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터스 테일 1 스토리콜렉터 20
마크 헬프린 지음, 전행선 옮김 / 북로드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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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윈터스 테일 1>은 1983년에 발표된 작가 마크 헬프린의 뉴욕을 배경으로 한 소설로서, 30년 넘게 미국 현대문학에 길이 남을 명작으로 일컬어진 작품이다.

 

지도에 없는 습지에서 자라 최고의 기계 기술자에서 갱단이 되었다가 마침내 도망자가 된 피터 레이크는 도시 속에서 여러 가지를 얻고 또 잃어가는 인간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는 돈의 몇가지 불가사의한 규칙 때문에 매번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우선 첫번째 규칙은 돈이라는 것을 벌기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일단 돈을 손에 넣더라고 그걸 계쏙 가지고 있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힘들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이러한 규칙은 오직 자기 자신, 즉 각 개인에게만 적용될 뿐 다른 사람과는 하등 관련도 없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서 돈이란 벌기도 힘들고 계속 가지고 있기도 힘들지만,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는 늘 넘쳐나며,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네 번째 규칙은 돈은 섬세한 직물과 매혹적인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깨끗하고 반짝이며 화려한 장소에서 살아가기를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많은 돈이 공원 언저리에 있는 짙은 적갈색 돌로 지은 커다란 저택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그가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동전을 던져주고 있었다. 사실 어렵지도 않은 일이고, 돈을 주지 않아도 얼마든지 했을 그런 일인데도 말이다. 피터 레이크가 어두운 밤 짙은 녹색 광장에 있는 분수대 옆에서 춤을 추고, 춤을 춘 대가로 동전을 얻었을 때, 그는 도둑이 됐다. 물론 그 원칙을 그가 이해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어쨌든 누군가에게 기쁨을 준 대가로 돈을 받는 것도 도둑질에 해당했다."

 

책을 읽으면서 피터 레이크의 이름이 왜 그렇게 불리우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 눈길을 끈다.

 

"그는 열두 살이 될 때까지 그들의 일원이었다. 습지 사람들은 그를 피터라고 불렀다. 그들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몇 명의 소년과는 달리 레이크라는 성을 골라 붙여주면서, 호수에서 그를 건져 올렸으니 딱 어울리는 성이라고 말했다."

 

도시를 지배하는 쇼트 테일 갱단과 그 우두머리인 펄리 솜즈. 그는 대도시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악과 범죄를 대변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전 우주를 통틀어 펄리 솜즈의 사진은 단 한 장밖에 없었다. 그것은 펄리가 다섯 명의 경찰과 함께 있는 모습을 담은 것으로, 네 명의 경찰이 각각 팔 다리를 하나씩 잡고 나머지 한 명은 머리를 붙들고 있었다. 그들은 펄리를 큰 대 자로 의자에 앉힌 후 가슴과 허리를 의자에 단단히 붙잡아 맸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얼굴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흑백사진인데도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의 목구멍에서 울려 나오는 고함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의 뒤에 서 있는 덩치가 산만 한 경찰은 사진의 대상이 되는 자의 얼굴을 카메라 쪽에 고정시키는 데 몹시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분명했다. 펄리의 머리채와 턱수염을 움켜쥔 모양새가 마치 온몸을 뒤트는 독사라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섬광분이 팬 속에서 번쩍일 때, 발버둥의 여파로 세워놓은 코트걸이가 왼쪽으로 쓰러지며 2시를 가리키는 화려하게 장식된 시곗바늘처럼 사진 속에 영원히 그 흔적을 남겼다. 물론 사진에 찍힌 다음에는 바닥에 쓰러져 부상을 입었다. 펄리 솜즈는 사진에 찍히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의 눈은 레이저 광선이나 흰색 다이아몬드처럼 보였다.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을 정도로 하얗고 투명하고 은빛이었다. 사람들은 “펄리 솜즈가 눈을 뜨면, 꼭 전등을 켠 것 같다니까”라고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입꼬리에서 귀까지 올라가는 흉터가 하나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마치 자신의 피부가 날카로운 칼로 깊고 예리하게 잘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펄리 솜즈의 흉터는 차가운 상아색 필라멘트로 덮인 하얀 홈통처럼 보였다. 이 흉터는 네 살 때부터 그와 함께했다. 아들의 목을 따려다가 실패한 그의 아버지에게서 받은 선물이었다."

 

"물론 범죄자가 된다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것이 만고의 진리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범죄자들은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어놓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상이 정체되지 않도록 돕는 유동성의 가신들이기도 하다. 사실 선과 대조되는 악마의 군단이라 할 만한 범죄자들 없이는 뉴욕이 지금처럼 빛을 발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불가해한 반대와 저항이 선의 밝은 면을 더욱 선명히 빛나게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범죄자들이란 세상이 균형 있게 돌아가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소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범죄야말로 그 강철 같은 등에 던져지는 모든 시간을 꾸준히 아름답게 다 소비해버리지 않는가. 범죄자들은 도시에 없어서는 안 될 당분이자 술이고, 무더운 여름밤 번쩍이며 내리치는 모자이크 속의 붉은 섬광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펄리도 마찬가지였다."

 

피터 레이크는 우연히 만난 신비한 백마 덕분에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고, 백마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죄를 짓기로 한 피터 레이크는 새 출발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백만장자 아이작 펜의 저택에 침입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상한 소녀 베버리를 만난다. 아이작 펜의 딸인 베버리는 늘 열 때문에 상기된 얼굴로 독특한 언행을 일삼는 특이한 소녀다. 밤이면 저택 지붕 위의 텐트 안에서 잠을 자고, 미친 듯이 피아노를 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지병 때문에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은 상태다. 베버리는 자기 집에 침입한 도둑인 피터 레이크를 보고도 전혀 무서워하거나 경계하지 않는다. 피터 레이크는 이 이상한 소녀에게 걷잡을 수 없이 끌리기 시작한다. 피터 레이크를 처음 보았을 때 베버리는 피터에게 "당신이 내게 주어진 전부라면, 그래요, 받아들일께요."라고 말한다.

 

아이작 펜이 피터 레이크에게 이야기한 말이 인상적이다.

 

"그들의 움직임, 열정, 감정 말이네. 고통에 사로잡힌 몸과 그 몸이 느끼는 감각들은 계절의 지극히 사소한 특징이나 도시의 거대한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미세한 구성 요소만큼이나 확실하게 작용하지. 무작위로 보이는 그것들은 모두 커다란 계획의 일부라네."

 

이상하지만 순수한 소녀 베버리와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백마는 대도시의 혼란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사라지지 않는 순수함을 상징한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서 뉴욕이라는 도시 그 자체의 삶을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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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 2014.3
샘터 편집부 엮음 / 샘터사(잡지)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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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오름달'은 3월의 우리말 표현으로, '산과 들에 물이 오르는 달'이라는 뜻이다. 샘터 2014년 3월호에서 진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서 즐겁다. 특집으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날, 생일'에 관한 독자들의 개성있는 글을 만나볼 수 있었다. '사물의 시간'을 말하는 구두 디자이너 김진향 님의 '손뜨개 동전지갑'에 관한 이야기는 개인의 사물과 시간의 역사를 표현한다.
 
법륜 스님의 참살이 마음공부 시간에는 '면접에 붙게 해주세요'라는 물음에 대한 법륜스님의 지혜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세상에 어려운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분들 좀 도와주십시오. 제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그분 먼저 도와주시고, 그러고도 자리가 있으면 저한테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보라는 법륜 스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본다.
 
헌책이 말을 걸었다의 윤성근은 책의 옜 주인이 책 속에 남겨놓은 흔적과 거기에 깃든 투박하고도 아름다운 진심을 사진과 글로 남기여 인상적이다. 이번 샘터 3월호에서는 <항상 가슴 떨리는 처음입니다>라는 하종강의 헌책으로 '처음처럼'이라는 이야기를 남긴다. '주어진 매 순간을 처음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과거는 더 이상 지나간 옛일이 아니라 늘 새로운 시작이다.'라고 말하는 윤성근의 말이 눈길을 끌었다.
 
샘터 잡지에서 보물 같은 정보가 실린 '지혜 나누는 장터'의 이번 3월호 내용도 알차다. 3월의 물건으로 마스크팩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소개한다. 마스크팩에는 글리세린, 미네랄 오일 같은 보습 성분과 부틸렌글라이콜, 세틸에칠헥사노에이트 등 피부 컨디셔닝제가 들어 있기 때문에 피부가 촉촉하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파라벤의 대체 성분으로 사용되는 페녹시에탄올은 피부에 자극을 주고 알레르기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겠다. 이밖에도 올리고당을 과하게 섭취하면 설탕과 다를 게 없다는 정보, '헬스클럽 절대 환불 불가'에 대한 법률 상담 정보, 야근이 회사에 도움이 안 되는 이유 등을 배울 수 있어서 유익했다. 특히 수면 부족이 두뇌를 많이 사용해야 하는 일을 회피하게 만들면서 전반적으로 생산성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잦은 야근은 생산성을 갉아먹는 벌레와 같다는 말이 충격적이다. '저녁이 있는 삶은 인문학적 의미를 넘어, 경제적으로 생산성을 높이는 일이자 과학적으로 효율성을 높이는 일'이라는 점을 명심해야겠다.
 
해외통신으로 독일의 병원이 소개되어 국내 병원과는 차별화된 혜택으로 부러웠다. 국내에도 선진국 독일과 같은 의료혜택이 자리잡았으면 하는 바램이 생기는 글이었다.
"소아와 청소년에게는 병원비와 약값이 전혀 들지 않는 독일. 그뿐만 아니라 임산부에 대한 약값도, 출산 혹은 유산에도 아무런 비용을 내지 않는다. 우리 같은 외국인 유학생 가정에도 혜택은 동일하다. 독일에서는 약간의 입원비만 낼 뿐 암 같은 무거운 질병까지 모두 무상 진료다. 가난 때문에 치료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모든 사람을 정책으로 보호해주는 나라, 내가 본 독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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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의 기적 - 시각 장애 아이들의 마음으로 찍은 사진 여행 이야기
인사이트 캠페인을 만드는 사람들 지음 / 샘터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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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손끝의 기적>은 서울 한빛 맹학교 여섯 아이들이 강영호 사진작가과 함께 강원도로 3박 4일의 사진 여행을 떠나며 찍은 사진과 글의 기록이다. 강영호 작가는 '어떤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것, 그리고 쓸데 없는 짓이라고 여기던 일에 대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 자체만으로 그들은 이미 예술가'라고 말한다. 눈이 보이지 않지만, 소리와 오감을 통해서 예술 행위를 표현한 아이들의 작품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이들이 감각으로 찍어야 하기기 때문에 청각과 후각 그리고 촉감이 풍부한 곳, 산과 바다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에서의 아름다운 사진들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아이들에게 구도도 포커스도 광선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숲으로 데려가 이것이 숲의 향기라고, 바닷가로 데려가 이것이 파도의 소리라고만 일러 주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아이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필요한 기술이란 카메라 버튼을 누르는 사소한 손짓뿐이었다. 단 하나 내가 알려 준 것이 있다면, 사진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여행은 아이들에게 사진을 가르치기 위해 떠난 여행이 아니었다. 선행이나 봉사를 위한 여행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아이들과 더불어 작업하러 여행을 떠난 것일뿐. 우리는 즐거웠고 재미있게 놀았다. 시각 장애 아이들이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 그들이 느낀 세상은 우리가 본 세상과 조금 다르다. 그들이 찍은 사진은 우리가 늘 찍고 보덧 '인증샷'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들이 '사진'이라는 언어로 들려주는 세상을 여러분도 함께 느껴 보길 바란다."

 

이 책에는 태어날 때부터 컴컴한 세상에서 부모도 없이 섬처럼 자란 17세 소녀 나라,  열한 살 때 뇌종양 수술을 받은 후 부작용으로 시력 저하 증상이 나타난 17세 소녀 성희, 선천적인 시각 장애를 안고 태어나서 희미한 형체만 구분하는 9세 소녀 소정이, 돌이 되기도 전에 안과 수술을 받았고 여섯 살 무렵까지는 저시력을 간신히 유지하다가 그 후 완전히 빛을 잃은 14세 소년 종서,  정상 시력이었지만 중학교 3학년 부렵에 '레버씨 시신경 위축증'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시력을 잃은 18세 소년 범빈, 선천성 시각 장애를 갖고 있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형태나 색깔을 선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15세 소년 정완이라는 여섯 아이들이 찍은 사진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세상을 담고, 감각을 깨우고, 다가가서 들여다보며 자주보고 멀리보는 여섯 아이들의 사진은 큰 감동을 준다.

 

"때로는 다 보여 주는 것보다 일부만 보여 주는 것이 상상력을 자극한다.

보이지 않는 부분은 실제보다 아름다워질 수 있다.

아이들이 찍은 사진을 보며 찍히지 않은 부분을 상상하게 된다.

아이들이 그랬듯이 눈을 감고 그 순간을 상상하며

프레임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느껴 보는 것이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보이지 않음의 미학을 아이들의 사진으로 배운다."

 

 

이 책에는 여섯 아이들이 여행 중 찍은 사진들을 실시간으로 인사이트2 캠페인 페이스북(www.facebook-insight2.com)에 올려 온라인상에서 사람들과 소통한 내용을 볼 수 있었다. 페이스북에 들어가서 직접 아이들이 찍은 사진도 보았다. 사람들과 함께 교감하며 이야기하는 아이들의 사진이 감동적이다.

 

 

시각장애 아이들에게 사진은 언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시각장애 아이들의 감각은 섬세하며 따뜻하다. 손 끝으로 본 아이들의 세상은 아름답고 창의적이다.

 

"성희가 말했다. 사진을 찍으면 누군가가 본다는 생각을 갖고 열심히 찍을 거라고. 시각 장애 아이들에게도 사진은 언어다. 볼 수는 없지만 그들이 알고 느낀 세상에 대해서 우리에게 보여 줄 수 있다. 그들이 들은 것, 그들이 맡은 것, 그들이 만진 것을 우리와함께 나눌 수 있다.

소통은 그런 것이다. 서로 다른 세계를 공유하는 것. 보이지 않는 세상의 감각이 안일한 우리의 감각을 일깨운다."

 

 

이 책에서 시각장애 아이들이 동물들을 찍은 사진이 눈길을 끈다.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동물들의 순수함이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함의 결정체들이 만난 사진은 더욱 감동적인 것이 아닐까...

 

"우리는 왜 동물을 보면 순수해질까? 동물들에게는 아무런 가식이나 가면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은 눈에 보이는 모습과 똑같다. 그래서 동물들은 있는 그대로 믿고 신뢰할 수 있을 것 같다. 남을 의식하지 않기에 속임수가 없다.

양을 처음 보고 무서워하던 아이들은 이내 친해져서 스스럼없이 다가갔다. 동물의 순수함이 아이들의 맑음과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서 시각장애 아이가 찍은 물고기 사진이 독특하다. '이 물고기처럼 한 번이라도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나아간 적 있는가'라는 글귀를 통해서 삶의 열정을 되새겨본다.
 
"미끼에 걸린 물고기처럼 금방이라고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때도 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나는 이 물고기처럼 한 번이라도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나아간 적 있는가.
한 번이라도 이렇게 필사적으로 숨 쉬어 본 적 있는가.
그러고는 알았다.
나는 아직 숨이 끊길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 아이들은 침착하고 사려 깊다'라는 글귀에 나를 반성해본다. 나는 보인다는 오만함에 빠져서 타인을 배려하지 못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자신의 길을 온전히 걸어가는 아이들의 사진에서 사려깊은 아이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보인다는 오만 때문에 서두르고, 그러다 발을 헛디딘다.
돌진하고 부딪치고 다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아이들은 침착하고 사려 깊다.
앞만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옆과 뒤까지 찬찬히 느끼며 나아간다.
함부로 팔을 뻗거나 휘두르지 않는다.
밀치거나 걷어차지 않는다.
그저 온전히 자신만의 공간을 형성하며 방향을 잡는다.
주변 공기를 모두 흡수하듯 겸허하지만 단호하게 나아간다."

 

 

시각장애 아이들과 강영호 작가가 떠난 여행에서 아이들은 자신과 세상과 타인을 보았을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온몸으로 아이들은 여행의 진리를 느끼지 않았을까...
 
"여행이란
나를 보고
세상을 보고
타인을 보는 것.
아이들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볼 수 없다고 보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이 책은 시각장애 아이들이 찍은 사진을 통해서 예술작품을 느끼게 한다. '쓸데 없는 일'일지라도 예술로 인하여 인간은 풍요롭고 발전하는 것이 아닐까... 돈으로 얼룩진 세상에서 참된 예술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아이들의 사진은 우리에게 순수함과 행복감을 안겨준다.
 
"누구든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쓸데없고 쓸모없는 일이라고 해도 좋다. 사람이 어떻게 밥만 먹고 살겠는가? 문화와 예술을 만들고 인간 세상을 풍요롭게 한 것은 결국 '쓸데없는' 일이 아니었는가. 아이들이 쓸데없는 일을 더 많이 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책 끝부분에 '인사이트 캠페인'에 대한 소개글이 등장한다. 인사이트 캠페인은 시각장애 아이들에게 자신의 상상력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되었다. 2013년 두 번째 인사이트 캠페인은 페이스북과 유튜브 등 SNS 매체를 적극 활용해 사람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캠페인에 참여할 시각장애 아이들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었고 소개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그리고 2013년 겨울, 3박 4일간 여섯 아이들과 강영호 작가가 사진 여행을 떠났다. 강원도 평창의 대관령 양떼목장과 눈썰매장, 삼척의 바닷가에서 끝없이 펼쳐진 눈밭과 발끝에 닿는 파도 소리, 폭죽 소리를 사진으로 담아냈다. 밤하늘을 밝히는 불꽃, 자신과 친구들의 모습도 사진에 담았다. 이 여정은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져 2013년 12월 17일 KBS1에서 <손끝의 기적, 고맙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인사이트 캠페인은 우리 사회 시각 장애 아이들에게 표현과 소통을 위한 희망을 열어주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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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가루 백년 식당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샘터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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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쓰가루 백년 식당>은 <무지개 곶의 찻집>, <당신에게>의 일본작가 모리사와 아키오의 신작소설이다. 이 책은 따스한 위로와 온기를 전해주는 모리사와 아키오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기대되었다. 

 

이 책은 1800년 중반 메이지 시대 쓰가루에서 시작된 오모리 식당 창업주인 1대 겐지와 그의 부인 도요의 애틋하고 정겨운 사랑 이야기, 4대째 후손인 요이치와 요이치의 여자친구 나나미의 아기자기하고도 위태로운 사랑 이야기로 구성된다. 주인공 요이치의 아버지이자 현재 오모리 식당의 주인인 데쓰오가 프롤로그에 등장하고, 요이치의 어머니인 아키코가 에필로그에 등장해 소설의 문을 닫는 독특한 구조이다. 

 

오모리 데쓰오는 이 소설의 주인공인 요이치의 아버지이며, 올해 창업 100주년을 맞은 오모리 식당의 3대 주이자 현 주인이다. 오모리 식당 2대 주인이자 방탕한 주정뱅이였던 아버지의 뒤를 잇느라 여섯 살 때부터 가게 일을 도와야 했다. 아들 요이치에게는 고생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자기 대에서 오모리 식당을 그만 접으려는 생각이다. 데쓰오는 요이치가 결혼을 하면 며느리에게도 고생을 시키게 될까봐 식당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어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선대로부터 가게를 이어받고 아이들을 독립시키기까지 많은 일을 경험했다. 딸 모모코가 폐렴으로 죽을 뻔했고, 태풍으로 가게 지붕이 부서졌고, 아버지가 술에 취해 차에 치여 사망했고, 오일 쇼크가 있었고, 아내가 자궁근종으로 입원했다.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하루하루를 담담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고마운 일인지. 그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 데쓰오는 줄곧 같은 기도를 올리고 있다."

 

요이치는 아버지를 '요즘 세상에 보기 힘들 만큼 우직하고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우리 주변에도 요이치의 아버지인 데쓰오와 같은 인물이 많지 않을까?

 

"무슨 문제가 생겨도 타인의 도움 없이 묵묵히 혼자 짊어지고 일하는 사람. 몸 상태가 좋지 않아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어떠한 불평불만도 입에 담지 않는 사람. 나쁘게 말하는 건 정치가에 대해서뿐이고, 어쩌다 선의의 거짓말을 해도 금방 들통이 나고, 본인은 들통 났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묵묵히 일만 하는 사람. 돈이 드는 취미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지만 동네 주민과의 자리에는 빠짐없이 참석하는 사람. 그게 우리 아버지였다. 요즘 세상에 보기 힘들 만큼 우직하고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오모리 요이치는 '오모리 식당'의 4대손으로 달리기를 잘하고 수줍음 많은 순수한 청년이다. 도쿄에서 광고 회사에 취직했다가 그만둔 뒤, 피에로 복장으로 풍성 아트 쇼를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28세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는 요이치는 도쿄의 싸구려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는 소심한 성격의 남성이다. 꿈을 이루고자 노력하며 나아가는 여자친구 나나미를 보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그는 지켜야 할 사랑, 뒤를 이어야 할 백년 식당 사이에서 고민하는 남자이다.

 

요이치는 나나미를 알게 된 후 '혼자'가 아닌 '둘'이 되었다. 요이치와 나나미는 이제 도쿄를 험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자극적인 도시에서 모험하는 마음으로 함께 즐기는 입장이 되었다.

 

"거꾸로 생각하면, 그건 히로사키를 떠나 외톨이로 생활하는 우리가 늘 품어왔던 고독감과 불안한 미래를 공통된 문제로서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눈을 반쯤 감고 대화를 즐겼다. 위로하며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었다. 조금 과장인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가슴은 늘 도쿄의 까슬까슬한 바람에 쓸려왔고, 긁혀서 조금 피도 났는데, 그 옥신거리는 아픔을 이해하는사람만이 다정하게 약을 발라줬으면 싶은 것이다. 그 마음을 알기에 우리의 대화는 한없이 즐거웠지만 그만큼의 쓸쓸함도 가슴 깊은 곳에 서서히 달라붙기 시작했다."

 

요이치의 여자친구인 쓰쓰이 나나미는 엉뚱하고 아이처럼 순수하면서도 저돌적이고 씩씩한 면이 있다. 요이치와 같은 하나모리 지방의 과수원집 딸이다. 사진작가라는 꿈을 좇아 도쿄에 와 고생하면서 배우며 일하던 중 우연히 요이치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책을 읽으면서 '피에로' 분장을 하고 일을 하는 요이치 자신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나나미가 사진가로서 인정을 받아가자 요이치는 질투라는 감정에 휩싸인다. 아니, 그것은 질투보다는 열등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꿈을 향해 한걸음씩 전진하는 나나미에 비해 요이치는 여전히 피에로인 자신이 싫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평소처럼 피에로가 되어 웃는 얼굴을 만들고, 눈앞에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고, 그 사람이 좋아할 만한 행동을 하고...... 피에로 안에 있는 진짜 나 자신을 새하얀 화장으로 감추고, 나는...... 나는 언제까지 피에로일까?"

 

어린시절 멋진 존재였던 요이치의 아버지는 요이치가 도쿄에 오자 시골 촌구석의 그저 그런 식당 아저씨일 뿐이었다. 요이치는 아버지가 소개해준 중화요리점을 그만두고 누나의 지인이 근무하는 광고회사를 다니다 2년을 채우고 그만두었다. 하지만 2년째가 되어 매일매일 눈이 팽팽 돌 정도로 일만 해야 하니 생활 리듬을 찾기 힘들었다. 요이치는 권태감이 오래 지속되는 것 같아 병원을 찾아가니 의사는 불안신경증이라는 마음의 병이라고 말했다. 요이치는 회사를 그만두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풍선 아트 쇼를 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요이치의 아버지인 데쓰오는 요이치에게 자신은 어린시절 생계를 꾸리기 위해 식당을 했지만 손님이 기뻐하면 자신도 기뻐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5년동안 얼굴을 보지 않았던 요이치와 아버지가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장면이 따스하게 그려진다. '모든 일의 끝에는 반드시 감사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데쓰오의 말이 뭉클해진다.

 

"손님이 맛있다고 기뻐하면 나도 그냥 기쁜 거야. 그래서 네가 피에로 일을 한다고 했을 때도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그것도 좋지 않겠나 생각한 거지. 돈도 잘 못 버는 시골 식당 주인보다 더 멋진 인생은 얼마든지 있지 않겠지?"

 

 

"이건, 내가 어릴 때, 이 식당을 처음 만든 할아버지한테 몇 번이나 들은 이야긴데.

모든 일의 끝에는 반드시 감사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배웠단다.

어떤 일이든 마지막엔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만 한다면 모두가 좋은 기분을 간직할 수 있다고 초대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단다."

 

요이치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어떤 선택을 할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을 짐작케한다. 책 <쓰가루 백년 식당>은 따뜻한 마음과 감사를 잃지 않는 기쁨을 배울 수 있는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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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스프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하명희 지음 / 북로드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책 <착한 스프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드라마 '따뜻한 말 한마디' 하명희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PC통신을 이용해 밤새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시작된다. 주인공 현수는 ‘제인’이라는 대화명을 쓰고 그녀의 절친 홍아는 ‘우체통’이라는 대화명을 쓴다. 어느 날 결혼을 앞둔 홍아가 PC통신 요리동호회에 들면서 현수를 끌어들인다. 그녀가 PC통신 요리동호회에서 홍아의 소개로 ‘착한스프’라는 대화명의 남자 온정선을 만난다. 그들은 그렇게 PC통신이라는 공간에서 서로 친해진다. 사랑하면서도 그것이 사랑인지 모르는 바람에 긴 시간을 돌아 운명처럼 만난다. 빗나간 운명이 어느 시점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 사랑은 더 지독하고 애절하다.

 

PC통신을 통해 만난 현수, 홍아, 정선은 각각 '제인', '우체국', '착한스프'라는 대화를 지닌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익명의 대화명 속에서 자신의 진짜 본질을 알지 못하는 인물들을 발견한다.

 

"그땐 우린 만나면 다 온라인상의 대화명을 썼다. 온라인상의 만남이란 우선 익명을 전제로 한다. 익명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활동하기 좋은 조건이다.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되고, 어쩜 한 번 보고 말 사람들이기 때문에 좀 더 동물적일 수 있다."

 

현수의 대화명인 제인은 '피아노', '내 책상 위의 천사', '여인의 초상'을 연출한 뉴질랜드의 여성 영화감독 제인 캠피온에서 따온 것이다. 스물여섯 현수는 '착한 스프'라는 대화명을 지닌 정선을 사랑하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현수가 사랑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마음의 양을 재는 계량기는 없다. 언제나 내가 많이 주거나, 내가 많이 받는 것 같다. 양쪽 모두 만족하기 어려운 것이 사랑이다. 그것 때문에 우린 그토록 사랑을 원하면서도 사랑을 포기한다. 포기하면서 말한다. '사랑은 없다'. "

 

"누구나 어떤 사람을 처음 봤을 때, 그 사람의 생김새나 말투, 학력, 가정환경, 성격 등을 가늠하면서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를 그린다. 그리고 그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그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낀다."

 

"사랑은 자기 자신이 심어 놓은 환상을 먹고 자란다. 내가 사랑했던 그는 내가 생각했던 그가 아니다. 내가 사랑했던 그는 내가 느꼈던 그가 아니다. 그저 내가 물 주고 햇빛에 내놓고 키운 꽃 같은 존재다. 꽃은 원래 그대로인데 이름 붙이고 의미 붙이고 애착한 건 나다. 꽃이 내게 이름을 붙이라고 하지도 않았고 의미를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순전히 내 뜻이었다."

 

"내게 대시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한번 사귀면 오래 만났다. 지금껏 두 명의 남자를 만났는데, 두 번 다 내가 이별을 고했다. 홍아는 지금껏 남자가 떨어진 적이 없다. 항상 주위에 남자들이 몰려 있다. 반면 그렇게 좋아한다고 매달리던 남자들이 막상 사귀기 시작하면 막 대하기도 하고, 먼저 홍아를 버린 적도 있다. 그런 면에서 인생이란 공평한 것 같다.

 

소설 속 인물중에서 가장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인물은 '착한 스프'라는 대화명의 정선이었다. 정선의 친엄마는 남자 없인 살 수 없는 여자였다. 정체성이 없는 불행한 정선의 친엄마는 아들에게 집착하며 아픔을 주었다. 정선은 처음으로 현수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현수의 절친인 홍아로 인해서 정선의 사랑은 뒤틀리게 된다.

 

“난 날 인정해 주는 여자가 좋아. 아무리 내가 좋아도 여자가 싫다면 대시하지 않아. 사랑은 쌍방통행이지, 일방통행이 아니잖아.”

 

"정선은 인생에 여자는 하나밖에 두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인간이 환경에 지배받느냐 받지 않느냐 하는 명제에서 정선은 지배받는 쪽의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정선에겐 모든 것이 절대와 상대로 나뉜다. 절대는 하나다. 둘 이상이 될 때부터는 상대적이 된다. 둘 이상이 될 때부터 비교라는 것이 들어온다. 정선은 단 한 명의 여자와 가정이란 걸 이루고 충실하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의 부모가 자신에게 저지른 정신적 폭행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통해서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고 그 생명을 보호하고 든든한 지킴이가 되어 주는 것이 그가 삶에 대해 갖고 있는 희망이다."

 

"세상에 하나뿐인 나라는 존재를 부모의 삶과 함께 엮으며 살아가려는 건 자신에 대한 모욕이고, 그 사람에 대한 올바른 잣대가 아니다. 정선에게 누군가가 부모를 내려놓고, 너는 니 인생을 살라고 했다면 그의 인생이 좀 더 자유로웠을까. 정선은 부모의 삶을 보면서 자신도 그런 삶을 살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 두려움은 그를 옭아맸다. 그를 옭아맸던 정신은 그에게 상처를 내고 귀중한 것을 잃게 했다."

 

타인이 자신을 좋아해주기를 바라면서 거절하지 않고 살아온 홍아에게 현수는 유일한 친구였다. 홍아는 현수가 자신과 정반대인 것이 좋았다. 자신이 진행하면서 끊임없이 옆을 보는 타입이라면, 현수는 목표를 정하면 그곳을 향해 꾸준히 발걸음을 쉬지 않는 타입이였다. 홍아는 거리를 두고 보면 착한 여자지만, 일단 자신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자기 식대로 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여자다. 남자들은 홍아의 겉모습에 빠져들어 사귀게 되었다가 홍아의 말과 집착 때문에 견디기 힘들어했다.

 

"착하다는 건 복잡하다. 홍아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착하다고 하는 것을 안다. 홍아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의 의견에 토를 달지 않고 속으로 무시해 버린다. 그리고 거절이란 걸 별로 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를 사람들은 착한 여자라고 한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알고 있다. 자신이 착하지 않다는 것을. 단지 그녀가 원한 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다. 어느 자리에서건 주목받고 싶은 것이다. 어딜 가든 홍아는 그런 행동거지 때문에 인기가 좋았다."

 

"그것이 그녀의 모순이였다.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으면서 성취하려는 것. 이제껏 그녀가 살면서 그것에 적합한 것을 찾은 건 섹스다. 섹스는 그녀에게 쉬운 것이었다. 노력이 필요없는, 손만 내밀면 이룰 수 있는, 한 번의 실수도 그녀를 막을 순 없었지만, 이것도 더 이상 그녀를 잡아 둘 수 없었다. 그래서 곁눈질 하면서도 이룰 수 있는 것을 찾아 아직도 헤매고 있다."

 

"인생은 긴 여정이다. 어린 시절 빛났던 사람이 자라면서 그 빛이 바랠 수도 있고, 어린 시절 주목받지 못했던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빛을 발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 좋은 것이라고 단정 지어서 말할 순 없다. 어린 시절의 빛남은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것과 관계가 있고, 나이 들어서의 빛남은 후천적인 노력과 관계가 있다. 홍아는 많은 것을 갖고 태어났기에 잃는 것부터 배워야 했다. 가진 것 없이 시작한 사람은 획득을 먼저 배운다. 잃는 것을 먼저 배우는 사람은 피해의식을 가질 수 있고, 얻는 것부터 배우는 사람은 자만을 가질 수 있다,"

 

홍아의 거짓으로 인해서 정선과 현수는 사랑의 타이밍을 잃어버렸다. 홍아는 상처를 받든 안 받든 모든 사랑에 대해 말해 줘야 할 도리가 있다는 걸 간과했다. 상처는 사랑하고 있는 자들이라면 필수로 끼고 가야 하는 목록이다.

 

"5분 일찍 떠난 시침은 5분을 뒤로 돌리지 않는 한 정확한 시간을 낼 수 없다. 시계의 5분은 뒤로 돌리면 되지만, 인간에게 엇나간 타이밍은, 신이, 보이지 않는 강한 손이, 맞춰 주지 않으면 계속 엇나간다. 인간은 그걸 운명이라고 부른다."

 

"현수에게도 잘못은 있다. 자신에게 사랑이 왔는데, 알아보지 못했다. 사랑을 알아보려면 자신 안에 사랑이 있어야 하고, 자신과 대화를 잘 나눌 줄 알아야 한다. 홍아의 거짓이 아니라 현수가 한 박자 늦게 알아서 그들이 고통받는지도 모른다. 결과는 같은데, 원인은 여러가지일 수 있다."

 

"거짓말을 자꾸 하면 거짓말이 자신의 정신에 차츰차츰 자리를 차지하고 급기야는 정신세계를 지배하여 그 사람은 '거짓말' 그 차제가 된다. 시기와 질투, 분노도 예외일 수는 없다. 시기를 풀어내지 못하고 계속 정신이 좀먹에 방치해 두면 열등감과 우월감이 파행적으로 부딪치며 정신을 분열시킨다. 분열된 정신은 결국 자신을 파멸시킨다. 홍아는 지금 자신의 정신이 죽음에 이르는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시기와 질투가 그녀의 정신을 점점 갉아먹고 있기에."

 

'착한 스프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라는 책의 제목을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왜 '착한 스프는 전화를 받지 못했을까?'... 사랑의 오해와 상처로 인한 소설 속 인물들. 하지만 우리는 사랑하기에 상처받는 것이다. 착한 스프라는 닉네임의 정선이라는 인물이 이 소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소설을 읽고나니, 소설을 시작하기 전 저자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작가는 '피상적인 소통'으로 인한 관계의 허약함이 이 시대 우리가 해결해야 할 숙제라고 말한다.

 

"이 작품은 인간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사랑을 주고받는 과정에서는 상처 또한 주고받을 수 없다. 사랑을 주고받는 과정에서는 상처 또한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상처는 사랑에 따르는 필수사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처를 받지 않으려는 사람은 피상적인 관계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네 사람의 서로의 세계관에 부딪히며 오해하고, 자신의 세계관에 상대를 편입하려 든다. 그 과정에서 균형 감각은 깨지고, 결국 그들은 홀로 남는다. 그리고 혼자가 되었을 때 그들은 비로소 상대를 사랑하고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터넷 시대에 관계의 키워드는 고독이다. 피상성에는 고독이 따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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