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긍정의 배신 -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ㅣ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1년 4월
평점 :
얼마 전 <꾸베씨의 행복 여행> 이라는 책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읽고 나서, 오래된 궁금증이 되살아났더랬다.
"도대체 이런 책들을 돈주고 사는 사람들이 있을까?"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얇고 가벼운 교훈을 반복해서 주장하고 있는 책들이 전세계적으로 수십 수백만 심지어 수천 만부가 팔려나가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마시멜로 이야기> <시크릿> 등등...
제목만 들어도 결코 낯설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도 엄청난 광고와 함께 초대형 베스트셀러 목록에 장기간 올라있었던 책들이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행복은 내 안의 인내와 긍정적인 사고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행복은 마음 먹기에 달려 있는 걸까...?'
자기개발서와 기업의 동기 유발 강연 등도 모두 하나같이 똑같은 메세지를 담고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사회에 부정적인 관점과 현실적인 비판보다는 긍정적인 낙관과 개인의 반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행복전도사'나 '자기개발코치'등등의 수사어가 따라 붙은 강사들이 지상파 프로그램의 단골 초대손님이 되는가 하면, 강연 강좌 등으로 꾸며진 교양프로그램이나 토크쇼등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하나같이 책임과 원인을 자기자신에게서 찾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으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마치 청년 실업은 기성세대와는 달리 고생 모르고 자란 나태한 20대의 탓이며, 회사에서 해고된 4,50대들은 그 누구도 원망하지 말고 다시 일어서라며 매서운 채찍질을 멈추지 않는다. 어디 이 뿐인가? 가정과 육아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는 여성들에게는 '원더우먼'이 되어야 한다며 목에 핏대를 세운다. 누가 봐도 뻔한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모두 개인의 문제로 둔갑시키고 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세계관이 형성된 것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지난 90년대 말 외환위기로 노동시장이 유연화되면서부터다.
심각한 경제위기에 직면해 있는 미국에서도 지난 90년대 초부터 긍정 심리학이 거세게 불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마음먹기만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비현실적인 현상이 '긍정 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성장세를 구가하고 있나 보다. 말도 안되는 <시크릿>이라는 책이 대표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긍정의 배신>은 긍정 심리학이 불어닥친 원인과 배경 그리고 목적을 예리하게 지적한 시의적절한 책이라 하겠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미국 사회에 '긍정 심리학'이 휘몰아치게 된 배경으로 칼뱅주의의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을 지적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구대륙의 기근과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넘어온 초기 이민자들은 혹독한 환경에 맞서 생존하기 위해 '부는 곧 신의 은총'이요 '가난은 죄악이자 징벌'이라는 세계관 속에서 엄격한 생활태도와 윤리적 잣대를 확립하게 되었단다.
초기 자본주의가 노동을 통한 생산력 향상을 위해 칼뱅의 운명예정설을 교묘하게 활용했다면, 그후 나날이 번창한 자본주의는 대중의 소비를 자극하고 확대시키기 위해 낙관적 사고를 널리 장려하게 되면서 오늘날의 긍정 심리학의 모태가 되었다.
<긍정의 배신>은 바로 이처럼 '긍정적 사고'를 주장하고 칭송하는 이면에 기업과 자본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도사리고 있음을 정면으로 지적하고 있다.
긍정적 사고는 미국의 국가적 자부심을 강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와 일종의 상징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본래 자본주의와 긍정적 사고 사이에는 내재적이고 자연스러운 유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막스 베버가 쓴 사회학의 고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자본주의가 엄하고 가혹한 칼뱅주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칼뱅주의는 만족을 뒤로 미루고 향락의 유혹에 저항하면서 열심히 일해 부를 쌓으라고 가르쳤다.
초기 자본주의가 긍정적 사고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반면에 후기 자본주의, 곧 소비자 자본주의는 긍정적 사고와 훨씬 더 죽이 잘 맞았다. 소비자 자본주의는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개인의 욕구와 '성장'이라는 기업의 지상 과제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 문화는 더 많은 것(자동차, 더 넓은 집, 텔레비전, 휴대전화, 갖가지 종류의 신제품)을 원하도록 부추기고, 긍정적 사고는 소비자들에게 '당신은 더 많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으며, 정말로 그것을 원하고 손에 넣기 위해 노력한다면 실제로 가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한편 경쟁 속에서 상품을 생산하고 직원들에게 급여를 지급해야 하는 기업들로서는 성장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
(......)
낙천성이 물질적 성공의 열쇠이고 긍정적 사고 훈련을 통해 누구나 갖출 수 있는 덕목이라면, 실패한 사람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개인의 책임을 가혹하게 강요하는 것이 긍정의 이면이다. 당신이 경영한 기업이 도산하거나 당신이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은 당신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성공 필연성을 굳게 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고의 칼바람이 몰아치고 금융 혼란의 여파가 중산층에까지 미치자 긍정적 사고의 전도사들은 점점 더 이런 부정적인 판정을 강조하고 있다. 낙담하고, 분개하고, 풀죽은 사람들은 '제물'이 되고 '눈물을 쏟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그들은 경고한다.
-바버라 에런라이크 <긍정의 배신> 머리말 中-
나의 오래된 궁금증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어째서 유난히 긍정적 마인드와 낙천성이 행복이요 축복이라고 주장하는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어째서 개인적 반성과 스스로 능력을 개발하라고 윽박지르기만 하는 강사들에게 기업(방송국 포함)은 높은 강연료와 출연료를 기꺼이 지불하는지 알 것 같다.
의문이 풀린 자리에 분노가 밀려온다.
초대형 교회 건물은 기업 사무 건물이나 본사와 흡사하다. 목사는 성직자용 예복이 아니라 주로 정장 차림이다. 종교적 상징과 상은 사라지고 없다. 게다가 핵심 철학에서 기업과 교회는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앞으로 나아가고, 장애물을 극복하고, 긍정적 사고를 통해 바라는 것을 손에 넣으라고 한다. 더구나 목사들은 으레 자유기업 체계와 그것이 일반 노동자들에게 요구하는 내용에 찬동하기 때문에 기업과 교회의 유사성은 더욱 짙어진다.
(......)
하지만 초대형 교회와 기업 사이에는 한 가지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교회는 다정하다. 아무도 당신에게 고함치지 않고, 불가능한 마감 시한을 설정하지 않으며, 당신이 미숙하다는 느낌을 받도록 하지 않는다. (......) 초대형 교회는 기업의 모습을 띠고 기업의 힘과 효율성을 그대로 보여 주면서도 무자비함과 공포라는 요소는 없다. 교회는 다운사이징을 해서 당신을 내쫒지 않는다.
-바버라 에런라이크, <긍정의 배신> p204~205-
저자는 종교와 기업은 점점 닮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교회는 록콘서트홀을 닮아가고 성직자들은 기업의 CEO와 흡사하며, 기업은 마치 종교처럼 신비주의와 1인 우상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정말이지 예리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위계질서의 꼭대기에 있는 CEO들은 급속히 변하는 세상사에 대해 올바른 직관과 육감을 가졌다는 확신을 심어 주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라는 새로운 자아상을 연출해 냈다. 구식 CEO들은 회사에서 뼈가 굵은 인물로 정상에 오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거치며 업무 전반에 통달했지만, 요즘엔 사업 분야와 무관해도 유명세를 내세워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다. CEO의 이미지는 유능한 관리자에서 지도자로,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현란한 지도자로 바뀌었다. 아무리 봐도 동기 유발 강사와 흡사하다. (...) 경영 컨설턴트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동기 유발 전문가들의 적잖은 영향을 받아 CEO들은 정장을 차려입은 인물이라기보다는 '카리스카 넘치는 선지자'라는 자아상을 갖게 되었다.
-바버라 에런라이크, <긍정의 배신> p158~159-
결국 이 모든 것들이 금융위기를 초래한 이들에게는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이었으며, 대중들에게는 현명한 현실인식과 위기의식를 갖는 대신 낙관주의와 긍정적 사고를 퍼뜨려 소비를 부추기고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눈을 돌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술책'에 다름 아니었다.
긍정적인 사고가 질병에 더 강한 면역력이 있는 것도 아니며 낙천적인 태도가 암을 예방하지도 치료에 확실한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 과학적으로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골적으로 긍정을 강요당하고 있다.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일자리가 부족해지고 사회 구성원의 삶이 각박해질수록 긍정 심리학은 활개를 펼친다.
이런 무차별적 긍정 심리학에 대한 저자의 처방은 명쾌하다.
지금까지 인류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발명한 근본 기술들은 모두 냉철한 경험주의에 철저하게 의존한 것이었다. 조짐이 상서롭거나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는 초자연적인 계시를 받았다고 해서, 화살촉이 숨어 있는 들소를 꿰뚫고 뗏목이 물 위에 뜰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면 안 된다. (...) 지금까지 이루어진 인류의 지적 진보는 우리가 사물을 자기 감정의 투사물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가장 보편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파악하려 했던 오랜 투쟁의 결과다. 천둥은 하늘의 분노가 아니고, 질병은 신이 내리는 벌이 아니며, 마법이 사고나 죽음을 초래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 우리가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는 그것은 이 세계가 인간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인과관계, 개연성, 우연이라는 자체의 알고리즘에 의해 전개된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닫는 과정이었다. (...)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쾌활하게 생활하기로 굳게 마음 먹었다고 해도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데는 심리학자 줄리 노럼이 말한 '방어적 비관주의'가 필요하다. 조종사만 최악의 사태를 그려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 운전자도 그렇다. 아무도 차 앞으로 불쑥 튀어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가정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보다 부정적인 마음가짐으로 브레이크를 밟을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까?
-바버라 에런라이크, <긍정의 배신>, p271~273-
긍정적 사고나 생각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대신 '막연히 다 잘 될 것'이요 '생각대로 다 이루어진다'라고 여기는 대책없는 긍정주의야말로 우리를 사회 구조적 문제는 외면한 채 '신의 은총'만 바라는 눈 먼 장님으로 만들고 기업만 배불리는 무분별한 소비 행태에 빠져들게 만든다는 점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자, 그럼 이제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소리를 들려준다고 믿었던 '멘토'들을 되돌아봐야 할 때이다.
'언니의 독설'은 정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걸까?
'청춘은 정말 당연히 아파야만 하고 방황해야만 하는 걸까?'
'행복이란 정말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걸까?'
.
.
.
그동안 세상 참 쉽지 않다고만 생각했더랬는데...
시야를 가리고 있던 꺼풀이 한겹 벗겨지니, 세상 참 무섭다는 생각마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