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선생님은 스트레스를 날린다 - 유능한 교사를 위한 스트레스 관리 필수 지침서
빌 로저스 지음, 안찬성 옮김 / 밥북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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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교사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여러 상황들 속에서 어떻게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학생들에게 지도력을 발휘할 것인지 알려주는 좋은 책이다. 현재 무기력에 빠진 교사들이라면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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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선생님은 스트레스를 날린다 - 유능한 교사를 위한 스트레스 관리 필수 지침서
빌 로저스 지음, 안찬성 옮김 / 밥북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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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사는 생각보다 고독한 직업이다. 아이들과 같이 있을 때는 느끼기 어렵지만 사실 아이들에게 교사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초등학생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고독에서 교사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풀리기 커녕 부정적으로 증폭된다. 방학이 있고 대우도 나쁘지 않다지만 그와 별개로 교사들이 인간적으로 받은 스트레스는 사람들이 갖는 선입견 이상이다. 기본적으로 교사가 처리해야할 업무가 제법 많으면 아이들은 물론, 학부모, 관리자, 동료교사와 관계를 맺으면서 얻게되는 여러 갈등이나 부가업무도 상당하다. 나도 교사를 하지 않았다면 몰랐겠지만 오늘날 교사들은 많은 부담을 지니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이 다녔던 예전 학교만 생각하고 교사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소위 진보라 자처하는 이들 쪽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한겨레로 대변되는 진보언론에서 교사들을 다루는 태도는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도리어 보수언론인 조중동에서 물론 최근들어 다른 목적이 있는 듯 하지만 교사 입장에서 기사를 쓰는 경향이 보인다.


 이런 우울한 상황에서 교사들이 갖는 스트레스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교사들의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고 쌓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교사들이 할 일 없다고 하지만 그들은 너무 단면적인 모습만 보고 말한다. 이는 한가한 지방의 주민센터 9급 공무원을 보고 공무원들은 다 논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 특수한 경우도 있는 것이지 교사들은 이미 그들이 본래 하지 않아도 될 상당한 일을 처리하고 있다. 일단 이 일, 소위 잡무라는 것부터 해결이 안되는 데 교사들이 하는 일이 없다는 소리가 어떻게 나올까. 다 몰라서 하는 소리며 교사가 갖는 스트레스가 그들의 학급운영과 교수행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전혀 고찰하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이야기다.


 수업의 질이 교사의 질을 넘을 수 없으니 교사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믿는다면 교사가 지니는 스트레스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유능한들 쌓이는 스트레스에는 장사 없다. 이런 상황에서 ‘훌륭한 선생님은 스트레스를 날린다’란 책은 시의 적절하며 의미가 있다.


 아쉽게도 이 책은 학교를 둘러싼 사회구조에는 딱히 언급하지 않는다. 이런 사회구조를 상수로 놓고 어떻게 스트레스를 관리할지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교사의 스트레스와 어려움을 개인의 능력 탓으로 돌리는 건 아니다.


 교사의 스트레스에 대해 이 책에서 내놓은 대답은 긍정적이고 지원적인 학교문화, 동료문화다. 미국에는 선임교사라는 역할이 따로 있는 모양인데 이들을 비롯한 동료교사들의 지원과 협력, 긍정적 받아들임이 있을 때 교사는 고립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상실될 뻔한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부분은 교사로서 공감이 된다. 힘든 일도 동료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면 그 힘듬이 덜어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이야기 나누는 것 자체가 힐링인 셈이다.


 이 책에서는 교사 개인이 어떻게 대응할지도 제법 자세히 설명한다. 스트레스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학생들에게 적절하게 지도력을 발휘하는 방법 등등 교사로서 도움이 될만한 팁들이 있었다. 지도력이란 표현이 마음에 와 닿았으며 특히 점과 정사각형 비유가 마음에 들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너무 부정적인 요소에 집중하느라 다른 긍정적인 요소를 도외시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한두 아이 때문에 힘들지만 다르게 보면 다른 아이들은 잘 따라오는데도 불구하고 화가 나면 싸잡아서 혼낸 것 같아 반성이 되었다.


 한두 아이로 인해 교사로서 내 자존감을 떨어뜨릴 필요는 없다. 그들은 도움이 필요한 학생일 뿐 교사가 열불을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확신에 찬 차분한 태도가 교육적 권위를 가져다 준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을 스트레스란 주제를 통해 접근하니 새로웠다. 학급운영에 애로사항을 겪는 많은 이들이 접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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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하느님 - 유일신 신앙에 대한 김경재 교수의 본격 비판
김경재 지음 / 삼인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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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아브라함 계 종교인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를 유일신 신앙이라 부른다. 유일신 신앙을  개신교회에서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뜻이라고 가르친다. 나머지는 다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은 누구시며 어떤 분이냐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다르기에 이 세 종교는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가장 격렬히 싸워왔다. 이런 아이러니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김경재 교수는 ‘이름 없는 하느님’이란 책을 통해 기존의 유일신 신앙을 비판하고 새로운 유일신 신앙을 이야기 한다. 그의 생각은 이미 역사적 예수 관련 서적을 읽은 내게 크게 새로울 것은 없지만 유일신 신앙을 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를 깊게 숙고했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책에 따르면 유일신 신앙에서 ‘유일’을 숫자로 간주하는 것은 유일신론을 왜곡하는 것이다. 일을 숫자로 보는 것은 다신론이나 일신론에 더 가깝다. ‘유일’은 우리나라 식으로 하면 ‘한’이라 볼 수 있다. ‘한’은 숫자 1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꽉찬, 온전한을 의미하기도 한다. 김경재 교수에게 ‘유일’은 어떤 궁극적 실재를 의미하는 것이지 어떤 한 인격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아브라함 계 종교만이 유일신론이라고 볼 수도 없다. 힌두교에서도 불교에서도 심지어 유교에서도 궁극적 실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김경재 교수는 우리 한민족에게 이미 하느님 사상이 있었고 그 하느님 사상이 우리나라에 전래해온 다른 외래종교들을 다 포괄했다고 말한다. 이를 최치원은 풍류도라 일컬었다. 

이 풍류도는 불교, 유교를 만나 새로운 지평을 만들어냈으며 19세기 혼탁한 시대에 동학, 원불교로 다시 살아났다. 이는 김경재 교수의 해석이지만 풍류도에 대한 전제를 수용한다면 이 해석이 그리 비약적인 것은 아니다. 

이상의 내용을 생각해볼 때 보수주의 기독교에서 이루어지는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공격은 과한 측면이 있다. 궁극적 실재, 유일신은 하나이나 이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다양할 수 있으며 종교다원주의와 종교혼합주의는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종교다원주의도 스펙트럼이 다양하다고 한다. 

김경재 교수도 인정했지만 설령 종교의 다원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신이 믿는 종교에 좀 더 무게를 두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종교는 물건처럼 쇼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에서도 팬클럽이 만들어지곤 하는데 종교에서 이를 배제한다는 건 몽상일 뿐이다. 문제는 이런 종파적 하나님을 통해 인간의 역사 속에서 갖은 폭력이 거룩한 성전으로 포장되었다는 것이다.

한국 개신교회는 세계 기독교회들 중에서도 보수적이다. 창조과학은 물론이고 문자주의적 성경해석을 고수하는 편이기도 하다. 또한 기복신앙과 엮어져 오로지 자기 자신이 잘 되기 위한 소승적 성격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다른 종교나 해외에 나가 성경에 근거도 없는 땅밟기를 할 정도로 제대로 된 신학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종파적 종교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경재 교수의 이야기가 얼마나 설득력있게 들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면 그 결과는 사멸 뿐이다. 유럽만 보더라도 교회에는 노인들이 대다수라고 하지 않은가. 한국 교회라고 딱히 다를 거 같진 않다. 시간문제일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생각이다. 기존의 생각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온전하게 하는 대안이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하다. 이 책은 그 디딤돌이 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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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지능 - 생각을 자극하고 혁신을 유도하는 질문!
아이작 유 지음 / 다연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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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대화 내용이 이전에 나왔던 이야기의 재탕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다. 

2. 왜 항상 하던 이야기만 할까? 그럴 때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필요성을 느낀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3. 그러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쉬운 것도 아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꼭 그렇게 신선하지만도 않다. 

4.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는 건 그 사람과 그 모임이 성장함을 의미한다. 성장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새로운 자극이다. 그 자극으로 가장 기본적이고 효과적인 것은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질문’이다. 

5. 인간의 두뇌는 질문을 받을 때 일을 한다. 즉, 질문이 있을 때 비로소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질문 없이 하는 생각은 사실 생각이라기보다는 습관에 가까울 때가 많다.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가 계속 되풀이되는 것은 그 이야기 흐름 자체가 하나의 습관이기 때문이다. 

6. ‘질문지능’의 저자 ‘아이작 유’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질문지능’이란 단어를 내세운다. 그는 개인과 조직, 가정, 사회와 질문지능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영향을 미치는지 다양한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7. 본래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질문할지, 그리고 질문을 어떻게 해야할지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교육 서적이라기 보다는 자기계발 분야에 가까워 본래 의도를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제기되어온 문제의식들을 잘 모아 엮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8. 질문의 영향력에 대해 이 책이 아니더라도 의심할 여지는 없을 것이나 하나 더 짚어보자면 질문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라는 점이다. 질문은 하나의 자극이다. 좋은 자극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이는 주체가 관심이 없다면 그 자극은 그저 자극으로 끝날 뿐 의미 있는 변화와 성장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9. 질문이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개인의 ‘호기심’이 필수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호기심’과 관련된 책도 읽어보고 싶다. 

10. 마지막으로 저자의 책 중에 가장 인상 깊은 내용을 소개하자면 질문은 새로운 생각을 이끌어내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행동을, 새로운 행동은 새로운 사회를 이끌어낸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우리가 학생들에게 던져야할 질문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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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품이란 무엇일까? - 공동체에 대한 고민 길담서원 청소년인문학교실 6
윤구병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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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이후 인간의 문명은 이전과 달리 급속도로 성장한다. 물질문명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근대 국가가 출현하게 되고 이전과 달리 민족주의가 심화되면서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서 인간이 아닌 '개인'이 출연하게 된다. 

'개인'의 등장으로 인권의식이 더 높아지고 공동체는 해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라진 공동체를 '국가'가 메우게 된다. 오늘날 '국가'는 그 형태는 민주정이지만 이전의 왕정보다도 더 강하고 넓은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성장한 인권의식과 '개인'의 탄생이 결코 온전한 자유의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푸코의 말처럼 근대의 인간은 겉으로 보기에는 자유로워보이지만 실상 감옥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국가의 메세지를 받아들여 스스로 검열하는 개인의 모습은 공동체의 품에서 벗어난 개인이 얼마나 무력한지 잘 보여준다. 

근대를 상징하는 것은 바로 시간표다. 이전까지 시간이란 자연이 정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시간은 자연이 아니라 자본가가 지정해주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교육에도 밀려왔다. 물론 근대 공교육의 성립은 이전 엘리트 사교육을 극복하고 아이들의 교육권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진보다. 그러나 근대 학교가 시간표를 정해 아이들의 리듬을 무시하고 통제한다는 점에서 많은 교육자들의 비판이 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통제의 반대말은 자율이다. 자율이란 스스로 규칙을 정해 실천한다는 뜻이다. 학교에도 자율학습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자율이란 것이 허울 뿐이라는 건 그 자율학습을 계획하는 교사들도 알고 있다. 진짜 자율학습이라면 왜 야자 폐지를 반대한단 말인가.

윤구병 님의 말처럼 자율은 교육이 추구해야할 궁극목표 중 하나다. 오늘날 한국 교육은 자율성을 길러주고 있는가? 이에 대답은 자율성에 대한 해석에 따라 다르겠고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생각이 다르겠지만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이 질문에 아니라고 답하고 있다. 아이러니컬한 건 이런 자율성을 말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기존 체제의 승리자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협동 역시 미래에 꼭 필요하다고 명사들이 말하는 능력이다. 협동을 위해서는 말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또 자유로운 분위기가 필요하다. 억제되고 통제된 분위기에서 겉핥기가 아닌 진정한 협동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설령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협동능력을 길러주지는 못한다. 

인간은 무리를 짓는 동물이다. 인간의 한자어에 사이를 뜻하는 한자가 들어간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무리를 짓고 인간은 협동을 한다. 언어의 경우 인간만큼은 아니지만 원숭이나 다른 똑똑한 동물도 어린아이 수준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몇 천만, 몇 억이 넘는 개체가 협력할 수 있는 종은 오로지 인간이다. 협동능력이 미래에 중요한 능력이 된다 했지만 생각해보면 과거에도 협동능력은 중요했다. 오늘날 개인이 중요시되어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이 능력을 길러주는 곳은 이제 학교 뿐이다. 

이 책에는 가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공동체 중에 아직도 무너지지 않은 단위는 오로지 가족 뿐이다. 그러나 그 가족도 요즘은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4가구 중에 1가구가 단독가구라는 통계는 가족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생산을 위한 힘을 재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쉼터라는 점에서 가족은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 

요즘 공동체란 말은 너무 흔해졌다. 그러나 진정한 공동체는 찾기 어렵다. 공동체는 그 구성원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기 듯 사람은 공동체의 품에 안길 수 있어야 한다. 성미산은 그런 점에서 가장 대표적인 공동체다. 

공동체가 공동체 답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공감이다. 공감은 연민의 마음이 있을 때 가능하다. 다른 사람을 안타깝게 여길 때 비로소 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다. 요즘 아이들은 이런 점이 부족하다. 그러다보니 너무 쉽게 친구를 배제해버린다.
유창복 님의 말처럼 공동체에서 갈등은 당연한 것이다. 갈등이 없다면 그 공동체의 건강에 대해 의심해봐야 한다. 중요한 것은 갈등이 있어도 헤어지지 않는 것이다. 

학급은 운명공동체다. 미우나 고우나 1년간 떠날 수 없는 공간이자 품이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서로에게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공감할 것인가. 이건 교사에게 필연으로 다가오는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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