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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고코로
누마타 마호카루 지음, 민경욱 옮김 / 서울문화사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엄마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너희들이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러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너희들을 손가락질하고 미워하더라도, 엄마 아빠는 끝까지 너희를 편이고 변함없이 사랑할 거라고. 나는 이제까지 살면서 그 말처럼 가슴을 울리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때 느꼈던 커다란 감동과 미묘한 공포를 잊지 못한다. 아마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다시는 들어보지 못하리라. 무모할 정도의 절대적인 신뢰와 사랑을 나는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받고 있구나. 아마 나는 죽었다 깨어나는 일이 있더라도 그런 마음을 그 분들께 고스란히 되돌릴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의 사랑은, 특히나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맹목적이고 절대적이다. 혈연이라는 강력한 이끌림 때문이라고는 차마 다 설명하지 못할 무언가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데, 그것은 일반적인 세상의 도덕과 상식과 가치판단을 뒤엎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그렇게 강력한 무언가를 가슴에 품고 자식을 사랑한다.
나는 처음으로 순수한 공포를 느꼈다. 이것은 현실일까? 오랫동안 함께 산 그 아버지의 얼굴도, 어머니의 얼굴도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의식을 바로잡으려 해도 눈도 코도 없는 시커먼 일면만이 떠오른다. 지금까지 아버지라고 부르고, 어머니라고 불렀던 그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그 의문 앞에서 몸이 떨렸다. - 111쪽
그리고
좀도둑도, 강도도, 인질범도, 살인마도 자식 앞에서는 부모가 된다.
4권의 살인수기. 나를 낳아준 부모님 가운데 살인마가 있다?!
한꺼번에 말도 안 되는 불행을 겪게 된 남자가 있다. 애견 카페를 운영하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던 료스케는 결혼을 약속한 약혼녀가 갑자기 실종되어 버리고, 정신없는 와중에 아버지마저 췌장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아버지 보다는 오래 사실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어이없게 생을 마감한다. 정신없게 몰아치는 불행 속에 힘없이 휘둘리던 료스케는 아버지의 모습을 살피고자 찾은 집에서 우연히 머리카락이 들어있는 가방과 무언가가 빼곡하게 적혀있는 공책 4권을 발견한다. 공책에 적혀 있는 것은 놀랍게도 살인을 고백하는 수기였다.
료스케는 노트에 적힌 내용이 소설이 아닌 실화이며, 노트의 주인공이 부모님 중 한분 이라는 사실을 직감한다. 아버지는 인자하고 성실한 사람이며 어머니 또한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평범하고 화목했던 가족들과의 지난날을 생각하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료스케는 큰 충격에 휩싸인다. 노트를 읽어가는 와중에 료스케는 어릴 적 어머니가 뒤바뀐 사실을 홀로 알아차렸던 기억을 떠올리며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고 숨겨졌던 가족사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수기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어머니가 뒤바뀐 기억의 진실은 무엇일까? 숨겨졌던 가족의 비밀에 다가갈수록, 잔혹하고 슬픈 가족사가 서서히 드러날수록 료스케는 혼란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어떠한 사실을 밝혀내더라도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료스케를 사랑으로 보살피고 보듬어준 부모라는 점이다.
너무나도 끔찍하고 애잔한 사랑 이야기
가족에 대해서는 냉정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은연중에 서로를 자신의 분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부모가 자식에게만 갖는 감정이 아니다. 자식 또한 그렇다.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가 현재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될지 판단하는데 큰 부분을 차지한다. 피를 이었다는 것은 그렇게 정신적인 부분 까지도 이어졌다는 착각 아닌 착각을 하게 만든다.
자식은 부모를 닮고 싶어 하기도 하고, 닮고 싶어 하지 않기도 하지만 결국은 그들과 내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내 부모 중 누군가가 인면수심의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아 버린 료스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덩달아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사실 누가 살인마일까 하는 의문은 료스케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더욱 괴로운 것은 그가 알지 못하는 부모의 추악한 다른 얼굴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료스케의 부모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료스케가 4권의 노트를 읽고 노트의 주인을 추적하는 것은 살인마를 잡아내기 위함이 아니다. 잘못을 비난하고 원망하기 위해서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료스케를 사랑했던 부모의 민낯을 대면하기 위해서다. 그런 과정이기 때문에 더욱 안타깝고 가슴이 떨린다.
운명과 죄의 사함은 어떻게 다른 걸까요? 운명과 유리고코로는 같은 걸까요? 하지만 운명이라는 게 정말 있기는 한 걸 까요? 제 운명은 당신일까요? - 140쪽
여러 건의 끔찍한 살인 장면이 묘사되고 이해할 수 없는 살인자의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야기이지만 결국에는 사랑 이야기이다. 본능처럼 살인욕구를 품고 살아가는 어떤 이의 절절한 연애담이고,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잇달아 살인을 저지르는 인간이지만 자식을 사랑하고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알아가는 ‘평범한 부모’의 이야기이다. 살인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래서 인상적이다. 모든 미스터리가 풀려도 무거운 마음이 찌꺼기처럼 남아서 길게 여운을 끈다. 어쩌면 예측할 수 있는 반전일 테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후일담이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런 것과는 별개로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 이야기다. 기리노 나쓰오 여사의 평처럼 공포와 슬픔이 어느새 행복으로 변해간다. 이 책 자체가 참 미스터리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