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자로 이룬 문자혁명 훈민정음 나의 고전 읽기 9
김슬옹 지음, 신준식 그림 / 미래엔아이세움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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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글이라 불리는 이 문자는 본래 훈민정음,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불렸다. 훈민정음이라는 단어에는 문자 그 자체와 이를 풀이한 책의 이름,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일반적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 불리는 책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둘의 구분은 우리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이 훈민정음이라는 28자로 이루어진 문자가 왜 그리고 어떻게 창제되었으며, 이 문자가 당시와 지금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더 중요하다.

 

당시 조선은 중국 문자인 한자를 글자로 사용했다. 어디 그때 뿐 일까. 삼국시대부터 이미 우리민족은 우리말을 표시할 문자를 갖지 못하여 한자를 빌려 사용했다. 그러다보니 불편함이 있어 신라시대에 설총이 이두라는 한자를 다루는 법과 음독법을 만들긴 했지만 한자는 여전히 불편하고 백성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어려운 문자였다.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곧 힘이다. 문맹자가 거의 없는 대한민국에서는 그다지 와닿지 않는 말이겠다. 그러나 당시에는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이 교양이 있는 지식인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지금은 좀 위상이 약화되었지만 문자는 중요한 기록수단이자 전달 수단이다. 문맹자가 많은 사회에서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여론의 흐름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휘두를 수 있게 된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시가 종교개혁 시기의 성직자들이다. 마르틴 루터, 칼뱅 등이 활약하던 시기, 성서는 라틴어로만 써져 있기 때문에 일반 민중이 직접 읽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다보니 성서의 해석은 성직자들이 독점하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그들은 막강한 종교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종교개혁과정에서 마르틴 루터는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민중이 직접 성서를 읽을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그 유명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이 이를 뒷받침 하여 만인사제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개신교가 태동하게 된 것이다. 만약 루터의 독일어 번역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의 불씨는 타다가 곧 꺼져버렸을지도 모른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 최만리를 비롯한 보수파가 반대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들이 종교개혁 시기의 성직자들처럼 자기들만 아는 반동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시대 상황에서 이들의 반대는 사실 상식에 가까운 것이다. 계급제 사회에서 하층 계급이 상층 계급에 반할 수 있게 만들지도 모르는 도구를 왕이 만들겠다는 데 가만히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까?

 

저자 김슬옹은 이를 왕이 백성들과 직접 교류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으로는 납득하기 힘들다. 계급제는 구조의 문제로 일단 그 구조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최상위 계급이라고 무사할 수는 없다. 단적으로 프랑스 대혁명에서 루이 16세가 어떻게 죽었는지 보면 된다. 세종대왕의 업적이 전 세계를 둘러봐도 최상위라는 점은 사실이지만 그 분이 민주사회가 아니라 군주제 사회에서 최고 권력자라는 점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또한 당시 지성 사대주의를 펼치던 조선의 입장에서 이러한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문화적으로야 대단한 업적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상당한 위험을 감수한 것이다. 당대 명나라 황제는 그 유명한 영락제이고 그 세종 본인이 지성 사대주의 입장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신하들의 반대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진의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더라도 백성들을 위하여 이 문자를 창제함은 분명하다. 스스로가 그렇게 밝히고 있고 당시 반대파들과의 논쟁에서 이러한 뜻은 잘 드러난다. 또한 훈민정음이 이후 하층민의 투쟁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세종대왕의 업적은 대단한 것이다.

 

당시에는 언문이라 불리며 한자 다음의 문자 역할을 했던 훈민정음(이하 한글로 표기)이지만 일제 시대를 거쳐 대한민국이 성립되면서 한글이라는 이름을 얻고 우리나라 공식 문자가 되어 세계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다. 한글의 과학성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는 바이며 몇 백년 전에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근대적이다. 특히 말을 하는 기관과 말소리를 분석하여 만든 점은 정말 극찬을 받아도 무방하다.

 

이러한 노력이 후대에까지 내려와 오늘날 대한민국은 문맹자가 거의 없는 국가가 되었다. 물론 이는 한글의 우수성에 우리나라 의무교육의 우수성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글(훈민정음)이 문자혁명에 가까웠다는 저자의 주장은 사실이라 말해도 될 것 같다.

 

그러나 문맹자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오늘날 민중의 삶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다. 사실 조선시대에도 최고 학문인 성리학이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라 한자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제대로 된 문해력은 문자만 읽을 줄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파울로 프레이리의 주장을 참고하자. 언론의 부화뇌동과 권력 계층의 달변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학문 전공자들이 쌓아놓은 언어의 장벽은 문맹이 아니라는 것만 가지고 넘어서기에는 너무 높다.

 

당시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이 만들어낸 혁명을 넘어선 새로운 혁명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민중을 위한 언어(단어, 용어)를 만들어내고 권력을 쥔 자들이 하는 말의 진의를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전자는 지식인들이 하지만 후자는 교육자가 한다. 교사들이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가르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사가 혁명적 마인드를 갖추어야 하는 이유기도 한다.

 

세종대왕의 민본주의는 오늘날 민주주의에 비하면 한계가 있는 것이며, 신분제 사회를 벗어나지 못한 시혜적 민본주의다. 그러나 최고 권력자가 백성들을 위하여 문자를 만든 그 의의는 우리가 기억해야하며 다시 되살려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민주 집중제를 채택한 상황에서 권력의 견제를 위해 우리는 더욱더 문해력을 길러야 한다. 이러한 역할을 누가 해야 하는지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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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9-30 0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훈민정음을 지은 까닭은 무엇보다 `한국 지식인이 한자 소리를 통일해서 말하고 쓰도록 규범을 세우려는 뜻`이 가장 컸다고 느껴요. 조선 시대에서 `백성`은 농사짓는 여느 사람을 아우르는 말까지는 담지 않았으리라 느낍니다. 요즈음 `국민`이라는 낱말을 쓰듯, 그때에는 으레 하는 말이 `백성`이었을 뿐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니까, 훈민정음은 오늘날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과 달리, 한자를 한국에서 소리값을 제대로 적으려고 만든 `발음기호` 수준이었던 셈이라고 해야 올바르리라 느껴요.

다만, 어떻게 만든 글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잘 쓰니까 다 괜찮게 여길 만하지 싶습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97289&cid=47303&categoryId=47303

데카로그스 2014-11-07 22:03   좋아요 0 | URL
오... 그럴수도 있겠습니다.
 
주식회사 장성군 - 공무원이 경영하는 회사
양병무 지음 / 21세기북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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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월호의 파동 때에 해경을 비롯한 공무원들이 많은 지탄을 받고 있다. 거기에 현 대통령은 공무원들의 태만을 징계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세월호가 인양되고 마무리되려면 앞으로 반년은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 과정에서 공무원들은 계속해서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이 문제가 정치쟁점화 되면서 정부 대 반정부의 구도로 흘러가면 비판의 목소리는 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대다수의 일반인들은 이 일을 머릿속에서 지우지 않을 것이다.

 

이미 학교에서도 근무기강 확립을 위한 공문이 내려온 상태다. 세월호 참사와 학교 근무태도가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다르게 보면 일반인들이 공무원을 보는 시각이 그만큼 차갑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기강확립을 위한 공문이 내려올 리가 없다. 이는 공무원들이 나태하다는 전제 하에서 비로소 나올 수 있는 공문이다.

 

왜 공무원들에 대한 이미지가 이렇게 나빠졌을까? 본래 공무원은 그렇게 인기 있는 직종이 아니다. 198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고졸들이 하는 일에 가까웠다. 그런데 IMF 이후 상황이 반전됐다. 사람들이 당장 버는 수익보다 안정성을 추구하면서 공무원이라는 직종에 대한 주가는 치솟아 올랐고 그 결과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거기에 사고를 쳐도 쉽게 짤리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공무원은 철밥통에 무능하다는 사람들의 인식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정말 공무원들이 무능한 사람들만 모였다면 이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겠는가? 신문 기사에 나오는 사례들을 보면 갑갑하지만 사실 공무원들이 정해진 규정 밖에서 움직인다면 그게 더 큰 문제다. 무릇 지도자란 못한다고 야단칠게 아니라 밑에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배정하고 그들이 활약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그런 지도자가 바로 이 책에 나오는 김흥식 장성군수다.

 

그는 군수로 취임할 때 주식회사 장성군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들고 나왔다고 한다. 이 책 이름도 주식회사 장성군이다. 주식회사란 이름 때문에 전 대통령처럼 효율화란 미명 하에 공공성을 포기하는 거 아닌가라는 편견을 가졌지만 다 읽고 보니 민간의 장점을 절묘하게 접목했을 뿐 공공성을 포기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장성군에서 공무원들은 기업으로 치면 임직원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군민를 주주로 생각한다. 일반 기업이라기보다는 협동조합에 가까운 형태인데 김흥식 군수는 이러한 관점 하에 많은 변화를 일구어낸다. 그 변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게 팀제로 조직을 개편한 것이다.

 

공무원 조직은 철저한 위계질서로 이루어져 있다. 그 때문에 승진에 목숨을 걸기도 하는데 지방직만 보면 6급만 되더라도 일보다는 결제하는 관리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물론 관리자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공무원들의 승진 구조 상 언젠가는 6급을 달 수 있다는 점에서 실무자는 줄어들고 관리자는 늘어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팀제로 조직을 개편할 필요가 있다. 중앙관청에서도 이후 팀제로 조직을 개편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학교에서도 최근 업무전담팀 이야기가 나오고 교육청에서도 6급 공무원도 실질적인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을 보면 이는 하나의 대세라고 볼 수 있다. 사실 교육계가 꽤 늦은 거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팀제는 조직에 활기를 불어넣어주고 의사소통을 활성화시킨다. 팀이 실질적인 책임을 가지고 일을 하기 때문에 기존의 상명하달 식의 업무처리가 아닌 기업식의 업무처리가 이루어진다. 조직 내 민주주의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교육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는 점이다. 공무원도 연수라는 것이 있긴 하지만 장성군은 기존의 연수와 격을 달리한다. 가장 먼저 장성 아카데미를 들 수 있는데 군수의 헌신과 집념으로 유명 강사들을 매주 초빙하여 강의를 들을 수가 있다. 이는 공무원 뿐만 아니라 군민들 모두 가능하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다. 장성 같이 조그만 동네에 왜 그런 강의가 필요하단 말인가? 당시 군 의회에서 반대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 김흥식 군수는 콩나물 비유를 들며 당장은 효과가 없어 보이지만 꾸준히 물을 부으면 콩나물이 자라는 것처럼 지속적인 교육으로 군이 발전할 수 있다고 의회를 설득한다. 이러한 그의 믿음은 책에서 잘 나오는데 공무원들과 군민들의 변화로 나타난다.

 

요즘 학부모 교육이 강조되는데 교육의 주체로서 학부모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교육 받아야할 분들은 안 오시고 굳이 안 받아도 되는 분들이 자주 오시는 경우가 있다. 아무래도 생계가 문제다 보니 그럴 것이다. 이러한 교육을 지방자치단체나 교육청 차원에서 주력사업으로 하는 것이 어떨까? 개별학교에서 하기에는 예산이나 그 외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장성 아카데미는 군민과 공무원 모두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공무원들에게는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하기에 글로벌 마인드를 길러줄 수 있는 해외 배낭연수를 군 내 모든 공무원들이 갈 수 있도록 기회를 준다. 자비 20% 부담이기는 하지만 모든 공무원들이 한 번 씩 다녀오게 하는 것은 김 군수의 확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지자체 최초로 민간기업 위탁 연수 교육을 실시하였다. 요즘은 꽤 많다고 들었지만 당시에는 기업 연수 담당자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니 꽤 놀라운 일이다.

 

비록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는 기업이지만 이러한 경쟁력은 조직 내 협동에 의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삼성, LG와 같은 대기업들은 그런 교육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다고 한다. 이 대기업들의 탐욕에 대해서는 비판해야 옳겠으나 한국 내 조직 운영은 이들 기업을 따라올 수가 없다. 유감스럽지만 공공성을 수호해야하는 공직 사회가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자기 일만 하면 끝이라는 일종의 보신주의, 무사주의가 퍼져있다. 따라서 이런 점은 배울 필요가 있고 아예 기업 연수원에 직접 가서 연수를 받게 한 것은 탁월한 혜안이라 볼 수 있다.

 

그 외 4장과 5장에 장성군의 히트 사례가 잘 나와 있다. 군수의 의지만으로 이렇게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민관 합동으로 이러한 일을 이루어낸 장성군의 사례는 교육계에서도 의미 있게 받아들일만 하다.

 

마지막 장을 보면 중장기 계획에는 반드시 마스터플랜을 세워야 한다는 말이 나와 있다. 그러고 보면 내 학급운영은 꽤 조급하게 밀어붙이다 안 되면 포기하는 식인 것 같다. 좀 여유를 가지고 장기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다. 혁신학교 역시 마스터플랜을 세울 필요성이 있다. 장성군이야 용역을 줘서 이를 세웠지만 학교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는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전반적으로 재미있는 책이다. 실제로 어떤지는 가봐야 알겠지만 책에 언급된 것만 가지고도 혁신이라 이름 붙일 수 있겠다. 리더 한 명이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리더의 역할은 어떤 계획을 세우고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조직을 탈바꿈시키는 것이 최우선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여기에 나온 히트 사례를 군수가 하자고 밀어붙였다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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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랑 2014-05-13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호~ 서재 멋지네용!
 
[POD] 켈트 영성 이야기
필립 뉴엘 지음, 정미현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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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처럼 기독교 관련 책을 읽었다. 그동안 읽지 못했다가 오랜만에 읽어서 그런지 아니면 책 내용이 워낙 감명깊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이 책은 기독교에서도 비주류인 켈트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닮고 있다. 책의 내용은 일반적인 정통교회에서 우리가 배웠던 교리와 상반되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물론 더 높은 관점에서 통합할 수 있는 여지가 있고 저자 역시 이를 희망하긴 하나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비롯한 원죄 신학과 충돌하는 지점이 많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의 죄성에 초점을 맞추어 원죄론을 설파했다면 켈트 신학은 인간의 죄성이 아니라 인간의 선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현대 신학자 중 하나인 메튜 폭스가 주창하는 '원복'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그렇다고 해서 펠라기우스를 필두로 한 켈트 영성이 마치 불교처럼 인간의 자력갱생을 통한 구원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이 점은 펠라기우스가 오해받은 측면이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선함 역시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로서 인간은 아무리 악에 가려져도 그 본질적인 부분에 한줄기 빛, 그러니까 신의 창조성이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따라서 자력갱생이라는 것조차 신의 선물인 것이다. 메튜 폭스의 경우 이를 '원복'이라 부르고 있다.

 

  반면 로마교회를 대표하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죄성에 주목하여 그들의 신학을 전개하고 있다. 이는 아마 그의 방탕했던 젊은 시절에 대한 참회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를 비롯한 기독교 주류 교리는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저지른 불순종에 의하여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원죄'론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에서 저자는 펠라기우스를 비롯한 켈트 신학의 근본을 성 요한에게, 아우구스티누스를 필두로 한 로마 신학의 근본을 성 베드로에게 두고 있다.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주장이라 꽤 흥미로왔는데 요한복음과 마태복음의 구절을 절묘하게 대비시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확실히 두 복음서는 성격이 다르긴 하다. 좀 충격적인 이야기이기도 하기에 이 이야기는 신중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주류 기독교의 원죄론, 즉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선을 행할 수 없다는 주장은 양날의 칼과 같다. 이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어째서 비기독교인들이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인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 이는 기독교 주류 신학에서 결코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이 일어나는 현상을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든지 아니면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이 있다고 하든지 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난제에 대한 여러가지 대답이 이미 나오긴 했다. 내가 신학자가 아니므로 자세한 내용을 쓸 수는 없지만 나름 설득력있는 주장들을 본 기억이 난다. 은총을 자연은총, 계시은총으로 나눈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극복하는 글을 어디서 본 기억이 난다. 그러나 좀 불만족스럽긴 했다.

 

  이 두 신학의 대립을 보면 유학에서 유명한 맹자와 순자의 대립이 떠오른다. 물론 기독교와는 다르게 유학에서는 맹자가 도통을 계승한 것으로 결론이 난다. 뭐랄까,, 아이러니 하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인 걸까?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위로를 얻었다. 또한 새로운 관점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아무리 타락했다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최고의 피조물이라는 인간에게 선성이 완전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말 사라졌다면 인간의 회복은 불가능하다. 아예 새로 만들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신은 비록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였지만 그를 없애고 새로운 인류를 만들지는 않았다. 인간에겐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다.

 

  물론 위대한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인간이 선을 행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악마 이상으로 악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 역시 엄연한 사실이다. 그의 원죄론 역시 새롭게 볼 필요가 있긴 하지만 의미가 깊다.

 

  하나님을 인간과 완전 분리된 초월적이과 외재적인 존재로 인식하여 인간의 힘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다고 하기는 했지만 그 역시 인간이 다시 신 앞으로 돌아가기를 바란 신학자다. 하나님의 손길이 어떤 맥락에서 개입되냐로 이단 논쟁이 벌어지긴 했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그렇게 큰 차이일까 싶다.

 

  저자는 켈트 신학을 자연의 신학이라 불렀다. 하나님이 만들고 스스로 보기 좋았다 말씀하신 이 세상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자연을 또 하나의 성서라고 주장한 프랜시스 콜린스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낼 수 있다. 세상은 타락하고 성경만 존귀하다는 생각은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은 아마 한국 주류 교회에서는 결코 인정될 수 없는 아마 이단 취급을 받을 책이다. 그러나 기독교 교리의 모순을 극복하고 리처드 도킨스로 대변되는 현대 무신론의 도전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이러한 책이 필요하다. 기독교 비주류로서 꾸준히 그 명맥을 유지해온 켈트 신학과 그 신앙에 경의를 표하며 저자와 역자에게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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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이야기, 아이는 들어주는 만큼 자란다
박문희 지음 / 보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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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이야기, 아이는 들어주는 만큼 자란다박문희 선생님께서 쓰신 이 책은 기존의 교육에 대한 정의를 무너뜨리는 아주 독특한 책이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교사 주도 하에 이루어진다. 아이중심 교육이라 할지라고 그 설계자는 교사다.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하든 교육내용의 입장에서 출발하든 교육의 가장 현실적인 부분인 수업의 최종 설계자이자 결정자는 바로 교사다.

 

또한 교사에게는 가르쳐야할 것들이 있다. 이른바 국가교육과정, 교사들은 이것을 재구성하여 수업을 구상한다. 그 목표는 당연히 교육과정에서 요구하는 성취수준에 아이들을 도달시키는 데 있다. 비록 아이들이 즐겁게 할 수 있도록 활동을 구성하고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할지라도 교사가 설정한 테두리에 벗어나는 것은 결국 허락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성취수준 도달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아이들의 활동과 참여는 보장되는 것이다.

 

조금 부정적인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이는 당연한 일이다. 만약 이러한 성취수준과 목적, 교육과정이 없다면 뭐하러 국가가 그 많은 돈을 들여서 공교육을 지원하겠는가? 또한 선생이란 말의 뜻처럼 먼저 그 길을 걸은 사람들이 배워야할 내용을 미리 설정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효율적인 일이다. 그 방향에 의견이 분분할 수는 있겠지만 교사가 배울 내용을 미리 정하고 그 방법을 고안하는 것 자체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렇게 생각할 경우 100% 아동이 중심이 되는 교육은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아동이 배움의 주체라면 우리는 아동이 온전히 교육의 중심이 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계속 말했듯이 이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아동이 뭘 배워야하는지 결정할 권리가 있는지, 그럴 능력은 있는지, 또한 그렇다고 할 경우 왜 국가, 사회가 지원을 해야는지 등 여러 가지 문제가 파생된다. 때문에 이런 교육을 펼치고자 하는 사람들이 감당해야할 무게는 보통이 아닌 것이고 아직 난 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박문희 선생님은 그 무게를 감당하고 또 이를 즐거워하시는 분인 것 같다. 직접 만나보지 못했지만 책에서 느끼는 모습은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 이야기를 여과 없이 들어주는 자애로운 교사, 그 자체다. 이 분 역시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의 영향을 받으신 분으로 마주이야기라는 독특한 교육브랜드를 만드셨다. 책에서 느끼는 바는 마주이야기라기 보다는 가급적 어른은 말을 삼가고 아이들이 말하게 하자에 가까운 것 같지만 어른과 아이의 권력관계가 평등하지 않다는 점에서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유치원 아이들의 재치 있으면서도 어른들은 생각하기 힘든 말글들을 보면서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또한 이런 말글이야말로 진짜 살아있는 글쓰기 교육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선생님의 교실에서 주인공은 아이들이다. 심지어 급식식단조차도 유치원에서 정하지 않는다니 더 할 말이 없다. 자신의 주장을 현실에서 올곧게 실천하는 데 여기에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은 어떻게 배우는가존 홀트가 지은 책이 떠올랐다. 읽다가 지루해서 중단한 그 책은 아이들의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아이들이 어떻게 배우고 그 과정에서 어른들이 어떻게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꽤 흥미로운 내용들이 나온다. 나는 너무 일관적인 내용에 질려서 그만 읽기는 했지만 언젠가 다시 펼쳐봐야 할 책이다. 아이들의 가능성과 그 배움의 신비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마주이야기, 아이는 들어주는 만큼 자란다와 같이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교육이 초등학교에서도 가능한지 의문은 든다. 우연인지 모르겠으나 박문희 선생님 책이나 존 홀트 책이나 초등학교 이전의 아이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데 공교육 체제 하에서의 교사들이 가질만한 고민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박문희 선생님이야 유치원 교사이니 당연한 일이고 존 홀트 역시 간혹 초등학생 이야기가 등장할 뿐 대다수 우리나라 유치원 시기의 아이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고 볼 때 이 교육을 초등학교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일단 유치원도 국가교육과정이 있긴 하지만 초등학교처럼 엄격하지는 않다. 초등학교는 교과와 학년이라는 분리된 개념들이 있기에 교사가 마음대로 움직일 여지가 유치원보다는 적다. 무엇보다 가르쳐야할 내용이 대략적이나마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마주이야기 내용 자체를 교육과정으로 삼는다는 박문희 선생님의 교육은 들어설 곳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나는 교육이란 결국 아이들이 성장하여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천편일률적인 글쓰기가 되도록 꾸미는 교육을 해서는 곤란하지만 보편적인 격식을 차리는 것 정도는 훈련이 필요하다. 또한 스승이란 본이 되는 존재다. 아이들에게 배워할 것도 있겠지만 아이들 역시 교사를 배워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교사라는 존재가 있을 필요가 없으며 교대라는 교육기관을 만들어 교사를 양성할 필요도 없다.

 

아이들의 자발적인 성장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주변 친구들이 젓가락질 하는 것을 보고 내 습관을 한 번에 바꿨던 경험이 있는지라 또래가 가장 좋은 교사라는 주장에 공감이 되긴 하지만, 동시에 별로 좋지 못한 것을 한 번에 배웠던 것도 또래라는 점에서 교사의 역할에 대해 숙고해야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끼리 대화 나누고 살아가면서 배운다는 것은 유치원 수준 또는 초등학교 1, 2년 수준에서나 가능한 것 아닐까? 높은 성장을 위해서는 그에 걸 맞는 만남이 있어야 한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노력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동시에 아이들에게 해줘야할 말이 있다면 마땅히 해줘야 할 것이다.

 

마주이야기 교육의 핵심은 아이들 이야기를 들어주는 어른이다. 아이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내 이야기를 줄이는 노력은 필요할 것 같다. 공자나 석가 같은 성현들도 말을 많이 한 사람들은 아니었으니까. 더욱 낮아지려는 노력은 필요하겠다. 배워야할 내용 역시 아이들이 직접 골라볼 수 있도록 한 번 해봐야겠다. 요즘 감기기운이 도져서 여력이 부족하지만 한 번 쯤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마 한 번으로 그칠 것 같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 역시 배우는 것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책은 꽤나 부담스럽다. 좋은 것을 알겠지만 내가 할 수 없는 것이라 그렇다. 그러나 그래서 읽을 가치가 있었다. 이전에 읽은 책으로 행복한 교실 이야기에 나오는 글을 통한 소통이 초등학교 판 마주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다음에는 글을 통한 소통이 있는 책을 읽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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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행복한 교실 이야기 - 이주영 선생님의 행복한 독서교육 1
이주영 지음, 장경혜 그림 / 행복한아침독서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그동안 독서 관련 책은 많이 읽었다고 생각해왔다. 우리학교 책날개 모델학교 멘토이신 여희숙 선생님께서 쓰신 책 읽는 교실을 위시하여 개인적으로 크라센의 읽기 혁명’,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등을 비롯한 책을 읽어왔고, 우리학교 독서모임에서도 수업 중 15, 행복한 책읽기’, ‘하루 15분 책 읽어주기의 힘’, ‘하루 30분 혼자 읽기의 힘등 다양한 책을 읽어왔으니 그럴만하다.

그런데 이번에 이주영 선생님의 책으로 행복한 교실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직도 읽어야 할 책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의 책 중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를 제외하고 나머지 책은 이론적인 성격이 강하고 학생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진 책들이다. 이렇게 해서 학생이 이렇게 변했으며 이 방법은 우수한 다양한 증거가 있다.. 라는 전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 책에는 교사의 고민이나 실패를 통한 성찰보다는 일종의 솔루션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반면 이번에 읽은 책으로 행복한 교실 이야기는 저자 스스로는 너무 자기 잘한 이야기만 쓴 거 아닌가 걱정하는 말이 있지만, 나는 이 책이 매우 솔직하고 다른 책에 비하여 실패를 통한 성찰이 잘 녹아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교사로서 고민이 잘 나와 있고 저자가 이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했고 생각했는지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어 느낀 점도 많고 읽기도 수월했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인데 과거의 학교 상황은 꽤 암울했던 듯싶다. 문집을 내는 게 지탄받고 종이를 절약하겠다고 공책 아래 위 빈칸까지 쓰도록 지시가 내려와 장학지도까지 있었다는 이야기는 지금 사람이 보기에는 공산주의식 유머에 가까울 정도로 실소를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그 당시에도 교권은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던 셈이다.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위에서 지시하는 데로 하는 것 밖에 없는데 거기서 무슨 교권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거기에 과거에는 학급운영비도 없었다니 그 당시 분들은 어떻게 교사생활을 해왔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지금은 과거에 비해 교육환경이 좋아졌다. 교육과정 자체에서 교사에게 자율권을 부여하고 있고, 단위학교에서 위의 지시에 거부도 할 수 있다. 물론 아이들이 예전보다 드세지고 교사의 사회적 권위도 약해져 교권이 위협받는다는 이야기가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가 자신의 교육관에 따라 교육하기는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이런 암울했던 시기에서도 저자는 자기 나름대로의 교육활동을 펼쳐왔다. 학급문고 마련, 돌려있기, 동시 읽기, 책 읽어주기, 연극하기, 책 만들기, 책 지도 만들기 등등 다양한 교육활동은 그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해볼 때 경이로운 일이 아닌가 싶다. 아니, 어쩌면 그런 시기이기에 그런 활동이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역경 속에서 나온 활동들이 지금 교육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은 꽤 역설적이다.

저자를 뒷받침하는 것은 본인의 말에 따르면 이오덕 선생님의 책들과 글쓰기 교육연구회에서 배운 내용들이다. 저자는 이오덕 선생님과 직접 만나서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는 데, 그래서인지 이 책의 제목은 책으로 행복한 교실 이야기지만 글쓰기로 행복한 교실 이야기라고 이름을 붙여도 좋을 정도로 글쓰기 이야기가 많다. 또 책의 후반부에는 저자의 학급운영에 대한 노하우가 자세히 있어 독서교육을 넘어서 교사로서 배우고 실천해볼만한 내용이 꽤 있었다. 특히 교사가 본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에 깊은 공감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지난번에 읽은 나무에게 배운다의 도제교육과도 연관이 있는 이 주장은 깊이 기억해두고 생각해봐야 되는 것 아닌가 싶다.

일반적으로 교육은 말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를 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지만, 말로만 이루어지는 교육은 그 한계에 갇히게 된다. 또 교사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된다. 아이스크림과 같은 매체의 답을 베껴 적는 아이들을 보면 갑갑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쩌면 나 스스로도 말로 이루어지는 교육에 갑갑함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때문에 교사는 아이들에게 말뿐이 아니라 모범과 본이 되어야 한다. 독서교육에서도 독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을 넘어서 본인이 훌륭한 독서가로서 하나의 체험 대상이 될 필요가 있다. 청소도 마찬가지다. 저자의 말만 따라 교사랍시고 아이들한테 노동을 강요하고, 노동을 천시하게 하고, 아이들 사이에 계급을 만들어 주는 것이 청소지도라는 교육활동의 모습이다. 이게 지금도 내려오고 있다. 특히 이오덕 선생님의 반장이 감독하나 담임이 감독하나 청소 감독은 똑같은 거지요. 말이 지도지 그건 힘센 선생이 힘없는 아이들한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강제로 시키는 거잖아요. 그게 무슨 민주주의 정신을 길러주는 교육이 됩니까?” 라는 말은 이 청소지도의 부조리함을 날카롭게 짚어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청소활동에서 교사가 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감독자가 되어버린 것은 청소라는 활동이 중요한 일과활동이라기 보다는 귀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도 딱히 할 말이 없다. 집안 청소도 게을리 하는 형편이라 교실청소를 아이들의 귀중한 일과활동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수업 후 잠시라도 쉬고 싶다는 마음에 같이 청소를 하기 보다는 이래라 저래라 설명, 지시에 그쳤다. 이 점은 깊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청소를 벌이 아니라 상으로 생각하게끔 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청소를 귀찮은 일로 여기지 않도록 스스로 본을 보여야겠다.

또한 아무리 좋은 활동이라고 아이들이 즐겁게 참여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거나 다른 활동으로 대체한 이야기는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흔히 황금률이라고 내가 대접받고 싶은 데로 다른 사람에게 대접하라라는 말이 있다. 성경에서 비롯된 이 말은 격언 중 하나로 우리가 기억하고 따를 만하다. 그러나 조심해야할 점도 있다. 일반적으로 나한테 좋은 것은 다른 사람한테도 좋은 경우가 많지만 간혹 나한테 좋은 것이 다른 사람한테도 싫은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의가 폭력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교사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좋은 교육활동이라 하더라도 이를 강제로 밀어 붙이면 폭력이 될 수 있다. 마땅히 가르쳐야만 하는 기본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가급적 아이들의 즐거움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책 재판놀이라는 활동도 굉장히 특이하면서 재밌는 활동이다. 교과서는 하나의 참고자료라지만 교과서가 없으면 수업이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참고자료만 가지고 하루가 아닌 1년 동안 교육을 하는 것도 굉장히 불안한 일이기 때문에 교과서가 필요하긴 하다. 그러나 교과서가 금과옥조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발휘하게 두어서도 안 된다. 수업의 주인공이 교과서가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이야기다. 비판할 수 있는 능력 역시 학교에서 길러줘야 할 중요한 역량이기 때문에 책에 있는 내용은 무조건 맞다. 책은 옳다라는 편견과 우상을 깨기 위한 이러한 교육활동은 해볼 만한 활동이 아닌가 싶다.

그 외에도 다양하면서도 귀중한 이야기들이 이 책에 실려 있다. 나의 경우 1부 독서활동, 2부 글쓰기 이야기보다 3부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아온 이야기가 더 좋았다. 학부모와의 연대를 위한 실천도 어렵지 않으면서도 기발했고, 교실일기 이야기도 실천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 책에서 저자의 모습이 어떤 비범하고 특별한 교사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들처럼 평범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치열한 고민 속에서 성장해온 과정이 잘 들어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특히 폭력교사를 벗어나기 위해 글쓰기 활동을 선택한 저자의 모습에서 학교폭력 문제는 결국 교사와 학생의 소통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80명까지는 아니지만 26명의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힘들긴 매한가지다. 글쓰기를 통한 소통 방법도 연구해볼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이야기 중 공감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210~211쪽을 보면 공교육이 담임 선택제로 바뀌지 않는 이상 우리 교육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동시에 우리나라 담임교사는 학생과 학부모가 협의해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나라 초·중등학교에서 학생이 교사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저자가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는 이해가 간다. 교육의 3주체라고는 해도 학생, 학부모는 학교 교육활동에 거의 관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저자의 주장은 고민해볼만한 토론거리기는 하다. 그러나 담임 선택제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교권을 심히 훼손하고 공교육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는 일이다.

일단 공교육은 그 자체가 개인의 자유권을 일정 부분 침해함으로서 성립된다. 이는 인권이 자유권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공익과 개인의 교육권도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교육은 다양성 이전에 보편성과 공공성을 근본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막대한 국가예산이 투입되는 것이다. 지금도 이렇듯 많은 예산이 투입되는 공교육에서 공공의식이 부족한 학생들이 배출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인데 담임 선택제는 이러한 경향을 강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교사가 사회의 공적 대변인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담임 선택제는 필연적으로 공교육의 보편성과 교권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 선택제가 될 경우 학부모와 학생의 생각에 따라 교사가 휘둘릴 수밖에 없으며 교사는 선택할 수 있는 소비재가 되는데 이렇게 되면 사설 학원과 뭐가 다를까? 만약 학부모가 시험을 잘 보게 해주는 교사를 선택한다면 이를 따라줘야 하나? 현 한국의 입시상황에서 이러한 제도는 교육의 본질을 손상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미 일제고사와 교원평가에서 경험해본 일 아닌가? 때문에 학부모의 참여가 미비하다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담임 선택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은 방향이 잘못된 주장이다. 이는 경제논리와도 유사하다. 소비자는 무조건 옳다라는 주장을 그대로 끌고 온 것이다. 저자가 그런 의도로 주장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된다.

담임 선택제 하에서 학부모들의 참여라는 것도 의문이다. 대다수의 학부모의 목적은 자기 자식 출세하는 것이다. , 조금 특이한 학부모는 자기 삶을 나름대로 꾸려갈 수 있도록 기르는 것이 목적이다. 학부모의 수요 자체가 그다지 다양하지 않고 사회경제논리에 지배받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학부모의 참여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대안학교 이야기도 있는데 그 대안학교가 귀족학교로 변질되는 곳이 많으며, 무엇보다 그곳 교사들도 나름의 교육적 신념에 의해 공교육에는 한계를 느껴 그에 벗어난 곳에서 교육을 하는 곳이지 선택을 받는 다고 생각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대안학교의 목적이 공교육에서 벗어난 제대로 된 교육을 해보자는 것 아닌가? 학부모 입장에서는 선택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식이라면 사설학원도 선택제라고 볼 수 있으니 일종의 대안학교인 셈인가? 무엇보다 각 대안학교가 옳다는 보장도 없다.

게다가 공교육 내에서 교사가 가르치는 과목은 국가에서 다 지정한 것들이다. 교사가 가르치고 싶은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교수가 자기 이름을 걸고 과목을 개설하는 대학교라면 모를까 학교에서 담임 선택제를 하라는 것은 권리는 주지 않은 채 의무만 강요하는 모양새다. 대학교에서도 학점 잘 주고 편하게 해주는 교수가 인기가 있는 현실인데 학교에서 이런 제도가 실시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눈에 선하지 않은가? 학생들이 잘 가르친다고 인정하는 것과 그 교수를 선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맥락의 이야기다. 학문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어떤 과목을 청강하는 것은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서 이루어진다.

지금도 사립대학을 중심으로 인기 없는 과는 없애고 있다. 인기가 없는 이유는 취직에 도움이 안 되고 당장 현실에서 실용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쓸모없음의 쓸모라는 장자의 말처럼 이는 국가의 교육체계가 무너지는 일이다. 담임을 선택하라고 할 때 사람들이 어떤 담임을 선택하는 지는 사회문화와 구조에 달려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교육의 본질에 부합하는지부터 따져 물을 일이며, 학부모 참여는 학급보다 학교 차원에서 선행되어야 할 일이라는 점에서 담임 선택제는 아직 나올 이야기가 아니고 동의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 기본전제인 담임 선택제로는 학부모의 참여를 보장할 수 있다는 주장부터 그 근거가 희박하다. 우리가 사람을 고용할 때 그 사람과 같이 물건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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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3-29 0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책에서 얻은 아름다운 빛과 이야기로
아름다운 손길을 나누시겠지요?

마치 제가 이 책을 읽은 듯이
느낌글 잘 읽었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널리 헤아리면서
아이들을 사랑하는 교사가
한 분 두 분 꾸준히 늘어나
어디에서나 즐거운 배움과 가르침이
퍼지리라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