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박종대 옮김 / 시공사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이런 작품들이 있다.

대표작(?)이 전해주는 감동으로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게 되는 거 말이다.

 

얼마전, 박경리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한국을 찾은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야말로 여기에 딱 맞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영화로도 유명한 그의 작품 <더 리더: 책 읽어 주는 남자>를 올 겨울에 다시 읽었고... 또 다시 감동을 받았더랬다.

그래서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우선 <귀향>과 <주말>부터 읽기 시작했다.

 

<귀향>은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를 변주한 작품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귀향하는 병사들...

그들은 환대받기도 하고 냉대받기도 한다.

남편의 부고 소식이 전달되지도 않았건만 고향에 남아 있던 아내는 이미 새로운 가정을 꾸민 경우도 있고...

엉뚱한 남자가 남편 행세를 하며 귀향한 병사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기도 하고...

 

말도 안 된다고...?

원래 전쟁이라는 게 그런 것이지 않은가? 

말도 안되는 이유들로 시작되고 끝나서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는 것도 모자라, 여러 사람의 인생을 비틀어 버린다. 

마치 전지전능한 신처럼...

 

<귀향>의 주인공 페터 데바우어 역시 이런 신의 장난과 변덕에서 자유롭지 못한 영혼 중 하나였을 뿐이다. 

 

스위스에 자리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집을 오가며 성장하지만 엄마와도 조부모와도 '아버지'이야기를 꺼내는 건 일종의 금기였다.

내가 누구인지 혹은 내가 누구의 자식인지 모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털어도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티끌'처럼 마음에 '딱' 달라붙어 수시로 상실감과 좌절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런 게 아닐까...

마치 순서가 어긋난 단추 채우기마냥 한번 비틀린 인생은 작은 바람에도 쉽사리 흔들리고 만다.

 

 

 

페터 데바우어는 소설 원고 교정을 하는 조부모의 집에서 이면지로 얻은 종이에 적힌 <기쁨과 재미를 주는 소설>을 읽게 된다. 소설의 결말이 너무 궁금했던 그는 성인이 되어 출판사 법률 분야 담당 편집자로 일하면서 이 소설을 쓴 작가를 수소문하게 된다.

 

이제야 나는 나를 사로잡은 귀향 이야기의 저자를 찾아냈다. 그는 1940~41년에 내가 살았던 도시에서 대학을 다녔고, 클라인 마이어 가 38번지의 람페 가족 집에 세 들어 살았으며, 베아테 람페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퇴짜를 맞았다. 그러다가 1941~42년 겨울 한케의 휘하로 들어갔고, 한케의 지시에 의해 종군 기자로 육성되었거나 바로 투입되었다. 1942년 여름에는 베아테를 다시 만났고, 이번에는 일시적으로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그 밖에 다른 정황들을 통털어 보건대 그는 한케가 죽기 전 몇 주 혹은 몇 달 동안 한케와 함께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존쟁이 끝난 뒤에는 클라인마이어가를 다시 찾았을 확률도 무척 크다. 그리고 이 방문과 1950년대 중반 사이의 어느 시기에 그 소설을 썼다. 1950년대 중반은 조부모가 내게 그 소설의 원고를 이면지로 쓰라고 주신 시점이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귀향> p189 中-

 

이 와중에 드러나는 어머니와의 불화(혹은 어머니의 비협조)는 또 다른 실마리를 제공한다. 자식을 사랑하지만 그 자식을 존재하게 해준 또 다른 존재(남편)에 대한 증오는 알게 모르게 자식에게 투영된다.  

 

부모가 이혼한, 한부모 자녀들이 앓게 되는 보이지 않는 질병 중에 하나는 헤어진 또 다른 부모(아빠/엄마)에 대한 이중적 감정이라고 한다. 부모니까 당연히 보고싶고 그립지만.... 함께 사는 부모를 위해 그 감정을 숨기거나 좌절시켜야만 한다. 심지어 부부 사이의 미움과 원망이 아이에게 고스란히 투영되어 필요이상으로 부모 중 어느 한쪽을 증오하기도 한다.

 

작품 속 주인공 역시 이런 이중적 감정에 시달린다. 

아빠가 누구인지 알고 싶고 궁금해하면서 그의 아들이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의 이와같은 욕구는 번번히 좌절되고 만다. 물론 처음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극단적으로 피하는 모친 탓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을 죽은 사람 취급하고 새출발을 한 부친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주인공은 바로 이런 부친의 진심을 꿰뚫어 보고는 아버지를 원망한다. 

 

이런 와중에 페터는 존 드 바우어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출간된 <법의 오디세이>라는 책의 번역과 출판을 의뢰받게 되면서 이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걸 직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를 만나보기 위해 그 몰래 그의 강의를 듣고 그가 주관하는 세미나까지 참석한다. 

 

페터는 아버지를 찾아서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걸까?

'왜 자식을 버리고 떠났느냐고 묻고 싶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자식을 사랑하지 않았느냐'고도 묻고 싶었겠지...

 

그러니까 이작품은...

인간이 짊어져야 하는 의무와 책임 그리고 의무와 책임을 다 하지 않았을 때 당연히 가질 수 밖에 없는 죄책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만약 당연히 가져야 할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건 또한 선인가? 아니면, 악인가?

 

역시 슐링크의 작품은 쉽지 않다.

법과 정의를 다루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선과 악의 세계로까지 확장된다.

 

제목이 '귀향'인 점 그리고 귀향을 다룬 <오디세이아>를 모티브로 했다는 점이야말로 이 작품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그건 다름 아닌, '인과관계'와 '근원'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유(원인)를 알게 되면 결과(행위)를 이해할 수 있다.

이해가 이처럼 중요한 까닭은 아마도 살기 위해서일 게다.

인간이란 단 한순간도 사랑없인 살 수 없는 존재이며, 사랑은 이해와 용서가 선행되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페터는 이해해야만 했다.

왜 자신에게는 아버지가 없는지를....

죽었다면 어떻게 죽었으며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을 테니까...

 

마지막 결말이 나로서는 유감스럽고 이해가 잘 되지는 않지만, 결국엔 아버지인 존 드 바우어교수의 의도를 아들인 페터 데 바우어가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결국 아버지가 어째서 죽은 사람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아들인 자신과 아내 곁을 떠났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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