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옆의 소시오패스 - 사이코패스의 또 다른 이름
마사 스타우트 지음, 김윤창 옮김 / 산눈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전, 소시오패스의 자전적 책인 M.E 토마스 <나, 소시오패스>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은 게 계기가 되었을 게다. 이 책을 읽게 된 건...

결론적으로 전문가가 진단하고 기술한 소시오패스는 훨씬 더 객관적으로 다가왔다. 객관적이라는 건 감정에 호소하는 정도가  덜 하다는 뜻이고, 이는 그만큼 덜 재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사 스타우트는 소시오패스의 특징을 '무죄의식'으로 봤다.

4%인 그들을 제외한 96%에 해당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죄의식을 갖고 있으며, 이 죄의식은 바로 '양심'에서 기원한다고 주장한다.

 

양심이 존재하느냐 부재하느냐는 하나의 뿌리 깊은 인간구분, 어쩌면 지능이나 인종, 심지어 성별보다도 더욱 중요한 구분이다. (...)

우리들 가운데 96%에게, 양심이란 따로 생각을 기울이지도 않을 만큼 근본적인 어떤 것이다. 양심은 대부분 반사적으로 작동한다. 유혹이 극도로 크지 않은 한(고맙게도 평범한 일상에서 심사숙고할 만큼 커다란 유혹을 느끼는 경우는 흔치 않다.)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도덕적 질문들을 결코 일일이 숙고하지 않는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진지하게 자문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급식비를 줄까 말까? 오늘 동료의 서류 가방을 훔칠까 말까? 오늘 배우자를 버릴까 말까? 양심이 우리를 대신하여 이 모든 결정들을 그토록 조용하게, 자동적으로, 끊임없이 내리기 때문에, 제아무리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펼치더라도 우리는 결코 양심 없는 존재의 심상을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정말로 양심 없는 선택을 할 경우, 우리는 진실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설명만을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급식비 주는 것을 깜빡 잊었을 거야. 그 사람의 동료가 서류가방을 잘못 놓아두었겠지. 그 배우자는 분명 함께 살기 불가능할 정도로 문제가 있을 거야. 아니면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는 전혀 알수 없는 그의 반사회적인 행동을 거의 설명해주는 꼬리표들을 가져다 붙인다. 그는 별나거나, 예술적이거나, 너무 승부욕이 강하거나, 게으르거나, 멍청하거나, 늘 악동 같다.

우리가 이따금 텔레비전에서 보는, 살인마 같은 무시무시한 사이코패스 괴물들을 제외하면, 양심 없는 사람들은 보통 우리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마사 스타우트, <당신옆의 소시오패스> p27~28-

 

'그래, 맞다!'

생각해보면, 이런 사람들은 주변에 한두명쯤은 언제나 있었던 것 같다.

다소 무례하고 뻔뻔하고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거짓말이 들통나거나 타인의 질책 앞에선 눈물을 흘리며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 말이다.

천만다행스럽게도 난 이런 사람들을 천성적으로 끔찍하게 싫어하는 편이었다.

어렸을때부터 '넌, 왜 그렇게 냉정하고 차갑기만 하냐?' 등의 말들을 집안 어른들로부터 곧잘 듣는 편이었고, 지금도 가족간 의견 충돌이 일어나면 '감정이나 친분'보다는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쪽이다. 아주 가까운 사이에도 'Give & Take'가 좋고, 필요이상의 관심이나 친절을 타인에게 베푸는 법도 없으며 타인으로부터 받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내가 감지하지 못하는 순간 나에게 뻗쳐왔던 소시오패스의 작업(?)들이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는 소시오패스가 그만큼 많다기보다는 우리가 지나치게 소시오패스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고, 이와 같은 무지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과 입장에서 세상과 타인을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심 있는 사람들은 양심이 없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20여년 넘게 임상심리상담을 해온 글쓴이가 주로 만나는 대상은 이처럼 자신의 관점에서 타인을 바라보았다가 인생이 제대로 꼬인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들의 심리적 회복을 도우면서 동시에 양심적인 96%의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비양심적인 4%의 사람들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까? 를 고민했고, 그 결과가 바로 이 한권의 책이라고 하겠다.

 

꼭 읽었으면 좋겠다.

만약, 당신이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사랑의 다이얼'을 자주 누르는 사람이거나, 지하철의 구걸인들에게 빈번히 연민을 보이는 유형이라면 말이다.

 

 

소시오패스는 치료될 수 있을까?

치료란, 특히 심리적 차원의 문제일 경우엔 더더욱 당사자의 치료 희망 여부가 매우 중요하다. 만약 소시오패스가 치료 받기를 원한다면, 이는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시오패스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과 그 삶에 아주 만족하며, 법정에 회부되었거나 또는 환자라는 점으로부터 얻어질 어떤 부차적 이득이 있을 때만 치료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리고 소시오패스가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인식하고 있느냐? 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역시 안타깝게도 '그렇다!'이다. 소시오패스는 '자기통찰' 능력이 있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의 판단으로 분명 사악한 어떤 사람이 스스로는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경우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이 곧 현실인 듯하다.'

 

그러므로 우린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 중에는 진짜 '구제불능'이 있다는 걸 말이다. 그 어떤 노력과 희생으로도 고쳐지지 않는 구제불능의 인간이 있다는 건, 같은 인간으로서 소름 돋는 일이지만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슬픈 현실이다.

 

그렇다면, 소시오패스는 어째서 탄생하는 걸까?

이기적 유전자가 이타적 유전자보다 생존과 진화에 유리하다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소시오패스는 진화의 산물이며 앞으로 더 많이 살아남아 현생인류를 대체하진 않을까?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전문가들은 '개체'로 보면 소시오패스의 생존이 유리하지만, '집단'으로 보면 상호이타주의가 훨씬 더 생존에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쉽게 설명하면, 우리는 혈연관계에 있는 가족들에게 훨씬 더 이타적인데, 그 이유는 나와 1/2 혹은 1/4 심지어 1/16의 유전자를 나누어 갖고 있는 존재를 통해 자신의 유전자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족이나 집단을 위한 개체의 희생은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는 유리한 행동이라 하겠다. 이와는 반대로, 소시오패스처럼 이기적 유전자는 집단 안에서 끝없이 투쟁하기 때문에 결국 집단 전체가 멸종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 

 

 

양심은 때론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고 욕망과 욕구 만족을 강력하게 방해한다. 하여, 때론 양심을 갖고 있다는게 경쟁에서의 패배와 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과 비양심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 대부분은 당연히 양심을 선택할 것이다. 

 

양심은 우리에게 서로에 대한 신뢰와 믿음 굳건한 동지애를 느끼게 해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랑'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양심이 부재한 소시오패스는 불쌍하다.

가장 숭고하고 강력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을 느끼지 못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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