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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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사다 지로의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은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일곱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작품집이야. 

다 읽고 난 지금은...

뭐랄까,,,

마치 천둥번개 치는 날 역사 선생님을 조르고 졸라 이야기 한조각을 얻어 들은 것 같은 기분 같은 거.  딱 그런 느낌인 것 같아...

 

어딘지 모르게 작가 특유의 스잔함이 배어 나는,,, 나름 괜찮았어...

다만, 미야베 미유키의 <괴이>라든지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 라든지 하는 작품집들과 소재와 주제가 겹쳐서 본의 아니게 비교하면서 읽게 되었지...

 

개인적으로 난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들이 훨씬 더 재밌는 것 같아. 감동도 더 크고... 소재도 다양하며... 이야기 전개 방식도 훨씬 더 세련되었지...

 

근데 어째 이렇게 쓰고 나니 왠지 찜찜한 걸...

그동안 아사다 지로 좋아한다고 사방팔방 소문 내서 다들 알고 있을 텐데...

 

'이거, 뭐야? 언제는 아사다 지로 작품은 사랑입네 어쩝네 호들갑을 떨더니만...'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들려오는 걸...?!

하지만, 글쎄 그게 그렇더라구... 

2000년대 초반,

아사다 지로 단편집들을 접했을 때의 감동은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지만, 그로부터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의 또 다른 작품집을 읽었을 때는 그 느낌 그 감동이 아닌 걸...

이걸 내 탓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아니야...

사람 마음은 이렇게 변덕스럽고 시시각각 변하는 법이지...

사랑도 마음이 하는 거야...

그러니까 사랑도 변하지...

책에 대한 느낌이 변하는 거랑 똑같아...

그냥 그런거야...

 

 

자, 그럼 다시 작품이야기로 돌아가 볼까?

일곱 편 중, 첫번째 작품과 마지막 작품은 마치 액자소설 혹은 연작 단편이라고 할 법 한 것 같아.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모님과 엄마와 단 둘이 떨어져 사는 외로운 소년이 나오는데, 그들의 상황과 모습이 작품 속 이야기들과 잘 어우러져서 더한층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것 같아...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연로한 이모님은 어린 시절 본인이 직접 듣거나 보았던 이야기들을 방학을 맞이하여 본가로 놀러온 어린 조카들에게 들려주는데, 그게 참 하나같이 기가 막히는 이야기들이었지...

 

그러니까 주름살 자글자글한 이모님이 이불을 뒤집어 씌고 이야기를 듣다가 잠이 들은 조카들만 했을 때였지...

어린 나이에 겪었기에 충격도 컸을 법하고...

어쩌면 어린 나이였기에 옳고 그름을 어른보다도 더 명민하게 구분할 수 있었던 거고...

 

암튼, 내 생각은 서양의 좀비나 귀신과는 달리 동양의 귀신들은 어딘지 모르게 어수룩하거나 제각각 사연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무턱대고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나름 슬픈 곡절로 인해 혼령이 되어 저승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이승을 헤매다가 사람들 눈에 띈 거지... 때론, 원한을 풀거나 복수를 하기 위해서  때론 선량한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서 말이야...

 

그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역시나 첫번째 작품인 <인연의 붉은 끈>이 아닐까 싶어...

정말이지 가슴이 미어지는 줄 알았어...

 

돈으로 사고파는 몸뚱이의 여자는 인간이라기보다 물건이며 노예였다. 돈으로 팔려갔을 때에 부모와의 인연이 끊겼고, 유곽에서 밤도망을 친 것에 의해 포주와의 인연도 제 손으로 끊어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붉은 인연의 끈도 남자의 죽음에 의해 끊겨버렸다. 이 사건에 관여했던 사람들은 비정했던 것이 아니라 여자와는 어떤 인연의 끈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뿐이었다.

 

이모님은 등뼈가 부러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고개를 돌려 아이들의 잠든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너는 꼭 네 어머니 곁에 있어줘. 남들이 뭐라고 하건, 네가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더라도, 네 어머니의 손은 놓지 마라."

-아사다 지로, <인연의 붉은 끈> 中-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목숨을 끊으려고 산속 산장을 찾아 들어가 약을 먹었는데... 그만 남자만 죽고 여자는 목숨이 붙은 채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그런데 말이야. 사람들이 어떻게 했는지 알아?

산장 여관에 숙박하고 있던 의사의 도움으로 목숨을 살려보려다가 안되니까 그냥 여자의 숨이 저절로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거야. 죽은 남자의 옆에 누운 채... 사람들이 자신을 죽은 사람 취급하는 가운데... 여자는 꼬박 나흘을 있다가 홀로 떠나지... 

 

그 모진 고통을 어떻게 참아냈을까...?

교제를 극구 반대하던 남자의 부친이 찾아와서는 아들의 시신을 거두어 가면서 숨을 헐떡거리는 여자을 내려다보았어... 부모 입장에서 보자면, 참 억장이 무너졌을 거야...

 

여자는 남자의 부친을 보자마자 두 눈을 번쩍 뜨고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어...

살려달라고 목숨을 구걸했을까...?

아니야. 어린 이모님이 보기에도 그건 분명 '용서해 주세요'였어...

그런 그녀에게 남자의 아버지가 뭐라 했는지 알아?

이 또한 어린 이모님이 몰래 숨어서 똑똑히 보고 들었다고...

 

"너도 어서 죽어라!"

 

 

한편, 이 작품과 연작이라고 할 수 있는 <여우님 이야기>도 소름이 돋을 만큼 무서우면서도 묘하게 아련하고 애잔하지...

 

여우 귀신이 씌인 어린 것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른들 눈엔 몹쓸 여우 귀신으로만 보였겠지만 동년배인 어린 이모님의 눈에는 배가 고파 힘겨워 하는 불쌍한 애기씨만 보였을 터...

 

보는 관점에 따라선,

귀신도 귀신이 아닌 사람이고... 사람도 사람이 아닌 귀신인 거고...

 

세상은...

그래서 더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건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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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옆의 소시오패스 - 사이코패스의 또 다른 이름
마사 스타우트 지음, 김윤창 옮김 / 산눈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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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얼마전, 소시오패스의 자전적 책인 M.E 토마스 <나, 소시오패스>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은 게 계기가 되었을 게다. 이 책을 읽게 된 건...

결론적으로 전문가가 진단하고 기술한 소시오패스는 훨씬 더 객관적으로 다가왔다. 객관적이라는 건 감정에 호소하는 정도가  덜 하다는 뜻이고, 이는 그만큼 덜 재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사 스타우트는 소시오패스의 특징을 '무죄의식'으로 봤다.

4%인 그들을 제외한 96%에 해당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죄의식을 갖고 있으며, 이 죄의식은 바로 '양심'에서 기원한다고 주장한다.

 

양심이 존재하느냐 부재하느냐는 하나의 뿌리 깊은 인간구분, 어쩌면 지능이나 인종, 심지어 성별보다도 더욱 중요한 구분이다. (...)

우리들 가운데 96%에게, 양심이란 따로 생각을 기울이지도 않을 만큼 근본적인 어떤 것이다. 양심은 대부분 반사적으로 작동한다. 유혹이 극도로 크지 않은 한(고맙게도 평범한 일상에서 심사숙고할 만큼 커다란 유혹을 느끼는 경우는 흔치 않다.)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도덕적 질문들을 결코 일일이 숙고하지 않는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진지하게 자문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급식비를 줄까 말까? 오늘 동료의 서류 가방을 훔칠까 말까? 오늘 배우자를 버릴까 말까? 양심이 우리를 대신하여 이 모든 결정들을 그토록 조용하게, 자동적으로, 끊임없이 내리기 때문에, 제아무리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펼치더라도 우리는 결코 양심 없는 존재의 심상을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정말로 양심 없는 선택을 할 경우, 우리는 진실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설명만을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급식비 주는 것을 깜빡 잊었을 거야. 그 사람의 동료가 서류가방을 잘못 놓아두었겠지. 그 배우자는 분명 함께 살기 불가능할 정도로 문제가 있을 거야. 아니면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는 전혀 알수 없는 그의 반사회적인 행동을 거의 설명해주는 꼬리표들을 가져다 붙인다. 그는 별나거나, 예술적이거나, 너무 승부욕이 강하거나, 게으르거나, 멍청하거나, 늘 악동 같다.

우리가 이따금 텔레비전에서 보는, 살인마 같은 무시무시한 사이코패스 괴물들을 제외하면, 양심 없는 사람들은 보통 우리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마사 스타우트, <당신옆의 소시오패스> p27~28-

 

'그래, 맞다!'

생각해보면, 이런 사람들은 주변에 한두명쯤은 언제나 있었던 것 같다.

다소 무례하고 뻔뻔하고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거짓말이 들통나거나 타인의 질책 앞에선 눈물을 흘리며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 말이다.

천만다행스럽게도 난 이런 사람들을 천성적으로 끔찍하게 싫어하는 편이었다.

어렸을때부터 '넌, 왜 그렇게 냉정하고 차갑기만 하냐?' 등의 말들을 집안 어른들로부터 곧잘 듣는 편이었고, 지금도 가족간 의견 충돌이 일어나면 '감정이나 친분'보다는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쪽이다. 아주 가까운 사이에도 'Give & Take'가 좋고, 필요이상의 관심이나 친절을 타인에게 베푸는 법도 없으며 타인으로부터 받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내가 감지하지 못하는 순간 나에게 뻗쳐왔던 소시오패스의 작업(?)들이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는 소시오패스가 그만큼 많다기보다는 우리가 지나치게 소시오패스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고, 이와 같은 무지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과 입장에서 세상과 타인을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심 있는 사람들은 양심이 없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20여년 넘게 임상심리상담을 해온 글쓴이가 주로 만나는 대상은 이처럼 자신의 관점에서 타인을 바라보았다가 인생이 제대로 꼬인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들의 심리적 회복을 도우면서 동시에 양심적인 96%의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비양심적인 4%의 사람들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까? 를 고민했고, 그 결과가 바로 이 한권의 책이라고 하겠다.

 

꼭 읽었으면 좋겠다.

만약, 당신이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사랑의 다이얼'을 자주 누르는 사람이거나, 지하철의 구걸인들에게 빈번히 연민을 보이는 유형이라면 말이다.

 

 

소시오패스는 치료될 수 있을까?

치료란, 특히 심리적 차원의 문제일 경우엔 더더욱 당사자의 치료 희망 여부가 매우 중요하다. 만약 소시오패스가 치료 받기를 원한다면, 이는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시오패스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과 그 삶에 아주 만족하며, 법정에 회부되었거나 또는 환자라는 점으로부터 얻어질 어떤 부차적 이득이 있을 때만 치료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리고 소시오패스가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인식하고 있느냐? 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역시 안타깝게도 '그렇다!'이다. 소시오패스는 '자기통찰' 능력이 있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의 판단으로 분명 사악한 어떤 사람이 스스로는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경우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이 곧 현실인 듯하다.'

 

그러므로 우린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 중에는 진짜 '구제불능'이 있다는 걸 말이다. 그 어떤 노력과 희생으로도 고쳐지지 않는 구제불능의 인간이 있다는 건, 같은 인간으로서 소름 돋는 일이지만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슬픈 현실이다.

 

그렇다면, 소시오패스는 어째서 탄생하는 걸까?

이기적 유전자가 이타적 유전자보다 생존과 진화에 유리하다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소시오패스는 진화의 산물이며 앞으로 더 많이 살아남아 현생인류를 대체하진 않을까?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전문가들은 '개체'로 보면 소시오패스의 생존이 유리하지만, '집단'으로 보면 상호이타주의가 훨씬 더 생존에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쉽게 설명하면, 우리는 혈연관계에 있는 가족들에게 훨씬 더 이타적인데, 그 이유는 나와 1/2 혹은 1/4 심지어 1/16의 유전자를 나누어 갖고 있는 존재를 통해 자신의 유전자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족이나 집단을 위한 개체의 희생은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는 유리한 행동이라 하겠다. 이와는 반대로, 소시오패스처럼 이기적 유전자는 집단 안에서 끝없이 투쟁하기 때문에 결국 집단 전체가 멸종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 

 

 

양심은 때론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고 욕망과 욕구 만족을 강력하게 방해한다. 하여, 때론 양심을 갖고 있다는게 경쟁에서의 패배와 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과 비양심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 대부분은 당연히 양심을 선택할 것이다. 

 

양심은 우리에게 서로에 대한 신뢰와 믿음 굳건한 동지애를 느끼게 해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랑'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양심이 부재한 소시오패스는 불쌍하다.

가장 숭고하고 강력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을 느끼지 못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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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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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이 1000만을 돌파했다고 한다.

1000만!

거칠게 계산해도 우리나라 인구가 4000만이 넘으니 노약자를 제외한 성인 중 1/2은 봤다는 얘기다.

'나도, 볼까?' 하다가 말았다.

극장에 사람들이 넘실댈 것 같다. 

나란 인간, 인파에 심히 취약하단 말이지....-.-;

지난 봄에도 뒤늦게 <겨울왕국>을 보려고 큰 맘먹고 갔다가 평일 한낮 극장안에 줄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는 발길을 돌린 전력이 있었지...


대신, 책 한권을 집어 들었다. 

21세기 새천년과 함께 세상에 나온 책,

나오자마자 화제를 몰고 온 책,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자의 남자에 의한 남자를 위한 책',

바로 <칼의 노래>다.


<칼의 노래>는 신문기자로 일하다가 마흔이 넘어 작가가 되고 쉰이 넘어 쓴 단 한편의 장편으로 대표작가 반열에 오른 김훈의 역사소설이다.


 

작가는 이십대 언저리에 읽은 <난중일기>에 깊히 매료된 나머지 이순신을 수십년동안 마음에 품고 살아온듯 싶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는 책을 읽고 있노라면, 충무공에 대한 작가의 감정이입의 정도가 매우 깊고 넓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작가는 스스로 충무공이 되어 그의 삶과 죽음, 슬픔과 두려움, 희망과 좌절을 그려내고 있다. 


 

<칼의 노래>는 1597년 정유재란이 터지자, 순신이 풀려나 '백의종군'하는 시점부터 전개된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만약, 적이 다시 쳐들어오지 않았던들 순신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임금의 뿌리깊은 질투와 의심과 좌절을 가라앉힐 수 있었을까...?

갈갈이 찢긴 조국강산을 되살리고, 흩뿌려진 백성의 피와 눈물을 닦아낼 수 있었을까...?

어쩌면 처음부터 이순신은 희생양으로서 이 땅에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수졸들이 여자들의 시체를 들어서 밭둑 위로 옮겼다. 굶어 죽고 병들어 죽은 피난민들의 시체 20여구가 밭둑에 쌓여 있었다. 수졸들은 묵은 밭 가운데 커다란 구덩이를 파놓았다. 역질이 돌고 있었으므로 구덩이는 깊었다. 수졸들이 시체를 하나씩 구덩이 안으로 던졌다. 수졸들은 시체의 팔다리를 마주 잡고 흔들다가 공중으로 휙 날렸다. 시체는 구덩이 안으로 떨어져 쌓였다. (......)

나는 개별적인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온 바다를 송장이 뒤덮어도, 그 많은 죽음들이 개별적인 죽음을 설명하거나 위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훈, <칼의 노래> p102~104 中-

 


순신은 전쟁의 실체를 보았다.

적이 죽는다고 해서 내가 사는 것도 아니요, 내가 죽는다고 해서 적이 사는 것도 아닌 것임을...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정치인들)은 모두 살고, 전쟁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백성들만 죽는 것.

이것이 바로 전쟁인 것임을...

충무공은 베어낸 적들의 죽음 앞에서 인간의 개별적인 죽음을 마주하며 어찌할 수 없는 깊은 자괴감과 슬픔에 빠진다.


한편, 전쟁의 실체와 개별적 죽음의 비애를 외면하는 조정 대신들은 사악했고, 그들에 둘러싸인 임금은 무능했다.

왜군을 막아줄 요량으로 조선에 파견된 명의 군대는 싸움은 하지 않은 채, 강화도와 중부지방 요지에 둥지를 틀고 들어앉았다.

일개 장수가 한나라의 임금을 모욕해도 죄를 물을 수 없고, 적군과 내통해도 이를 막을 수 없었다.

그 당시 조선은 스스로를 지켜낼 수 없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도 없는 '노예'와 다름 없어 보였다. 


 

적들은 조선인 포로들 중 극소수는 데리고 가기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죽였거나, 해안 진지에 배치했다. 적들은 조선인 포로들 중 병약자 3백 명을 죽여서 시체를 바다에 버렸다. 조선인 포로를 죽일 때, 적들은 포로를 바닷가 창고에 가두어놓고 하나씩 끌어내서 목 베었고, 시체를 배에 싣고 외항으로 나갔다. 광양만 바다에는 적병들의 시체와 조선인 포로들의 시체가 섞여서 떠다녔다. 시체들은 모두가 머리가 잘려 있었다. 적들은 베어낸 머리통을 소금 창고에 보관하고 창고 주변에 경비 병력을 배치했다. 이 머리통들의 용도는 적들이 바다에서 퇴로를 열 때 진린에게 바칠 뇌물일 것이라고 정탐들은 판단했다. 

-김훈, <칼의 노래>p297~298 中-

 


제 나라 백성도 아니요 제 나라 영토도 아닌 조선을 위해 명나라 군인들이 목숨을 내놓고 싸우길 바란다는 건, 처음부터 순진한 발상이었다. 싸움보다는 명분을 얻으려 혈안이 되어 있고 심지어는 퇴각하는 적군과 내통하는 명나라 수군 대장 진린 앞에서 충무공은 한없는 울분을 삭혀야만 했으리라.

 


 

비록 그 당시로서는 결코 젊지 않은 나이인 50줄에 들어섰지만 순신 역시 살고 싶었을 것이다.

살아서 자자손손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신의 운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할 것임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는 살고 싶었고 살 수도 있었지만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충무공의 담대하고도 위대함은 바로 자신이 희생양이 되어야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으며, 또한 이를 피하지 않았던 점에 있지 않을까 싶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그는 평범했지만 또한 평범치 않고...

나약했지만 또한 나약하지 않으며...

살아있되 살아있는 것이 아니요, 죽었으되 죽은 것이 아닌 인물이다. 

 



이와 같은 충무공의 깊은 내면을 김훈은 일찌감치 엿보았다.  물비늘에 흔들리는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그의 문장들은 바로 복잡다단한 충무공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읽는 이의 마음을 내내 휘감고 돈다.


이름있는 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역사란, 이름없는 민중들의 삶이다.

이 점을 잘 알았던 충무공은 <난중일기>로 자기 자신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만약 <난중일기>가 없었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그를 어떻게 기록하여 기억했을까...?

새까맣게 잊혀졌거나 아니면 역적 죄인으로 우리 앞에 등장하지 않으리란 보장 또한 없지 않으리라...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난중일기>의 중요성에 다시 한번 심장이 울려온다.



순신은 스스로를 잊지 않기 위해 일기를 썼고, 시간에 의해 잊혀지지 않기 위해 일기를 썼다.

그는 일기로써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더 나아가 역사에 기억됨으로써 마침내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일찍이 수전 손택은 '일기란, 단순히 신변잡기를 기록하는 게 아니라 자아를 창조하고 규정해 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

.

.

하루 하루 일기를 쓰고 있는 나, 부끄러워진다.

일상의 편린들과 감정의 조각들만 격하게 토해내고 있는 내 일기들은 과연 무얼 위한, 누굴 위한 기록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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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대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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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파 라히니는 인도계 미국인이다.

<저지대>는 그녀의 두번째 장편이라고 하는데 분량이 만만찮다. 무려 500페이지가 넘으며 70여년이라는 긴 세월을 다루고 있지만 오히려 등장인물은 열 손가락을 넘지 않는다. 

 

작품은 영국으로부터 막 독립한 인도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을 날실로, 수바시와 우다얀 형제의 일대기를 씨실로 꼼꼼히 엮어진다.

 

독립 후 좌우 이념 대립이라는 현대사를 갖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들 형제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공산주의자가 된 동생(우다얀)과 대학졸업후 미국으로 건너가 학자가 된 형(수바시)...

그리고 이 둘과 각각 시차를 두고 결혼한 여인(가우리)의 이야기는 평범한듯 평범치 않고, 비현실적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사실적이다.

 

이념과 사상에 경도된 우다얀은 신념과 열정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고, 비겁했던 수바시는 동생에 대한 사랑(혹은 '속죄'?)으로 동생의 여자와 조카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 기꺼이 무슨 일이든 했던 가우리는 사랑(남편)을 잃고 나서야 진실을 깨닫는다.

사랑이란, 때론 얼마든지 무책임할 수 있으며 타인의 삶에 예측할 수 없는 폭력이 된다. 그리고 그걸 깨닫는 건 언제나 너무 늦은 순간임을...

 

 

역자처럼 나 역시 처음엔 모성애조차 거부하는 듯한 가우리의 모습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랑했던 남편이 세상에 남겨주고 떠난 유일한 혈육에 대한 지나친 쌀쌀함과 학문적 성취를 위해 가정을 저버리는 이기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들 모녀를 위해 기꺼이 희생한 수바시를 배신한 것 등등...

그녀의 행동은 용서되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더랬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주인공들의 삶이 종착역으로 향해 갈수록 이해불가 해독불가였던 그녀가 조금씩 이해되기시작했다.   

그녀의 혈육에 대한 냉정함과 가족에 대한 이기심과 심지어 성적인 일탈 등은 모두 자신을 배신한 사랑에 대한 자기학대식 저항이었음을... 

 

그러나 그녀는 과연 알았을까?

상처받은 자신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한 선택이 또 다른 사람에겐 치유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는 걸...

 

 

화해의 여지를 남겨두긴 했지만 진정으로 가족간 친족간 사랑을 나누기엔 주인공들에게 남겨진 시간이 터무니 없이 짧아 보인다.

어쩌면 그들은 앞으로도 계속 서로를 오해하고 원망하다가 각자의 삶을 마무리할지도 모른다.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들의 지나온 과거일뿐이다.  작가의 말처럼 인간은 예측가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면 딱히 극적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예상했던 대로 흘러온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내 미래를 예측하고 심지어 재단하려고 한다.

 

'우리가 이처럼 스스로를 예측할 수 없으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고 싶어하는 건, 자신조차 스스로를 예측할수 없다는 낭패감과 불안감의 발로는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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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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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에 이어 <투명사회>를 읽었다.

쉽지 않은 용어들과 개념들로 읽기가 쉬운 책은 절대 아니지만, 반드시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피로사회>에서 긍정적인 이미지로 널리 알려진 '열정'이 어떻게 자기착취적 노동으로 변질되어 가는지를 고발했던 저자는 <투명사회>에선 투명성을 강조하는 '투명사회'가 어떻게 감시와 통제를 체계화시켜나가는지를 지적하고 있다.

 

투명성은 열정과 마찬가지로 긍정성을 대표하지만 이러한 긍정성이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면 오히려 상호 감시를 조장하게 된다.  '전부 공개하라!'고 투명성을 요구하는 건 그만큼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이 팽배해 있는 소위 '불신사회'이기 때문이다. 하여, 국가기관이건 국회의원이건 기업이건 개인이건 할 것없이 투명성이라는 이름 하에 상대방을 발가벗기고 스스로도 발가벗고 있다. 이처럼 서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사회는 점점 더 투명해지고 있다. 

 

투명성과 진리는 같은 것이 아니다. 진리는 다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립하고 관철한다. 그 점에서 진리는 부정성이다. 정보의 증가와 축적만으로 진리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에는 방향, 즉 의미가 없다. 진리의 부정성이 결여됨으로 인해 긍정적인 것이 마구 증식하고 다량화된다. 과다 정보와 과다 커뮤니케이션은 바로 진리의 결핍, 존재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다.

-한병철, <투명사회> p26~27 中-

 

평소 사회 제도에 대한 불신과 투명성을 곧잘 연관짓곤 하던 나, 멘탈 붕괴 제대로 경험했다. 

 

투명하게 정보(혹은 '사실')가 공개되서 우리가 얻은 건 뭘까?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투명해진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과연 과거보다 얼마나 더 행복해졌을까?

 

'모르는게 약'이라는 속담이 있다. 

'알면 알수록 좋다'라는 인식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말이다. 더 많은 정보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더 나은 선택과 결과를 얻는 건 아니다. 오히려 '아는 게 병'이라는 말처럼 지나치게 많은 정보는 올바른 선택을 방해하여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정보와 사실에 집착하는 건, '다른 사람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르면 손해'라는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리라. 이와 같은 우리사회의 집단심리구조는 불평등한 사회를 거쳐온 구성원일수록 '평등'과 '공평'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일 것이고, 이는 한편으론 평등지향적 사회로 나아가는 데에 강력한 동력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일정한 평등치에 도달한 사회에서 지나치게 투명성을 강조한다면 오히려 '획일화'와 '통일성'으로 나아가기 쉽다.  이런 사회의 구성원들은 서로 경쟁하듯 자발적으로 투명성이라는 명목하에 자신을 공개하고 드러내 놓는다. 바로 '전시사회'의 모습이다.

 

전시가치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외양에 달려 있다. 그래서 전시의 강제는 성형수술과 피트니트클럽에 대한 강박을 낳는다. 성형수술의 목표는 전시가치의 극대화에 있다. 오늘날에는 내적 가치를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외적인 척도를 제공하는 자가 모범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은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그러한 척도에 자신을 맞추려고 노력한다. 전시의 명령은 가시적인 것과 외적인 것으로 절대화를 초래한다. 비가시적인 것은 전시가치, 주의를 생산하지 않는 까닭에 존재하지조차 않는 것이 된다.

-P34~35 中-

 

인터넷의 개인 블로그나 SNS를 보라.

개인의 사생활들이 얼마나 신속하고도 보기 좋게 올라오고 있는가. 마치 온라인 쇼핑몰의 상품들을 바라보듯 지인이 올린 SNS 속 사진들을 훑어보는 우리 개개인의 모습은 결코 낯설지 않다. 

 

오늘의 통제사회는 특수한 파놉티콘적 구조를 보여준다. 서로 격리되고 고립되어 있는 벤담식 파놉티콘의 수감자들과는 반대로 현대 통제사회의 주민들은 네트워크화 되어 서로 맹렬하게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

고립을 통한 고독이 아니라 과도한 커뮤니케이션이 투명성을 보장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특수성은 무엇보다도 그 속의 주민들 스스로가 자기를 전시하고 노출함으로써 파놉티콘의 건설과 유지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스스로를 파놉티콘적 시장에 전시한다. 포르노적 과시와 파놉피콘적 통제가 서로를 넘나든다. 노출증과 관음증이 디지털 파놉티콘인 인터넷을 살찌운다. 주체가 외적인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가발전적인 욕구에 의해서 스스로를 노출할때, 그러니까 자신의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을 잃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 그것을 버젓이 드러내놓고자 하는 욕망에 밀려 날때, 통제사회는 완성된다.                                                      

-한병철, <투명사회> p26~27 中-

 

노출증과 관음증 그리고 포르노적 과시...

다소 거칠고 불편한 표현들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사회를 이보다 더 정확하게 정의한 문장이 또 있을까? 

 

사람들은 마치 시장에 전시된 상품을 바라보듯 서로가 서로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너무나 개인적인 사생활들이 서로 제한없이 공유되기 때문에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경계선마저 무너졌다. 경계가 없어졌으니 더욱 친밀해졌다. 서로 모르는 것 없이 너무 친한 사이일수록 상처를 주고받기 쉬우며 서로에 대한 존경의 부재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 폐해는 뜻밖에 크고 깊다.

 

타인을 존경하는 사람은 함부로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 존경의 전제는 떨어져 있는 시선, 거리의 '파토스'이다. 오늘날 존경심이 사라지면서 거리를 알지 못하는 구경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것은 스펙터클의 특징이다. 스펙터클의 어원인 라틴어 동사 spectare는 거리를 둔 배려와 존경(respectare)없이 관음증적 태도로 쳐다보는 것을 의미한다. -p115-

 

존경은 이름과 결부되어 있다. 익명성과 존경은 양립할 수 없다. 디지털 매체를 통해 촉진되고 있는 익명적 커뮤니케이션은 존경심을 대대적으로 파괴하며, 조심성 없고 존중할 줄 모르는 문화의 확산에 함께 기여하고 있다. 악플 역시 익명적이다. 바로 이 점에 악플의 폭력성이 있다. 이름과 존경은 서로 엮여 있다. 이름은 인정의 기반이다. 인정은 언제나 기명적으로 이루어진다. 책임지기, 신뢰하기, 약속하기와 같은 행위 역시 기명성과 연관되어있다. 신뢰란 이름에 대한 믿음으로 정의할 수 있다.

 -p117~121 中-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의 근원이 다름 아닌 바로 지나친 '친밀감'에서 비롯됐다는 저자의 지적에 소름이 돋을만큼 공감했다.

 

진정 어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낯익은 가족이나 오프라인 친구와는 의미있는 관계를 맺지 못한 채, 낯선 불특정 대중과는 불안정하고 불규칙적인 '소통'과 '접속'을 이어간다. 

 

왜?

서로 존중할 필요가 없으니까... 즉, '만남'에 있어서 어떠한 '의무'나 일말의 '책임'도 느낄 필요가 없으니까...

 

사람들은 감정과 느낌을 드러냄으로써, 즉 영혼을 노출함으로써 영혼의 투명성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소셜미디어와 개인화된 검색 엔진은 네트워크 내에 외부가 제거된 절대적인 인접공간을 수립한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을 닮은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에는 변화를 가능하게 할 어떤 부정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디지털 이웃사촌의 공간은 참여자에게 마음에 드는 세계의 단면만을 제공하며, 그럼으로써 공론장, 공적영역, 비판적 의식을 해제하고 세계를 사적인 장소로 만들어 버린다. 인터넷은 친밀성의 영역, 혹은 아늑한 지대로 변모한다. 모든 먼 것이 제거된 가까움 역시 투명성의 한가지 표현 형식이다. -p73~74 中-

 

서로의 체온을 느끼기 위해 다가가지만, 상대에게 닿자마자 그 속으로 들어갔다가 반대쪽으로 통과하여 나온다. 이제 대인관계는 마치 SF영화 속 한장면처럼 투명하게 이루어진다.

 

인터넷 컴티 활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하리라. 동일한 관심사로 이루어진 컴티 안에서 조금만 다른 의견을 내는 회원에게 얼마나 많은 분노의 댓글이 쏟아지는지를...

 

그렇다!

우리는 너무도 손쉽게 격분한다. 격분하여 댓글을 달고 마녀사냥식 인신공격을 퍼붓는다.

 

그러나 저자는 이와같은 감정적인 격분으로는 사회의 변화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인터넷에서 모인 사람들은 팔짱을 끼고 서로의 체온을 느끼면서 한곳을 향해 행진하는 시위군중이 아닌, 그저 일시적이고 단말마적인 불특정한 '무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격분의 물결은 사람들의 주의를 동원하고 묶어내는 데는 대단히 효과적이다. 하지만 매우 유동적이고 변덕스러운 까닭에 공적인 논의와 공적인 공간을 형성하는 역할을 감당하지는 못한다.

격분사회는 스캔들의 사회다. 이런 사회에는 침착함, 자제력이 없다. 격분의 물결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반항기, 히스테리, 완고함은 신중하고 객관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떤 대화도, 어떤 논의도 불가능하다.

 

반면, 분노는 일정한 행동을 촉발하기에 서사적이다. 그 점에서 분노는 격분의 물결에서 나타나는 감정인 화와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디지털적 격분은 행동도 이야기도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강력한 행동의 힘도 펼치지 못하는 감정적 상태일 뿐이다. 강력한 의미에서의 분노는 감정적 상태 이상의 것이다. 분노는 기존의 상태를 중단하고 새로운 상태를 시작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렇게 해서 분노는 미지를 만들어낸다. 오늘날 격분하는 군중은 극도로 덧없고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다. 그들에게는 행동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질량과 중력이 조금도 없다. 그들은 미래를 창출하지 못한다. -P124~126 中-

 

사실, 대다수 사람들이 인터넷 컴티의 무의미함과 예의 없음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정보를 나누고 소통하는데 있어서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의 효과에 대해선 쉽게 부정하지 못한다.  저자의 해석대로 투명사회가 통제사회요 감시사회이며 전시사회고 격분사회일지라도 이제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떠나선 살 수 없는 시대에 진입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저자는 투명사회의 도래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던 인류가 '자유로움'를 최고의 가치로 정립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인류의 진화는 곧 자연으로부터 오는 제약과 사회로부터 오는 제약을 부정하고 극복하는 과정이었다. 그 결과, 후기근대사회(포스트모던이즘)에 접어들면서 인류는 더 한층 자유로워졌다. 인터넷 역시 시공간의 제약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로 인류에 의해 개발되고 받아들여졌다.

 

 

그릇에 담겨 있는 물은 자유롭게 흘러가지 못하고 갇혀 있으니 부자유스럽다. 반면, 그릇에 담겨 있지 않은 물은 자유롭게 흐른다. 그렇지만 이처럼 아무것에도 담겨 있지 않은 물은 자신을 가두는 '틀'이 없어서 자유로운 대신, 땅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져 버리기도 쉽다. 여기에서 우리는 물을 가두는 '틀'이 실은 물의 소멸을 막아준 '담'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은 '담'을 한병철은 우리의 자유를 거스르는 '부정성'이라고 표현한다. 다음은 이 책을 번역한 역자의 해석이다. 다소 길지만 철학도들도 울고 간다는 이 책  <투명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인용하기로 한다. 

 

부정성 개념은 한병철의 저술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지만 그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꼽는다면 '타자', 즉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의지와 통제에 따르지 않는 것, 나에게 거역하는 것, 나를 꼼짝 못하게 하는 것, 내가 원하지 않는 것,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 혐오스러운 것, 심지어 나를 공격하고 파괴하려고 위협하려는 적, 이 모든 것이 부정성의 범주에 속한다. 어떤 의미에서 인류의 역사는 부정성과의 지난한 투쟁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 문명의 진보는 곧 부정성의 축소인 것이다. (...)

 

사회적 차원과 자연적 차원에서 모두 부정성의 축소 과정이 충분히 진행되어 개개인이 그것이 낳은 자유의 과실을 만끽하게 된 사회가 바로 후기 근대적(포스트모더니즘적)사회인 셈이다. 사회가 이 단계에 이르면 어떻게 남아 있는 부정성을 더 축소시킬 것인가보다 부정성의 퇴각이 남긴 빈 공간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사람들의 더 큰 관심사가 된다. 인간은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자기 뜻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겨난 커다란 자유가 사람들에게 각자의 삶에서 어떤 뜻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이냐에 대한 대답까지 자동적으로 주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병철은 우리의 당면 위기가 궁극적으로 부정성이 지나치게 축소되었다는 사실 자체에서 온 것이라고 지적한다. 한병철은 근대가 철저하게 퇴치하려고 싸워온 부정성이 사실은 인간의 삶을 떠받쳐온 버팀목이었다고 본다. 싸워야 할 적으로서의 부정성도, 또는 반드시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자연적 전제로서의 부정성도, 모두 인간의 삶에 일정한 위치와 방향과 의미를 정해주는 중요한 기능을 해왔다는 것이다. 부정성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는 이정표였다. 반면 오늘날 막대한 자유 공간을 확보한 인간의 의지는 정박할 닻을 내리지 못하고 방향을 상실한 채 이리저리 떠돌고 있다. 그것이 이 시대가 당면한 위기의 본질이다.

 

-<불투명성의 옹호> 역자 김태환 해제 中-

 

부정성은 긍정성과 대척점에 서 있다.

과잉 긍정이 우리를 피로하게 만들었듯, 지나친 부정성의 부정은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위협한다.

너무나도 손쉽게 나와 비슷한 것과 익숙한 것만을 취할 수 있게 된 오늘날, 우리는 지나친 부정성의 부정이야말로 부정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깊이 숙지해야만 한다.

나와 다른 것과 낯선 것 심지어 불편한 것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과 접촉이야말로 우리를 더욱 새롭게 하고 가치를 창출하게 만드는 원동력임을 명심해야 한다.

 

정신은 타자를 대면할 때 깨어난다. 타자의 부정성이 정신의 생명을 유지한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 자기 속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은 정신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정신의 특별한 능력은 "자신의 개별적 직접성에 대한 부정을, 무한한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타자의 부정성을 완전히 떨쳐버린 긍정성은 "죽은 존재"로 쪼그라든다. "자기 자신과의 단순한 "관계"에서 탈출하는 정신만이 경험을 할 수 있다. 고통이 없고, 타자의 부정성이 없고, 긍정성만 과다한 경우에 경험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어디나 돌아다니지만 경험에는 이르지 못한다. 사람들은 끝없이 수를 세지만 이야기 할 줄 모른다. 사람들은 온갖 것에 대한 정보를 얻지만 어떤 깨달음도 얻지는 못한다. 타자에 직면할 때 찾아오는 문턱의 감정, 즉 고통은 정신의 매체다. 정신은 고통이다.

 

-p186~187 中-

 

 

나는 올 한해가 시작되는 즈음에 소박하지만 나름 의미 있는 '한해 목표'를 세운 바 있다. 그 목표 중 하나가 바로 멘토를 만나는 것이었다.

멘토란 누구인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기존의 지식 위에 우뚝 서 있는 나를 뒤흔드는 사람이다.

기존의 질서에 안주하려는 나를 그 질서 너머 또 다른 질서가 존재한다는 걸 일깨워주는 사람이다.

자연수 너머에는 정수가 있고 정수 너머에는 유리수가 그리고 유리수 너머에는 무리수가 있으며, 숫자의 끝으로 알았던 무리수의 세계 너머에 허수와 미적분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걸 알려주는 사람이다.

기존 지식과 질서에 대한 부정과 도전은 파괴가 아닌, 더 큰 세상과 조우하기 위한 용기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 사람이다.

 

이 책을 만나려고 올초부터 나는 그렇게 멘토를 갈구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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