되었던(그리고 지금도 고미숙 씨 같은 사람들에게 이어져 내려오는) 과학비판가들은 포스트모더니즘에 속해있는 학자들이다. 최근에는 기세가 많이 누그러졌지만 70~80년대에는 굉장했던 모양이다. 이들은 절대적 진리가 없다고 주장하며 지식이란 사회적, 문화적 영향을 받기 때문에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탐구하는 이 자연세계가 과학적 지식에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고도 말한다. , 과학 역시 하나의 담론일 뿐이라는게 이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판단하는가? 포스트모더니즘이 옳다는 주장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이는 마치 상대주의의 문제를 되풀이해 보는 것 같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에 대한 어떤 기준점이나 근거를 마련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의 말만 따라 이들도 아프면 무속신앙에 의지하기 보다는 의사를 찾아갈 것이다. 과학자도 인간이니 만큼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사회, 문화적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이를 가지고 과학이 하나의 담론일 뿐이라는 것은 지나치다. 마치 최근에 고미숙 씨가 과학의 실패를 이야기하며 주역을 그 대안으로 제시한 것과 같다. 그러나 이는 독단적 회의주의일 뿐이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이 지동설에 아무런 영향을 기치지 못했다는 말이 납득이 가는가?

자연세계와 인간 인식의 한계를 조화, 중재시키기 위하여 헬렌 롱기로, 로널드 기어리 등이 나름의 해법을 내놓았다. 개인적으로 이 둘의 의견이 나름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구성주의를 극단적으로 교육에 적응하는 것이 꽤나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성주의는 움베르토 마투라나의 주장처럼 생물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합리적 이론이지만 이를 지나치게 확장하여 유아론으로 흐르면 곤란하다.

과학은 근본적으로 완벽하지는 않다. 과학자들은 반발하겠지만 역사적으로나 논리적으나 과학은 방법론적 자연주의라는 사상에 기대고 있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차가 고장 나면 아무리 신심이 두터운 신자라도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정비사를 찾는다. 신이 차를 고쳐줄 가능성이 없다고는 볼 수 없음에도 일반적으로 그렇게 우리는 행동한다.

그러나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과학적으로 실증할 수 없는 문제이다. 우리가 우주의 탄생을 엿보고 있다 하더라도 아직도 우리는 우주가 얼마나 넓고 그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귀납적 방법으로 아무리 데이터를 쌓아도 귀납의 특성상 우리는 자연주의를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이미 과학은 자연주의를 기반으로 발전하였다. 신을 등장시키면 모든 것을 신이 한 것이라고 설명하면 그만이기에 과학은 발전할 수가 없다. 최근에 대두되는 지적설계론은 바로 이런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지금 발견되는 현상이 아닌 다른 현상도 지적설계론은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기에 발전할 필요가 없으며 오로지 빈틈을 찾는데 열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주의는 실증할 수 없다. 이는 철학, 형이상학의 영역이다. 때문에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자연주의를 방법론적 자연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을 이러한 기본 토대를 가지고 탐구하고 발견해나간다. 그리고 그 방법은 옳았다고 하겠다.

과학은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자연 외의 원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과학이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실증이 가능해야 한다. 다양한 증거가 있어야 하고 이론이 있어야 하며 이를 검증할 수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론이나 점성술, 관상은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점성술과 관상과 같은 경우 이미 반례가 많이 있으며 이 책에서도 그냥 찍는 것과 별 차이 없었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창조론의 경우 신을 등장시키는데 신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범주를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검증이 불가능하다. 만약 신의 의도를 알 수 있고 이를 파악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그 어떤 종교인들도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신성모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의 범주를 정확히 설정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일단 일반적으로 과학은 경성과학, 연성과학으로 구분되는데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이러한 구분 역시 명확한 기준이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과학은 스스로 자신을 평가하고 자신의 오류를 검증하여 고쳐나가는 발전능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칼 포퍼는 반증가능성을 제시하고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 이론을 제시했다. 둘 다 과학의 속성을 보여주지만 한계를 지니고 있다. 실상 과학과 비과학의 구별은 다양한 요소에 의존하고 있다. 개별적으로 어떤 것이 과학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구분해줄 리트머스 종이는 없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지름길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의 많은 특성을 알고 있으며 이를 통해 무엇이 과학인지 아닌지 논의할 수 있다. 만약 과거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으면서 검증할 수 없는 말을 되풀이 한다면 이는 사이비 과학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너무 쉽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권위자나 저명한 인사가 한 말이라도 필터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심지어 자신의 생각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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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인문학 - 교양 있는 아이로 키우는 2500년 전통의 고전공부법
리 보틴스 지음, 김영선 옮김 / 유유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문법, 논리학, 수사학이라는 모든 공부의 기본을 아이에게 가르칠 것을 요구하는 독특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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