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 과학이라 불리는 비과학의 함정
마시모 피글리우치 지음, 노태복 옮김 / 부키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는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과학은 최고의 권위를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으며 그 콧대 높은 종교조차도 과학이라는 이름을 빌어 자신을 합리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특히 과학기술의 부진으로 인해 나라를 빼앗겼던 대한민국으로서는 더더욱 과학이라는 이름이 권위를 가지고 있다.

과학의 발전은 인간 지성의 승리를 의미한다. 과학의 발전을 통해 우리는 과거에는 꿈꾸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급부로 과학이라는 이름을 사칭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과거에 과학이 많은 것을 설명하지 못했을 때는 몰라도 우주의 탄생을 엿보고 있는 지금에 와서도 점성술이나 관상, 창조론 같은 이야기에 사람들이 혹하는 것은 과학이 무엇인지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데서 비롯한 것이다. 게다가 이런 사이비 과학들은 인간의 직관에 비추어볼 때 꽤 그럴듯하게 들리기 때문에 정상적인 과학자들을 곤란케 하고 자신들의 이야기가 마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 양 위장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과학이 무엇인지, 과학과 철학의 경계선은 무엇인지, 그리고 제일 중요한 사이비 과학의 특징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말미에 사이비 과학을 경계하기 위하여 언제나 헛소리 탐지키를 켜놓으라고 주문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과학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과학의 발전사를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았다. 뉴턴의 인간성이 더러웠다는(?) 사실과 과학이 어떤 식으로 오류를 수정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더불어 내가 잘 몰랐던 과학에 뿌리를 둔 유사과학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특히 끈이론과 외계지적생명체 탐사가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꽤 충격적이었다.

난 그동안 이 두 분야를 과학의 범주에 든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 두 분야는 거의 과학에 속한다. 과학의 최고봉이라는 물리학과 천문학에 둥지를 틀고 있지만 이 두 분야를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이야기다.

일단 끈이론의 경우 수학적으로는 완벽하다고 한다. , 이론상 맹점은 없다는 이야기다. 아마 그 때문에 최종이론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올라있으며 많은 과학자들이 이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물리는 수학이 아니다. 수학이라는 언어를 활용하는 것이지 물리는 기본적으로 우리 실제 세상에 관한 학문이다. 수학적으로 완벽하다 할지라도 수학의 특성상 공리만 세워지면 어떤 논리든 가능하기 때문에 공식이 맞아 떨어진다고 해서 실제로 그 일이 그런 방식으로 일어났다 확신할 수는 없다.

문제는 끈이론을 검증한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진화생물학의 경우 과거의 일이지만 분자생물학의 도움을 받아 이론을 검증할 수 있고 또 많은 화석이 발굴되고 있으며 이론을 토대로 그에 맞는 추측도 꽤 들어맞고 있다. 따라서 이는 비록 연성과학이라 불릴지는 몰라도 분명한 과학이다. 그러나 끈이론의 경우 수학적 해석만 난무할 뿐 이게 확실하다는 검증방법이 없다. 물론 경쟁상대인 평행우주론도 마찬가지다. 거물급 물리학자들이 관찰가능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입증하려 시도하는 현실은 꽤나 아이러니컬하다. 끈이론, 평행우주론은 현재 우주론의 최첨단에 속해있지만 실은 철학적 탐구에 가까우며 언젠가 사이비과학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불안전한 과학이다. 때문에 저자는 거의 과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외계지적생명체 탐사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수많은 프로젝트가 있었지만 성과는 전무했다. 물론 이 넓은 우주에 지적생명체가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마찬가지고 지적생명체가 있으리라는 보장 역시 없다. 이것은 확률문제인데 검증할 방법이 없다고 봐도 된다. 따라서 이 역시 거의 과학에 속한다. 이 분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야속한 소리겠지만.

앞에서 과학의 발전은 인간 지성의 승리를 의미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과학이 결코 완벽한 것은 아니다. 저자는 과학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이유과 사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과학자 역시 사람이다 보니 명성이나 돈 때문에 사기를 펼치거나 우생학과 같은 과학의 탈을 쓴 이데올로기적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때문에 과학에 대한 공격 역시 존재한다. 현재 과학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일단 대표적으로 창조과학(창조과학의 경우 스스로 과학이라 칭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공격하는 것은 아니다.)이 있으며, 그 외 많은 과학 비판가들이 존재한다.

창조과학의 경우 더 이상 언급할 가치가 없다. 성경의 많은 일들은 초자연적인 개입을 인정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과학은 초자연적인 개입을 인정하지 않는다. 보통 초자연적인 개입을 부정하면 무신론자라고 여기지만 이러한 부정이 과학은 참이고 성경은 거짓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신을 믿는 과학자들도 많으며 학문 활동에서 초자연적인 개입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면 왜 교회는 건물을 지어달라고 기도를 드릴 것이지 세속적인 방법으로 헌금을 모아 건설회사에 일을 맡기는지 모를 일이다. 일상생활에서도 신의 역사를 믿고 따라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종교인들도 일상생활에서 신의 임재를 고백할지언정 행동은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따르고 있다.

사실 창조과학의 목적은 성경이 사실이라고 입증하는데 있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를 어떻게 입증한단 말인가? 더불어 성경에는 공룡에 대한 언급도 없다. 혹자는 베히모스와 리바이어던이 그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해석이며 베히모스라는 이름 자체가 히브리어로 짐승의 복수형이다. , 이를 공룡으로 취급한 근거는 없으며 설령 공룡으로 취급한다 한들 성경에 묘사된 모습 그대로라면 어떻게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더불어 상당수의 공룡들은 초식이 아니라 육식이었다.

칼뱅과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신학자들은 창세기에 대해 현명한 말들을 했다. 그들은 창세기를 과거 사람들이 보이는 데로 적은 것으로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방인들에게 오해를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 창세기의 ‘6을 우리가 생각하는 6일로 여기면 곤란하다고 말하였다.

최근까지 대두되었던(그리고 지금도 고미숙 씨 같은 사람들에게 이어져 내려오는) 과학비판가들은 포스트모더니즘에 속해있는 학자들이다. 최근에는 기세가 많이 누그러졌지만 70~80년대에는 굉장했던 모양이다. 이들은 절대적 진리가 없다고 주장하며 지식이란 사회적, 문화적 영향을 받기 때문에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탐구하는 이 자연세계가 과학적 지식에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고도 말한다. , 과학 역시 하나의 담론일 뿐이라는게 이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판단하는가? 포스트모더니즘이 옳다는 주장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이는 마치 상대주의의 문제를 되풀이해 보는 것 같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에 대한 어떤 기준점이나 근거를 마련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의 말만 따라 이들도 아프면 무속신앙에 의지하기 보다는 의사를 찾아갈 것이다. 과학자도 인간이니 만큼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사회, 문화적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이를 가지고 과학이 하나의 담론일 뿐이라는 것은 지나치다. 마치 최근에 고미숙 씨가 과학의 실패를 이야기하며 주역을 그 대안으로 제시한 것과 같다. 그러나 이는 독단적 회의주의일 뿐이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이 지동설에 아무런 영향을 기치지 못했다는 말이 납득이 가는가?

자연세계와 인간 인식의 한계를 조화, 중재시키기 위하여 헬렌 롱기로, 로널드 기어리 등이 나름의 해법을 내놓았다. 개인적으로 이 둘의 의견이 나름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구성주의를 극단적으로 교육에 적응하는 것이 꽤나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성주의는 움베르토 마투라나의 주장처럼 생물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합리적 이론이지만 이를 지나치게 확장하여 유아론으로 흐르면 곤란하다.

과학은 근본적으로 완벽하지는 않다. 과학자들은 반발하겠지만 역사적으로나 논리적으나 과학은 방법론적 자연주의라는 사상에 기대고 있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차가 고장 나면 아무리 신심이 두터운 신자라도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정비사를 찾는다. 신이 차를 고쳐줄 가능성이 없다고는 볼 수 없음에도 일반적으로 그렇게 우리는 행동한다.

그러나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과학적으로 실증할 수 없는 문제이다. 우리가 우주의 탄생을 엿보고 있다 하더라도 아직도 우리는 우주가 얼마나 넓고 그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귀납적 방법으로 아무리 데이터를 쌓아도 귀납의 특성상 우리는 자연주의를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이미 과학은 자연주의를 기반으로 발전하였다. 신을 등장시키면 모든 것을 신이 한 것이라고 설명하면 그만이기에 과학은 발전할 수가 없다. 최근에 대두되는 지적설계론은 바로 이런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지금 발견되는 현상이 아닌 다른 현상도 지적설계론은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기에 발전할 필요가 없으며 오로지 빈틈을 찾는데 열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주의는 실증할 수 없다. 이는 철학, 형이상학의 영역이다. 때문에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자연주의를 방법론적 자연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을 이러한 기본 토대를 가지고 탐구하고 발견해나간다. 그리고 그 방법은 옳았다고 하겠다.

과학은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자연 외의 원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과학이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실증이 가능해야 한다. 다양한 증거가 있어야 하고 이론이 있어야 하며 이를 검증할 수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론이나 점성술, 관상은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점성술과 관상과 같은 경우 이미 반례가 많이 있으며 이 책에서도 그냥 찍는 것과 별 차이 없었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창조론의 경우 신을 등장시키는데 신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범주를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검증이 불가능하다. 만약 신의 의도를 알 수 있고 이를 파악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그 어떤 종교인들도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신성모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의 범주를 정확히 설정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일단 일반적으로 과학은 경성과학, 연성과학으로 구분되는데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이러한 구분 역시 명확한 기준이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과학은 스스로 자신을 평가하고 자신의 오류를 검증하여 고쳐나가는 발전능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칼 포퍼는 반증가능성을 제시하고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 이론을 제시했다. 둘 다 과학의 속성을 보여주지만 한계를 지니고 있다. 실상 과학과 비과학의 구별은 다양한 요소에 의존하고 있다. 개별적으로 어떤 것이 과학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구분해줄 리트머스 종이는 없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지름길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의 많은 특성을 알고 있으며 이를 통해 무엇이 과학인지 아닌지 논의할 수 있다. 만약 과거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으면서 검증할 수 없는 말을 되풀이 한다면 이는 사이비 과학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너무 쉽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권위자나 저명한 인사가 한 말이라도 필터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심지어 자신의 생각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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