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 시작하라 - 변화하는 학교 ESBZ의 부추김
마르그레트 라스펠트.슈테판 브라이덴바흐 지음, 류동수 옮김 / 에듀니티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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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는 어떤 곳이어야 할까? 오늘날 학교는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다. 내 세대를 생각하면 마냥 틀린 말은 아니지만, 또 전통적으로 내려온 교육법이 다 틀린 것도 아니겠지만 학교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학교가 이렇게 뒤쳐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입시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의 경쟁구조 때문일까? 학교 역시 사회라는 거대 공동체의 일부일 뿐이니.. 그렇게 놓고 보면 학교에만 새로운 혁신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해보이기도 한다.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혁신을 외치는 교사들이 있다. 학교의 변화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행동은 어리석어 보인다. 입시로 인해 왜곡된 교육환경은 너무나도 공고하지 않은가. 이들의 행동이 의미가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정말 옳을까? 왜곡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사람들이 선택한 결과 아니겠는가?


  여러 어려움과 한계 속에서도 변화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마르그레트 라스펠트와 슈테판 브라이덴바흐가 쓴 <학교가 시작하라>는 숨막힐듯한 갈망을 조금이라도 채워줄 단비와 같은 책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은 독일 ‘우리베를린학교’의 이야기이며 동시에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는 혁신과 변화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독일이 유럽 선진국이며 또 교육강국이라 알고 있다. 지식채널e에서도 나온 것처럼 아이들의 천국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독일 역시 순위 경쟁이 있으며 사교육에 돈을 많이 쓴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으면서 사람 사는 곳은 결국 다 똑같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 상황을 역전시키며 새로운 페다고지를 제안하는 학교가 ‘우리베를린학교’다. 이 학교는 아이들의 잠재력을 믿으며 이를 발휘하게 하기 위하여 다양한 매개를 활용한다. 이들 매개는 그렇게 대단해보이지 않지만 오늘날 우리 한국 학교에서는 쉽게 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작은 변화가 결국 큰 혁신을 가져오는 것 아닐까. 그렇다고 보면 입시 환경만 탓하는 것은 어쩌면.. 정말 어쩌면 무책임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저자들은 책에서 지금 즉시 착수할 것을 주장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책임’과 ‘용기’다. 무기력한 학교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결국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닭이 먼저냐 달갈이 먼저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없는 것처럼 사람이 바뀌는 게 먼저인지 체계가 바뀌는 게 먼저인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분분하다. 하지만 선의가 결국 생각을 바꾼다고 믿는다면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할 것이다. 그게 당장은 무의미해 보여도 말이다. 


  학생이 스스로 공부하고 책임을 다하고 교사들이 이를 돕고 주변 교육환경이 조화롭게 받쳐주는 학교. 우리가 그리는 이상적인 학교의 모습이다. 이 이상은 멀게만 느껴졌지만 곧 다가오는 미래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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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어떤 공동체인가? - 활동이론으로 바라본 혁신학교
성열관 외 지음 / 살림터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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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교는 미래의 동량인 아이들을 가르치는 곳이다. 좀 더 부연하자면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 원만하게 적응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하는 곳이다. 그런데 요즘은 세상이 바뀌어 교육을 넘어서 그 이상을 학교에 요구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동안 시야에 벗어났던 것들이 교육이란 렌즈에 들어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학교에는 교사가 있고 학생이 있다. 교사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훈육한다. 반 세기에 가까운 시간동안 해온 일이다.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학교가 어떤 공동체인지 묻는 것일까? 아니, 그 전에 학교가 조직을 넘어서 정말 공동체이긴 한 걸까?


성열관 외 18명은 일반학교와 혁신학교를 비교하면서 질문을 하고 답을 찾아간다. 저자들은 활동이론이라는 후기 비고츠키주의자들의 이론을 하나의 렌즈로 삼아 이 과정을 헤쳐나간다.


교육계에 몸담은 사람 중에 비고츠키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졸업한지 한참 지났지만 여전히 근접적 발달영역과 비계라는 단어가 여전히 기억나는 것을 보니 말이다.


학습을 개인의 인지구조의 발달로 본 피아제와 다르게 비고츠키는 비계 설정을 통한 사회적 협력을 통해 학습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중요한 매개가 되는 것이 언어. 근접적 발달영역 역시 이런 이론을 토대로 나온 곳이다.


비고츠키의 이론은 오늘날 교육선진국으로 평가받는 핀란드 교육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이론을 이어받아 연구한 후기 비고츠키주의자들은 비고츠키의 이론을 발전시켜 매개 이외에 공동체, 문화, 규범, 분업구조 등이 공동체 조직의 성장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활동이론은 공동체를 목적이 있고 규범, 문화가 있는 활동체계라고 말한다. 저자들은 이를 토대로 학교가 추구해야할 공동체의 모습을 배려, 정의, 전문가, 크게 3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2.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존재들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피할 수 없는 관계성 때문에 배려라는 가치가 중요하다.


저자들은 배려와 돌봄이 혁신학교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이를 통한 관계의 회복을 통해 비로소 학습이 가능하다는 주장한다.


배려와 돌봄을 위해 규범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 학교에도 생활규정이 있다. 그런데 규범을 같이 세웠다고 잘 지킨다는 보장은 없다. 저자들은 이를 지적하며 규범의 내면화를 위해 학생자치활동을 강조한다. 학생자치활동은 이후 정의 공동체 파트에서도 나오는데 결국 학생들의 자발성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다.


배려의 윤리는 배려하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배려 받는 사람도 중요하다고 한다. 이 부분을 읽었을 때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배려라는 행위가 주체와 객체로 구분된다면 그 행위는 결국 시혜적 성격을 지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배려 받는 사람은 고마움을 표현하여 스스로가 배려의 주체로 설 수 있는 셈이다.



3.

마이클 센델이 지은 정의란 무엇일까;라는 책이 한때 유행했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이 책이 유행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정의에 목말라 했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럼 그렇게 사람들이 목말라하는 정의란 무엇일까?


오늘날 우리 사회는 불평등과 양극화로 어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절대적으로그렇다 할 순 없겠지만 불평등과 양극화를 사람들은 불의로 보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정의라는 말에 최소한 평등이란 가치는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학교는 어떨까? 학교에서 불평등과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 사실 학교에서 그런 것까지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긴 한다.


정의공동체는 크게 3가지 관점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자치와 참여다. 콜버그의 정의 공동체 이론에서 나온 개념으로 국가 교육과정에서도 명시된 이야기다. 두 번째는 사회정의교육이다. 수업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실제로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사회정의라는 것은 이론보다는 실천이 중요하다.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정의교육이 과연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확신하기는 어렵다. 세 번째는 학습복지다. 롤스의 정의론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롤스는 운의 중화, 출발선 평등을 위해 차등의 원칙을 적용하자고 말한다. , 기회의 평등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공부할 기회를 주는 것만 가지고는 불평등을 해소하기는 어렵다. 똑같은 교사한테 교육 받아도 아이들 성장이 제각각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롤스의 주장은 깊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상당히 막막했다. 나온 이야기는 큰데 어떻게 해야할지 감이 안 왔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이런 부분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다만 학교의 자치가 학생주도적으로 유연하게 학생의 삶을 초점으로 삼고 있는지는 검토해야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4.

흔히 교사를 전문직이라고 말한다. 속으로야 어떻게들 생각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공적으로는 전문직이라고 인정받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한다는 말도 있다. 또 다른 공무원들과 다르게 단일호봉제로 취급받는 특정직 공무원이기도 하다.

현실은 어떨까? 지난번 조희연 교육감의 페이스북 댓글 논란도 그렇고 상당수의 사람들은 교사를 전문직으로 보기보다는 그냥 교육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국가에 고용된 인력 정도로 보는 것 같다. 심지어 교사들 중 일부도 누릴 것은 누리면서 본인이 전문직이라는 인식은 부재하는 경우도 있다.


하그리브스는 오늘날이 포스트모던 전문성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교사들이 탈전문화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도 말한다.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의 대두를 볼 때 그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학습을 개인적 지식의 측면에서 볼 때 더더욱.


학교의 문화는 그간 협력적이기보다는 개별화, 불간섭주의를 기반으로 해왔다. 학교공동체는 교사들이 공동으로 모여 있는 곳을 의미할 뿐 공동체란 언명에 걸맞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런 문화적 맥락을 유지한다면 하그리브스의 예측처럼 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저자들은 대안으로 협력적 전문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혁신학교들이 이를 위해 어떤 매개를 사용했는지도 이야기한다.


혁신학교가 협력을 위해 사용한 매개는 책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크게 3가지다. 하나는 전문적 학습공동체의 날운영이다. 전북의 경우 교육청 정책으로 거진 대다수 학교에서 운영하고 있긴 하다. 그 내용과 질의 수준은 제각각이겠지만. 다른 하나는 공동수업안 작성이다. 이전 학교에서 많이 해본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컨퍼런스 데이운영이 있다. 서로의 교육활동을 공유하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그렇게 하고 있는 학교가 많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아무리 매개를 잘 준비한다 하더라도 이를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규범이다. 비전을 공유하고, 민주적 의사결정을 하고 교사들의 협력을 약속하는 것 말이다. 이런 규범과 매개가 상호작용할 때 비로소 학교의 성장이라는 성과가 나타난다.


활동이론에 따르면 자발적인 노력은 모순을 인식하는 데서 나온다. 현 상황에 대해 불만이 없다면 당연히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모순을 인식하고 자발적인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교사는 성장한다. 또한 활동체계, 즉 공동체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동기도 생기게 된다.


책에는 쓰여 있지 않지만 내 생각에 하나가 더 필요한 것 같다. ‘용기말이다. 개인의 성장은 개인에게 달린 것이지만 공동체의 성장은 다른 사람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일이다. 관계를 중요시하는 사람에게 이 동의를 구하는 과정은 괴로울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가 에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처럼 변화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그 방향에 대해서는 계속 검토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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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와 권력 - 혼돈의 시대를 헤쳐가기 위한 정치학 수업
나다 이나다 지음, 송태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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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와 권력> 나다 이나다 지음

2020년 2월 23일 일 오후 1:08

우리 반이 단결하지 않아서 걱정이라는 고민에서 시작된 대화로 이루어진 이 책은 권위와 권력의 차이가 뭔지, 그리고 이 둘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할 점은 무엇인지 이야기해준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보고 깨달은 점도 많았고 동의하지 못하는 지점도 몇몇 있었다. 어찌됐든 오늘날 사회에 대해 이해하기 위하여 한 번쯤 아니 두세 번쯤은 읽어볼만한 책이다.

권위와 권력의 차이는 무엇일까? 권위는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낸다. 즉, 순종이라는 가치를 이끌어낸다. 그러나 권력은 강제적인 복종을 이끌어낸다. 오늘날 그 수많은 법에 대해 모두 동의하고 따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을 따르는 것은 권장된다. 이게 권력이고 또 권력으로 인해 생기는 법의 권위인 것이다. 강제적인 복종을 넘어서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고 또 이를 사회의 바른 가치이자 상식으로 세우는 것이다.

확실히 권력보다는 권위가 더 부드럽고 민주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저자는 권위조차도 넘어서기를 원하는 것 같다. 저자는 권위 역시 무지와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 말하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합리적 설득을 제시한다.

합리적 설득이란 이치를 통해 상대방이 상황을 깨닫게 하여 바른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생각해볼 때 저자의 대안은 타당해 보인다. 문제는 이게 정말 인간 삶 전부에 적용가능하냐는 것이다.

저자 역시 한정된 영역에서나 아게 가능하다고 말한다. 예술이나 음식 취향 같은 것을 이치로 설명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이치라는 것은 서로가 공유하고 인정해야 전제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 합리적 설득이 안 되는 경우는 어찌해야 하는 걸까?

여기서 다시 나오는 게 권위다. 우리는 다수라는 권위, 전문가라는 권위, 상의 권위로 예술와 음식 같은 주관적 요소가 강한 영역까지 서열화한다. 여기서 인간이 권위를 만들어내는 걸까, 아니면 권위에 길들여지는 걸까? 아니면 둘 다일까?

돌아와서 오늘날 단결이 잘 안 되는 이유는 이런 권위의 실종 때문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단결시키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권력의 개입이 필요하다. 즉, 법과 처벌이 생겨난다.

저자는 결론에서 단결을 대신하여 조화를 이야기한다. 어떻게 보면 허무한 결론일 수 있지만 오늘날 민주사회에서 상식적인 이야기일수도 있다.

그런데 이 책이 아주 오랜전에 나온 책이다 보니 현대 과학의 성과가 반영 안된 부분도 있는 것 같다. 내가 동의하지 못한 부분이 그것인데 최근 연구 결과 중 하나는 인간의 자아가 공동체의 탄생 이후 생겨난 것이라고 말한다. 자아를 가진 인간이 모여 공동체(사회)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일단 모이고 그러면서 역할이 생기면서 자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구조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저자의 조화론은 결국 하나마나한 이야기라고 볼수도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저자도 이를 알기에 마지막에 A군의 미소에 비아냥거리는 그림자가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라고 쓴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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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를 만들기 위해서 무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법이라는 군주의 무기입니다. 한비자는 법을 군주의 발톱과 이발이라고 하면서 이것으로 신하들을 다루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상벌권을 장악한 채 언제든 그들에게 무거운 벌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궁중 사회의 호랑이 같은 신하들은 언제든 호시탐탐 군주의 권력을 노리는데, 법으로써 감히 군주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게 하고, 법을 어길 때에는 엄형을 내려 누구든 군주를 무서워하게 해야한다고 했습니다. 법은 군주의 세에 있어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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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로마법 수업 - 흔들리지 않는 삶을 위한 천 년의 학교
한동일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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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인간 사회는 시대적 한계 때문에 여성을 억압했지만, 신은 남성만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남성 여성을 구분하지 않고 두 성性을 아우르는 ‘인간’을 사랑하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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