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않는 아이 - 울지 않는 아이가 우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울지 않는 아이가 우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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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는 무라카미 하루키 못지 않게 국내에선 상당히 유명한 일본 작가인데, 이상하게도 그동안 나하고는 인연이 닿지 않은 작가 중 한명이다. 츠지 히토나리와 함께 쓴, <냉정과 열정 사이> 라는 작품도 읽었건만 단 한 줄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으니 읽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최근 읽기 위해 소환(?)한 아홉 권의 책들 중 에쿠니 가오리의 책들이 두 권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엔 단편소설 모음집 아니면 경장소설인 줄로만 알았더랬다. 그런데 읽다보니 수필이었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이십여년 전인 90년대 중후반에 쓰여진...


 

수필은 '타이밍'에 매우 민감한 장르라고 생각한다.

신변잡기를 나열한 오래된 수필일수록 문학사적 연구라면 모를까 일반인에게 커다란 공감이나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는 매우 어렵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냥 그런 사건과 감상들로부터 너무 많이 흘러온 것 뿐이다.  개인의 감상이나 일상이 아닌, 깊은 사색과 철학적 통찰력이 빛나는 수필만이 시간과 세월의 무게를 이겨낼 수 있다.


 

'읽을까? 말까?' 살짝 갈등했지만, 에쿠니 가오리에게 입문(?)할 수 있는 우연한 기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울지 않는 아이』는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2013년) 출판되었지만 일본에서는 1997년 출판된 수필집으로 그녀가 8년동안 써왔던 수필 모음집이라고 하니, 20대중반에서 30대 초반까지의 에쿠니 가오리를 만날 수 있다. 만약 그녀의 팬이라면 지금은 50대인  작가의 젊은 시절은 어땠을까? 하는 호기심을 채우기엔 더할나위 없을 것 같다.


다만, 나처럼 그녀의 작품을 단 한권도 읽지 않은 -아니, 읽었을 테지만 단 한 글자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으니 안 읽은 셈이나 마찬가지- 사람이라면 그녀의 독서일기에 시선이 꽂힐지도 모른다. 그녀의 독서일기 덕분에 나의 독서목록이 단 하루만에 수십줄로 늘어났다. 


젊은 작가의 마음을 휘어잡은 작품에 대한 서평이기 때문일까? 

그녀의 독서일기에 등장하는 작품들은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좋고 또 좋았다.  물론, 나도 잘 안다. 타인의 독후감에 낚여 읽게 된 작품들이 반드시 나에게도 좋은 감상을 전해주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번역 출판되지 않은 작품이라도 있으면 아쉬움부터 솟구쳤다. 그만큼 그녀의 독후감은 세련되고 멋스럽다. 어쩜 그렇게 글들이 모두 하나같이 예쁘게 차려진 신혼부부의 밥상 같은지...


그렇다고 그냥 앙증맞기만 한 건 절대 아니다. 비교적 젊은 시절에 쓴 글들임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프로답다. 묵직한 중량감이랄까... 적잖은 독서량과 글쓰기 연습을 거친 문장들은 어딘지 달라도 다른 법이고, 아마 이와 같은 점들이 2,30대 여성 독자층의 감성을 건드리지 않았나 싶다. 가령, 메리 웨슬리의 <마지막 날의 시작>이나 존 치버의 단편집에 대한 그녀의 글 속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나온다.



 

글 쓰는 다른 사람들이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몹시 궁금한데, 나는 압도적으로 재미있고 질도 좋은 데다 완성도도 높고, 게다가 신선한 소설을 만나면 당황스럽다. 아, 소설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수긍하고 나면 소설 쓸 용기를 잃고 만다. 태생이 낙천적인 성격이라서 그런 일이 흔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간혹(가나이 미에코 씨나 비어트릭스 포터를 읽었을 때) 그런 기분이 덮치곤 한다. 이번에는 팀 오브라이언이었다. 소설이란 이렇게 입체적으로 구축되어야 하는 것, 이라는 현기증 같은 마음속 목소리. -『울지 않는 아이』p106 中-



같은 가족이나 부부를 그려도, 예를 들어 카버나 업다이크가 가족과 부부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반해 치버의 초점은 한 인간의 내면적 고독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도망갈 곳이 없다. 읽는 이는 그 엄격함에 질리고 우울해지며, 때로는 큰 타격을 받는다. (...) 게다가 이 사람의 굉장한 점은 이야기를 파탄으로 이끌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비관적인 시각을 갖고 있으니, 은둔 생활을 하며 바깥 세상을 조소적으로 바라봐야 할 텐데, 이 사람은 완강하게 버틴다. 도망치지 않는다. 세상에 구원 따윈 없다고 쓰지만, 그래도 절망은 선택하지 않는다. 그리고 작가가 절망하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쓰는 소설은 제 아무리 비관적으로 보이는 이야기라도 하나하나가 이미 구원이다.


 - 『울지 않는 아이』p111~113 中 발췌-

  



온 몸으로 감동하지 않으면 절대로 뽑아낼 수 없는 문장들이다.

이와 같은 글들을 읽고 어떻게 메리 웨슬리와 존 치버의 작품들을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해서, 그녀 덕분에 나는 그동안 풍문으로만 들어왔던 작가들과 작품들을 읽게 될 것같다.



 

 

존재 자체가 아름다운 책이 있다. 그림이나 문장은 물론, 여백까지도 아름다운  책.

스콧 피츠제럴드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있는 연인을 보고, "하루에 열 페이지 이상은 읽지 않는 게 좋을 거야"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천천히, 꼼꼼하게 읽고서,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읽은 부분을 잘 소화시켜야 해"하고.


앙리 드 레니에의 <베니치아 풍물지> 역시 그런 책이라고 생각한다. 전편이 시에 아주 가까운 산문으로, 언어가 집어내는 이미지의 아름다움에 현기증마저 인다. 언어가 지니는 일종의 마약 같은 힘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강력한 힘을 지닌 문장은 한꺼번에 많이 읽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관능적이기 때문에, 조금씩 읽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언어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울지 않는 아이』p117 中 -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은 일찍이 스콧 피츠제럴드와 프랑수와즈 사강을 매료시키더니, 아쿠니 가오리도 예외없이 당했다!


특히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슬픔이여 안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를 쓴, 프랑수와즈 사강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작품 속 여주인공의 이름인 '사강'을 자신의 필명으로 삼지 않았던가.


 

한편, 에쿠니 가오리는 사랑과 연애를 그려내는데 있어서 최고의 작가로 프랑수와즈 사강을 꼽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나 역시 절대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신간을 읽고서 실망하는 일이 없는 흔치 않은 작가에 프랑수아즈 사강이 있다. (...) 탁월한 문학이 지니는 힘, 그 깊이와 강함과 아름다움을 이 작가만큼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가도 없다. (...) 연애를 바짝 졸이고 졸인 소설, 브랜디를 듬뿍 머금은 케이크처럼 속속들이 연애로 절여진 소설이다. 그러면서도 몹시 신랄하고, 인간의 슬픔에 거침없이 도달하는 예리함이 그야말로 사강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 읽는 이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 소설(<사랑은 속박>)을 읽으면서 점점 더 로랑스에게 매료되었지, 뱅상은 한 번도 동정하지 않았다. 로랑스는, 뱅상의 말을 빌리면 이런 여자다.

 

 

 머리는 좋지만 기지는 없다. 돈은 헤프게 쓰지만 너그러운 베풂은 없다. 아름답지만 매력은 없다. 헌신적이지만 친절함은 없다. 기민하지만 생기발랄하지 않다. 타인을 부러워하지만 스스로 바라는 것은 없다. 그녀는 사람을 헐뜯지만 증오하지는 않고, 자존심은 세지만 자긍심은 없으며, 친근하게 굴지만 따뜻함은 없다. 감수성은 풍부하지만 상처 입는 일은 없다. 그녀는 어린애 같지만 순수함은 없고, 투덜거리기는 해도 포기하지 않으며, 값비싼 옷을 입고 있어도 우아하지 않고, 신경질적이지만 분노는 없다. 그녀는 솔직하지만 성실하지 않고, 겁은 많지만 두려움을 모른다. 그러니까 즉 정열은 있어도 사랑은 없는 것이다. 


 

사강의 문장은 숨 막힐 정도로 긴밀하고 감미롭고 산뜻하다. (...) 사랑을 둘러싼 인간의 심리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이렇듯 아름답고 상큼하게 그려낼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에쿠니 가오리,『울지 않는 아이』p108~110 中 -

 

 

아, 프랑수와즈 사강....

이름만 들어도 애잔해지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작품을 떠나 그냥 인간적으로 너무 좋다. 나와는 너무 다른 인종이라서...

원래부터 비범함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일상은 어쩔 수없이 '비범'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나는 그 전형에 해당하는 인물이 바로 사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설령 그녀의 이름과 작품은 낯설지언정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유명한 말은 다들 들어봤을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작가 중 한명도 그녀의 이 말을 책 제목으로 빌려왔더랬지...

 

 


끝으로,

나와 너무 취향이 같아서 깜짝 놀란 부분이 있어 옮겨본다.


 

차를 마신다는 것은 시간을 멈추게 하는 행위다.

나도 찻집을 좋아한다. 대개는 혼자서 간다. 누구랑 같이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니, 신이 날 때도 있다-하지만 찻집에 가는 것 자체를 즐기기에는 혼자가 훨씬 좋다. (...) 문제는 좋아하는 찻집이다. 좋아하는 데다 늘 혼자가는 찻집에, 같이 가도 행복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하지만, 좋아한다고 해서 너무 가까운 사람은 또 안 된다.

그렇지 않은가. 나그네가 되기 위해 가는 장소다. 일상을 끌여들일 수는 없다. 그러니 같이 가는 사람도 소설 속 사람같은 이가 좋다. 마음 속에서는 아주 가깝지만, 마음 밖에서는 먼 사람.

 -에쿠니 가오리,『울지 않는 아이』p195~196-

 

 

좋아하지만 또한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되는 사람...

마음 속에서는 아주 가깝지만, 마음 밖에서는 아주 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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