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국영의 언어 - 우리가 모르는 광동어 이야기 고려대중국학연구소 문화시리즈 5
조은정 지음 / 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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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표준 중국어 일명 '만다린'어만 할 줄 안다. 그런데 홍콩과 광둥 지역을 포함하여 동남아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화교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바로 광둥어이다. 사용인구가 1억명에 달한다고 하니 중국의 방언 중 가히 대표적이라고 할 만하다. 


평 소 광둥어에 관심이 있었던 터라, 도서관 신간 코너에 꽂혀 있던 <장국영의 언어-우리가 모르는 광동어 이야기>를 집어 들었다. 고려대중국학연구소의 문화시리즈 중 제5권으로, 얄팍하여 두껍지 않고 일반인의 호기심도 자극할 만한 내용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글쓴이는 내 나이또래-적확하게는 나보다 한살 아래-로 성대 중문과를 졸업하고 대만국립사범대에서 광동어 연구로 석,박사학위를 취득한 인물이다.


책의 앞부분에서는 광동어의 발음과 성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청각적 도움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시각적으로 읽기만 하니 '수박 겉핥기식' 으로 넘어갈 수 밖에 없었다.


나 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 부분은 케짬(茄汁)->케첩(ketchup), 라이치(荔枝)->리치(litchi), 딤쌈(点心)->딤섬(dim sum), 다이퐁(大风)->타이푼(typhoon)등의 영어 표현이 원래는 광동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점이었다. 특히, 대표적인 서양 소스로 알고 있던 케첩이 원래는 광동 지역 어민들이 만들어 먹었던 해산물 소스 '케짬'이 서구로 넘어가 토마토를 주재료로 사용하게 되면서 지금의 토마토 케첩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표준중국어로는 토마토 케첩은 '판체장(番茄酱)' 이라고 하는 등, 위와 같은 유래의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아마 종성이 발달되지 않았고 특히  'ㅁ, ㅂ'의 받침을 소리낼 수 없는 표준 중국어의 특징때문에 의역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중국 북방에서 토마토는 주로 西红柿라고 하는 반면, 남방지방에서는  番茄라고 한다.


이와는 반대로 영어에서 들어와 중국어 단어로 자리잡은 경우도 있다. 대륙에서는 택시를 '出租车'라는 반면, 홍콩등 광둥지역에서는 '的士'라고 하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원래 的士는 영어 발음 taxi와 가장 가까운 광동어로 광동 지역에서는 的士를 '땍시'라고 발음했던 것이다. 그 후, 的士가 대륙으로 넘어오면서 택시를 의미하게 되었고 발음도 중국 표준 발음으로 '디스'라고 불렸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연유로 인해 중국 남방지역에서는 아직도 택시를 '出租车'보다는 '디스(的士)'라고 부르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택시(taxi)->땍시(的士)->디스(的士)


이 밖에도 대륙 표준어와 쓰임이 다른 단어들도 상당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姑娘으로, 중국어로는 아가씨를 뜻하지만 광동어로는 '간호사'를 의미한단다. 이유인 즉, 과거 선교사들이 들어와 현대식 병원을 운영하면서 수녀들이 환자들을 돌보았는데 수녀들은 결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가씨를 뜻하는 姑娘이 간호사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단다.


그리고 영어를 중국 표준어에서는 뜻으로 번역한 반면, 광동어는 음으로 번역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쿠키(cookie)는 광동어로 콕케이(曲奇)인 반면, 표준 중국어로는 의역하여 '마른 떡'이라는 뜻의 '빙간(饼干)'이라고 한다. 이런 단어들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한국어
 영어  광둥어
 표준 중국어
 젤리  jeiiy   嘟哩(찔레이)
 果冻(궈둥)
 스토로베리  strawberry  士多啤梨(사또뻬레이)  草莓(차오메이)
 넘버  number   冧巴(람바)  号码(하오마)
 바이올린  violin  歪乌连(와이우린)  小提琴(샤오티친)
 스탬프  stamp  士擔(시땀)  邮票(유파오)



젤리/찔레이, 바이올린/와이우린, 넘버/람바 등등 한국어와 광둥어는 영어 발음과 상당히 유사한 것에 비해, 의역한 표준 중국어는 원래의 영어 단어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발음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점 때문에 표준 중국어로 표기된 외국인 이름이나 지명등 고유명사는 일일히 사전을 찾거나 검색하지 않는 한 알 길이 없다. 설령, 의역하지 않고 발음대로 표기했다 하더라도 영어 발음에 가까운 광둥어에 비해 표준 중국어는 전혀 다른 발음처럼 들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베이커한무(贝克汉姆)가 축구스타 베컴(Beckham)이고, 지무카이리(吉姆凯利)가 영화배우 짐 캐리(Jim Carrey)라는 걸 발음만으로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반면, 광둥어에서는 베컴은 碧咸(빽함), 짐 캐리는 占基利(찜께이레이)라고 표기하고 발음한다 하니, 표준 중국어보다는 원 발음에 훨씬 더 가깝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말도 안되는 상상이지만 만약 중국의 표준어가 지금의 북경지방언어가 아닌 광둥어로 결정되었다면 어떠했을까?  성조와 발음을 익히기 위해 훨씬 더 힘이 들었겠지만, 외국인 이름과 지명 등으로 혼란을 겪는 일은 지금보다는 훨씬 더 줄어들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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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집의 살인 집의 살인 시리즈 3
우타노 쇼고 지음, 박재현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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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61년 후쿠오카에서 태어난 우타노 쇼고는 1988년 <긴 집의 살인>으로 데뷰한 이래, 정통 추리소설(일명 '본격파' 추리소설)을 발표하면서 입지를 다진 작가이다. 특히, 2004년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기리워하네>로 제57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과 제4회 본격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한다.

 

 

<움직이는 집의 살인>은 <긴집의 살인>과 <흰 집의 살인>과 함께 '집의 살인'시리즈 중, 세 번째 작품이다. 화려한(?) 작가의 이력에 이끌려 배경 지식도 없이 집어든 책이어서 그런지 나에겐 상당히 느리게 책장이 넘어간 책이었다. 독자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들어야 추리소설로써 합격점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우타노 쇼고의 <움직이는 집의 살인>은 일단 나에게는 실패작처럼 보인다. 작가의 애독자들에게는 기대와 경애의 대상일수도 있는 괴짜 탐정 시나노 조지와 그의 활약상을 알지 못하는 나에게는 '결론부터 말하면, 시나노는 죽었다'는 도입부 첫문장마저 강렬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작품의 구성은 '액자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다. 시나노 조지의 친구인 이치노세 도오루는 신문을 통해 시나노 조지가 누군가와의 싸움 중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친구의 마지막 행적을 쫒아가는 형식이다. 이 부분이 다루어지는 작품의 맨 앞부분은 지나치게 밋밋하게 표현되었다. 아마도 눈치 빠른 독자에 막판 반전을 들킬 것을 우려한 작가가 의도적으로 독자의 관심을 피하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럼, 시나노 조지라는 인물은 어떻게 죽었을까?

 

시나노 조지는 '마스터 스트로크(masterstroke: 신기)'라는 극단에 스태프로 참여하게 된다. 극단은 '신은 예술가를 좋아해'라는 작품 공연으로 한창 바쁜데, 알고 보니 이 공연은 6년 전인 1983년 무대에서 창에 찔려 죽은 이자와 기요미라는 단원을 추모하기 위해 열리는 추모공연이었다. 그리고 공연장소는 최첨단 시절을 자랑하는 시어터 K1으로 결정되는 데, 시어터 K1은 죽은 이자와 기요미의 아버지인 건축가 야스노리 이자와가 사재를 털어 만든 것으로 무대가 360도 회전하도록 설계되었다.

 

 

운영자금이 부족한 극단을 위해 시나노 조지는 사채까지 끌어다 쓰면서 적극적으로 공연을 돕고, 그 과정에서 모리 교코라는 여성과 가까워진다. 그리고 공연 도중 모리 교코의 연출용 칼에 스미요시가 상처를 입는 사건이 발생한다. 스미요시는 병원에 입원하고 경찰의 조사가 계속되는 가운데 다키가와 요스케의 고집으로 공연은 예정대로 진행된다. 참고로, 다키는 기요미의 연인이자 그녀를 연극의 세계로 입문시킨 장본인이다. 그런 그가 자신이 극본을 맡은 공연 도중, 실제로 죽고 만다. 극 중 칼에 맞는 라스트 신을 끝으로 컬튼 콜이 이어졌지만 결국 그는 일어나지 못한다.

 

 

스미요시가 무대에서 뒤바뀐 칼에 상처를 입으면서 공연은 뜻밖에도 입소문을 타 경제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다키가 죽으면서 시나노 조지는 야스노리 이자와를 강력한 범인으로 지목한다. 그 이유는 야스노리 이자와가 딸의 죽음을 다키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시어터 K1의 무대의 설계자로서 그라면 충분히 360도 회전하는 무대를 이용하여 다키를 살해할 수도 있다는 가설이 설득력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건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시나노 조지가 죽는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시나노 조지를 사칭한 인물이 죽는다. 반전은 정말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정사(情死)'를 암시하는 마지막 장면...

결국, 기요미와 다키 그리고 교코도 다 사랑때문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움직이는 집의 살인>이라는 작품은 놀라운 반전과 뛰어난 트릭으로 추리소설의 요소를 다 갖추고 있다. 가히 우타노 쇼고다. 그의 대표작품을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추리소설작가로의 그의 재능은 이미 이 작품 하나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대한 집중과 몰입이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내린 판단으로는 아마도 그의 작품이 대화체 위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는 점과 비쥬얼(영상)을 중시한 글쓰기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배경과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가 지나치게 부족하고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에는 '복선'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독자들은 작품을 읽으면서 상상이나 추측을 전개해 나갈 수가 없다. 즉, 추리소설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인 '두뇌 플레이'를 펼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이 만화나 영화 등으로 만들어진다면 책보다는 훨씬 더 재미있을 수도 있을 것같다.

 

 

한 작품을 읽고 작가와 그의 작품성을 이야기하는 것만큼 섣부른 짓도 없으리라. 진작부터 독서 목록에 올려놓은 우타노 쇼고의 대표작인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기리워하네>를 어서 빨리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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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심을 버리면 이루지 못하는 바가 없다'는 말이 있다. 너무 잘 하려고 할수록 역효과가 난다는 의미다.

사실, 일상생활에서 뭔가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실수 연발이요, 꼭 합격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공부에 집중할 수 없어 오히려 합격권에서 멀어지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우리 속담에 '제사보다는 젯밥에 관심이 있다'는 말처럼 '사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사심 즉 생각이란 행동을 유발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지나치면 역시 주객이 전도되어 사심(생각)에 빠져 집중력이 떨어지고 행동에 방해가 된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 걸까?

마음을 쓰면 쓸수록 마음만 다친다. 전심전력이란 말은 '온 마음을 다해서'이지 '온 마음을 채워서'가 아닐진데 어느덧 마음속엔 욕심만 가득 차있다. 이러하니 몸이 가벼울 리가 없다. 한 걸음 떼어 놓기에도 힘에 부치는 몸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뭔가 이루려면 우선 비워야 한다. 그런데 마음을 비운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마음을 '턱'하니 비워버리면 뭔가 하고자하는 의욕마저 달아나 버리고 만다. 그러니 마음을 비울 줄 알아야 한다고 하나보다. '비우는 것'과 '비울 줄 안다'는 것은 언뜻 비슷한 것 같지만 엄연히 다르다. 비우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상태를 일컫는 반면, 비울 줄 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연습하고 배워 익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혹은 마음 먹는다고 해서 저절로 비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사람들은 명상도 하고 수행을 해서라도 자신을 오롯히 비우려고 한다. 다시 이야기를 되돌려서, 그렇다면 어째서 비우려고 하는가? 바로, 채우기 위함이다. 채운다는 것은 바로 뭔가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비우지 않으면 안된다. 비운다는 건 바로 욕심과 욕망을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나부터 도저히 욕심과 욕망을 저버릴 수가 없다. 욕심과 욕망이야말로 하루를 견뎌내는 '힘'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 자신을 도저히 비워낼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단 하나. 바로 나 자신을 던지는 수밖에는 없다. 깡그리 비울 수 없다면 송두리째 던져버리는 수밖에는 없지 않은가. 욕심과 욕망을 도저히 저버릴 수 없다면 욕심과 욕망 속으로 자기 자신을 던져버리는 것이다.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욕망 즉 목표는 이와 같은 철저한 자기 버림 즉 '몰입'을 통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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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차이
연준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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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돈을 써가며 구입하진 않지만 한번쯤 진지(?)하게 눈길이 가는 책들이 있다. <사소한 차이> 도 아마 그런 종류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독서 계획표에 담겨 있지는 않지만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면 무심코 손이 가고 책장을 넘기게 된다.

많은 이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그들만이 갖고 있는 비밀스런 습관이나 행동을 서른 세 가지로 요약하여 보여준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내가 아직도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것이 그들처럼 훌륭한 습관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자괴감을 피할 수 없다.  

 

물론, 작은 차이가 모이고 쌓여 커다란 차이와 변화를 만들어낸다. 그렇지만 이런 사소한 차이가 성공을 부르는 결정적인 요소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 <사소한 차이>와 같은 '처세술' 용 지침서들은 경쟁에 내몰려 있는 현대인들의 불안하고 조급한 심리를 잘 이용하여 마치 나도 책에서 언급한 좋은 습관만 갖는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2010년 상반기 <사소한 차이>가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자 그 뒤를 이어 <보이지 않는 차이>라는 책이 서점가에 등장했었다. 내용은 위대한 발명이나 아이디어의 탄생에 담겨 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소개 나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책들은 일단 읽기에 부담이 없다. 간결하고 짧은 문장에 누구나 공감하는 말들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류의 책읽기는 진정한 '독서'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마지막 장을 덮으면 모든 내용들이 망각의 블랙홀 속으로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무릇, 좋은 책이란 좋은 내용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색의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책이다. 그리고 이처럼 생각에 잠길 수 있는 독서는 책을 읽는 과정에서 혹은 책을 다 읽고 난 후 끝없이 이어지는 진지한 질문과 대면하는 행위이다. 스스로 깨닫고 체득하지 않은 앎은 얄팍한 지식에 불과할 뿐, 진정한 지혜로 승화되지 못한다.


성공적인 삶을 절실히 바란다면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이나 처세술을 모은 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깊은 사색의 세계로 인도하는 책들을 가까이 해야 한다. 생각의 폭과 넓이가 확장되면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관점 역시 그만큼 커지는 법이다.


그런데 이제 막 책읽는 습관을 갖추기 시작한 독서 초보자도 아니요 처세술 서적을 가급적 멀리하려 노력해 왔고 또 나름대로 독서 목록과 계획을 갖고 있는 내가 냉큼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끝까지 정독을 했다. 역시, 베스트셀러를 여러 권 만들어낸 저자답다. 도서 구입을 위해 쉽사리 지갑을 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솜씨가 여간 아니다.


타성에 적은 일상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는 이들은 일독을 해도 무방할 듯...


참고로,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범인과 초인의 사소한 차이는 다음과 같다.


 

1, 마감시한 이틀 앞당기기

2, 하기 싫은 일 3분 더하기

3, 가족과 함께 아침밥 먹기

4, 맨 앞자리에 앉기

5, 늘 펜을 가지고 다니기

6, 핸드폰 바탕화면에 목표 띄워 놓기

7, 약속 시간 15분 전에 도착하기

8, 노는 계획 먼저 세우기

9, 큰 소리로 먼저 인사하기

10,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일주일 안에 이메일 보내기

11, 이름과 직위를 정확하게 부르기

12, 신용카드 잘라 버리기

13, 평생의 동반자, 취미 만들기

14, 3초 기다린 후에 대답하기

15, 만장구치면서 듣기

16, 닫힘 버튼 누르기 않기

17, 한 숟가락 덜어내고 밥 먹기

18, 매일 다른 사람과 점심 먹기

19, 흘리지 않고 밥 먹기

20, 하루 30분 걷거나 뛰기

21, 배웅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하기

22, 모든 대답은 '예'로 시작하기

23, 잠자리에 들기 5분 전, 스스로에게 질문 던지기

24, 5분 안에 꿈 일기 쓰기

25, 종이 신문 꼼꼼하게 읽기

26, 책 한권 가지고 다니기

27, 일주일에 한 번 다른 길로 출퇴근하기

28, 가만히 앉아 사람 구경하기

29, 컴퓨터 끄고 퇴근하기

30, 모르는 척해주기

31, 안 좋은 이야기는 이메일로 보내지 않기

32, 없는 사람 칭찬하기

33, 나에게 고맙다고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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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저는 추리소설과 깊은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원래 추리소설은 여름이 제철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저에게 지난 겨울은 추리소설 그것도 일본 추리소설을 읽은 기억만 떠오르네요. 물론, 저를 추리소설의 세계로 안내 한 이가 있는데 종종 언급했던 '물만두'라는 블로거입니다. 알라딘 서재에 십년 동안 무려 1838편이라는 전무후무한 리뷰를 올린 전설의 블로거지요.


2000 년 3월2일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시작으로 2010년 11월17일 <메타볼타>까지 약10년동안 1838편의 서평을 썼습니다. 서평이란 말 그대로 책을 읽고 적은 소감이므로 10년 동안 무려 1838권의 책을 읽었다는 계산이 나오지요. 

아, '혹시 만화책이나 가벼운 에세이류겠지...'라고 오해하시는 분도 계실 것 같아 미리 밝혀둡니다. 물만두님은 다른 장르는 손도 대지 않고 오로지 국내외의 추리소설만 읽고 리뷰를 달았습니다. 추리소설은 어떤 장르보다도 작품의 분량이 많다는 점은 제가 굳이 이 자리에서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


물만두의 블로그를 방문한 이후, 저는 두 가지 의문(?)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한 가지는 평균 하루 걸러 한편씩 서평을 올렸다는 점입니다. 약 십년동안 1838권의 책을 읽으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독서력을 갖고 있어야 하는지 상상이 되시나요? 대략 계산해 보면 일년에 183권, 한달이면 15.25권. 이틀에 한권꼴로 책을 읽고 리뷰를 달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희귀질환을 앓고 있었기에 매일 출근할 필요도 없었고 집안일에서도 자유로웠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하루하루 조금씩 자신의 몸이 굳어가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처음 리뷰를 달기 시작할 당시에는 엄청난 책값을 감당할 수 없어 집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시내의 대형서점을 직접 오가며 서점안에서 책을 읽었답니다. 그러다가 두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외출이 불가능하게 되고... 다시 혼자 힘으로는 일어설 수 없게 되고... 그러다가 앉을 수도 없이 누워만 지내게 되고... 마지막 리뷰를 올릴 당시에는 열 개의 손가락  중 고작 여섯 개만 움직일 수 있는 상태였답니다.


이렇게까지 처절하게 몸부림치면서 생이 사그라드는 마지막 순간까지 책을 읽고 리뷰를 올려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을 철저하게 '몰입'하게 만든, 그런 열정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또 다른 의문은 많고 많은 장르 중에서 어째서 추리소설을 선택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만약, 세상에 알려진 바 대로 질병을 앓고 있었다면 마음의 평정에 도움이 되는 종교서적이나 부드럽고 선한 책들도 얼마든지 많았을 텐데 하필이면 잔인하고 끔찍한 장면이 등장하기도 하고 죽음을 가깝게 다루는 추리소설을 선택한, 그 '심리'는 무엇인지 도무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결 국, 이와 같은 의문들이 지난 겨울 내내 저로 하여금 추리소설들을 찾아 읽게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을 접하면서 마침내 어렴풋이 조금이나마 그녀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너무 '오만한 발언'일까요?


일 본의 사회파 추리소설이란 고전적인 추리소설이 '범인이 누구인가?'와 '어떤 트릭을 사용했는가?'에 집중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범행 동기와 범죄를 불러온 사회적 환경을 중시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표 작가들로는 마쓰모토 세이초와 미야베 미유키를 꼽을 수 있습니다.


참! 최근 영화화되어 상영 중인 <화차>가 바로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입니다. 자칭 타칭 마쓰모토 세이초의 '장녀'로 불리우는 미야베는 에도를 배경으로 한 고전물과 현대물에서도 빼어난 수작을 여러편 남겼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뛰어난 작품들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 녀가 자신의 문학적 스승이라 칭송해마지 않는 마쓰모토 세이초라는 작가는 한두 마디로 쉽게 설명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일단, 그는 1909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공교롭게도 한국의 현대추리소설작가로 널리 알려진 김내성과 같은 연도에 태어났더군요. 평양 명문가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온 유학파 엘리트였던 김내성과는 달리 마쓰모토 세이초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입니다. 습작 연습을 할 수도 없었던 그는 아사히 신문사의 광고부에서 일하면서 41살 늦은 나이에 작가로 입문합니다. 그리고 1992년 81세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무려 원고지로 24만장의 글을 남깁니다. 보통 장편소설 한권이 원고지 천장을 기준으로 한다고 하니, 40년 동안 240권의 장편소설에 해당하는 분량의 작품을 남긴 셈입니다. 40년 동안 240권이면 1년에 6권, 두달에 한권 꼴로 장편소설을 썼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가벼운 수필이거나 뻔한 스토리의 잡문 나부랑이겠지...'라고 여기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기에 여기에서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는 일단 일본의 '이상 문학상'이라고 할 만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합니다. 그리고 1956년 47세의 나이에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이후 일본 세무청이 발표한 작가 부문 부동의 납세 1위 자리를 십 수년이나 지킵니다. 이는 그의 작품들이 문학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특히, 그의 초기 단편들은 50년여년이라는 시간과 일본이라는 공간의 격차를 무색하게 만들 만큼 저에겐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미야베 및 세이초와 함께 범죄의 동기를 추적해 나가다보면, 어느 순간 '인간이란 스스로를 지키지 위해 몸부림치는 슬픈 존재'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인간이 이처럼 슬픈 존재라면 스스로를 더욱 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눈에 비친 세이초는 추리소설가이기에 앞서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똘똘 뭉친 휴머니스트였습니다. 그의 다작(多作)은 사회와 주변 사람들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탐구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공 포는 미스터리 즉 무지(無知)에서 출발합니다.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무지'의 영역을 줄이고 '앎'의 영역을 확대시키는 것이겠지요. 즉, 두려움이란 세상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세상을 이해하면 할수록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가히, 다독(多讀)의 대가라 할만한 물만두님이 십년동안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에 심취했던 이유 또한 바로 이 점을 겁니다. 


한 명은 전무후무한 '다독(多讀)'으로 또 한 명은 전무후무 한 '다작(多作)'으로 제 앞에 '불쑥' 나타났습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절묘하기에 계절은 이미 바뀌어 봄으로 향하고 있건만, 전 아직도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기분입니다. '남들이 그 많은 책을 읽고 그 많은 글을 쓰는 동안 도대체 나는 어디에서 뭘 찾아 헤매고 있었던 걸까...'하는 생각에 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순간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을 만나게 된 건 분명 저에겐 크나큰 행운이었습니다. 기쁨과 환희 못지 않게 좌절과 절망 또한 안겨 주었지만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와 꿈 꿀 수 있는 '자유'를 일깨워주었으니 말이지요. 곰곰히 생각해보면, 뭔가를 이루어낸 사람들은 한결같이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뭔가를 했던 이들입니다. 학교 공부가 바쁘다고... 직장에 출근해야 한다고... 갖은 돈이 없다고... 여건이 안 된다고... 우리는 어쩌면 소중한 꿈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여가시간을 불평불만하는 데에 다 써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자신의 꿈을 홀대하는 줄도 모르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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