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책으로 행복한 교실 이야기 - 이주영 선생님의 ㅣ 행복한 독서교육 1
이주영 지음, 장경혜 그림 / 행복한아침독서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그동안 독서 관련 책은 많이 읽었다고 생각해왔다. 우리학교 책날개 모델학교 멘토이신 여희숙 선생님께서 쓰신 ‘책 읽는 교실’을 위시하여 개인적으로 크라센의 ‘읽기 혁명’,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 등을 비롯한 책을 읽어왔고, 우리학교 독서모임에서도 ‘수업 중 15분, 행복한 책읽기’, ‘하루 15분 책 읽어주기의 힘’, ‘하루 30분 혼자 읽기의 힘’ 등 다양한 책을 읽어왔으니 그럴만하다.
그런데 이번에 이주영 선생님의 ‘책으로 행복한 교실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직도 읽어야 할 책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의 책 중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 를 제외하고 나머지 책은 이론적인 성격이 강하고 학생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진 책들이다. 이렇게 해서 학생이 이렇게 변했으며 이 방법은 우수한 다양한 증거가 있다.. 라는 전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 책에는 교사의 고민이나 실패를 통한 성찰보다는 일종의 솔루션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반면 이번에 읽은 ‘책으로 행복한 교실 이야기’는 저자 스스로는 너무 자기 잘한 이야기만 쓴 거 아닌가 걱정하는 말이 있지만, 나는 이 책이 매우 솔직하고 다른 책에 비하여 실패를 통한 성찰이 잘 녹아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교사로서 고민이 잘 나와 있고 저자가 이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했고 생각했는지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어 느낀 점도 많고 읽기도 수월했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인데 과거의 학교 상황은 꽤 암울했던 듯싶다. 문집을 내는 게 지탄받고 종이를 절약하겠다고 공책 아래 위 빈칸까지 쓰도록 지시가 내려와 장학지도까지 있었다는 이야기는 지금 사람이 보기에는 공산주의식 유머에 가까울 정도로 실소를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그 당시에도 교권은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던 셈이다.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위에서 지시하는 데로 하는 것 밖에 없는데 거기서 무슨 교권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거기에 과거에는 학급운영비도 없었다니 그 당시 분들은 어떻게 교사생활을 해왔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지금은 과거에 비해 교육환경이 좋아졌다. 교육과정 자체에서 교사에게 자율권을 부여하고 있고, 단위학교에서 위의 지시에 거부도 할 수 있다. 물론 아이들이 예전보다 드세지고 교사의 사회적 권위도 약해져 교권이 위협받는다는 이야기가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가 자신의 교육관에 따라 교육하기는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이런 암울했던 시기에서도 저자는 자기 나름대로의 교육활동을 펼쳐왔다. 학급문고 마련, 돌려있기, 동시 읽기, 책 읽어주기, 연극하기, 책 만들기, 책 지도 만들기 등등 다양한 교육활동은 그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해볼 때 경이로운 일이 아닌가 싶다. 아니, 어쩌면 그런 시기이기에 그런 활동이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역경 속에서 나온 활동들이 지금 교육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은 꽤 역설적이다.
저자를 뒷받침하는 것은 본인의 말에 따르면 이오덕 선생님의 책들과 글쓰기 교육연구회에서 배운 내용들이다. 저자는 이오덕 선생님과 직접 만나서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는 데, 그래서인지 이 책의 제목은 ‘책으로 행복한 교실 이야기’ 지만 글쓰기로 행복한 교실 이야기라고 이름을 붙여도 좋을 정도로 글쓰기 이야기가 많다. 또 책의 후반부에는 저자의 학급운영에 대한 노하우가 자세히 있어 독서교육을 넘어서 교사로서 배우고 실천해볼만한 내용이 꽤 있었다. 특히 교사가 본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에 깊은 공감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지난번에 읽은 ‘나무에게 배운다’ 의 도제교육과도 연관이 있는 이 주장은 깊이 기억해두고 생각해봐야 되는 것 아닌가 싶다.
일반적으로 교육은 말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를 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지만, 말로만 이루어지는 교육은 그 한계에 갇히게 된다. 또 교사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된다. 아이스크림과 같은 매체의 답을 베껴 적는 아이들을 보면 갑갑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쩌면 나 스스로도 말로 이루어지는 교육에 갑갑함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때문에 교사는 아이들에게 말뿐이 아니라 모범과 본이 되어야 한다. 독서교육에서도 독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을 넘어서 본인이 훌륭한 독서가로서 하나의 체험 대상이 될 필요가 있다. 청소도 마찬가지다. 저자의 말만 따라 교사랍시고 아이들한테 노동을 강요하고, 노동을 천시하게 하고, 아이들 사이에 계급을 만들어 주는 것이 청소지도라는 교육활동의 모습이다. 이게 지금도 내려오고 있다. 특히 이오덕 선생님의 “반장이 감독하나 담임이 감독하나 청소 감독은 똑같은 거지요. 말이 지도지 그건 힘센 선생이 힘없는 아이들한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강제로 시키는 거잖아요. 그게 무슨 민주주의 정신을 길러주는 교육이 됩니까?” 라는 말은 이 청소지도의 부조리함을 날카롭게 짚어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청소활동에서 교사가 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감독자가 되어버린 것은 청소라는 활동이 중요한 일과활동이라기 보다는 귀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도 딱히 할 말이 없다. 집안 청소도 게을리 하는 형편이라 교실청소를 아이들의 귀중한 일과활동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수업 후 잠시라도 쉬고 싶다는 마음에 같이 청소를 하기 보다는 이래라 저래라 설명, 지시에 그쳤다. 이 점은 깊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청소를 벌이 아니라 상으로 생각하게끔 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청소를 귀찮은 일로 여기지 않도록 스스로 본을 보여야겠다.
또한 아무리 좋은 활동이라고 아이들이 즐겁게 참여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거나 다른 활동으로 대체한 이야기는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흔히 황금률이라고 ‘내가 대접받고 싶은 데로 다른 사람에게 대접하라’ 라는 말이 있다. 성경에서 비롯된 이 말은 격언 중 하나로 우리가 기억하고 따를 만하다. 그러나 조심해야할 점도 있다. 일반적으로 나한테 좋은 것은 다른 사람한테도 좋은 경우가 많지만 간혹 나한테 좋은 것이 다른 사람한테도 싫은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의가 폭력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교사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좋은 교육활동이라 하더라도 이를 강제로 밀어 붙이면 폭력이 될 수 있다. 마땅히 가르쳐야만 하는 기본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가급적 아이들의 즐거움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책 재판놀이라는 활동도 굉장히 특이하면서 재밌는 활동이다. 교과서는 하나의 참고자료라지만 교과서가 없으면 수업이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참고자료만 가지고 하루가 아닌 1년 동안 교육을 하는 것도 굉장히 불안한 일이기 때문에 교과서가 필요하긴 하다. 그러나 교과서가 금과옥조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발휘하게 두어서도 안 된다. 수업의 주인공이 교과서가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이야기다. 비판할 수 있는 능력 역시 학교에서 길러줘야 할 중요한 역량이기 때문에 ‘책에 있는 내용은 무조건 맞다. 책은 옳다’라는 편견과 우상을 깨기 위한 이러한 교육활동은 해볼 만한 활동이 아닌가 싶다.
그 외에도 다양하면서도 귀중한 이야기들이 이 책에 실려 있다. 나의 경우 1부 독서활동, 2부 글쓰기 이야기보다 3부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아온 이야기가 더 좋았다. 학부모와의 연대를 위한 실천도 어렵지 않으면서도 기발했고, 교실일기 이야기도 실천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 책에서 저자의 모습이 어떤 비범하고 특별한 교사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들처럼 평범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치열한 고민 속에서 성장해온 과정이 잘 들어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특히 폭력교사를 벗어나기 위해 글쓰기 활동을 선택한 저자의 모습에서 학교폭력 문제는 결국 교사와 학생의 소통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80명까지는 아니지만 26명의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힘들긴 매한가지다. 글쓰기를 통한 소통 방법도 연구해볼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이야기 중 공감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책 210~211쪽을 보면 공교육이 담임 선택제로 바뀌지 않는 이상 우리 교육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동시에 우리나라 담임교사는 학생과 학부모가 협의해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나라 초·중등학교에서 학생이 교사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저자가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는 이해가 간다. 교육의 3주체라고는 해도 학생, 학부모는 학교 교육활동에 거의 관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저자의 주장은 고민해볼만한 토론거리기는 하다. 그러나 담임 선택제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교권을 심히 훼손하고 공교육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는 일이다.
일단 공교육은 그 자체가 개인의 자유권을 일정 부분 침해함으로서 성립된다. 이는 인권이 자유권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공익과 개인의 교육권도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교육은 다양성 이전에 보편성과 공공성을 근본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막대한 국가예산이 투입되는 것이다. 지금도 이렇듯 많은 예산이 투입되는 공교육에서 공공의식이 부족한 학생들이 배출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인데 담임 선택제는 이러한 경향을 강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교사가 사회의 공적 대변인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담임 선택제는 필연적으로 공교육의 보편성과 교권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 선택제가 될 경우 학부모와 학생의 생각에 따라 교사가 휘둘릴 수밖에 없으며 교사는 선택할 수 있는 소비재가 되는데 이렇게 되면 사설 학원과 뭐가 다를까? 만약 학부모가 시험을 잘 보게 해주는 교사를 선택한다면 이를 따라줘야 하나? 현 한국의 입시상황에서 이러한 제도는 교육의 본질을 손상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미 일제고사와 교원평가에서 경험해본 일 아닌가? 때문에 학부모의 참여가 미비하다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담임 선택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은 방향이 잘못된 주장이다. 이는 경제논리와도 유사하다. 소비자는 무조건 옳다라는 주장을 그대로 끌고 온 것이다. 저자가 그런 의도로 주장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된다.
담임 선택제 하에서 학부모들의 참여라는 것도 의문이다. 대다수의 학부모의 목적은 자기 자식 출세하는 것이다. 뭐, 조금 특이한 학부모는 자기 삶을 나름대로 꾸려갈 수 있도록 기르는 것이 목적이다. 학부모의 수요 자체가 그다지 다양하지 않고 사회경제논리에 지배받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학부모의 참여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대안학교 이야기도 있는데 그 대안학교가 귀족학교로 변질되는 곳이 많으며, 무엇보다 그곳 교사들도 나름의 교육적 신념에 의해 공교육에는 한계를 느껴 그에 벗어난 곳에서 교육을 하는 곳이지 선택을 받는 다고 생각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대안학교의 목적이 공교육에서 벗어난 제대로 된 교육을 해보자는 것 아닌가? 학부모 입장에서는 선택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식이라면 사설학원도 선택제라고 볼 수 있으니 일종의 대안학교인 셈인가? 무엇보다 각 대안학교가 옳다는 보장도 없다.
게다가 공교육 내에서 교사가 가르치는 과목은 국가에서 다 지정한 것들이다. 교사가 가르치고 싶은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교수가 자기 이름을 걸고 과목을 개설하는 대학교라면 모를까 학교에서 담임 선택제를 하라는 것은 권리는 주지 않은 채 의무만 강요하는 모양새다. 대학교에서도 학점 잘 주고 편하게 해주는 교수가 인기가 있는 현실인데 학교에서 이런 제도가 실시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눈에 선하지 않은가? 학생들이 잘 가르친다고 인정하는 것과 그 교수를 선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맥락의 이야기다. 학문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어떤 과목을 청강하는 것은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서 이루어진다.
지금도 사립대학을 중심으로 인기 없는 과는 없애고 있다. 인기가 없는 이유는 취직에 도움이 안 되고 당장 현실에서 실용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쓸모없음의 쓸모라는 장자의 말처럼 이는 국가의 교육체계가 무너지는 일이다. 담임을 선택하라고 할 때 사람들이 어떤 담임을 선택하는 지는 사회문화와 구조에 달려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교육의 본질에 부합하는지부터 따져 물을 일이며, 학부모 참여는 학급보다 학교 차원에서 선행되어야 할 일이라는 점에서 담임 선택제는 아직 나올 이야기가 아니고 동의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 기본전제인 담임 선택제로는 학부모의 참여를 보장할 수 있다는 주장부터 그 근거가 희박하다. 우리가 사람을 고용할 때 그 사람과 같이 물건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