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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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나온 하루키의 신간 단편집 『여자없는 남자들』을  최근에야 읽었어요.

'누군가를 너무 좋아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그러기 위해 노력해본 적이 있습니까?'라는 문장이 가슴 한켠으로 날아와 박혔던 기억이 아직도 얼얼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때의 상흔(?)이 미처 사라지기 전에 읽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키는 굳이 설명을 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요.

문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그 이름만큼은 들어봤을 만큼 명성이 자자한 일본의 대표작가라 할 수 있습니다. 1949년생이니 올해로 66세군요.


작품이 너무 많아서 그가 이른 나이에 작가가 됐을거라 여길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는 1978년 우리 나이로 서른살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작품으로 등단합니다. 야구장에 갔다가 외야쪽으로 길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야구공을 보면서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죠.



 

첫작품을 낸지 8년 후인 1987년 <노르웨이의 숲>으로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만  <상실의 시대>로 번역 출간된 한국에서는 별 주목을 끌지 못하다가 90년대 중후반에 가서야 뒤늦게 인기를 얻으면서 소위 '와타나베 신드롬'을 불러일으킵니다. 평론가들은 1997년 소위 '아시아금융위기(IMF)' 속에서 한순간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린 이십대 젊은이들이 하루키의 작품 속에서 동질감과 위안을 얻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지요. 그 당시 이십대였던 제가 무엇 때문에 방황했는지 이젠 구체적으로 떠오르지도 않지만 하루키를 만나고 순식간에 매료되었던 건 사실입니다. 


 

어디가 좋아? 뭐가 그렇게 좋은데?

라는 질문에는 우물쭈물 답을 하지 못했지만, 그저 마냥 좋아했던 기억만은 또렷합니다.



 

 

사실, 하루키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큼 그의 작품들은 줄거리를 딱히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와 어디선가 느꼈음직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하죠. 분명 존재하고 느낄 수 있지만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선율을 표현하는 작가로 하루키는 단연 최고가 아닐까 합니다. 물론, 작품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익숙한 멜로디의 노래 한두곡이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것도 다반사죠.


저는 하루키를 만날 때마다 그러니까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비틀즈 노래가 귓전을 맴돌곤 합니다. 무슨 주문처럼...

 


초여름의 나른함을 타고 동시에 찾아온 하루키와 비틀즈는 저에게 두가지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하루키의 소설은 들을 수 있고, 비틀즈의 노래는 읽을 수 있다는 거...  

 

그리고,

오블라디 오블라다...


즉,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는 거라는 거...


 

노래가사처럼...

소설속 주인공들처럼...


 

그렇게 어딘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그런 먼 곳으로 흘러가는... 그런 게, 바로 인생이라는 거...



 

 

 

 



#-책속의 문장들



가후쿠가 보기에,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술꾼이 있다. 하나는 자신에게 뭔가를 보태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고, 또하나는 자신에게서 뭔가를 지우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다카쓰키는 분명 후자였다. -드라이브 마이 카』中-



 

그 시절 나도 매일 밤 둥근 선창으로 얼음 달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두께 이십 센티미터에, 단단히 얼어붙은 투명한 달을. 하지만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달의 아름다움이나 차가움을 누군가와 공유하지 못한 채 나는 혼자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는/내일의 그저께고

그저께의 내일이라네  -예스터데이』中-



 

 

우리 인생을 저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고,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마음을 뒤흔들고, 아름다운 환상을 보여주고, 때로는 죽음에까지 몰아붙이는 그런 기관의 개입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분명 몹시 퉁명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혹은 단순한 기교의 나열로 끝나버릴 것이다.  -『독립기관』中-



 

 

 

인생이란 묘한 거야. 한때는 엄청나게 찬란하고 절대적으로 여겨지던 것이, 그걸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버려도 좋다고까지 생각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혹은 바라보는 각도를 약간 달리하면 놀랄 만큼 빛이 바래 보이는 거야. 내 눈이 대체 뭘 보고 있었나 싶어서 어이가 없어져." -『세에라자드』中-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고 당연히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하지도 못한다. 행복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이제 기노는 이렇다 하게 정의 내릴 수 없었다. 분노, 실망, 체념, 그런 감각도 뭔가 또렷하게 와닿지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렇듯 깊이와 무게를 상실해버린 자신의 마음이 어딘가로 맥없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둘 장소를 마련하는 것 정도였다.  -『기노』中-



 

 

내가 여기서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나 자신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사실이 아닌 본질을 쓰고 싶은 것이리라. 하지만 사실이 아닌 본질을 쓰는 일이란 달의 뒷면에서 누군가와 만나기로 약속하는 일과 다름없다. 캄캄하고 표지로 삼을 만한 것도 없다. 게다가 너무 넓다.  -『여자 없는 남자들』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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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는 아이 - 울지 않는 아이가 우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울지 않는 아이가 우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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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는 무라카미 하루키 못지 않게 국내에선 상당히 유명한 일본 작가인데, 이상하게도 그동안 나하고는 인연이 닿지 않은 작가 중 한명이다. 츠지 히토나리와 함께 쓴, <냉정과 열정 사이> 라는 작품도 읽었건만 단 한 줄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으니 읽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최근 읽기 위해 소환(?)한 아홉 권의 책들 중 에쿠니 가오리의 책들이 두 권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엔 단편소설 모음집 아니면 경장소설인 줄로만 알았더랬다. 그런데 읽다보니 수필이었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이십여년 전인 90년대 중후반에 쓰여진...


 

수필은 '타이밍'에 매우 민감한 장르라고 생각한다.

신변잡기를 나열한 오래된 수필일수록 문학사적 연구라면 모를까 일반인에게 커다란 공감이나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는 매우 어렵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냥 그런 사건과 감상들로부터 너무 많이 흘러온 것 뿐이다.  개인의 감상이나 일상이 아닌, 깊은 사색과 철학적 통찰력이 빛나는 수필만이 시간과 세월의 무게를 이겨낼 수 있다.


 

'읽을까? 말까?' 살짝 갈등했지만, 에쿠니 가오리에게 입문(?)할 수 있는 우연한 기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울지 않는 아이』는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2013년) 출판되었지만 일본에서는 1997년 출판된 수필집으로 그녀가 8년동안 써왔던 수필 모음집이라고 하니, 20대중반에서 30대 초반까지의 에쿠니 가오리를 만날 수 있다. 만약 그녀의 팬이라면 지금은 50대인  작가의 젊은 시절은 어땠을까? 하는 호기심을 채우기엔 더할나위 없을 것 같다.


다만, 나처럼 그녀의 작품을 단 한권도 읽지 않은 -아니, 읽었을 테지만 단 한 글자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으니 안 읽은 셈이나 마찬가지- 사람이라면 그녀의 독서일기에 시선이 꽂힐지도 모른다. 그녀의 독서일기 덕분에 나의 독서목록이 단 하루만에 수십줄로 늘어났다. 


젊은 작가의 마음을 휘어잡은 작품에 대한 서평이기 때문일까? 

그녀의 독서일기에 등장하는 작품들은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좋고 또 좋았다.  물론, 나도 잘 안다. 타인의 독후감에 낚여 읽게 된 작품들이 반드시 나에게도 좋은 감상을 전해주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번역 출판되지 않은 작품이라도 있으면 아쉬움부터 솟구쳤다. 그만큼 그녀의 독후감은 세련되고 멋스럽다. 어쩜 그렇게 글들이 모두 하나같이 예쁘게 차려진 신혼부부의 밥상 같은지...


그렇다고 그냥 앙증맞기만 한 건 절대 아니다. 비교적 젊은 시절에 쓴 글들임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프로답다. 묵직한 중량감이랄까... 적잖은 독서량과 글쓰기 연습을 거친 문장들은 어딘지 달라도 다른 법이고, 아마 이와 같은 점들이 2,30대 여성 독자층의 감성을 건드리지 않았나 싶다. 가령, 메리 웨슬리의 <마지막 날의 시작>이나 존 치버의 단편집에 대한 그녀의 글 속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나온다.



 

글 쓰는 다른 사람들이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몹시 궁금한데, 나는 압도적으로 재미있고 질도 좋은 데다 완성도도 높고, 게다가 신선한 소설을 만나면 당황스럽다. 아, 소설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수긍하고 나면 소설 쓸 용기를 잃고 만다. 태생이 낙천적인 성격이라서 그런 일이 흔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간혹(가나이 미에코 씨나 비어트릭스 포터를 읽었을 때) 그런 기분이 덮치곤 한다. 이번에는 팀 오브라이언이었다. 소설이란 이렇게 입체적으로 구축되어야 하는 것, 이라는 현기증 같은 마음속 목소리. -『울지 않는 아이』p106 中-



같은 가족이나 부부를 그려도, 예를 들어 카버나 업다이크가 가족과 부부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반해 치버의 초점은 한 인간의 내면적 고독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도망갈 곳이 없다. 읽는 이는 그 엄격함에 질리고 우울해지며, 때로는 큰 타격을 받는다. (...) 게다가 이 사람의 굉장한 점은 이야기를 파탄으로 이끌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비관적인 시각을 갖고 있으니, 은둔 생활을 하며 바깥 세상을 조소적으로 바라봐야 할 텐데, 이 사람은 완강하게 버틴다. 도망치지 않는다. 세상에 구원 따윈 없다고 쓰지만, 그래도 절망은 선택하지 않는다. 그리고 작가가 절망하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쓰는 소설은 제 아무리 비관적으로 보이는 이야기라도 하나하나가 이미 구원이다.


 - 『울지 않는 아이』p111~113 中 발췌-

  



온 몸으로 감동하지 않으면 절대로 뽑아낼 수 없는 문장들이다.

이와 같은 글들을 읽고 어떻게 메리 웨슬리와 존 치버의 작품들을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해서, 그녀 덕분에 나는 그동안 풍문으로만 들어왔던 작가들과 작품들을 읽게 될 것같다.



 

 

존재 자체가 아름다운 책이 있다. 그림이나 문장은 물론, 여백까지도 아름다운  책.

스콧 피츠제럴드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있는 연인을 보고, "하루에 열 페이지 이상은 읽지 않는 게 좋을 거야"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천천히, 꼼꼼하게 읽고서,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읽은 부분을 잘 소화시켜야 해"하고.


앙리 드 레니에의 <베니치아 풍물지> 역시 그런 책이라고 생각한다. 전편이 시에 아주 가까운 산문으로, 언어가 집어내는 이미지의 아름다움에 현기증마저 인다. 언어가 지니는 일종의 마약 같은 힘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강력한 힘을 지닌 문장은 한꺼번에 많이 읽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관능적이기 때문에, 조금씩 읽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언어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울지 않는 아이』p117 中 -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은 일찍이 스콧 피츠제럴드와 프랑수와즈 사강을 매료시키더니, 아쿠니 가오리도 예외없이 당했다!


특히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슬픔이여 안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를 쓴, 프랑수와즈 사강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작품 속 여주인공의 이름인 '사강'을 자신의 필명으로 삼지 않았던가.


 

한편, 에쿠니 가오리는 사랑과 연애를 그려내는데 있어서 최고의 작가로 프랑수와즈 사강을 꼽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나 역시 절대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신간을 읽고서 실망하는 일이 없는 흔치 않은 작가에 프랑수아즈 사강이 있다. (...) 탁월한 문학이 지니는 힘, 그 깊이와 강함과 아름다움을 이 작가만큼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가도 없다. (...) 연애를 바짝 졸이고 졸인 소설, 브랜디를 듬뿍 머금은 케이크처럼 속속들이 연애로 절여진 소설이다. 그러면서도 몹시 신랄하고, 인간의 슬픔에 거침없이 도달하는 예리함이 그야말로 사강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 읽는 이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 소설(<사랑은 속박>)을 읽으면서 점점 더 로랑스에게 매료되었지, 뱅상은 한 번도 동정하지 않았다. 로랑스는, 뱅상의 말을 빌리면 이런 여자다.

 

 

 머리는 좋지만 기지는 없다. 돈은 헤프게 쓰지만 너그러운 베풂은 없다. 아름답지만 매력은 없다. 헌신적이지만 친절함은 없다. 기민하지만 생기발랄하지 않다. 타인을 부러워하지만 스스로 바라는 것은 없다. 그녀는 사람을 헐뜯지만 증오하지는 않고, 자존심은 세지만 자긍심은 없으며, 친근하게 굴지만 따뜻함은 없다. 감수성은 풍부하지만 상처 입는 일은 없다. 그녀는 어린애 같지만 순수함은 없고, 투덜거리기는 해도 포기하지 않으며, 값비싼 옷을 입고 있어도 우아하지 않고, 신경질적이지만 분노는 없다. 그녀는 솔직하지만 성실하지 않고, 겁은 많지만 두려움을 모른다. 그러니까 즉 정열은 있어도 사랑은 없는 것이다. 


 

사강의 문장은 숨 막힐 정도로 긴밀하고 감미롭고 산뜻하다. (...) 사랑을 둘러싼 인간의 심리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이렇듯 아름답고 상큼하게 그려낼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에쿠니 가오리,『울지 않는 아이』p108~110 中 -

 

 

아, 프랑수와즈 사강....

이름만 들어도 애잔해지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작품을 떠나 그냥 인간적으로 너무 좋다. 나와는 너무 다른 인종이라서...

원래부터 비범함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일상은 어쩔 수없이 '비범'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나는 그 전형에 해당하는 인물이 바로 사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설령 그녀의 이름과 작품은 낯설지언정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유명한 말은 다들 들어봤을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작가 중 한명도 그녀의 이 말을 책 제목으로 빌려왔더랬지...

 

 


끝으로,

나와 너무 취향이 같아서 깜짝 놀란 부분이 있어 옮겨본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시간을 멈추게 하는 행위다.

나도 찻집을 좋아한다. 대개는 혼자서 간다. 누구랑 같이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니, 신이 날 때도 있다-하지만 찻집에 가는 것 자체를 즐기기에는 혼자가 훨씬 좋다. (...) 문제는 좋아하는 찻집이다. 좋아하는 데다 늘 혼자가는 찻집에, 같이 가도 행복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하지만, 좋아한다고 해서 너무 가까운 사람은 또 안 된다.

그렇지 않은가. 나그네가 되기 위해 가는 장소다. 일상을 끌여들일 수는 없다. 그러니 같이 가는 사람도 소설 속 사람같은 이가 좋다. 마음 속에서는 아주 가깝지만, 마음 밖에서는 먼 사람.

 -에쿠니 가오리,『울지 않는 아이』p195~196-

 

 

좋아하지만 또한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되는 사람...

마음 속에서는 아주 가깝지만, 마음 밖에서는 아주 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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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 - 제135회 나오키 상 수상작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들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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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 글을 참 쉽게 쓴다.

초연함이랄까...?

절박하게 애태우며 매달리는 게 아니라, 무심한 듯 '툭'하고 내뱉어 버리는 '쿨'함이 있다.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라도 그녀의 손끝만 거치면 자연스럽고 편안해진다. 예전엔 이런 글들 별로라 생각했더랬다. 무릇, 문학이란 무게감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으니까... 그러나 언젠가부턴 진짜 이야기꾼은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할 줄 아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마호로역 다다 심부름집』



 

이 작품 역시 소녀스러운 발상과 문장들로 가득하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작가의 속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오히려 누구나 골치 아프고 피하고 싶은 일들 한두 가지 쯤은 가지고 살아가는 이 시대에, 심부름집을 창업(?)하여 사람들을 위무하고자 하는 작가의 그 배려가 참 따뜻하다.


연로한 부모를 외면하는 친자식을 대신하여 문안 인사를 가고... 바쁜 부모 대신 초등학생을 귀가시켜주는가 하면... 버스 시간을 기록하고 집주인 대신 창고와 마당을 청소해준다.



 

 

만약에 마음의 무게만을 따로 잴 수 있는 저울이 있어서 비밀을 간직한 사람이 그 저울 위에 올라간다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우리 체중의 상당 부분을 마음이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비밀이 끝까지 지켜지기 어려운 건 비밀 자체가 가지고 있는 중요성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무게감에 마음이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밀은 날카로운 흉기가 되어 우리 마음을 수시로 겁주고 위협하여 주저앉혀 버리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동창생인 다다와 교텐 역시 단 둘만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 특히, 다다의 입장에서 교텐은 영원히 피하고 싶은 비밀이었다. 그 비밀은 주머니 속에 감춰둔 송곳처럼 다다의 마음을 수시로 쿡쿡 찔러댄다. 



 

무슨 말을 해도 이제 와서는 돌이킬 수 없다.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 교텐의 손가락은 잘렸다. 그 사실만이 영원히 괴롭게 남을 것이다.


"장난치던 녀석들은 교텐한테 울면서 사과했지만, 나는 사과할 수 없었어. 내가 한 짓을 고백할 용기가 없었거든. 잠자코 있으면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하지만 교텐은 눈치 챘을 거야. 바닥에 떨어진 손가락을 주울 때 그 녀석은 뒹굴고 있던 의자를 봤어. 그것만으로 녀석은 누가 앉았던 의자인지, 어떻게 해서 일이 벌어졌는지 다 알아차렸을 거야. 녀석은 내가 자기를 싫어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거든." -p251~252

 

 


'사과조차 할 수 없고, 용서조차 구할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다다의 마음 속 깊숙히 잠겨 있던 비밀이었다.


 

다다가 아무리 털어내려해도 떨어지지 않는 먼지와 같던 그 '비밀'을 어느날 불쑥 나타난 교텐이 툭툭 털어준다. 그 순간 다다의 마음은 얼마나 홀가분했을까...


알고 보니, 교텐은 '물(水)'과 같은 사람이었다. 상처와 오물을 깨끗하게 씻어 주고, 자신을 드러내거나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꼭 필요한 존재...



 

"하루짱은 물을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시의 한 구절을 낭송하듯 나기코의 목소리는 고요하게 잦아들었다. "그 사람을 폭포수처럼 거칠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거고, 차갑고 맑은 정취를 가졌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물이 어떤 영향을 끼치든 생물이 사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인 것처럼, 하루짱은 우리한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친구랍니다. 설령 두 번 다시 만나는 일이 없다 해도. 그래서 딸아이 이름도 '하루'라고 지었습니다. 소중한 이름이죠."


희망의 빛. 다다는 감동했다. 교텐의 이름을 희망과 함께 부르는 이가 있다. -p188~189

 



거리가 좁혀지면 질수록 서로 부딪친다. 부딪치면 아프고 상처가 난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가까워질수록 물집이 생기고 생채기가 난다. 그리고 진짜 관계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아픔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관계를 지속시켜 나간다면 상처는 어느덧 아물고 새살이 돋아나며 굳은살이 잡히면서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된다.

 


일본인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로 유명하다.


가족마저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거리를 둔다. 짐이란 곧 상처다.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일본인 특유의 성향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는다. 사람 사이의 거리란, 좁혀지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는 것이라고 한다.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아픔을 극복하는 것처럼...



 

미우라 시온은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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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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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눈으로 읽을 때보다 입으로 낭독할 때가 훨씬 좋은 거 같아요.


장편보단 단편, 특히 이야기도 등장인물도 명확하지 않아서 뭐가 뭔지 모호하기만 한 작품일수록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마치 흡수되지 않고 반사되기만 하는 빛처럼 눈으로 들어오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기만 하던 문장들을 나직히 소리내어 읽다보면, 어느순간 소리소문없이 스며드는 빗물처럼 마음이 촉촉해지곤 합니다.



며칠 전이었어요.


주위는 소음으로 가득찼고... 제 마음은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이런 순간이 오면 저는 책 속으로 도망을 치곤 하는데, 그때 저에게 문을 열어준 책이 다름아닌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이었지요.

이 작품은 1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짧은 서간체 단편이지만, 상실의 아픔을 절절히 표현한 작품으로도 유명하지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 의해 동명 영화로도 만들어져 호평을 받은 바 있지요.


 


저는 이 작품을 읽을 때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는 남편의 죽음에 허물어진 주인공처럼, 저 역시 작가의 의도도 작품의 주제도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으니까요.



저도 처음에는 화자인 아내와 함께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간 이유를 열심히 찾아나섰더랬지요. 

그녀는 어린시절 살았던 동네부터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치매를 앓으셨던 친할머니도 만나고... 힘겹게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던 부모님의 모습도 봅니다. 물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초라한 자신의 어린 모습까지 마주하지요.



​그러고 보면, 기억이라는 거...

참 야속하고 잔인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싶은 것일수록 깊게 깊게 새겨놓아, '이젠 잊기로 했고, 정말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시도때도 없이 불쑥불쑥 되살려 놓아 사람을 난감하게 만드니 말이지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기억이라는 녀석은 참 지독한 면이 있는 거 같아요.

어린 시절 남편과 함께 보냈던 아마가사키의 '마쓰다 아파트'에도 가보고 오쿠노토의 소소기 해변 마을의 앞바다까지 훑었지만, 남편은 말이 없습니다.


단 한마디면 되련만...

더도 덜도 아닌 그저 딱 한마디만 해주면 되련만...

남편은 고집스럽게 뒷모습만 보일 뿐이지요.



우리가 이별이나 상실 혹은 실패를 힘겨워하는 건, 그 자체가 가져다주는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이 아니라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유를 알았다면, 그리고 그 이유가 타당하다면...? 우리는 고통이 아무리 크고 끝이 없다한들 견뎌낼 수 있어요. 


우리가 모든 행동과 결과에 대해 이유를 알고자 하는 건, 그것 자체가 우리 삶의 본질을 이루는 일부분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삶의 의미 즉 삶의 이유를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삶 자체가 정말 다르듯이 말입니다.

 



눈으로 읽던 문장들을 입으로 소리내어 읽기 시작하자 불연듯 깨닫게 되었지요.

아, 화자인 아내를 절망케 한 건 남편의 부재 자체가 아니라 그 부재를 불러온 이유였다는 걸...  

상실에 대한 이유를 알아야만 받아들일 수 있고 잊을 수 있는 거죠.


왜, 떠났을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화자인 아내가 원한 것도 단 한가지였습니다.

왜 남편이 자살이라는 형식으로 가족 곁을 떠나야만 했었는지 바로 그 이유였더랬죠.


그러나...

남편은 말이 없습니다.



 

정말, 사람은 혼이 빠져나가면 누구나 죽고싶어지는 법일까요?




마지막으로...

낭독에는 놀라운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읽는 것도 듣는 것도 믿을 수 없을만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다만,

둘 중 어느것이 더 좋으냐고 저에게 물으신다면...?

저는 외롭고 슬플땐 주로 입으로 낭독하고...

그 반대일 땐 주로 귀로 듣지만, 사실 거의 대부분은 눈으로 읽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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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6
잭 케루악 지음, 이만식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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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읽었다.

읽고 싶지 않았지만...



여름엔 주로 추리소설을 읽어오던 습관을 바꿔 올핸 소위 '고전명작'이라고 하는 것들을 읽어 보기로 결심한 후, 요즘 대세(?)인 헤르만 헤세 작품들과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기로 결정했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호밀밭의 파수꾼』은 무척 재밌게 읽혔다. 은둔의 작가로 타계할 때까지 수많은 풍문을 만들어냈던 샐린저의 기이함과 괴팍함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고자 했고, 할 줄 아는 거라곤 비속어와 징징거리기 뿐인 주인공에게도 은근히 친절해졌달까.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발단은 『호밀밭의 파수꾼』에 대한 나의 관심이 적정선을 넘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올랐다는 데에 있었다. 그리하여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검색들을 하다가 하필이면 최근 나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작가가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를 두고는, 『호밀밭의 파수꾼』보다 백배는 더 재밌는 작품이라고 발언(?)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배, 세배, 열배도 아니고 무려 백배라고...???'


읽고 싶은 않았던 작품을 읽게 된 사연이다. 





2차대전 이후 50년대 '비트 세대'의 상징이자 60년대 히피문화의 탄생을 불러온 이 작품은 자전적 소설로, 작가 지망생이었던 잭 케루악(샐 파라다이스)이 콜럼비아대학 기숙사에서 출소(소년원)한지 얼마 안 된 네살 연하의 닐 캐시디(딘 모리아티)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프랑스계 캐나다인이었던 잭 케루악에게 뒷골목에서 자라난 닐 캐시디는 처음부터 태양처럼 빛나는 존재로 다가왔다.

 


그렇다. 내가 단순히 작가로서 새로운 경험이 필요했거나 교정 주변을 맴돌기만 하는 내 삶의 무기력함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딘을 더 알고 싶어진 것은 아니다. (...)  당시 내가 사귀고 있던 다른 친구들은 모두 '지식인'들이었다. 채드는 니체적 인류학자였고, 카를로 막스는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응시하며 이야기하는 미친 초현실주의자였고, 올드 불 리는 느린 말투로 무조건 모든 것에 반대하는 비평가였다. 하지만 딘의 빛나는 지성은 모든 면에서 격식을 갖추고 있었고 완전하면서도 지식인스럽지가 않았다. 


딘은 서쪽에서 온 태양의 자손이었다. 이모는 그와 어울리면 말썽에 휘말릴 거라고 경고했지만, 나는 새로운 부름을 받았고 새로운 지평선을 봤으며 젊은 나이에도 그것을 믿을 수 있었다. (...) 나는 젊은 작가였고 날아오르고 싶었다.

따라가다 보면 어딘가에 여자, 미래, 그 모든 것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난 알고 있었다. 따라가다 보면 어딘가에서 내게 진주가 건네질 것이다.  -잭 케루악 『길 위에서』p20~22 中-


작가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내적인 욕망과 백인이면서도 미국사회에서 결코 주류가 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은 잭 케루악으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분노와 견딜 수 없는 불안을 안겨줬을 것이다. 한편, 알콜중독자인 아버지와 이곳저곳 떠돌면서 일찌감치 '거리의 아이'로 자라난 닐 캐시디의 즉흥적이고 쾌락적인 성향은 잭의 분노와 불안을 씻어낼 만큼 강하고 거침이 없었다.


전후 눈부신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성공지향적 소비중심적 사회로 빠르게 접어들고 있는 당시의 미국 사회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잭(샐 파라다이스)과 원래부터 제자리가 없었던 닐(딘 모리아티)이 길 위로 나서게 된 건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일지도 모른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다시 서부에서 동부로 그리고 멕시코까지 그들은 마약과 즉흥 파티, 차량절도와 소소한 범죄행각 등을 일삼으면서 시속 177km로 미친듯이 질주한다.

 

그들은 그 길 위에서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무엇을 보았으며 또한 무엇을 얻었을까?



난 탐욕스럽게 창밖을 내다봤다. 창밖엔 치장 벽토를 바른 집과 야자수와 드라이브인 식당, 온갖 미친 짓거리, 초라한 약속의 땅, 미국의 환상적인 종말이 있었다. 중심가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붉은 벽돌, 더러움, 부유하는 사람들, 희망 없는 새벽에 삐걱거리며 나아가는 전차, 매춘부 같은 대도시의 냄새 등 캔자스시티나 시카고나 보스턴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p135


문득 내가 타임스스퀘어에 돌아와 있음을 깨달았다. 1만3000킬로미터에 걸쳐 미 대륙 전체를 돌고 돈 끝에 다시 타임스스퀘어에 돌아온 것이다. 나는 러시아워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시간에, 길에 익숙해진 순진한 눈으로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끝없이 서로 으르렁대는 뉴욕의 절대적인 광기와 환상적인 혼잡함을, 그 미친 꿈을 보았다. -p174


우리는 허섭스레기 한 보따리를 든 채 좁다랗고 낭만적인 길거리를 떠돌았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절망에 빠진 단역배우 아니면 한물간 반짝 스타 같아 보였다. 꿈에서 깬 스턴트맨들, 난쟁이 카 레이서들, 막다른 곳에 다다른 듯한 슬픔에 잠긴 캘리포니아의 독설가들, 퇴폐적 매력을 풍기는 잘생긴 난봉꾼들, 수면 부족으로 눈이 부은 모텔의 금발 여자들, 도박사들, 포주들, 창녀들, 안마사들, 벨 보이들. 하나같이 한심한 인생들뿐이었다. 대체 이런 인간들 사이에서 어떻게 어울려 생활하면 된단 말인가? -p279


서부의 LA, 샌프란시스코도 캔자스시티나 시카고 보스턴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실망한 그들은 또 다시 길 위에 선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곳엔 진주 대신 환멸만 가득할 뿐이다.


대도시(뉴욕)의 절대적인 광기와 혼잡으로 어우러진 미친 꿈을 피해 그들은 또 다시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어쩌면...

애초 목적지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다시, 길 위에 선다는 것.

그들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이것 단 한가지 뿐이었는지도...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는 J.D 샐린저의『호밀밭의 파수꾼』과 함께 대표적인 '컬트서적'으로 손꼽힌다. 

'컬트서적'이란 기존의 사회질서와 가치관을 부정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쓰여진 책을 말한다. 그래서 기성세대에게는 철저하게 외면당하는 대신 젊은층에게는 광적으로 추앙받는 기현상을 종종 불러온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한때의 유행으로 잊혀지거나 정반대로 새시대의 중심 가치관으로 자리잡으면서 '컬트적'이라는 수식어 대신 '대중적'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고, 여기서 다시 더 많은 시간이 흐르면 '고전 명작'의 반열에 오르는 경우도 흔하다.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와 괴테의『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비롯하여 오늘날 우리가 고전 명작이라 입이 닳도록 칭송하는 작품들 역시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왔다. 어디 문학뿐이랴. 음악, 미술 등등... 모든 예술 분야에서 '아방가르드(전위)'야말로 예술을 존재케 하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지 않은가. 


하지만 모든 전위 예술이 그렇듯, 어렵다.

이 책 역시 읽기 어렵다. 내용이 어렵고 쉽고를 떠나 일단 '스토리'자체가 없다. 문장 구조도 이상하고 도중에 뚝뚝 끊기기 일수에다가 나오는 이야기라고 해봤자, 마약 아니면 섹스에 간간히 폭력과 절도 뭐 이런 것들이다. 하긴 뭐, 잭 케루악이 타자용 종이를 36미터로 길게 이어 붙인 후 그 위에 단락 구분도 없이 심지어 마침표나 쉼표도 거의 사용하지 않은 채 단 3주만에 써내려갔다고 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지만...



그렇다면, 이런 작품을 고전 명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명작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일독(一讀)의 의미는 있는 걸까?

있다면 무엇이고,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




이 책을 읽는 동안 '이런 쓰레기같은...(책)'이라는 말이 수시로 목언저리를 타고 올라왔고, 그때마다 '백배나 더 좋다'라고 말한 작가의 얼굴을 떠올려야만 했다.  


사실 나와 같은 사람이 믿는 철칙 같은 게 하나 있다면, 그건 '독자가 언제나 옳지만 절대로 작가를 이길 수는 없다'라는 말일 것이다. 독자가 좋다고 하면 좋은 (작품인) 거고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지만, 작가보다 작품을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건 아니므로...


작가란, 비록 수시로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이지만 또한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바로 이 한가지 이유 때문에라도 우리는 책을 읽는 것이고, 작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하여, 나는 찾아야만 하리라.

백배보다 더 좋다고 말한 그 이유를...

끝까지 읽고 싶지 않았던 이 책을 끝내 읽게 된 그 이유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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