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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기억 속으로 매드 픽션 클럽
엘리자베스 헤인스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선정적이지만 그렇게 야하지는 않다. 고작 시리즈의 1부만 읽었을 뿐인 내가 평가를 내린다는 것이 조금 우습기는 하지만, 문득 생각해 보니 그렇더라. 스포츠신문에 연재되는 소설이나 인터넷에 *.txt 파일로 떠돌아다니는 저자 모를 저작물들을 몇 편만 들춰본다면 엄마들의 포르노라는 애칭을 달고 다니는 그레이씨가 달리 보이리라. 뭐 그렇다. 나는 일전에 그레이씨를 만나고 그를 내게 강력 추천한 인터넷서점 MD에게 도전적인 투정을 남긴 적이 있다. 사실 내가 그레이씨를 읽고 기함했던 이유는 노골적인 성애묘사가 때문이 아니었다. 별로 그렇게 순진한 처자도 아니고, 세상에는 다양한 취향을 가진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기에 SM이니 본디지니 채찍이니 하는 것들도 뭐 그런 것도 있겠거니 했다.

 

 

내가 기함했던 진짜 이유는, 그레이씨가 대단한 통제광이고 여주인공 아나스타샤 스틸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관계에 행복감을 느낀다는 설정 때문이었다. 예쁘고 똑똑하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그녀는 돈 많고 젊고 유능하며 잘생기기까지 한 통제광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느낀다. 뉴욕대의 교수라는 사람은 이 책이 남성과의 경쟁체제에 지친 현대 유능한 여성들의 복종판타지를 충족시켜주고 있다고 평론했다. 소설가 백영옥씨 역시 강한 남성에게 보호받고 지배당하고 싶은 여성의 은밀한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책이라는 서평을 남겼다. 그레이씨의 광고문구 또한 어찌나 멋진지, “알파걸들을 위한 로맨틱 힐링코드”란다. 남자들과의 경쟁에 떡이되서 내심 강한 남자에게 지배당하고 복종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알파걸들은 그레이씨 같은 통제광과의 로맨스를 꿈꾸며 이 책으로 스스로를 치유했을까? 모를 일이다. 일단 나는 알파걸이 아닌 고로 알 수가 없다.

 

 

‘복종 판타지’라는 것은 누구의 판타지일까? 여성의? 남성의? 강한 남성과 보호받는 여성이라는 성 관념의 역사는 검치 호랑이 빤스를 입고 돌도끼를 휘두르며 매머드를 사냥하러 돌아다니던 시절부터 전설처럼 전해져온 것이니 그 뿌리가 참으로 깊은 것이다. 어쩌면 생물학적으로도 일면 타당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강한 남성과 보호받는 여성 사이에 ‘복종’과 ‘지배’라는 야시꾸리한 단어가 끼어들게 된 것도 그렇게 역사가 깊을까? 애초에 ‘복종 판타지’라는 말의 출처는 어느 시절의 누구의 입(혹은 손)으로부터 나온 것일까? 역시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명백한 것은 이런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런 광고 문구는 사실 정말로 멋지고 세련됐지만 불편한 것이었다. 그런 평론은 너무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이었다.

 

 

나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 대해서는 서평을 남길 생각이 없었다. 그 책에 대한 일부 평론과 자극적인 광고문구가 조금(많이) 불편했던 것은 사실이나 책에 대해서는 정말 어떤 코멘트를 남길 거리가 없더라.(별로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이 가진 서역 출판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들은 흥미롭지만, 책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서 밝혔듯이 선정성을 놓고 보자면 이보다 더한 책들도 수두룩할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를 하게 될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엘리자베스 헤인스의 소설을 읽다보니 그레이씨가 떠올라 버렸다. 두 책은 은근하게 닮은꼴이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 멋진 남자 그레이씨가 있다면 『어두운 기억 속으로』에는 파란 눈이 매력적인 미남 리 브라이트만이 있다. 그들이 사랑하는 예쁘고 똑똑한 아가씨 아나스타샤 스틸과 캐서린 베일리는 당차고 도전적인 성격이 쌍둥이처럼 닮았다.

 

 

그레이와 리, 두 남자 모두 재력도 있고 몸매가 끝내주며 결정적으로 잘생겼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여자라도 매혹시킬 수 있을 정도의 아름다운 외양을 지닌 강한 남성이다. 그레이씨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여자에게 비싼 컴퓨터와 좋은 차(tea가 아니라 car다)를 선뜻 선물할 정도로(그런 일은 그냥 껌이다) 말도 안 되는 재력을 가졌다. 리는 그레이씨만큼 돈이 넘처날 정도는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그레이보다도 매력적인 남자다. 거의 모든 일에 능숙하고 항상 자신감에 차 있는 이 남자는 조금 위험한 매력이 있다. 알 듯 모를 듯한 무언가가 있는, 베일에 쌓여있는 의문의 남자! 라고 표현하면 딱 적절할 듯하다. 두 남자 모두 사랑하는 여자에게 헌신적이며 육체적인 애정표현에 심히 적극적이다. 두 남자의 사랑을 받는 아나스타샤 스틸과 캐서린 베일리 또한 비슷한 구석이 많다. 젊고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던 간에 어디서든 남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똑똑하기까지 해서 아무리 잘난 애인이라도 본인의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고 소신 있게 행동한다. 남모를 상처를 갖고 있는 것 같이 구는 애인을 잘 보듬을 줄도 안다. 하지만,

 

 

두 책의 주인공들 사이에 공통점은 딱 거기까지다. 놀랍도록 비슷한 설정을 뒤로하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정 반대로 간다. 한쪽은 다시없을 로맨스가 달달하게 이어지는데 한쪽은 로맨스에서 스릴러로, 종국에 가서는 호러로 장르를 갈아타며 정말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그레이씨에서는 남녀 간의 지배와 복종관계가 사랑의 한 면모로 그려지며 해피엔딩으로 이어지는 반면, 『어두운 기억 속으로』에서는 그것이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최악의 결말로 전개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구속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복종을 요구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일상의 하나하나까지 간섭하려 하고 그 모든 비인간적인 행위를 정당화 하려 한다면 그것은 과연 로맨틱한 일일지, 여자는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에 대해 두 책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레이씨는 여성과 남성간의 연애관계에 대해서는 상당히 남성적인 시각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것은 잘생긴 그레이씨의 황홀한 양복맵시와 고압적이지만 정중한 말투에 가려져 ‘로맨틱함’으로 포장되고 있을지언정, 여자에게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태도를 강요하고 결국 여자가 그것을 ‘사랑’이라는 보기 좋은 명분으로 받아들이는 형태이다. 『어두운 기억 속으로』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도 그레이씨와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무엇하나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하고 다정한 애인이 자기를 지나치게 통제하고 간섭하려 들기 시작할 때,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것에 대해서 여자가 느끼는 불편함과 거부감, 부당함을 이야기한다. 남자의 행동에 저항하기를 포기한 이후 급속도로 악화일로를 걷는 ‘지배와 복종’의 연애관계에 대해서, 그 모두가 불행한 결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지독한 통제광과의 로맨스에 대해서 로망을 가지는 이가 말이다. 물론 그에 대해 나처럼 눈살을 찌푸리는 이도 있겠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복종 판타지’라는 것은 분명 허상이다.(피학적인 성애 성향은 실재한다. 하지만 이건 분명 복종 판타지와는 다른 것이며 일반적이지도 않다.) 그 야릇한 단어의 위험성과 폭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두운 기억 속으로』인 것이다. 그레이를 읽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거나, 그레이 시리즈에 대한 일부의 평론을 읽고 혹시나 굴욕감을 느꼈거나 비슷한 유의 마음의 상처를 받은 여성이 있다면 오히려 이 책이 힐링북이 되어 줄 수 있겠다.

 

 

 

 

 

 

.....는 뭐. 복종 판타지라는 말에 울컥 했다가, 책에 리의 대사 중에 “여자는 거친 걸 좋아하잖아.” 대사 읽고 폭발. 그레이씨 얘기를 끌어와 버렸는데, 이 책이 궁금해서 서평을 찾아보는 사람이 있다면 이 부분만 읽으시라. 일단 가독성이 좋고 표현 수위가 조금 높다. ‘좆같은 ―’을 정말 그대로 ‘좇같은 ―’이라고 적는 패기 있는 번역이다.(비속어 오타도 오타일까? 웃음.) 로맨스에서 스릴러로, 호러로 장르가 널뛰는데 그런 면이 더욱 책에 집중하게 만들더라. ‘사건’이 벌어지기 4년 전 과거의 일기와 사건 이후의 현재의 일기가 하루하루 교차되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과거의 사건의 실마리가 일기 속에 조금씩 던져지는 형식이라서 정말 빠져들어 읽었다.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들간의 관계가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상이해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를 외치며 끊지 않고 술술 읽게 된다.

 

나쁜 놈으로 나오는 인물도, 구세주로 나오는 인물도 하나같이 매력적이라 여성 독자라면 더욱 신이 나게 읽을 수 있겠다. 강박증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심리치료를 받는 부분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서 작가가 심리학쪽 공부를 한 사람이겠거니 했더니 경찰 정보부에서 일을 했단다. 저자 소개를 보고나니 이야기의 리얼리티가 100을 기준으로 40에서 80으로 급상승. 소름 돋게 생생해 졌다. 자못 뻔해 보이는 줄거리지만 마지막에 중간 중간이랑 엔딩 이후에 반전도 있고 나름 훌륭했다. 재미는 별 4개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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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기담 -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
유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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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기에, 이 세상에는 딱 세 가지의 책만이 있을 뿐이다. 내가 읽은 책과 내가 안 읽은 책 그리고 내가 읽었다고 착각 하는 책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내가 세상의 책은 분류하는 카테고리로 삼은 세 종류의 폴더 가운데 가장 빈약한 것은 ‘읽은 책’ 폴더이다. 노파심에 밝혀 두건대 나는 딱히 이 세상 모든 책들을 읽어주겠다는 다부진 야망을 가진 독서광은 아니다. 그러므로 ‘읽은 책’ 폴더와 ‘안 읽은 책’ 폴더 사이의 엄청난 빈익빈 부익부 현상에 죄책감을 느낀다거나 자학 한다거나 하는 타입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나는 의외의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엄청난 쪽팔림을 경험하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얼마 전 모 퀴즈프로그램 문제에 ‘콩쥐의 성(姓)은 무엇일까요?’라는 문제가 출제됐었다. 아무생각 없이 티비를 보다가 목구멍에 찐 달걀이라도 걸린 듯 한 갑갑증이 일어서 켁켁댔었다. 그 유명한 콩쥐팥쥐 이야기, 누구나 아는 국민동화 콩쥐팥쥐가 아닌가. 근데 나는 소설 콩쥐팥쥐를 읽어본 일이 없다. 읽어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니까. 근데, 읽지도 않았는데 이미 읽은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니 조금 웃긴다. 뭐 이런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내가 ‘읽었다’고 착각하는 무수한 이야기들과 ‘읽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대충 알고 있는 그 많은 이야기들이 새삼 나를 쪽팔리게 만들더라.

 

 

이 책을 읽을 때 그 쪽팔림은 배가 되었다. 이 책에는 콩쥐팥쥐에 버금가는 국민동화, 국민고전소설로 꼽힐 만한 이야기들을 소재로 한 9편의 개성강한 글이 실려 있다. <가족기담>은 익히 알려진 민담과 고전소설을 날카로운 주제의식을 갖고 새로운 시각에서 다시 읽어 내려간 기록이다. 저자의 시선을 따라 저자가 품은 주제의식을 투영하여 낯익은 이야기들을 낯설게 읽어보고 교훈과 감동으로 포장되어 가려진 충격적인 진실과 경악스러운 의도를 파헤쳐보자는 것이 아마 이 책의 ‘주제’가 아닐까 싶다. 뭐 상당히 흥미롭고 재미있다. 어릴 적 배추도사 무도사가 들려주는 전래동화로 재미있게 보고 들었던 이야기들이 알고 보면 엽기 호러영화보다 더 끔찍하고 포르노 잡지보다 더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더라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니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심청이가 왜 눈먼 아비를 남겨두고 인당수에 몸을 던졌겠는가? 재색을 겸비한 장화와 홍련이는 노처녀가 되도록 왜 시집도 못가고 있었을까? 열부 함양박씨가 자살을 한 진짜 이유가 뭐겠나? 호부호형 못한 길동이가 불쌍할까? 어린나이에 주인마님 수발들다 난데없이 길동이를 갖은 춘섬이가 불쌍할까? 2명의 부인과 6명의 첩을 거느린 양소유는 쾌남인가 강아지인가? 등등 7세 관람가, 12세 관람가를 19금으로 과감하게 등급조정해서 거침없이 이야기를 쏟아낸다. 가족이라는 인간관계 속에서 의무와 채무로 엮여버린 혈육의 모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인격조차 무시되고 폭력적인 욕망의 대상이며 그저 소유물일 수밖에 없었던 여성의 삶, 효가 가장 큰 미덕이었던 극단적인 시대의 광기에 대해 실낱하게 비판하고 비웃는다. 우리가 알고 있던 가족에 대한 그 이야기들이 사실은 그렇게 아름답고 정겹고 훈훈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기이하고 괴상한 이야기였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남세스럽게 알려주는 책이랄까.

 

 

뭐 그렇다. 그런 얘기다. 그러니 참 재미지다. 원래 칭찬보다는 뒷담화가 더 흥미롭고 미담보다는 자극적인 뉴스가 더욱 이슈가 되는 법이 아니겠나. 이 책은 정말 노골적이고 딱 불량스러울 정도로 시선이 삐딱한데 고것이 매력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은 모르고 있었어’라고 하는 환청이 사방에서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는데 그것도 참 재미난 점이다. 앞서 나는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마치 그 책을 ‘읽었다고 착각 하는’ 경우 다시없을 쪽팔림을 느낀다고 고백한바 있다. 이 책은 그 쪽팔림을 한없이 자극하는 책이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의 알지 못했던 점들을 여기저기 늘어놓는 식이라서 아주 정신없이 얼굴이 벌게진다.(물론 다른 의미로 얼굴이 벌게지기도 했다. 더러 더러.) 나의 어설픈 오만함과 무성의함을 재발견하는 재미도 재미라면 재미이겠다. 그리고 또 이 책의 훌륭한 점은, 저자의 아주 집요하리만치 뚜렷한 문제의식이다. 장화홍련전을 이야기하며 이런 의혹을 제기했던 사람이, 뭐 고전소설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는 있었는지 어쨌는지 알 수 없으나, 있었나 싶다. 상당히 자극적이고 과감한 접근인데, 저자의 말대로라면 장화홍련전은 19금 딱지를 박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또한 이야기 속에서는 조연으로 초반에 잠깐 등장하고 마는 춘섬의 입장을 주목해 본 부분도 흥미로웠다. 홍길동전은 적서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은 있으면서 축첩의 폐단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데 이건 전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라 무릎을 탁 쳤다. 이 밖에도 내가 고전소설을 ‘남성의 시각’으로 읽고(혹은 알고) 있었구나 깨닫게 한 기가 막힌 부분들이 많다. 이런 부분이 참 괜찮더라.

 

 

조금 아쉬운 부분이라면 ‘~것이다’가 너무 남발된다는 점이다. 저자는 역사학자가 아니고 국문학을 전공하고 고전소설을 연구한 분이기 때문에 한계가 보이기는 한다. 이렇게 고전소설의 행간을 읽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은 한다. 하지만 그 전개가 대게가 ‘~일 것이다’ ‘~이지 않을까’ 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은 확실히 아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 글들은 당시 시대상을 연구하고, 그 당시 여성의 지위가 어떻고, 처첩간의 갈등이 실제로는 어땠고, 사료에 따르면 실제로 어떻고 하며 학술적으로 쓰인 글은 아니다. 새삼 몰랐던 이야기의 실체에 대해 폭로하며 뜻밖의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해 주고 있는 글이기는 하다만 연구서는 아니란 소리다. 그러므로 그렇게 학술적일 이유도 없다. 하지만, 고전소설의 행간을 읽는 과정에서 저자가 추측한 여러 이야기들의 근거는 어느 정도 제시되어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다. 적절한 근거 없이 ‘이 부분은 조금 이상하지 않나?’ ‘당시는 축첩이 일반적이었으니 이렇지 않았을까?’하는 식이라면 아무래도 부족하다. 독자로서 저자의 글에 반발심이 생기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느냐고 한다면 저자의 문체가 뭐랄까, 좀 강하다. 직설적이고 노골적이고 조금 비아냥거리는 듯 하기도 하고 따지는 듯 하기도 하고 여하튼 좀 열정적이다. 문체가 강하다 보니 그만큼 이런 부분들이 도드라져 보이더라.

 

 

뭐 재미도 있고, 훌륭하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좀 억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구나, 이런 부분도 있었구나 새록새록 발견하는 맛이 있어 존경스럽기도 하고 그렇다. 빠져들어 읽다보면 반쯤 흥분한 상태가 되어버리지만 오랜만에 재미나게 읽은 책이다. 가족에 대한 이상과 환상을 깨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고전소설에 대한 보이지 않는 금줄까지 끊어놓은 유쾌한 책이었다.

 

 

 

덧, 책 디자인 정말 이쁘게 나왔다. <청춘의 독서>이후 참 오랜만이다. 내지랑 본문까지 일러스트 화려하게 들어간 책..으~ 화려할 수록 책값은 올라가겠지만 뭐..이쁜건 어쩔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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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동물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굿바이 동물원 - 제1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태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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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알바라는 걸해서 내 손으로 돈을 벌었을 때, 20여 만원 남짓한 돈을 쥐고 가장 처음 간 곳이 속옷 가게였다. 나는 속옷 세트가 그렇게 비싼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엄마 아빠 속옷을 사고 나서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동생이 좋아하는 빵을 사들고 집으로 갔다. 두둑했던 지갑이 금세 비쩍 말라붙었지만 나는 그때 퍽 뿌듯했었다. ‘이야, 내가 이제 사람 구실을 하는구나’ 뭐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가만, - 돈을 벌었다. 속옷을 샀다. 빵을 샀다. - 이 중에 내가 한 ‘사람 구실’은 무엇이었을까? 가끔 그때 생각을 하는데 그때마다 아리송해 진다.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 내가 아는 A양. 아니, 그래 그냥 우리 언니 얘기다. 언니는 좋은 직장에 다닌다. 월급도 많이 받는다. 그 많은 월급으로 자기 차를 사고 아빠 차를 바꿔드렸다. 해마다 비싼 콘도를 예약해서 고모, 형부네까지 모두 모아 여름휴가를 간다. 내년에는 고모, 형부네까지 모두 모아 해외여행을 가겠다고 궁리중이다. 몇 년 전부터 얼마씩 적금을 부었다나 어쨌다나. 언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아주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언니는 오전 8시에 출근해서 오후 10시에 귀가한다. 8시에 퇴근하는 날에는 좋다고 헤헤거리며 들어온다. 바쁜 시기에는 일주일 내내 12시 가까이 돼서야 집에 들어오기도 하더라. 나에게는 ‘언니, 그렇게 사는 게 행복해?’라고 물어볼 용기가 없다. 언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사람 구실’을 하고 사는 사람이니까.

 

동물원에 있으면 사람답게 살 수 있어. 사람이 아니니까 사람 구실 같은 건 안 해도 돼. 솔직히 이 나라에서 사람 구실하면서 사람답게 사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냐고. 난 거의 없다고 봐. 하지만 동물원은 달라. 사람 구실은 못하지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이 동물원이야. 웃기지? 내가 그랬잖아. 사는 게 코미디라고. 자, 한잔해. 어때, 여기 죽여주지? - 214쪽

 

대기업 출신 조풍년씨는 말한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동물원에 왔다고. 공무원 시험만 5년째 준비했던 앤은 말한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나도 묻고 싶다. 사람답게 산다는 건 어떤 건가요? 사람 구실을 하면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 그렇게 어렵고 고된 건가요? 나는 아직 딸린 식구도 없고 부양해야 할 만큼 부모님이 연로하시지도 않은데도 그런 생각한다. 내 어깨에는 이미 무언가가 지워져 있다고. 그리고 그 무언가는 내가 앞으로 누군가를 만나고,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으며 살아가면서 더욱 비대해져서 나를 질식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 그래서인지 차라리 세렝게티 동물원은 낙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사람답게 사는 일이 무거워지고 괴로워지면 차라리 전부 훌훌 털어버리고 콩고에라도 떠나버릴 수도 있으니까. 뭐 선택하는 것은 동물 탈을 쓰고 앉아있는 ‘사람’의 몫이지만.

 

사실 아주 황당한 이야기다. 말 그대로 코미디. 고작 삼십대 중반에 백수가 된 가장 영수는 마늘 까기부터 시작해서 학알 접기, 종이학 접기, 곰 인형 눈 붙이기 등의 온갖 부업으로 생활을 연명한다. 그러다 부업 브로커 돼지엄마의 소개로 나름의 피나는 노력을 더해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는 공무원이나 다름없는 일자리, 세렝게티 동물원에 마운틴고릴라로 취업한다. 세렝게티 동물원에는 고릴라가 네 마리나 있다는데, 12미터 높이의 철제골절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올라 부저를 누르지 않으면 성과급이 나오지 않는다나 뭐라나. 그래서 세렝게티 동물원의 고릴라들은 바나나를 씹으며 12미터 높이의 철제골절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열심히 오르내린다는 고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그러던 어느 날 과거 ‘고릴라’였다는 여행사 직원이 나타나 야생으로 돌아간 탈 쓴 동물원 직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남파간첩 ‘고릴라’ 만딩고는 결국 그의 꼬드김(?)에 넘어가 콩고로 떠나고, 후에 그가 걸어온 전화에 동물원에서 ‘동물’로 일하며 살아가고 있던 이들이 동요하게 되고, 하나 둘씩 동물원의 동물들이 사라지기에 이른다.

 

만딩고가 그렇게 떠나고, 조풍년씨도 앤도 각자의 이유로 고릴라 탈을 벗어던지고 동물원을 나선다. 우리의 주인공 영수는 홀로 우리 안에 남아 ‘우후우후’ 포효하며 가슴을 두드리고 관람객이 던져주는 바나나를 씹으며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오른다.

 

세렝게티 동물원’에는 마운틴고릴라가 한 마리 있다. 한 마리뿐이라 좀 쓸쓸해 보인다. 하지만 바나나를 던져줘보시라. 사양하지 않고 받아먹는다. 또 여러분은 1시간에 한 번씩 마운틴고릴라가 가슴을 두드리며 포효하는 명장면도 보실 수 있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기어오르는 마운틴고릴라의 모습은 여러분에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의 한 장면을 선사할 것이다. 지금 그런 마운틴고릴라 한 마리가 ‘세렝게티 동물원’에서 여러분을 기다린다. - 343쪽

 

어떤 이는 우리를 떠나고, 어떤 이는 우리에 남았다. 사람답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고릴라 탈을 벗어던지고 콩고로, 새로운 직장으로, 동사무소로 자리를 옮긴 사람들이나 여전히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오르내리는 사람이나 누구하나 말해주지 않는다. 왠지 그들은 이전보다는 조금 더 ‘행복’해 지지 않을까 하는 묘한 여운을 남기며 이야기는 끝이 나 버린다. 사실은 너무 어려운 질문이 아닌가. 사람 구실이라는 것, 사람답게 산다는 것 말이다. 딱히 답을 구하면서 읽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금 허한 마음이 들더라. 사실 이 책은 저자가 아주 작정하고 웃기려고 쓴 글이다. 그래서 생각 없이 읽으며 킬킬 댔는데 마지막장에 가니까 정말 울컥 하더라. 언니야 사람답게, 살고 있어? 나는 사람답게 살고 있는 건가? 사람답게 살고 계신가요? 어쩌면 누군가는 여전히 우리 안에 있고, 누군가는 뛰쳐나갔는지도 모르겠다. 허한 마음이 들게 만들었던 마무리는 조금 성에 안차지만 나를 웃기고 센티하게 만들어버린 작가의 글빨은 정말 인정! 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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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웨딩드레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웨딩드레스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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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화자의 기억이 불분명 하다는 설정이 있고, 그 이야기가 사람이 여럿 죽어나가는 장르물로 분류된다면, 일단 화자를 범인으로 의심해 봐야 한다. 이건 일종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추리-미스터리 소설 범인잡기 팁인데, 이런 중심인물의 불분명한 기억이 아주 그럴듯하게 서술트릭의 근거(혹은 변명)나 반전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일련의 끔찍한 사건 한가운데에 놓이게 되는 불행을 몰고 다니는 여자 소피를 유력한 범인으로 생각했었다. 아니, 이미 단정하고 있었다고 해야 되겠다. 이유가 어쨌건 일단은 그녀가 범인이닷!

 

아닌 게 아니라 매우 의심스러운 상황과 점점이 이어지는 과거의 기억, 살인이 분명한 사건(내가 범인일리 없지만 상황이 이상하다. 하지만 ‘아! 내가 범인이다!’라는 체념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이 벌어졌는데 ‘도망치자!’라고 생각해 버리는 비범한 판단력 등을 볼 때 나의 추리(라고 쓰고 헛다리라고 읽는다! 라나 뭐라나)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반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오더라. 소피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가 끝나고, 프란츠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될 때, 나는 새삼 이 작가의 전작을 떠올렸다. <알렉스>의 작가 피에르 르메트르. 단서를 하나 하나 제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반전을 차곡차곡 쌓아가서 종극에 반전 잔치를 벌이는 이 늙은 오빠의 독특한 스타일이 요 책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에서도 잘 드러나 있더라.

 

그러니까 뭐 이런 얘기다. 소피라는 여자가 있다. 이 여자 참 미스터리한 구석이 있다. 구린 구석이 있다고 해야 정확할까? 지금은 보모 일을 하고 있다. 돌보는 아이와도 아이의 부모와도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이 여자, 뭔가 불안정 하다. 그녀의 기억은 구멍이 송송난 스펀지 같다. 이따금 잘생기고 다정한 남편과의 행복했던 과거가 조각조각 떠오르지만 행복했던 기억마저 온전치 못하다. 정신병을 앓고 있는 그녀는 종종 몽롱하고 희뿌예지는 의식 속을 헤맨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을 잘 알 수 없어져 버리는 그런 상태랄까. 어느 날은 깨어나 보니 돌보는 아이 레오가 움직이질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도무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운동화 끈에 졸려 웅크린 체 굳어버린 아이를 내버려 두고 그녀는 달아나 버린다.

 

아이를 죽인 건 누구일까? 설마 소피 자신일까? 몽롱해진 의식 속에 터무니없는 일을 저질러 버리고 만 것일까? 그녀는 기억이 없다.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뻗뻗하게 굳어버린 레오를 발견한 그날과 같은 일이 또다시 소피 앞에 반복되고 만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를 쫓아 살인사건이 연거푸 벌어지고 1급 수배범이 된 그녀는 신분을 세탁하고 새로운 삶을 위해 결혼을 결심한다. 평범하지만 건실해 보이는 남자와 함께. 소피가 결혼을 결심하는 이야기 뒤로 이어지는 프란츠의 일기에는 소피의 이야기를 한꺼번에 뒤엎는 뜻밖의 전말이 드러난다. 프란츠의 일기로 비로소 소피의 기억에 대한 공백이 메워지게 되지만 새로운 의문이 생긴다. 소피를 왜? 프란츠는 왜 그런 일을 벌인 걸까?

 

소피의 혼란스럽고 미스터리하고 무섭기까지 한 생활과 치밀하고 소름 돋는 프란츠의 일기는 ‘결혼’과 ‘청혼’이라는 단어로 마무리되고, 프란츠와 소피 그리고 소피와 프란츠 두 사람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소피 - 프란츠 - 프란츠와 소피 - 소피와 프란츠’라는 소제목에 맞게 그녀와 그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장이 끝날 때마다 반전과 함께 어떤 의문을 남기게 된다. 소피의 불완전한 의식과 살인사건의 진실은 무엇인지 에 대한 의문은 프란츠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로 해소되고, 프란츠의 행동에 대한 의문이 ‘프란츠와 소피’ 장에서 해소되고, ‘프란츠와 소피’ 장에서 생겨난 의문 X가 ‘소피와 프란츠’ 장에서 해소되며 모든 이야기가 정리되는 구조인데, 장과 장을 넘나드는 사이사이에 이전의 전개를 통째로 뒤흔드는 반전이 장치되어 있다. 덕분에 마치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어 370여 페이지의 굵직한 두께임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중간에 눈을 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치밀한 뒤통수는 앞서 소개된 작가의 다른 책 <알렉스>에서도 잘 나타났었더랬다. 달랑 두 작품만 두고 이 작가의 스타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 하는 것은 이르지만, 달랑 이 두 작품만 두고 작가 피에르 르메트르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참 이야기를 찰지게(다른 표현으로 ‘끈덕지게’) 잘 쓰는 작가! 라는 말만은 할 수 있겠다. 덧붙여 여성 캐릭터가 상당히 당차고 강하다는 점도 이야기 해 볼 수 있으려나. 한편으로는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과연 그렇게 까지 될 수 있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건의 개연성이 부족하다거나 뭐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음. 파격이었달 까.

 

불완전한 기억으로 인해 무서운 상황에 빠지는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 추리-스릴러물은 많았다. 하지만 그 설정을 이런 식으로 풀어나간 것은 꽤 신선했다. 나는 덕분에 초장부터 엉뚱한 헛발질만 계속 해댔고 말이다. 읽는 재미는 개인적으로 평하기로는 <알렉스>보다 좋았다. <알렉스>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와 문득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문장은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피에르 르메트르라는 작가에 대한 신뢰도를 쌓는 데는 엄청난 플러스가 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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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코를 위해 노리즈키 린타로 탐정 시리즈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이기웅 옮김 / 포레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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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행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그저 이유 없이 갑자기 누군가의 앞에 나타나 한사람의 인생을 한껏 휘저어 놓고 유유히 사라질 뿐이다. 불행에 치인 사람은 보이지 않는 내상을 입게 되는데, 문제는 불행으로 인한 내상을 입는 사람이 비단 불행을 직접 맞닥들인 사람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 그 사람의 행복한 미소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상실감, 출처를 알 수 없는 죄책감 등 모든 부정적이고 어두운 감정들이 불행을 당한 사람을 지켜보는 이들에게도 생겨나 마음속에 크고 작은 균열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주변에서 불행의 꼬리를 밟아버린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겠지만 사실은 꽤 위험하다. 그런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기도 하거니와, 심한 경우 소리 없이 곪아 올라서 결국 해체할 수도 없는 시한폭탄처럼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누군가가 만난 불행은 다른 사람에게 옮겨가고 조용히 몸을 불리며 또 다른 비극의 씨앗으로 잉태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요리코가 죽었다. 이제 막 열일곱이 됐을 뿐인데, 살해당했다."

 

  요리코가 살해당했다. 요리코는 우리 부부의 유일한 희망이고 행복이었다. 그런 요리코가 죽어버렸다. 경찰은 요리코 사건을 연쇄강간살인사건으로 결론지어 버리려고 한다. 하지만 경찰의 수사는 어딘가 무성의하다. 정말 요리코가 그런 강간살인마 따위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살해당한 것일까? 경찰의 수사에 의문을 품은 나는 독자적으로 조사를 펼친 끝에 요리코 사건이 정치적인 이유로 은폐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진범이 누구인지도……. 요리코를 죽게 만든 그에게 꼭 복수하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마침내 복수에 성공했다. 내 딸을 죽인 남자를 단죄하기는 했지만 차가운 땅에 홀로 묻혀있는 어리고 여린 딸을 생각하니 괴로워서 더 이상 삶을 이어나갈 수가 없다. 혼자 남게 될 아내 우미에가 걱정되지만 나는 자결해서 딸의 곁으로 가려고 한다. 딸 요리코를 위해.

 

  여기까지가 한 남성을 살해하고 자결을 시도한 니시우라 교수가 남긴 수기의 내용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사건에 참여하게 된 추리소설 작가 겸 탐정 노리즈키 린타로는 니시우라 교수가 남긴 수기의 모순을 발견하고 니시우라 교수의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탐문에 들어가는데. 죽음을 앞두고 쓴 고백록에 거짓이 담길 수 있을까? 하지만 수기를 읽으면서 느껴졌던 위화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사건에는 분명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 숨겨진 진실은 무엇일까? 또 그 진실을 숨기려 한 사람의 의도는?

 

"그렇다. 당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린타로는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당신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니시우라 교수가 남긴 수기는 그의 살인과정을 담고 있다. 그가 어떤 이유로 범인을 특정하게 됐고, 어떤 방식으로 살인을 계획하고 실행했는지 적혀 있는데 내용만 본다면 아주 명료하다. 수기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고운 딸을 잃은 슬픔과 범죄인 줄 알면서도 기어코 살인을 실행에 옮겨야 했던 애끓는 부정을 고스란히 전한다. 아내 우미에에 대한 미안함과 요리코와 우미에 둘 다 너무나도 아끼고 사랑하지만 결국은 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결정을 아내에게 전하는 부분은 신파극이 따로 없다. 아버지는 딸을 욕보인 남자를 제 손으로 벌했다. 결과는 명백한 범죄이지만 그 이유는 부정이었다. 충분히 동정 받을 만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수기의 내용이 전부 신뢰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한다. 니시우라가 특정한 범인이 정말 요리코를 살해한 범인이 맞는지 확신할 만한 근거가 부족하다. 니시우라가 살인을 저지르기 전 범인을 확신한 부분은 니시우라와 살해된 남자가 아니면 증명할 수 없다. 물론 자살을 결심한 사람이 생에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서와도 같은 기록에 거짓을 섞어 넣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런 감정적인 호소에 가려져 묻혀버린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조그마한 단서를 시작으로 수기의 본질을 파헤치는 탐정 노리즈키 린타로의 행보를 쫓다 보면 요리코 사건을 다양한 각도로 재구성해 볼 수 있다. 수기에 적힌 사람들의 이야기로 하나 둘씩 드러나는 그날 사건의 전말은 반전을 더하며 충격적인 결말로 이끈다. 한 가정에 불어 닥친 불행과 그 속에서 싹튼 비극의 씨앗이 만개하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마음의 균열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상처받기 쉽고 나약한지 또 그것이 사람을 얼마나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본격 소설로 트릭과 미스터리에 충실하고 몰입도가 좋은 책이다.

 

 

**쓸데없는 덧붙이기.

 

☆ 이 책을 읽기 전에 스포를 당했다. 아주 결정적인 단어를 들어버린 터라 책에 손이 잘 안 갔는데 어느 순간 아주 빠져들어 읽었다. 잘 읽히는 문체인 것 같다. 나랑 궁합이 맞는 작가인 듯.

 

☆ p. 202 ‘이언이 죽고 난 뒤 활동에 종지부를 찍은 마지막 싱글 <러브 윌 티어 어스 아파트 Love Will Tear Us Apart>......’ /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아아~ 가 갑자기 귀에 울려 퍼진 부분. 진지하고 의미심장한 부분인데 읽다가 풉! 했다. - ‘아’ 다르고 ‘어’ 다르다 - 를 절실하게 느낀 부분. 내가 외래어 표기법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아파트’라고 써야 되는 건가? ‘어파트’라고 쓰면 안되는 거였나?

 

☆ (스포주의) p. 199 '..... 때문에 두 사람의 목숨이 사라졌기 때문이죠.” / 요 부분 좀 걸렸다. 순간 ‘세 사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이 부분 스포일러 일지도!!) 고개를 갸웃 갸웃. 그것도 의사가 이런 대사를 쳐서 의아했다. 일본이랑 이쪽이랑은 고런 부분에 대해서는 정서가 다른 걸까?

 

☆ 뒤에 붙은 <작가에게 온 편지>에 대해서. 『요리코를 위해』에 대한 평론인 줄 알았다만 그보다는 본격 미스터리 소설을 고집하는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에 대한 글이었다. 말 그대로 노리즈키 린타로 씨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요약하자면 노리즈키 린타로라는 작가의 역량은 ‘본격 미스터리물’이라는 틀에만 묶어두기에는 아깝다. ‘본격’의 틀을 벗어나서 더 좋은 책을 써 주세용~ 이었는데. 작가에 대해 그리고 『요리코를 위해』가 포함되는 비극 3부작에 대한 정보를 얻기에 좋은 글이었지만 구태여 이 책 뒤에 실려 있으니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 글을 쓴 이는 노리즈키의 소설은 재미있지만 ‘명탐정’이라고 하는 시대착오적인 장치가 등장시켜서 베려버린다, 결국 본격물의 규칙을 지키려고 더 좋은 소설이 될 수도 있는 작품들을 베리고 있다는 건데 읽으면서 이게 대체 무슨 소리여 했다. 그 글을 쓴 필자의 ‘본격’물에 대한 비하와 혐오가 고스란히 읽혀져서 불편했다. 그 필자의 말을 빌자면 이 책 또한 좋은 미스터리 소설일 뻔 했지만 명탐정 노리즈키 린타로가 등장하면서 격을 팍 깎아 먹었다는 소린데 글쎄. 나는 본격물에 대한 편견도 없고 그렇다고 격하게 애정하는 편도 아니지만 이 책은 꽤 재미있고 괜찮았는데 말이다. 참 미스터리한 평론가의 글 붙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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