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이청준」 - 눈길, 서편제, 벌레 이야기 사피엔스 한국문학 중.단편소설 4
이청준 지음, 김준우 엮음 / 사피엔스21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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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한 일이다. 한국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의 작품 그것도 대표작을 이제서야 마주했으니 말이다. 도서관 사서로부터 건내 받은 책은 놀라울 정도로 두꺼웠고 또 많이 닳아 있었다. 두산동아에서 한국현대소설100권대계 시리즈로 출판되어 <병신과 머저리> <서편제> <눈길>등등 작가의 중단편 수작들을 알뜰이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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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너무 깊으면 상처가 되는 법이다.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어미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새벽길을 더듬어 아들을 배웅하며 솟구치는 감정을 다스렸으리라. 이른 새벽 굴뚝위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꾸역꾸역 하염없이 밀려 올라오는 그 감정을...

 

 

그런 어미를 따라가는 그 아들의 발걸음 또한 자꾸 흐트러진다. 야속하리만치 퍼붓기만 하는 눈발속으로 온 몸을 감추고만 싶었을 터. 살다보면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어도 때론 현실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하기에 소년은 아직 한참이나 어리다. 그저 쏟아지는 눈발이 야속할 따름이다.


홀로 남겨진 어머니가 앞으로 감내해야 할 삶의 무게가 얼마나 크고 가혹할지 가늠조차 할 길 없는 아들로서는 배웅하는 어머니를 남겨두고 서둘러 버스에 오르는 일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눈길에 선명히 남아 있는 아들의 발자국을 보며 돌아갈 집 없는 마을로 되돌아가는 어미의 슬픔을 아들이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렇게 아들이 떠나버린 시골 버스터미널 대합실에는 모정(母情)만이 망연자실 앉아 있었다.

 

한해가 가고...

두해가 가고...

십년이 지나고...

또 십년이 지나도...

 

새벽의 눈길 위에 모자(母子)는 여전히 서 있었던 것이다.

 

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면해 온 건 어미에 대한 부양 의무가 아니라 바로 그 슬픔이었으리라. 새벽 눈길 위에 꾹꾹 찍힌 아들의 발자국을 보며 오던 길 되짚어 가던 어미의 그 슬픔말이다.


 

부모 자식간의 인연은 '천륜'이라 한다.

이처럼 '뻔한' 내용의 '뻔한' 슬픔에...

나는 또 그 '뻔한' 눈물을 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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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냐 추녀냐 - 문화 마찰의 최전선인 통역 현장 이야기 지식여행자 3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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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냐 추녀냐>는 요네하라 마리의 생생한 통역 경험담을 묶은 것으로 1995년 요미우리 수필부문 수상작이다. 대부분의 통역 이론서들이 난해하거나 통역사들의 개인적 체험 위주여서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과는 달리, 그녀는 한껏 몸을 낮춰 독자들과 눈을 맞춘다. 통역과 번역의 차이 그리고 통역에도 동시통역과 순차통역이 있다는 것 등등...요네하라 마리와 함께라면 어렵고 복잡한 혹은 베일에 가려 있는 통번역의 세계에서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통번역사를 꿈꾸는 이들이나 일반인 모두 일독할 만하다.


당연히 완벽하고 이상적인 통번역은 일단 원문에서 전달하려는 내용을 남김없이 정확하게 전해야 한다. 그리고 번역이라면 원래 그렇게 쓴 것처럼 자연스럽게 정돈되어 있어야 하고, 통역이라면 원래 그렇게 발언한 것처럼 자연스럽고 무리 없고 거슬리지 않아야만 우리는 좋은 통번역이라고 판단한다.

(...) 그리고 역문의 좋은 정도, 역문이 얼마나 정돈되어 있는지, 편안하게 들리는지를 여자의 용모에 비유하여, 정돈된 경우에는 미녀, 아무리 봐도 번역한 티가 나면서 어색한 역문일 경우에는 추녀라고 분류하면 네 가지 조합이 생기는데 다음과 같다. 정숙한 미녀, 부정한 미녀, 정숙한 추녀, 부정한 추녀.

-미녀냐 추녀냐 中-


 

요네하라 마리의 설명에 의하면,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아름다우면서도 정확한 통번역 즉 '정숙한 미녀'일테고, 가장 안좋은 경우는 아름답지도 정확하지도 않은 통번역 즉 '부정한 추녀'일 것이다. 그러나 통번역사가 신이 아닌 바에야 언제나 어느 분야에서나 완벽한 결과물을 도출해낼 수는 없으니 '정숙한 미녀'는 그저 지향할 뿐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만찬가지로 언제나 어느 분야에서나 부정확한 오역과 세련되지 못한 통번역으로 일관한다면 아무도 일을 맡기려 하지 않을 것이니 자연스럽게 퇴출되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직역과 의역, 오역과 정역 사이에서 피 말리는 재주를 부려야 하는 통번역사로서 그녀의 '미녀와 추녀론'에  크게 공감하며 무릎을 쳤다. 뿐만 아니라, 출발어를 듣거나 읽은 후, 도착어로 말하거나 쓰는 통번역의 과정을 '블랙박스'에 비유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고 많은 학자들이 연구해 왔던 통번역이 이루어지는 과정 즉 통번역사의 두뇌 활동 과정은 사실 '검은 비밀의 세계'처럼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개발된 그 어떤 통번역기기들도 통번역사를 100%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미래에 대해 단정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지만 기계문명이 발전을 거듭한다하더라도 인간 통번역사를 대체하는 기계장비의 출현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참! 그리고 <미녀냐 추녀냐>를 통해 일본의 통역세계와 한국의 통역세계의 가장 큰 차이점을 알게 되었다. 다름 아니라 일본에서는 도착어보다는 출발어를 모국어로 하는 통역 즉, '정숙한 추녀'가 '부정한 미녀'보다 훨씬 선호된다는 것이다. 출발어를 모국어로 하는 통역사의 통역은 비록 거칠고 어색한 면이 있지만 원문을 오해하거나 곡해할 가능성은 극히 낮은 반면, 도착어를 모국어로 하는 통역사의 통역은 자연스러우나 원문이 모국어가 아니므로 그만큼 못 알아듣거나 오해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지기 때문이다. 과연, 정확성을 추구하는 일본인답다. 섬세함이나 정확성 면에서 일본에 훨씬 못 미치는 한국은 통역 분야에서도 보여지는 결과와 겉치레에 더 치중하는 것같아 씁쓸하다.


그리고 저자가 러시아어 통역사이다보니 러시아와 관련된 일화와 러시아어-일본어 간의 통번역을 다루고 있어 한국인 독자들에게는 이해가 잘 안 되거나 공감의 정도가 다소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옥의 티'라 하겠다. 그렇지만 이 책의 역자 역시 이대통번역대학원 출신이라 일반 번역사라면 달리 해석하거나 표현될 수 있는 부분들을 놓치지 않고 적확하게 옮긴 점은 미덕이라 할 만하다.


끝으로,요네하라 마리의 책들을 접하면 접할수록 떠오르는 질문 한가지가 있다.

'난다 긴다하는 한국의 그 많은 동시통역사들은 다들 어디로 간 걸까?'

나 역시 밀려드는 자괴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동안 몇 권의 번역서가 출판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번역사로서의 사회적 역할과 임무에 충실했다고 스스로 자부해왔으니 말이다.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요네하라 마리처럼 일본에서는 자신의 직업 분야에서 일가견을 이루고 직업적 체험을 바탕으로 책을 출판하는 일을 흔히 볼 수있다. 그들 역시 한국인들처럼 먹고 살기 바쁠텐데 말이다. 

세세한 일까지도 기록하고 정리하여 보관하는 일본인의 자세는 정말 감탄을 자아낸다. 그리고 분명 본받을 만한 점임에는 틀림없다. 그녀의 또 다른 책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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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김효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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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문학의 힘을 믿는다'라는 한마디의 말을 나는 믿었다.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작가의 작품을 단 한편도 접하지 않은 상태에서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 읽는 방법>에 이어 <책을 읽는 방법>까지 단숨에 읽은 이유는 바로 그 '믿음'때문이었다. 

 

속도와 양을 점점 중시하는 시대에 '슬로 리딩'을 주장하는 그의 목소리는 순수문학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장중한 울림이 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 지금까지 독서의 질보다는 양을 중시하지 않았나 싶다. 최소한의 시간을 투자하여 최대한 빨리 더 많은 책을 읽고 싶어했으니 말이다.


참으로 어리석었다.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공감하지 못했음은 물론이거니와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 버리는 부분 또한 상당하면서도 버젓히 블로그에 독서일기를 썼다. 마치 난 이런 이런 책을 읽었노라고 자랑하는 것처럼...

 

사실 최근들어 우후죽순처럼 출판되어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독서관련 서적들을 보면, '한달에 백권의 책을 읽으니 인생이 바뀌어 있더라'라는 식으로 깊이 있는 슬로리딩보다는 스피드리딩을 강조하고 있는 것같다. 물론, 다독(多讀)이 무조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독서 경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되고 대다수 사람들에게 있어 이와 같은 독서 경력은 일정 분량 이상의 책을 읽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나를 포함하여 상당수의 사람들이 다독에만 치중한 나머지 정독의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은  '슬로리딩'의 중요성을 감지한 이들에게 슬로리딩의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기존의 독서관련 책들과 엄연히 구분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일본 서적들이 그러하듯, 차례만으로 대략의 내용과 주제를 파악할 수 있도록 잘 짜여진 구성이 우선 눈에 띄었다. 뿐만 아니라 작가이기 이전에 독자로서 그리고 자칭 '슬로 리더'이자 '슬로 라이터'인 히라노 게이치로의 독서방법을 살짝 엿보는 즐거움은 '덤'으로 누릴 수 있다.

 

히라노가 주장하는 슬로 리딩의 몇 가지 테크닉을 나열하자면,

조사, 조동사에 주의하고 사전 찾는 습관을 기르며 작자의 의도를 파악함과 동시에 창조적인 '오독'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앞으로'가 아닌 '깊게' 읽을 것과 다시 읽기 즉 재독(再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읽기'만을 놓고 본다면, 나름 스스로 독서광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나는 유난히 '다시 읽기'에 인색하지 않았나 싶다. 지금까지 '다시 읽기'를 일종의 시간낭비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수박 겉핥기'식 독서를 해왔단 말인가.

 

이 밖에도 '밑줄과 표시' 역시 슬로 리딩의 기술로 소개하고 있다.

참고로, 나를 예로 들어 말하자면 이 점에 있어서 만큼은 슬로 리딩을 실천하고 있는 것같다. 주로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읽는 관계로 밑줄은 그을 수 없지만, 그 대신 작은 수첩을 항상 휴대하면서 중요한 문장등을 수시로 메모한다. 그리고 메모하기에 분량이 다소 많은 경우에는 해당 페이지의 한쪽 모서리를 살짝 접어 놓는다. -게이치로의 설명에 따르면 서양에서는 이런 식으로 책 모서리를 접는 걸 'dog ear'라고 한단다- 나중에 블로그에 독서일기를 쓸 때 인용하거나 다시 찾아보기 쉽도록 하기 위함이다. 

 

슬로 리딩 실천편에서는 8명의 작가의 여덟편의 작품을 텍스트로 삼아 어떻게 슬로 리딩을 하는지 혹은 슬로 리딩의 결과로 작품에 대해 알 수 있는 것들을 설명하고 있다.

 

작년에 읽었던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은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으로 더 한층 이해가 깊어진 걸 실감할 수 있었고, 안락사 문제를 다룬 모리 오가이의 <다카세부네>편을 읽을 때에는 일본 현대 문학에서의 모리 오가이의 자리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마쓰모토 세이초의 <고쿠라 일기전>을 비롯하여 세이초의 작품 세계에 자주 등장하는 모리 오가이를 히라노 게이치로도 언급한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이 밖에도 카프카의 <다리>에 대한 분석은 그 자체만으로 한편의 작품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훌륭했다. 매우 짧은 작품인 <다리>는 카프카의 <변신>과 비견되는 작품이라는데, 나는 처음 접하는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왔기에 전문을 옮겨 본다.

 

  나는 뻣뻣하고 차가웠다. 나는 다리였다. 어느 심연 위에 나는 있었다. 이편에는 두 발끝이, 저편에는 두 손이 뚫고 들어가 있어, 부스러 떨어지는 진흙을 나는 단단히 붙들고 늘어지고 있었다. 치맛자락이 내 옆구리 쪽으로 날렸다. 아래 깊은 곳에서는 얼음 같은, 숭어들 노니는 개울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런 다니기 어려운 고지(高地)로 길을 잘못 들어 헤매는 관광객은 없었다. 이 다리는 지도에조차도 올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ㅡ그렇게 나는 누워 기다렸다. 기다려야 했다. 무너지지 않은 바에야 한번 만들어진 다리가 다리이기를 중단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한번은 저녁 무렵이었다ㅡ그게 첫번째 날 저녁이었는지, 천번째 날 저녁이었는지는 모르겠다ㅡ나의 생각이란 항시 뒤죽박죽이 되었고 항시 빙빙 돌았으니. 여름 저녁 무렵 한층 더 어둡게 개울이 좔좔 흐르고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나에게로 오는, 나에게로 오는 발소리. 몸을 쭉 펴라. 다리여, 당당한 태세를 취하라, 난간 없는 들보여, 너에게 몸을 맡기는 이를 받쳐주어라. 그의 걸음걸이의 불안정을 눈에 띄지 않게 메워주어라. 그래도 그가 흔들거리거든 신분을 밝히고 나서 산신(山神)처럼 그를 건너편 땅에다 휙 집어 던져주어라.


그가 왔다, 그는 지팡이 끝에 박힌 쇠징으로 나를 두드렸다. 그러고는 그거로 내 치맛자락을 걷어올려 내 몸위에 가지런히 해주었다. 무성한 내 털 속으로 지팡이 끝을 옮기더니 그 지팡이를 , 아마도 격한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며, 오래 털 속에 눕혀져 있게 버려두었다. 그 다음에는 그러나ㅡ마침 나는 그를 따라 산골짜기 너머로 아득히 꿈에 잠겨 있었다, 그가 두 발로 내 몸 한가운데서 뛰어올랐다. 나는 뭐가 뭔지 모르면서도 격한 고통에 몸서리를 쳤다.


그게 누구였을까? 어린아이였을까? 꿈이었을까? 노상강도였을까? 자살자? 유혹자? 파괴자? 하여 나는 그를 보려고 몸을 틀었다. 다리가 몸을 틀다니! 미처 몸을 다 틀기도 전에 나는 벌써 추락하고 있었다. 추락하였다. 그리고 어느덧 산산히 찢기고 찔려 있었다. 격류(激流)속에서도 항시 그렇게도 평화스럽게 나를 응시했던 삐죽삐죽 솟은 돌멩이들에.

 

-프란츠 카프카, <다리> -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 작품을 관료제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하고 있다. 산이라는 거대한 전체에 속한 작은 다리는 사회에 속한 일개 개인으로, 필사적으로 버텨내는 다리를 직업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현대사회의 직장인으로 대치시킨다.

 

   <다리>가 섬뜩한 분위기를 풍긴는 것은, 그러한 회사에서의 역할을 빼앗기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서야 '나'는 '꿰뚫림'우로써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을 회복한다. 그리고 그가 잡고 있는 산(사회나 제도)역시 끝부분부터 '부슬부슬 무너져내리고'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는 '그'가 누구였는가 하는 것이다. '나'의 낙하 장면에서도 '그'가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한 기술은 없다. 어쩌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나'가 정말로 자신의 역할과 합치하고 있는지를 충격을 통해 시험해보는 자이다. 보통은 권력자로 파악할 수 있겠지만, 그 충격은 그를 일상(='다리'로서 계곡에 걸려 있는 것)에서 일탈 시킬 정도였고, 그 때문에 그만 몸을 틀어버렸다. 누구일까? 전 쟁 등과 같은 파멸적 상황의 비유일까?ㅡ유감스럽게도 여기서 더 파고들 수는 없지만, 이러한 수수께기를 늘 기억하고 있으면 책을 읽고 있지 않을 대에도 머릿속에서 계속 슬로 리딩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작품을 다시 읽으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때마다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히라노 게이치로 <책을 읽는 방법> 제3부 동서고금의 텍스트를읽다: 슬로리딩 실천편 中-

 

히라노의 해석에 공감하면서도 두 가지 의문이 남는다.

 

하나는 '내 치맛자락을 올려 내 몸위에 가지런히 해주었다'라는 문장으로 보아, 다리의 성(姓)을 여자로 봐야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그 당시 여성의 사회활동은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었으니 작품을 관료사회의 비판으로 해석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지 않을까. 카프카는 어째서 다리에게 '치마'라는 여성의 옷차림을 부여했을까? 그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두번째는 히라노는 다리가 무너져 내린 이유를 일상에 충격을 줄 수 있는 '권력자'로 해석하고 있다. 반면, 나는 다리의 무너져내림이 권력자에 의한 어쩔 수 없는 행위 즉 '피동'이 아닌 사회권력에 대한 능동적인 저항으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다리는 그 '누구'인지 모를 인물이 맞은 편으로 건널 수 있도록 묵묵히 견뎌내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몸을 틀었기 때문이다. 

 

 '그게 누구였을까? 어린아이였을까? 꿈이었을까? 노상강도였을까? 자살자? 유혹자? 파괴자? 하여 나는 그를 보려고 몸을 틀었다.'                                             -프란츠 카프카, <다리> 中-


다리의 무너짐(=죽음)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와 같은 절규이자 굴종의 삶에 대한 도전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혹시나 이 글을 읽는 분들이 계시다면, 히라노의 해석에 토를 단 것이 아니라 그의 슬로 리딩을 실천한 과정에서 얻은 결과로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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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행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태동출판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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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마지막 책장을 넘긴지 벌써 이틀이 흘렀건만 단말마의 감탄사밖에 나오지 않는다. 마치, 작품속 주인공들처럼 하얀 어둠 속을 걷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총3권으로 이루어진 작품 중, 제1권을 다 읽었을 무렵 범인의 윤곽은 그려진다. 청초한 미모 뒤에 감추어진 사악함과 세상을 속이는 교활함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점점 더 악랄하게 변해가는 범인을 지켜보면서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래, 그랬었구나....'

범인도 범행 동기도 밝혀지면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시원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가슴은 더욱 답답해지고 머리는 더욱 복잡해진다. 

.

.

.

기리하라 전당포 주인 기리하라 오스케가 빈 건물 안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저항의 흔적도 범인의 발자국도 없다. 그저 빈 건물 안에서 뛰놀던 아이들의 발자국만 무성할 뿐. 오스케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니시모토 후미요는 열 두살 어린 딸 유키호를 남겨둔 채 의문의 자살을 하고, 담당 형사인 사사가키 준죠에 의해 강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데라사키 다다오 또한 교통사고로 죽고 만다. 오일쇼크로 강력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결국 전당포 주인 살인 사건은 흐지부지 미제사건으로 남겨지고......

 

후미요의 어린 딸인 유키호는 엄마가 죽은 후, 아빠쪽 친척인 가라사와 레이코의 양녀가 되면서 평범한 중학교 생활을 시작한다. 그녀를 둘러싼 소문들이 무성했지만 타고난 외모와 품위 있는 행동거지로 유키호는 학교의 인기스타로 부상한다. 심지어 근처 남학교의 남학생들이 하교길에 몰래 숨어서 유키호의 사진을 찍어가기도 한다. 그런 그녀 옆에는 언제나 단짝 에리코가 함께 한다.

 

한편, 아홉살 어린 나이에 아빠를 잃은 기리하라 오스케의 아들 기리하라 료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말수 적고 뭔가 어두운 구석이 있던 료지는 눈에 띄지 않게 학교 생활을 하지만 그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컴퓨터를 익숙하게 다룰 줄 알고, 가끔 따분한 중년 여성들에게 젊은 남성들을 공급하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번다. 그의 친구 소노무라 도모히코 역시 료지의 검은 유혹에 걸려들어 그를 도와 컴퓨터 매장을 운영한다. 전당포 지배인으로 일했던 마츠우라가 나타나기 전까지...

 

세이카 여자대학에 들어간 유키호는 단짝 에리코와 함께 에메이 대학과의 연합댄스동아리에 가입하여 시노즈카 가즈나리를 알게 된다. 댄스 동아리 회장인 가즈나리는 모든 이들이 선망하는 유키호 대신 그녀의 단짝인 에리코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러던 어느날 에리코는 중학교 시절 유키호의 경쟁상대였던 후지무라 미야코처럼 여자에게는 치명적인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게 되면서 가즈나리 곁을 떠나고 만다. 

 

졸업후, 유키호는 댄스 동아리 선배인 다카미야 마코토와 결혼하지만 마코토는 유키호보다는 미사와 치즈루라는 파견사원을 사랑한다. 결국 마코토는 결혼식 전달 치즈루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그녀가 예약한 호텔에서 기다리지만 치즈루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주식투자와 부티크 운영으로 승승장구하는 유키호는 결국 마코토와 이혼하고 시노즈카 가즈나리의 사촌형과 재혼을 한다.

 

이 과정에서 가즈나리가 고용한 탐정 이마에다는 유키호의 과거와 그녀와 연관된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불행해졌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러나 어느날 그는 행방불명되고 만다. 

 

컴퓨터 매장에서 사라진 기리하라 료지는 대학병원 약사로 근무하는 노리코 앞에 우연을 가장하여 나타나 자신을 아키요시 슈이치라고 소개한다. 노리코는 슈이치-기리하라 료지-에게 깊이 빠져들지만 빠져들면 들수록 그는 비밀투성이 의문투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9년 전 전당포 주인 살인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 사사가키 준죠는 이미 정년퇴직을 했지만 끈질기게 범인의 행방을 쫒고 있다. 결국, 시노즈카 가즈나리와 함께 하나씩 하나씩 퍼즐을 맞추어 나간다.

 

사건이 미제에 빠진 건, 첫단추부터 잘못 채워졌기 때문이다.

사건 당일 오스케가 은행에서 찾은 백만엔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오스케의 유품인 라이터를 데리사키 다다오가 어떻게 갖고 있게 된 걸까?  첫만남부터 예사롭지 않던 분위기를 내품던 료지는 사건 발생 시간대에 정말 집에 있었던 걸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던 조숙한 소녀 유키호는 그때 정말 도서관에 간 걸까? 니시모토 후미요의 죽음은 사고사를 가장한 자살이 아니라 타살은 아니었을까? 범인을 왜 성인으로만 한정했을까? 어린 아이들의 사건 당일 알리바이를 정확히 확인하지 않았다는 실수의 대가는 너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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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인군자이거나 아니면 바보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세상은 따듯한 빛이 가득한 엄마의 품속과 같은가 하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세상은 냉혹하다 못해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렇게 상처받은 영혼은 때론 자신의 아픔을 고스란히 또 다른 타인에게 되돌려주면서 '악'을 확대 재생산하기도 하지만,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여 악을 선으로 승화시키기도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창조해낸 인물-예를 들면, 유키호-은 안타깝게도 전자에 속한다. 세상으로부터 따듯한 빛을 받지 못한 불운을 타고 났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불운이 주변 사람들을 교묘하게 이용하거나 불행에 빠뜨리고 심지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생명까지 앗아가는 행동에 대한 합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어긋한 가치관을 소유한 인물은 어쩌면 약자에 대한 무관심과 이기적인 사회풍토가 만들어낸 '사회악'으로, 작가가 침잠한 점도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싶다. <백야행>은 트릭과 범인 및 범행수법 등이 상당부분 생략되어 있다는 점에서 본격파 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사회파추리소설쪽에 보다 근접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작품의 도입 부분에 '오늘을 위해 마쓰모토 세이초의 신작을 읽지 않고 있었다'라는 문장은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마쓰모토 세이초에 대한 작가의 '오마주'로 읽힌다. 

 

미야베 미유키, 온타 리쿠등과 함께 일본 추리소설 3인방으로 불리우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세계는 상당히 거칠고 현실적 괴리가 분명 존재하지만, 그가 지향하는 주제는 악이 아니라 선인 것만은 확실하다. 밝음을 표현하는 건 빛이 아니라 오히려 어둠이듯, 악을 그리므로써 선을 구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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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비밀의 밤
딘 R. 쿤츠 지음, 김진석 옮김 / 제우미디어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제임스 스콧 벨의 <소설쓰기의 모든 것part01-플롯과 구조>를 읽은 후,두번째로 읽은 작품은 역시 그가 좋아한다는 딘 쿤츠의 작품이었다. 역시 많은 작품을 갖고 있는 작가였다. 내가 읽은 <검은 비밀의 밤>이라는 작품이 딘 쿤츠의 대표작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작품은 선과 악으로 대변되는 두쌍의 남여가 골든 리트리버를 매개체로 서로 뒤얽혀 있는 기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전혀 별개의 두 가지 이야기가 개별적으로 펼쳐지다가 마침내 빈틈 하나 없이 아귀가 딱 맞게 하나의 스토리로 귀결되는 과정이 새삼 놀라움을 불러일으킨다.


기본 스토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부모에게 버린 받아 입양되었지만 양부모를 교통사고로 잃고 다시 고아가 되어 수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성장한 여주인공은 스무살 젊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딸을 낳게 된다. 그러나 남편이 결혼한 이유는 단지 할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 그녀와 딸은 남자의 아내이자 딸이 아니라 어렵게 물려받은 할아버지의 재산에 대해 권리를 요구할지도 모르는 불필요한 존재일 따름이다. 결국, 아내와 딸을 죽이지만 딸만 죽고 아내는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다. 그후, 여자는 남편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성과 이름을 바꾸고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간다. 학대받는 개들을 구조하고 분양하는 봉사를 하면서...

 

 

한편, 아내살인미수죄로 쫒기던 남자는 미리 빼돌려놓은 재산으로 색다른 삶을 살아간다. 그는 우연히 자신과 꼭 닮은 일명 '달의 여인'을 만나게 되고, 그녀와 함께 그녀에게 장애아를 임신시킨 남자친구를 죽기는 데에 공모한다. 그녀는 장애를 입고 태어난-아마도 다운증후군- 자신의 딸을 집에 가두어 놓은 채 학대를 일삼는다. 마치 자신이 저지른 '죄'가 모두 '아이'의 탄생과 장애아를 10년 동안 돌봐온 것에 대한 스트레스 해소 차원으로 합리화시키는 듯하다.

 

 

달의 여인은 옛 남자친구-장애아의 아빠-에게 이메일 등을 보내며 협박을 일삼고 마침내 아이를 맡아 키우기로 결심한 남자를 유인한다. 그런데 이 남자와 함께 달의 여인을 찾아오는 그의 여자친구가 바로 자신을 죽이려는 남편을 피해 숨어살고 있던 여인이었다!


두 쌍의 남여를 선과 악의 대척점에 두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 들면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작가의 솜씨가 대단하다. 다만, 달의 여인이 악한 행동을 저지르는 이유가 충분히 들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악의 화신으로 대변되는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 방화, 아동 학대 등등-은 마치 사이코패스의 불특정다수를 향한 '묻지마 범죄'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살인청부업자 등을 등장시켜 기본 라인에서 벗어나 불필요한 긴장감을 조성하는데 공을 들이고 있는데, 이는 작품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질 경우 최대한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설정이 아니었나 싶다.


딘 쿤츠의 <벨로시티> <살인예언자> <남편> 등은 검색해 보니 물만두 서재에서도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살인예언자> <낯선 눈동자> 등의 작품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남편>이란 작품을 꼭 읽어 보고 싶다. 제목부터 기가 막힌 반전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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