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술사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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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장르소설이 매우 발달한 일본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작가 중 한명인 미야베 미유키의 시리즈 2막 중 제3편이다. 

시리즈라는 걸 알았더라면 2008년도와 2010년도에 각각 나온 <흑백>과 <안주>를 먼저 읽었을 텐데 아쉽다. 신작을 굳이 찾아 읽지 않는 나로서는 의도치않게 최신작을 서둘러(?) 읽어버린 셈이 되었다. 

 

<피리술사>에는 모두 여섯편의 괴담이 실려있다. 이 괴담의 청자는 에도의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의 오치카다. 열일곱 처녀인 그녀가, 원래는 주인 이헤에가 바둑을 두던 '흑백의 방'에 앉아 괴담을 들어주는 청자가 된 사연은 이렇다.

 

 

오치카가 집을 떠난 것은 작년 봄에 일어난 비극 때문이었다. 혼인을 목전에 두고 약혼자가 소꼽동무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가해자나 죽은 약혼자나 어릴 적부터 오치카와 친하게 지내온 청년들이었다. 그래서 두 청년 사이에 응어리진 감정과 갈등을 더욱 알아차리지 못했던 오치카는 사건이 벌어지자 슬픔보다 자책감에 더 깊이 빠져 영혼이 갈기갈기 헤지고 말았다. (......)

 

영혼이 부서질 정도로 비극적인 일을 겪은 젊은 처녀에게 어지간한 위로나 격려는 별 소용이 없다. 그보다는 차라리 오치카가 이런 식으로 항간의 신기한 이야기, 업보 이야기, 온갖 인생담을 듣고 그런 이야기들에서 실을 자아내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꿰매어 수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

 

이 괴담 자리에 엄격한 규칙은 없다. 화자는 내키는 대로 말하되 감추고 싶은 내용은 감추어도 상관없다. 이야기의 진위 여부도 아무렴 상관없다.

화자는 말하고 버린다.

청자는 듣고 버린다.

그것만이 규칙이다.

-미야베 미유키, <피리술사> p17~18 中-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한다는 건,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다는 의미다.

슬픔의 한가운데에서는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야기가 오고가는 경우에는 화자보다는 청자의 마음수련이 더 중요해진다. 그 이야기가 신비롭고 무섭고 슬플수록...

 

무엇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세상의 어둠, 즉 괴담을 듣기 위해선 그 '알 수 없음'까지 귀로 듣고 가슴에 담겠다는 각오가 없으면 청자 노릇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말하고 버리고... 청자는 듣고 버린다... 는 이 규칙을 액면 그대로 실행할 수 있을때까지 수행을 쌓지 않으면 안된다.

 

첫번째 이야기는 서로 사랑하는 남여가 함께 모습을 비추어 보면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는 연못에 관한 전설이다.

이 이야기는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불안에 대한 경종이 아닐까 싶다.

 

"장수한 멧돼지에게 무슨 영험이 있는지 모르지만 이 신은 몸에 낀 이끼를 위해 해마다 한번 목욕을 한답니다. 그때는 물고기도 못 살 정도로 깨끗한 물이어야 한대요. "

이노카미가 저택의 바로 뒤에 그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손거울처럼 동그랗고 조그만 연못이에요. 연못 건너편에는 작은 무덤이 있었어요. 이노카미 가 사람이 아니면 무덤에도, 연못가에도 가까이 가서는 안 됐다고 합니다."

청정을 좋아하는 까다로운 신이다.

"그 신은 여자ㅡ그러니까 암멧돼지인데, 아주 오래전에 남편이 사냥꾼 총에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분노와 원한 탓에 그냥 멧돼지가 아니라 원령 같은 것으로 변해서 그 지역에 재앙을 내리게 되었는데, 우연히 지나가던 덕이 높은 스님의 훈계를 듣고 참회하여, 앞으로는 이 고장 사람들을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고 신으로 모셔지게 되었다는 거예요." (.....)

거울 연못에 가까이 가는 일은 금기였다. 거울 연못에 제 모습을 비춰 보는 짓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금기를 깨면 어떻게 될까?

"멧돼지 신의 노여움을 사서 남녀는 반드시 헤어지게 된답니다."

"남자에게 어김없이 다른 여자가 생겨요. 그래서 원래 함께하던 여자를 배반하고 차버리는 거죠."

 

-미야베 미유키, <다마토리 연못> p40~43中-

 

 

특히 남자가 사랑에 빠진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원래 여자가 가장 싫어하는 상대방이라고 한다.

정말 짓굳지 않은가.

그러나 이 전설에는 다음과 같은 한가지 교훈이 담겨 있다고도 하겠다.

'사랑은, 시험하지도 장담하지도 말라!'

 

 

천재지변으로 함께 어울려 놀던 동무들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시체조차 찾지 못한 상황에서 홀로 살아남은 어린 조지로는 꿈속에서 '숨박꼭질'을 한다. 그러면 어김없이 동무들의 시체가 발견된다는 <기치장치 저택>은 '죽은 귀신과 함께 놀았다'는 괴기스러운 이야기를 혼자만 살아남은 미안함으로 승화시켜 눈시울을 붉힌다. 그러므로 죽은 자를 무조건 두려워하는 건 불필요한 억측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처럼 죽은 자와의 '조우' 혹은 '인연'을 강조(?)한 작품으로는 함께 실려 있는 <절기얼굴>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24절기마다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을 빌려서 단하루 이승에 모습을 나타내는 죽은자들.....

미처 다 나누지 못한 이별의 정을 나누기도 하고... 구천을 헤매던 영혼이 이승에 잠깐 나타나 원한을 풀고 가기도 하고...

단, 영혼에게 얼굴을 빌려준 사람은 그림자가 서서히 흐릿해진다. 즉, 그만큼 수명이 짧아서 종국엔 '죽음의 강'인 삼도천(三渡川)을 건너가게 된다.

 

젊어서 나쁜짓을 많이 했던 하루이치가 병든 몸으로 본가에 찾아든 이유 또한 영혼에게 얼굴을 빌려주는 것으로 자신이 지은 죄를 씻으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하루이치는 굳이 죽어서 산자의 얼굴을 빌려 이승에 나타날 이유가 없어지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죄를 갚는다고 생각하니 코끝이 아려왔다. 그리고 보면, 이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죄란 없지 않을까... 싶다. 진심으로 사죄한다면 말이다. 

 

알았다면 사죄하지 못할 죄가 있을까...?

떠나는 마당에 열번 백번이라도 사죄하는 게 인지상정 아닐까...?

문제는 본인조차도 알지못하는 죄가 아닐까...? 

나도 모르게 그 누군가에게 엄청난 슬픔과 상처를 줬다면....?

 

이건 또, 어떻게 풀고 가야 할까...?

그래서...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자신의 원수를 죽음의 길동무로 삼기 위해 영혼이 죽음의 강인 삼도천을 건너지 않고 기다린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저질러진 타인의 고통과 아픔 앞에서 우린 결국 죽음으로 빚갚음을 할 수 밖에 없단 말일까...?

 

'아, 스산해...'

 

 

표제인 <피리술사>는 몇 십년에 한번씩 여름에 나타나 사람들을 잡아먹는 괴물 '마구루'를 퇴치하는 여인의 이야기고, 이 밖에도 감춰진 악행을 꿰뚫어보는 <우는 아이>등이 실려 있다. 그리고  <가랑눈 날리는 날의 괴담 모임> 이라는 제목으로 모두 네편의 괴담을 들려주는 방식은 참 신선했다.

 

증축을 하면서 기둥을 거꾸로 세운 것을 고치지 않고 고집스럽게 우긴 결과, 새로 지어진 별채에 들어가면 길을 잃어버리는 괴이한 일들이 일어난다. 자신의 고집과 아집을 반성하지 않는 주인 양반은 결국 자신이 지은 별채에 들어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이야기...

자신의 남은 수명 10년과 뱃속 아기의 수명 1년을 맞바꾼 모정을 그린, 건너는 도중 넘어져서는 안되며 설령 넘어졌더라도 다른 사람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서는 절대로 안되는 나무다리 이야기...

사람의 병을 예견하는 애꾸눈 이야기...

원한에 사무친 영혼들이 밤마다 차례로 찾아와서 몸을 만지면 검게 썩어 들어가 결국엔 숨이 끊어진다는 이야기.... 등등...

 

하나같이 모두 흥미진진하다.

 

 

이야기에는 정말 놀라운 힘이 담겨 있는 거 같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순간,

근심 걱정따위는 가랑눈처럼 씻은 듯 녹아버리고...

한숨이 나올만큼 두 어깨를 짓누르던 고민들마저, 한줌의 새털처럼 가벼워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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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청소년 현대 문학선 10
이순원 지음, 이정선 그림 / 문이당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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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내 19세의 신고식이었다.

 

이젠,

 정말 늘 푸르기만 해야 할......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사십대에 이런 책을 읽는다는 게...

 

낯간지럽다고 생각했다.

다시 십대의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게...

 

무엇보다도 머리로는 이해가 충분히 되나, 도무지 감정이 투척되질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이라는 데에는 공감한다.

나 역시, 마지막 책장을 넘긴 다음에는 감동을 받았으니까...

물론,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감동이라기보다는 잔잔하게 그러나 거듭거듭 몰려오는 파도와 같은 감동이라고 해야하리라... 

 

난 왠지모르게 자전적 작품에 많이 끌리는 편인데, 이 작품 역시 공간적 배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전적 작품같다.

작가도 고향이 강원도 강릉이고 상고를 나왔단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이정수처럼...

 

그렇다면...?

작가도 열일곱의 어느 날...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학교를 그만두고 대관령에 올라가 고랭지 배추농사를 지었을까...?

대개는 부끄럽고 철없게 느껴지는 첫사랑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들어준 승희누나와 같은 친구의 누나가 있었을까...?

 

"정수야."

"예."

"너, 누나 좋아하니?"

"......많이요."

"감격스럽다. 내가 정수 그 말 가슴속에 간직할게. 정수도 오늘 내게 했던 말 영원히 잊지 말고. 우리는 거기까지야. 지금 정수가 한 말이 아름다운 건 정수가 지금 내게 한 말도 아름답지만, 그 말을 하는 정수의 나이가 아름답기 때문인 거야. 아마 스무 살만 지나가도 그 말이 스스로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을지도 몰라. 내 열여덟 살도 그랬거든. 선생님에게든 누구에게든, 어떤 때는 결혼한 선생님에게까지 내 가슴속에 품고 있던 생각들 다 아름다웠을 거야. 지금 정수도 그렇고. 그렇지만 스무 살이 넘어가면서 똑같은 생각도 어떤 것은 아름답지 않게 되어가는 것이 있어. 지나고 보면 정수 형에 대한 생각도 그랬고, 다른 생각도 그런 게 있었을 거고."

나는 눈이 가물가물한 배추밭의 능선만 바라보았다. 정말 누나가 그렇게 멋지게 말할지 몰랐다. 스무 살이 넘어 어느 한순간에 이르면 우리 마음을 보는 눈도 그렇게 깊어지는 것인지 몰랐다. 누나는 내가 부끄럽지 않게, 그리고 먼저 한 내 고백이 부끄럽지 않게 따뜻하게 내 마음을 만져주고 있었던 것이다.

(......)

나는 그 고백을 앞으로 잊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나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훗날 서른쯤 나이를 먹어, 또 마흔이나 쉰쯤 나이를 먹은 다음 오늘 이 시간을 다시 생각할 때 지금처럼 그때도 그것이 부끄럽거나 철없지 않고 아름답게 추억되었으면 좋겠다고. - 이순원, <19세>  p215~217 中-

 

이 부분은...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리게 만든다. 

만약,

철부지 시절의 어설픔으로 아련한 추억 대신 '풋ㅡ'하고 웃음이 나온다면, 그 사랑은 '첫사랑'이 아닌 '풋사랑'이었으리라...

이런 감정의 경험을 꼭 '사랑'이라 불러야 하는지 난 참으로 유감이다. 이건 그냥 사춘기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 혹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조금은 색다른 감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무릇, '첫사랑'이라면...?

이처럼 정수와 같은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너무 애틋하고 소중해서, 솟구치는 본능적 욕망조차 넘어서 버리는 그런 어떤 거 말이다...

 

여자가 상을  치우고, 벽장문을 열어 요를 내려 깔고, 자신의 속치마의 어깨 끈을 풀 때까지만 해도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몸과 마음으로의 어른 세계에 대한 적당한 두려움과 적당한 설레임, 적당한 흥분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참으로, 아니, 참으로가 아니라 그 어떤 말로도 그것을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그 뒤끝은열 배의 두려움과 열 배의 어둠보다 더허망하고도 허망하던 어른의 선이 있었다. 지난 가을 책과 책가방, 교복을 불 싸지를 때보다 더 크고 깊은 죄의식이 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스며들며 슬픔의 강을 이루던 것이었다. 내 살에 닿아 있는 여자의 몸조차 벌레의 그것처럼 보이던 것이었다. 나는 거칠게 여자의 몸을 밀어냈다. - 이순원, <19세> p203~204 中-

 

 

이 순간, 정수가 참 부러웠다. 

주인공 정수처럼 어른이 된다면 참 좋을 것 같다. 그처럼 강렬하고... 아름답고... 순수한... 19살이 내게도 있었더라면...

 

그리고,  

많이 배운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많이 갖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부모다운 부모님을 둔 정수가 너무 부럽다. 

 

"사람이 늘 그렇게 살 것도 아닌데 편한 걸 알면 꾀가 나게 된다. 편한 걸 알게 되면 지 사는 데가 싫어지고 며칠 살아본 편한 곳만 자꾸 생가갛게 돼. 니 거기 가서 공부 잘했다니 애비도 좋긴 하다만, 불편하게 사는 사람은 불편한 게 무엇인지도 알고 또 참고 커야 한다. 지금 그게 그렇게 돼 있는 니 몫이면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아나?" -p049

 

"나중에 커보면 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공부 많이 한 사람과 적게 한 사람의 차이는 그렇게 나지 안흔다. 잘한 사람과 못한 사람의 차이도 그렇고. 그렇지만 책을 많이 읽은 사람과 적게 읽은 사람의 차이는 몇 마디 얘기만 나눠봐도 금방 눈에 보인다. 니가 대관령에 가서 농사를 짓든 뭘 하든 애비가 보내주는 책만 제대로  챙겨 읽는다면 학교 공부 손을 놓는다 해도 어디 가서 무식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게다." -p145

 

"그래. 그동안 니가 지은 건 농사가 아니다. 운이 좋아 남이 만지지 못한 돈을 만지긴 했어도 그거야 농사랄 것도 없이 노름이고 장난인 거지. 너는 그걸로 무얼 벌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만 더 크게 잃은 것도 있을 게다. 하지만 그냥 허송세월을 한 시간만은 아닐 게다 .그건 앞으로 니가 하기 나름인 게지." -p220

 

그나저나,

작가에게도 이런 부모님이 계셨을까?

왠지 그랬을 것만 같다.

 

이젠 부모가 되었을 나이인 작가에게도 정수같은 아이가 있을까?

왠지 그럴것만 같다.

 

 

진솔함과 솔직함으로 무장한 '각주'를 보면, 이런 내 추측이 단순히 억측만은 아니라는 걸 미루어짐작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999년도에 쓰여졌으니 1957년생 마흔줄에 접어든 작가가 십대인 자신의 자식을 키우면서 20여년 전 십대의 끝으로 되돌아간 흔적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열일곱 어른이 되고 싶었던 정수는...

마침내,

어린 시절 잠시 기르다 날려 보낸 파랑새를 다시 가두듯 그렇게 열아홉에 다시 학교로 돌아온다.

 

왜냐하면...

자신이 2년동안 한 건, 어른노릇이 아니라 어른놀이였음을 깨달았기에...

 

왠지 그 기간동안 내가 했던 것은 어른 노릇이었던 것이 아니라 어른 놀이였다는 생각이 자꾸만 내 가슴을 무겁게 하던 것이었다. 이런 상태로 다시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나 스무 살이 된다고 해도,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된다 해도 그 일에 대해 어떤 후회거나 미련 같은 것이 남는다면 그때에도 내가 하는 짓은 여전히 어른 노릇이 아니라 어른 놀이일 것 같은 생각이 들던 것이었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이번 해에도 배추농사에서 큰돈을 만졌다 하더라도 지난여름 어느 날 갑자기 들기 시작한 그 생각만은 변함없을 것 같았다. 같은 나이의 다른 아이들이 하지 못하고 있는 무언가를 내가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같은 나이의 다른 아이들이 다하고 있는 어떤 것을 나만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뒤늦게야 어떤 후회거나 소외감처럼 조금씩 내 가슴에 스며들어 오던 것이었다.

- 이순원, <19세> p219~220 中-

 

 

이렇게 정수의 열아홉 성인식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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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박종대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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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링크의 작품으로는 세번째다.

<더 리더:책 읽어 주는 남자>와 <귀향>에 이어 세번째로 읽은 <주말>은 분량도 많다고 할 수 없는데 진도가 잘 안 나갔다. 물론, 개인적으로 오른쪽 각막을 다치는 등 책읽기에 집중할 수 없었던 이유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독일이 우리나라처럼 동서독으로 분리되어 있을때, 서독에서 일어난 반정부 좌파운동을 주요 모티브로 하고 있다. 주인공인 외르크가 '적군파'소속으로 정부의 주요 인사를 납치/살해한 혐의로 23년동안 감옥에서 복역 후 대통령 사면으로 출소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의 보호자인 누나 크리스티아네는 동생의 출소를 축하하기 위해서 한때 동생과 친했던 친구(동지)들을 주말에 시골집으로 초대한다.

 

초대된 인물들은 덴탈랩을 운영하는 울리히, 기자인 헤너, 성직자가 된 카린, 교사이자 작가인 일제, 그리고 외르크를 다시 좌파운동의 마스코트로 삼으려고 하는 마르코 한 등이다.

 

이들은 시골집에 도착한 첫날인 금요일 각자의 방식으로 과거를 회상하면서 외르크의 행위에 대한 감회를 드러낸다. 아내를 자살로 내몰고 아들에게 편지 한통 전달하지 않은 외르크의 삶은 과연 영웅적인 것일까? 그의 희생적(?) 행동이 과연 인류 사회에 도움이 되었을까?

아마도 저자는 이런 문제 제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은 마르카레테과 외르크의 아들 게르트 슈바르츠(페르디난트)의 관점으로 표출된다. 

 

그녀가 보기엔 외르크도 병든 인간이었다. 병들지 않았다면 격정과 절망이 아니라 어떻게 멀쩡한 정신과 냉혹한 가슴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겠는가? 건강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다른 행동을 찾았어야 하지 않을까?  마르가레테는 적군파와 독일의 가을, 그리고 크리스티아네와 그 친구들이 추진한 테러리스트 사면에 대한 대화도 화제 자체가 병들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시의 테러리스트들뿐 아니라 지금 그들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걸려 있는 병이다. 어떻게 건강한 정신으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살인으로 더 나은 사회가 만들어진다고? 이 모든 것이 추악하고 역겨운 병에 너무 많은 명예를 안겨주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주말> p115~116 中-

 

부모 세대의 나치즘 동조에 강한 거부감을 보인 전후세대는 테러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사회를 바꾸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 나치 친위대로 젊은 날을 보냈던 노인들이 과거를 회상하는 술자리 대화는 외르크의 출소를 계기로 다시 모인 친구들의 회합과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다. 

 

 

오펜부르크 회합에서는 인도 요리를 해 먹었다가 모두 설사를 했던 거 기억나? 도리스가 미스 유니버시티 선발 대회에서 상을 탄 뒤 수상소감자리에서 <공산당 선언문>을 낭독했던 거 기억나? 정치에는 아무 관심도 없으면서 단지 에바가 좋아서 베트남 전쟁 반대 데모에 참가한 게르노트가 갑자기 '양키를 미국에서 내쫓자!'하고 소리쳤던 거 기억나? (......) 다른 사건들도 그들의 머릿속에 잇따라 떠올랐다. 우리가 라텐베르크 교수의 강의 시간에 쥐새끼들을 풀어놓았던 거 기억나? 대통령 연설 때 스피커 시설을 방해해서 엉망으로 만들었던 거는? 전철 요금 인상안이 발표되었을 때는 쇠지레로 전철기를 차단시켰던 거는? 또 우리가 고가도로 벽에 격리 감금에 항의하는 플랜카드를 내걸었던 거는 기억나? 경찰이 플래카드를 내리자 고가도로 콘크리트에다 스프레이로 다시 썼던 거는? 우리가 시위를 벌이기 위해 도로공사 건물 안뜰에서 교통  표지판들을 슬쩍해서 간선도로를 폐쇄했던 거는? (......)

 

슈바르츠는 저녁 내내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그런 그가 이제 또박또박하고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 내가 자란 작은 도시에서 몇 주에 한 번 친구들과 술집에서 도펠코프를 쳤습니다. 그날 저녁도 카드를 치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다섯 노인이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죠. 모두 나치친위대 출신이더군요. 순간 나는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양반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세요? 그거 기억나, 그거 기억나? 밤새 그러면서 놀더군요. 이상했어요. 빌뉴스에서 유대 놈들을 어떻게 쳐죽였고,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놈들을 어떻게 쏘아 죽였는지를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데,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어요. 바르샤바에서 샴페인에 취해 떡이 된 얘기며, 폴란드 여자들과 오입질한 얘기며, 또 이발사가 그 양반들의 긴 수염을 자른 이야기를 자기들끼리 좋다고 낄낄거리면서 늘어놓았어요. 당신들도 다르지 않네요. 정작 중요한 건 왜 얘기를 하지 않죠? 은행을 습격할 때 여자를 쏘아 죽인 얘기도 있을 테고, 국경에서 경찰을 죽인 얘기도 있지 않습니까? 그뿐인가요? 은행장도 죽였고, 상공회의소 회장도 죽였죠. 아, 상공회의소 회장은 누가 죽였는지 우린 정확히 모르죠. 어때요, 아버지? 아버지가 죽였는지, 다른 사람이 그랬는지 아들한테 얘기해주고 싶은 마음 없어요?" 외르크는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주말> p204~208 中-

 

 

결국, 그들을 영웅심에 불타오르게 만들었던 혁명, 진리, 진보, 정의 등등은 그들이 꿈꿨던 세상 대신 폭력과 복종으로 점철된 굴종된 삶은 아니었을까?

원래 혁명이란 이런 것이다. 권력을 얻고자 하는 세력이 기존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그런 거...

그러니까 혁명 이후나 혁명 이전이나 커다란 차이는 없다는 거...

인류가 역사적으로 수많은 혁명을 거쳤음에도 여전히 지배와 피지배, 폭력과 복종은 똑같이 인류 사회를 지배하는 규칙이라는 거...

 

 

한편, 주인공 중 한명인 일제의 소설 속 등장인물인 얀이 실존인물인지 아닌지 모호하다.

자살을 가장하여 사라진 후, 테러리스트로 활동하다가 9.11 테러가 일어나던 당시. 어느 아랍인의 지시로 무역센터 꼭대기층에 있는 레스토랑에 가방을 하나 갖다 놓고 나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나오지 못했고.... 결국 추락사하는 것으로 그녀의 소설은 마무리 된다. 그 가방 안에는 비행기 유도장치가 들어있는 것으로 암시되어 있고...

 

 

얼마전, 우리나라의 극좌정치세력 중 하나인 통진당이 대법원에 의해 해산 명령을 받았다.

이를 두고, 혹자는 그들도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국민의 지지로 국회에 들어왔으니 법의 잣대가 아닌 국민의 심판에 맡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 대한민국 헌법질서에 위배되는 이적단체에 대한 해산은 정당하다는 주장 등도 있다.

 

어찌됐든,

의도와 취지가 아무리 좋다한들 폭력적인 방법은 더이상 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는 없다.

 

그리고 젊은 혈기는 권력추종자들에 의해 즐겨 이용되어 왔다는 사실 역시 잊지 말아야하리라.

 

혁명...?

이젠 지겹다.

 

왠지 반공 독후감이 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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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 몸에 관한 어떤 散 : 文 : 詩
권혁웅 지음, 이연미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그를 일컬어 '감각을 육화'하는데 전문인 시인이라고 하더라. 

과연 맞는 거 같다.

난, 그의 이름을... 그의 시들을... 최근에서야 접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에서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두근두근>과 김소연의 <마음사전>을 읽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함께 같이 읽게 되었다.

 

둘 다, 마음을 몸으로 표현하고.... 몸을 마음으로 등가시켜 표현하고 있었다. 어딘가 낯설다. 그래서 더 좋은 걸까? 그렇지도... 혹은 아닐지도...

 

흐릿한 빨강색 표지에 7~8cm는 족히 될 법해 보이는 두께의 <두근두근>은 시집이라기 보다는 낙서장(?) 혹은 메모장(?)에 더 가깝다. 시인 역시 이를 부인하지 않으며 시집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와 함께 읽어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래서 또 찾아봤다.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를....

그랬더니, 몇 편의 시들이 통째로 건져올라왔다.

 

<섬-코1>

조그마한 향기에도 출렁이는 섬이 있다고 합시다

익사가 아니면 익명이라고 합시다

들고나는 일이 부등가교환이어서

한번 든 이들이 무덤처럼 쌓여갔다고 그래서

그곳이 무인도거나 선산 같은

위장전입한 주인의 몫이라고 합시다 그가 없는데도

물 풍선처럼 터지는 향기를 어떡해야 하겠습니까

멱 따는 소리로 꿀꿀대는 이 안절부절을

어디에 버려야 하겠습니까

 

 

<혀 끝에 맴도는 이름 -입술6>

그녀가 내 입안에서 윤곽을 이루었습니다

긴 머리카락이 식도를 타고 흐르거나

실개천에 놓인 징검돌처럼

젖은 얼굴이 만져지기도 했습니다

내가 더듬거릴 때마다

풀잎을 구르는 물방울처럼, 순식간에,

그녀가 무너졌습니다

그것은 수사(修辭)도 수격(手格)도 아니었으나

공들이지 않고서는

하나의 표정도 불러낼 수 없었습니다

성과 이름 사이 가로놓인

강물을 건너갈 수 없었습니다

한 번 이름 부르는 일이

어떤 이에겐 평생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지나간 후에야 다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앉은 자리에 -엉덩이1>

내가 앉은 자리에 네가 거듭해서 앉는다면

휘말린 먼지들이 혹은 가라앉고 혹은 떠돌아

동심원 두 개가 고요하다면

거기에 내 손을 가만히 얹는다면

그 자리가 번져나가 끝내 너를 적신다면

 

 

 

역시, 시란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었다.

우선, 눈으로 바라본 다음, 마음으로 새긴다. 그리고 이것도 모자라거들랑 손으로 하나하나 짚어봐야한다.

손가락을 움직거려 시를 적어보니 새롭다. 그리고 좋다. 눈으로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수위표>

네 머리카락은 검은 강물이다. 너를 쓰다듬을 때면 내 손에서 네가 흘러간다.

그때 내 손의 마디는 수위표(水位標)이다. 아, 나는 네게 이만큼 잠겼구나. 

 

<교차로>

길이 인생에 대한 은유라면, 교차로는 사랑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먼지의 길>

마음은 늘 비포장이었다. 왜 그리 불퉁거려야만 했을까.

 

<사랑을 건너가는 두 가지 방법>

첫 번째는 횡단보도를 이용하는 것. 횡단보도는 일종의 사다리다. 이곳의 사랑은 오래 기다리는 사랑이며, 천천히 조금씩 디뎌야 하는 사랑이며, 주어진 시간 안에 건너야 하는 사랑이다.

두 번째가 무단횡단이다. 이 사랑에는 이곳저곳도 없고 지금과 나중도 없으며 중앙선도 없다. 누가 건너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평생(平生)을 질러가는 덤프트럭과 붉은 티켓을 마련해둔 경찰을 피해야 하는 필생(畢生)이 있을 뿐이다.

 

<버짐나무에 핀 버짐처럼>

그렇게 마음이 번져가는 오후가 있습니다. 마른버짐을 쏟아내는 저 나무처럼 그늘진 오후가 있습니다. 틈틈히 햇빛을 허락하는 저 그늘처럼 성긴 마음이 있지요.

버짐의 경계는 희미합니다. 물을 잘못 뺀  청바지처럼 희미하지요. 제 풀에 풀어지는 것을 허락하는 오후입니다.

어떤 입술도 받아들인 것 같은 번짐이지요.

 

<백락과 천리마>

"세상에 백락(천리마를 알아보는 안목을 가진 명인)이 있은 연후에 천리마가 있는 것이다. 천리마는 항상 있지만 백락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한유) 비단 인재(人才)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사랑에 빠진 자들은 모두 백락이다. 내가 그이를 발견했어, 그이처럼 착하고 멋지고 능력 있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은 없어. 그런 이가 왜 없겠는가. 그건 그이의 속성이 아니라 사랑의 속성이다. 천리마가 늘 있지만 백락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듯, 사랑할 만한 사람은 늘 있지만 그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실어증>

사랑에 빠진 자의 말은 점점 실어증을 닮아간다. 그의 말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짧은 단문으로 점점 축소되어간다.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어떤 말도, 그 말로 다 흘러들어간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에는 이전도 이후도 없다. 이전 말은 그 고백을 향해 가는 긴 정서적 논증의 과정이며, 이후 말은 그 고백을 추인하는 동어반복이다. 

 

<할증>

그리움에도 할증이 붙는다. 밤이 깊을수록 더욱더 생각난다고.

 

<엎질러진다는 것>

내 마음은 이런 것, 그 누군가 나를 건드린다면 언제라도 엎질러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그이는 어디에 있는가. 엎질러지는 내 앞에? 아니다, 그이는 내 엎질러짐 속에 있다. 

 

<안심>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 안쪽에 있는 것, 그것이 안심(安心)이다.

 

<비트박스>

아, 그이가 내게 걸어왔어요. '두근두근'이 발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란 걸 그때 처음으로 알았어요.

.

.

.

이 책 제목이 '두근두근'이다.

설마...? 싶어 찾아보니 두근두근은 부사로 '몹시 놀라거나 불안하여 자꾸 가슴이 뛰는 모양'이란다.

두근두근 울려대는 마음을 뚜벅뚜벅 소리내는 발(足)로 육화(肉化)시켰다.

아, 기가 막히는구나!

 

나, 지금...

두근거린다.

그의 시가 뚜벅뚜벅 내 마음 속으로 걸어들어오니 마음이 두근두근...두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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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박종대 옮김 / 시공사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이런 작품들이 있다.

대표작(?)이 전해주는 감동으로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게 되는 거 말이다.

 

얼마전, 박경리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한국을 찾은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야말로 여기에 딱 맞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영화로도 유명한 그의 작품 <더 리더: 책 읽어 주는 남자>를 올 겨울에 다시 읽었고... 또 다시 감동을 받았더랬다.

그래서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우선 <귀향>과 <주말>부터 읽기 시작했다.

 

<귀향>은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를 변주한 작품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귀향하는 병사들...

그들은 환대받기도 하고 냉대받기도 한다.

남편의 부고 소식이 전달되지도 않았건만 고향에 남아 있던 아내는 이미 새로운 가정을 꾸민 경우도 있고...

엉뚱한 남자가 남편 행세를 하며 귀향한 병사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기도 하고...

 

말도 안 된다고...?

원래 전쟁이라는 게 그런 것이지 않은가? 

말도 안되는 이유들로 시작되고 끝나서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는 것도 모자라, 여러 사람의 인생을 비틀어 버린다. 

마치 전지전능한 신처럼...

 

<귀향>의 주인공 페터 데바우어 역시 이런 신의 장난과 변덕에서 자유롭지 못한 영혼 중 하나였을 뿐이다. 

 

스위스에 자리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집을 오가며 성장하지만 엄마와도 조부모와도 '아버지'이야기를 꺼내는 건 일종의 금기였다.

내가 누구인지 혹은 내가 누구의 자식인지 모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털어도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티끌'처럼 마음에 '딱' 달라붙어 수시로 상실감과 좌절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런 게 아닐까...

마치 순서가 어긋난 단추 채우기마냥 한번 비틀린 인생은 작은 바람에도 쉽사리 흔들리고 만다.

 

 

 

페터 데바우어는 소설 원고 교정을 하는 조부모의 집에서 이면지로 얻은 종이에 적힌 <기쁨과 재미를 주는 소설>을 읽게 된다. 소설의 결말이 너무 궁금했던 그는 성인이 되어 출판사 법률 분야 담당 편집자로 일하면서 이 소설을 쓴 작가를 수소문하게 된다.

 

이제야 나는 나를 사로잡은 귀향 이야기의 저자를 찾아냈다. 그는 1940~41년에 내가 살았던 도시에서 대학을 다녔고, 클라인 마이어 가 38번지의 람페 가족 집에 세 들어 살았으며, 베아테 람페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퇴짜를 맞았다. 그러다가 1941~42년 겨울 한케의 휘하로 들어갔고, 한케의 지시에 의해 종군 기자로 육성되었거나 바로 투입되었다. 1942년 여름에는 베아테를 다시 만났고, 이번에는 일시적으로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그 밖에 다른 정황들을 통털어 보건대 그는 한케가 죽기 전 몇 주 혹은 몇 달 동안 한케와 함께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존쟁이 끝난 뒤에는 클라인마이어가를 다시 찾았을 확률도 무척 크다. 그리고 이 방문과 1950년대 중반 사이의 어느 시기에 그 소설을 썼다. 1950년대 중반은 조부모가 내게 그 소설의 원고를 이면지로 쓰라고 주신 시점이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귀향> p189 中-

 

이 와중에 드러나는 어머니와의 불화(혹은 어머니의 비협조)는 또 다른 실마리를 제공한다. 자식을 사랑하지만 그 자식을 존재하게 해준 또 다른 존재(남편)에 대한 증오는 알게 모르게 자식에게 투영된다.  

 

부모가 이혼한, 한부모 자녀들이 앓게 되는 보이지 않는 질병 중에 하나는 헤어진 또 다른 부모(아빠/엄마)에 대한 이중적 감정이라고 한다. 부모니까 당연히 보고싶고 그립지만.... 함께 사는 부모를 위해 그 감정을 숨기거나 좌절시켜야만 한다. 심지어 부부 사이의 미움과 원망이 아이에게 고스란히 투영되어 필요이상으로 부모 중 어느 한쪽을 증오하기도 한다.

 

작품 속 주인공 역시 이런 이중적 감정에 시달린다. 

아빠가 누구인지 알고 싶고 궁금해하면서 그의 아들이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의 이와같은 욕구는 번번히 좌절되고 만다. 물론 처음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극단적으로 피하는 모친 탓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을 죽은 사람 취급하고 새출발을 한 부친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주인공은 바로 이런 부친의 진심을 꿰뚫어 보고는 아버지를 원망한다. 

 

이런 와중에 페터는 존 드 바우어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출간된 <법의 오디세이>라는 책의 번역과 출판을 의뢰받게 되면서 이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걸 직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를 만나보기 위해 그 몰래 그의 강의를 듣고 그가 주관하는 세미나까지 참석한다. 

 

페터는 아버지를 찾아서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걸까?

'왜 자식을 버리고 떠났느냐고 묻고 싶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자식을 사랑하지 않았느냐'고도 묻고 싶었겠지...

 

그러니까 이작품은...

인간이 짊어져야 하는 의무와 책임 그리고 의무와 책임을 다 하지 않았을 때 당연히 가질 수 밖에 없는 죄책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만약 당연히 가져야 할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건 또한 선인가? 아니면, 악인가?

 

역시 슐링크의 작품은 쉽지 않다.

법과 정의를 다루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선과 악의 세계로까지 확장된다.

 

제목이 '귀향'인 점 그리고 귀향을 다룬 <오디세이아>를 모티브로 했다는 점이야말로 이 작품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그건 다름 아닌, '인과관계'와 '근원'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유(원인)를 알게 되면 결과(행위)를 이해할 수 있다.

이해가 이처럼 중요한 까닭은 아마도 살기 위해서일 게다.

인간이란 단 한순간도 사랑없인 살 수 없는 존재이며, 사랑은 이해와 용서가 선행되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페터는 이해해야만 했다.

왜 자신에게는 아버지가 없는지를....

죽었다면 어떻게 죽었으며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을 테니까...

 

마지막 결말이 나로서는 유감스럽고 이해가 잘 되지는 않지만, 결국엔 아버지인 존 드 바우어교수의 의도를 아들인 페터 데 바우어가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결국 아버지가 어째서 죽은 사람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아들인 자신과 아내 곁을 떠났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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