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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무덤의 남자
카타리나 마세티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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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도 언젠가 나와 100%로 들어맞는 사람을 기어코 만나게 되는 꿈을 꾼다. 운명 이라는 말을 쓰자면 너무 닭살이 돋는다. 그런 낭만적인 단어를 쓰기에는 내가 너무 무뚝뚝한 사람이라서 그런 말을 쓰고 싶지는 않다. ‘운명’이라기보다는 기질이나 성품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이해관계로 얽혀지지 않는 조그만 우연도 필요하다. 꼭 이성에 국한된 생각은 아니다. 친구라든지 스승이라든지 동료라든지 언젠가 내가 맺게 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인간관계에 대해서 나는 나와 100% 들어맞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가 이런 생각을 입 밖에 꺼내면 대게의 사람들은 얼굴을 찌푸리거나 훈계하려고 든다. 철이 없다느니 세상을 잘 모른다느니 하는 핀잔을 늘어놓거나 완벽한 관계를 원한다면 그만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려 깊은 충고를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 정말 그런 것일까? 결국은 서로에게 맞춰주기 위해 스스로를 갈아내고 리모델링해야 하는 관계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서로 너무 잘 들어맞아서 한쪽이 무언가를 희생하거나 양보할 일이 없고, 한쪽이 괜히 위축돼서 무리하거나 자괴하는 일이 없는 이상적인 관계는 정말 불가능 한 걸까? 그건 좀 너무 서글프지 않나. 모든 관계가 그렇게 개개인의 필연적인 불협화음 속에 잠재적인 갈등을 품고 시작할 수밖에 없다면 그 관계는 결국은 비극으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크다. 아, 정말 머리가 아프다.

 

 

극강의 언밸런스 커플의 탄생. 그들은 ‘사랑’할 수 있을까?

 

데시레와 벤니. 이 커플은 조금 독특하다. 데시레는 우습지도 않은 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그것도 고작 삼십대에! 어이없이 남편을 떠나보낸 슬픔보다는 황당함에 매일 남편의 무덤을 찾는 여자다. 벤니는 어머니를 병으로 떠나보냈다. 가족이자 든든한 농장의 일꾼이었고 무엇보다 그를 살뜰히 보살폈던 노모는 농장일 말고는 모든 게 서투른 노총각 아들을 남겨두고 떠나버렸다. 벤니는 주기적으로 엄마의 무덤을 찾아 화초를 가꾼다. 고상한 도서관 사서 데시레와 걸걸한 농장주 벤니는 공통점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다. 묘지라는 특수한 공간이 아니라면 전혀 마주칠 일이 없는 두 사람인데, 마주쳐 버렸다. 그저 옆 무덤의 남자인 벤니가 베이지색의 이상한 여자인 데시레를 눈에 담게 된 우연한 몇 초. 그 우연한 순간으로 그들은 시큰둥했던 첫인상이 무색하게 서로를 강렬하게 마음에 새기게 된다.

 

이후 재회한 그들은 끈적끈적하고 열정적적인 정사를 나누고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소 25마리를 보살피느라 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벤니가 고상하고 유식하지만 미트볼도 만들 줄 모르는 도서관 사서 데시레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연애를 한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가 평탄할리 없다. 생활 패턴에서부터 시작해서 식성이나 교양수준 심지어 데코레이션 취향에 이르기 까지 무엇 하나 닮은 점이 없는 두 사람은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삐걱대기 시작한다. 그저 농담으로 넘기고 갈등의 소지는 최대한 피하고 참아주고 끌어안으려 발버둥을 쳐댔다. 그렇게 물과 기름 같은 존재들이 하루하루를 평탄하게 보내기 위해 매일 한 가지씩 견디며 지내는 법을 배우려 하지만 서로에 대한 마음이 커져 갈수록 서로에 대한 욕심도 커져가기 마련인지라 결국 서로에게 자신의 입장을 강요하기 시작하고 관계는 엉망이 되고 만다. 그녀의 입장과 그의 입장이 흥미진진하게 교차되는 가운데 사랑하는 만큼 반목하기 시작하는 독특한 연인은 서로의 차이를 보듬어 안으며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타인을 위해 얼마나 희생할 수 있을까?

 

100% 들어맞는 사람을 만나기는 하늘에 별을 만지는 일만큼 어렵지만 100%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기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을 차는 일만큼 쉬운 걸까? 세상이라는 놈이 어찌나 이다지도 불공평한지! 데시레와 벤니 커플의 이야기는 조금 구태의연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사랑 이야기에서 언급되는 갈등요소의 집합체라고 할 만 하니까 말이다. 남자와 여자는 애초에 사는 별이 다른 두 인종이라고 어떤 작가는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와 남자는 사랑을 한다. 때때로 여생을 함께 보내자고 서약하기도 한다. 마치 그것이 갖은 난국을 극복하며 지켜낸 사랑의 완성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 과정이라는 것이 참 심난하다. 결국에는 한쪽이 무언가를 포기하고, 한쪽이 어떤 것을 감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일종의 희생인데, 희생의 명분이 참 말문이 막힐 정도로 절대적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성숙한 성인이라면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모나게 굴지 않고 적당히 참고 적당히 희생하며 살 줄 알아야 하는 거야. 라고 누군가 얘기한다면 나도 할 말이 없다. 맞는 소리니까. 너, 나, 우리.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사회. 랄랄라. 하하하. 호호호. 하지만 사랑이라는 절대반지 못지않게 위력적인 것을 핑계로 이기적으로 굴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해야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비인간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물론 가히 희망적이게도 사랑을 하는 두 사람에게는 적절한 타협의 여지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자존심을 세우고 치고 박고 싸우게 되더라도 그 타협점에만 이를 수 있게 된다면 그나마 해피엔딩일 진데. 그런데 서로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 적절한 타협점에 영영 이를 수 없는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도저히 win-win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관계라면 역시 ‘사랑’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의 희생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일까? 대부분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는 사랑 이야기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래서 결말이 어떻게 되더라? 그들의 사랑은 결국 깨지지 않았으니 그들은 happily ever after할 일만 남은 것일까? 모르겠다. 후일담 같은 걸 내주는 로맨스 소설을 구경해 본 일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교묘하게 똑똑한 결말을 만들어냈다. 결과적으로 작가는 ‘사랑과 희생’이라는 고전적인 질문에 어떠한 명확한 판결도 내리지 않았다. 이것은 속편을 내기 위한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 일뿐, 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결말에 대한 힌트를 남기자면 순진하고 우직한 벤니와 영악한 데시레! 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정말이지 속편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속편에서 작가가 어떤 답을 내릴지 혹은 그냥 얼버무려 버릴지도 모르겠지만 너무도 다른 사람들이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 똑같이 공평한 연애를 추구할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그 마지막 이야기가 너무도 궁금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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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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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초능력 같은 것을 얻게 될 거였다면 올림픽 복권 1등 번호를 미리 알아낼 수 있는 예지력 같은 것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혼자된 아이가 외로워서 누군가 보고 싶어 질 때 언제든 볼 수 있도록 천리안 같은 능력이었어도 괜찮았겠지.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염동력 같은 것을 얻었어도 좋았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텔레파시 능력이 제일 구리단 말이다. 말 많고 시끄러운 세상인데 입 밖에 내지 않는 소리까지 들어야 한다면, 안 그래도 괴로워진 인생인데 누군가의 고통과 외로움에 감응해야 한다면 그건 정말 고역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특별해지는 게 필요해. 우리는 중요해져야만 해. 원더보이가 되기를 바라고 또 바라야지. 매순간 삶이 놀라움으로 가득 차기를. 네가 원더보이인 한은 누구도 네 안의 놀라움을 짓밟거나 파괴할 수 없어. - 87쪽

 

 

그 아이는 어떻게 원더보이가 되었나?

 

과일 행상을 하는 술주정뱅이 아빠는 아들 정훈과 소원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규칙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절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일들을 말하면서도 아빠는 무한한 우주 어디선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모든 경우의 수가 이루어지는 양자역학 세계의 경이로운 기적을 동경했다. 아들은 아빠 몰래 엄마 아빠와 함께 돌고래 쇼를 보러 가는 소원을 품었다. 그것은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이루어 질 수 없는 아들의 소원은 아빠의 죽음으로 정말 절대 이루어 질 수 없는 소원으로 남게 되었다. 아빠는 남파공작원을 때려잡은 자랑스러운 애국지사로 포장되고 죽지 못하고 살아난 정훈은 온 국민의 염원으로 살아난 기적의 원더보이가 되었다.

 

어째서인지 아빠를 잃은 그날 밤 환하게 쏟아지는 빛의 무리를 경험한 뒤로 텔레파시 능력을 갖게 된 정훈은 재능개발이라는 그럴싸한 목적아래에 죄 같지 않은 죄목으로 잡혀 들어오는 사람들의 취조장면을 매일같이 지켜보게 된다. 그들의 마음을 읽으며, 감정에 동화되며 알지 못했던 고통과 말할 수 없는 절망과 고문 같은 희망, 깊은 상실감과 체념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마음의 그늘을 보게 된 이후 정훈은 권대령에게서 도망쳐 나온다. 병원에 있을 적 만났던 세상에서 FB를 제일 잘 던진다는 선재 형과 재회하고, 죽은 약혼자의 환영에 시달리는 강토 형과, 도통한 듯 은둔거사처럼 살고 있지만 가족을 그리워하고 삶을 후회하는 무공아저씨와 해직기자 재진아저씨를 만나게 된다. 불의에 저항하고, 그러다 누군가를 부당하게 잃고 상처를 품고 사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정훈은 초능력 따위를 빌리지 않고도 누군가의 마음의 그늘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비로소 본인에게 향하는지 타인에게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위로를 건네게 된다.

 

 

과연 이 고통이 사람들에게 보여질 수 있을까요?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과 시대의 우울과 너무나도 이상한 권력의 모순은 열다섯 살짜리 어린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아이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생겨버렸다. 아빠마저 잃은 천애고아인데다가 하루아침에 평범했던 모든 행복이 사라지고 본의 아니게 반공애국신파극의 주인공이 된 열다섯 살 정훈이 하필 사람의 마음을 읽고 동감하는 능력을 얻게 된 것은 우연이었을까? 어쩌면 그것은 필연이 아니었나. 1980년대는 한국은 너무도 외로운 곳이었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것 자체가 탄압 대상이고 이적행위였던 시절 아프고 고독했던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했다. 누군가는 외면되고 무시되는 이들의 마음을, 고통을, 외로움을 알아주었어야 했던 것이다. 알아주기라도 했어야 했던 것이다.

 

행복은 이토록 훤히 드러나는데, 고통은 꼭꼭 감춰져 있어요. 때리고, 부수고, 가두고, 불태우는 이유가 거기에 있죠. 어둠 속에 밀어넣고 감추기만 하면 되니까. 지금 우리는 차갑게 식어가는 캄캄한 밤 안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없다고 생각하죠. 그러니 그들의 고통도 이 세상에 없는 거예요. 신부님, 과연 이 고통이 사람들에게 보여질 수 있을까요? - 286쪽

 

보여주지 않으려는 사람들과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지지 않는 고통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의 아픔을 내보인다는 것은, 그렇게 부당함을 알리고 억울한 죽음을 애도 받는 일은 어쩌면 당시에는 일어날 수 없는 일,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정훈과 아빠가 절대로 이뤄질 수 없는 소원을 주고받았던 것처럼 그것 또한 누군가의 소원에 지나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정훈은 이루질 수 없는 소원도 계속 바라고 바라서 다른 우주에서라도 그 기적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아이였다. 쌍둥이에게 부정당해도 그 놀라운 어떤 가능성을 쫓아 끊임없이 기적을 소원하고 그 소원을 간직할 줄 아는 소년의 마음은 놀랍도록 희망적이었고 그래서 조금 더 특별했던 것이다.

 

특별했던 아이는 그렇게 원더보이가 됐고, 곁에 있는 사람들과 스스로에게 작은 기적을 만들어 냈다. 소년은 그렇게 어른이 되었고 아픈 이별을 한 사람은 마침내 안식을 얻었다.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으로 남았던 돌고래 쇼 관람도 끝내 이루어졌고, 1987년 억압받았던 사람들의 소원에 지나지 않았을 일도 실현되었다. 저기 먼 우주에 또 다른 지구에서가 아니라 바로 이곳, 너무도 고독한 사람들의 이상한 이곳에서.

 

기적을 바랐던 사람들에게 기적이 일어나고, 위로를 바랐던 사람들에게 진실한 위로가 전해지고, 마치 모든 것이 그렇게 흘러가게 되어 있었던 것처럼 마땅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흐른다는 듯이. 아팠던 지난 날들이 지독한 성장통이었음을, 어느 시절, 어떤 순간에도 누군가는 어떤 가능성을 믿고 기적을 소원한다는 희망을 전하는 정말 기적같은 이야기였다. 기적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반드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기적을 소원하는 원더보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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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의 품격]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공항의 품격
신노 다케시 지음, 양억관 옮김 / 윌북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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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에 박물관학 관련 책을 읽다가 새삼 놀란 것이 있는데, 어떤 학자는 박물관에 근무하는 전문 인력을 100여 가지의 직종으로 구분한다는 것이다. 박물관이라는 곳의 기능이나 역할을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렇게 많은 전문 인력이 필요한가 싶었다. 물론 이 분류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모두 포함된다. 박물관 전문직 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큐레이터에서부터 매표소의 직원, 박물관 환경미화원 까지 포함하여 셈한 숫자이니 따지고 보면 그리 놀랄 만한 숫자도 아니었던 것이다.

 

무지였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일종의 편견이었을 지도 모른다. 왜 특정한 업종에 대해서는 특정한 직업만 한정적으로 떠올리게 되지 않던가? 학교하면 선생님, 병원 하면 의사, 박물관 하면 학예사, 법원하면 검사, 공항 하면 항공기 기장이나 승무원 같이. 사회는 좀 더 복잡, 다양하고 아주 세세한 부분들 까지 전문성이 요구되는 일이 많은데 말이다. 대게의 사람들은 3D로 분류되는 고된 직업이나 돈 안 되고 뽄데 안 나는 한직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는 법이고, 어떤 일이든 그 안에서 느끼는 만족감은 (형태는 조금 다를 지라도)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면하고 싶어지는 것은 더 좋고 더 편하고 더 많이 벌고 더 출세하는 화려한 직업을 선호하는 어쩔 수 없는 마음 때문이리라.

 

그래서 더욱 감동적인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심지어 본인조차 어떠한 보람도, 의미도, 의욕도 가질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이런 저런 시끌벅적한 사건을 겪으면서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보람과 자부심을 갖게 된다는 주인공의 개과천선(?) 아니 어떤 의미로는 환골탈태라고 해야 할 것 같은 성공(혹은 성장?)스토리는 얼마나 대견하고 감동스러운가? 이 이야기는 공항이 아닌 수많은 직장에서 ‘아포양’일 수밖에 없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아주 묵직한 돌직구를 날린다. 그것은 부드러운 일침이고 별로 따뜻하지만은 않은 위로이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 세상의 모든 ‘아포양’들에게 바치는 헌사 같은 책이랄까? 그런데, 아포양이 뭐냐고?

 

아포양은 아포양이지, 뭐.

아포양은 세상을 가르쳐주지 않아. 아포양은 하늘을 날지 않아.

아포양에게서는 돈 냄새가 나지 않아.

아포양은 화를 내. 아포양은 웃어. 아포양은 달려.

아포양은 공항에 있어.

 

뭐 그렇단다. 아포양이라는 것이 우리나라에도 있겠지만 번역자도 적절한 말로 대체하지 못한 것을 보니(못한 것인지 안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참 설명하기 애매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간단히 말하자면 ‘아포양’은 공항에 내근하며 고객들의 각종 민원업무를 해결하는 일을 전담하는 인력에 대한 조롱 섞인 별칭이다. 공항에서 일하는 수많은 전문직 종사자들 가운데 화려하지도 않고 일도 고된데다가 돈도 못 벌고 별로 출세와는 상관이 없는 것 같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 그러니까 말하자면 아포양은 공항의 한직이다. 항공사 계열의 여행사에 근무하는 엔도 게이타는 잘나가는 기획부서 직원이었지만 새로 온 과장 대리를 두둔했다가 과장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나리타공항 민원업무 처리 담당으로 좌천되고 만다. 내일 모레면 서른인데 사귀던 여자 친구에게까지 차이고 한창 실적을 올려 출셋길을 열어야 할 시기에 익숙하지도 않은 일을 떠맡게 되어 버린 것이다. 늘 무기력한 엔도에게 선배 아포양 이마이즈미는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그를 볼 때마다 ‘즐기고 있어?’ ‘엔도, 웃어! 웃으라니까?’ 같은 시답지 않은 말이나 건네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가 터지고, 고객들의 불평불만은 각양각색이고, 회사와 고객 사이에서 중재도 해야 하고 문제도 해결해야 하는 엔도는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녀도 늘상 바쁘다. 그런 와중에도 유난히 눈에 밟히는 여성을 만나게 되고, 연애도 해야겠고 일도 해야 하는 엔도는 그야말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낸다. 수많은 사건을 겪고 또 해결하면서 엔도는 점차 아포양이라는 일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고 보람을 느끼게 된다. 떠맡겨진 일에 늘 무기력했던 엔도가 진정한 아포양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사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뻔 한 플롯에 낯간지러운 감동코드를 버무린 그저 그런 이야기로 비취지기 쉽겠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 책의 진정한 매력은 디테일에 있다. 저자가 공항에서 근무했던 이력이 있어서 그런지 공항 전문직 종사자들의 양태에 대해서나 그들간에 발생하는 갈등에 대해서나, 공항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소소한 사건사고들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잠시 머물렀다 떠나는 사람은 절대 알 수 없었던 배일에 쌓여있는 그들의 일상과 고충과 애환이 다소 코믹하게, 간간히 감동스럽게 그려져 있다. 그 속에서 출세 지향적이었던 엔도가 절대로 원치 않았던 업무에 좌절했다가 점차 본인의 일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고 비로소 일에서 어떤 만족감을 얻게 되는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지는데 그것이 퍽 감동적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쩌면 곡해일지도 모르고 감정과잉일수도 있겠지만 아포양과 엔도로 대표되는 고되고 초라할 지도 모를 수많은 직업들과 그 일을 천직으로 알고 묵묵히 살아가는 이들을 떠올리게 되어 조금 찡해지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아포양과 이 책의 초반 어느 페이지쯤을 견디고 있을 엔도들을 떠올리며, 조금 오버해서 외치고 싶었다. 소심하게 종이 위에서 외쳐본다. 힘내요, 아포양! 그대는 참 멋진 일을 하는 군요.

 

 

아, 그리고 이 책 후속편이 있다. 나리타공항 근무 2년차가 된 엔도가 신입 교육도 맡게 되면서 더욱 골치 아파졌다나 뭐라나. 공항은 여전히 사건사고로 떠들썩하고 거기에 보태듯 신입은 제멋대로 굴고, 사랑의 라이벌 까지 등장한단다. 제목은 [연애의 품격]이라는데 조만간 출간 예정이라고. 제목을 정말 기가 막히게 지었다. 원제는 아포양이지만 공항의 품격이 오히려 딱 들어맞고 읽고 나서 좀 더 와 닿는 무언가가 있더라. 2권은 대놓고 연애의 품격이라니, 어떤 골치 아프고 애타는 일이 엔도를 기다리고 있을지! 책장도 쉽게 술술 넘어가고 대단한 몰입도를 가진 책이었으니 2권도 적잖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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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의 고치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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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화가와 뮤즈와 추리소설

 

천재적인 예술가의 곁에는 그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가 함께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난봉꾼 클림트를 물신양면으로 도우며 곁을 지켰던 에밀리 플뢰게나 우유부단한 바람둥이 로댕을 사랑했던 젊고 아름다운 연인 까미유 끌로델, 프리다 칼로를 여러 번 울린 애증의 결정체 디에고 리베라 같은 이들 말이다. 여기에 한명 더 소개하고자 한다. 에밀리 플뢰게처럼 수완이 좋았던 사업 파트너였고 까미유 끌로델처럼 열정적인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으며 디에고 리베라만큼이나 엉덩이가 가벼웠던 최강의 뮤즈, 흘러내리는 시계 모티브로 유명한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평생을 사랑했던 여인 갈라리나다.

 

 ┃살바도르 달리와 그의 연인 갈라

 

달리가 갈라를 처음 만났을 때 갈라는 이미 유부녀였다. 하지만 첫눈에 갈라의 매력에 빠져버린 달리는 열렬히 구혼했고 결국 그녀와 혼인관계를 맺는다. 지금으로서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개방적인 성관념을 갖고 있던 갈라는 달리와 결혼한 이후에도(물론 이전에도 그러했다) 끊임없이 여러 애인들을 만들고 자유롭게 사랑을 나눴다.(심지어 전남편과도 계속 잠자리를 가졌다고 전한다) 하지만 달리는 그 모든 것을 용인했다고 한다. 달리는 그녀를 결혼으로 구속하려 들지 않았고, 갈라도 달리가 화가로 성장하고 더 좋은 가격에 그림을 팔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왔다고 한다. 이런 재미있는 관계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달리의 맹목적인 사랑이 그만큼 깊은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은 조금은 독특한 달리의 성품도 한 몫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우스꽝스러운 안테나 수염을 자랑스럽게 기르고, 당당하게 스스로를 천재라고 칭하고, 자궁 안에서의 기억도 갖고 있다는 허풍 같지도 않은 말을 자서전에 남긴 남자였으니 예사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정말 기인이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저런 얘기를 궁시렁 거렸지만 사실 잘 모르는 예술가의 뒷담화 같은 것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교과서적이면서도 조금 독특한 추리소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어서 얘기를 꺼낸 것이 조금 길어졌다. 일본의 엘러리 퀸이라고 불리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가 아리스 시리즈 두 번째 장편인『달리의 고치』는 바로 살바도르 달리를 소재로 쓰인 본격 추리소설이다. 괴짜 화가와 본격 추리물이라니 된장 올린 팥빙수처럼 궁합이 맞지 않을 것 같은 묘한조합이지만 의외로 괜찮은 맛이 나는 추리소설이었다. ‘고치’ 안에서 사망한 달리 추종자의 기괴한 죽음과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는 임상범죄학자 히무라 히데오의 추리는 단정하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논리 정연했다. 시종일관 헛다리를 짚어 대는 히무라 교수의 절친 작가 아리스 선생도 여전하더라. 역자는 전작인 『46번째 밀실』을 잇는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로서 ‘본격 추리소설로서의 완성도와 캐릭터의 성공적인 안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라고 평했다. 독자인 나는 ‘억지스러운 사건을 최대한 억지스럽지 않게 풀어내려고 머리를 굴린 작가의 노력이 보였다’라고 평하고 싶다. 이쯤 되면 조금은 궁금해 지지 않으신지? 과연 그 ‘고치’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달리 마니아, 고치 안에서 죽다.

 

프로토 캡슐에서 발견된 시체는 정말 기이했다. 머리를 둔기에 맞아 사망한 듯 보이는 시체의 주변에는 혈흔이 거의 없었고 무엇보다도 수염이 없었다. 수염이 없다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일수도 있으나 이 시체는 조금 특별했으므로 잘린 수염은 피가 거의 흐르지 않은 시체보다도 더욱 기이한 일이었다. 사망한 이는 규모 있는 주얼리 브랜드의 사장인 도죠 슈이치로, 열렬한 달리 신봉자 였다. 그는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를 너무도 동경한 나머지 그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안테나 수염을 코스프래 하듯 기르고 다녔다. 그의 우스꽝스러운 기행은 단시간에 회사를 크게 일으킨 남다른 사업 수완과 더불어 큰 주목 받으며 그가 연예인 못지않은 유명세를 누리는데 일조했다. 그런 그가 수염이 잘린 체 그의 별장 안 은밀한 휴식처에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누에는 고치를 짓고 그 안에서 번데기가 되지. 진주조개는 껍질 속으로 침입한 이물질을 수천 겹의 진주층으로 감싸 보석을 만들어. 인간도 마찬가지야. 인간의 고치 속에서도 갖가지 것들이 변화해 다양한 무언가가 만들어 지겠지. - 405쪽

 

혈흔이 거의 보이지 않는 살인현장, 사라진 무기와 피해자의 옷, 프로트 캡슐 안에 기이하게 내버려진 도죠 슈이치의 시체까지 모든 요소들이 살인임을 암시하는 기괴한 사건 수사에 ‘필드워크’를 명목으로 임상범죄학자인 히무라 히데오와 그의 절친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참여하게 된다. 경찰은 도죠 슈이치의 주변 인물들과 신상을 조사하는 한편 그에게 살의를 가질 만한 인물들을 용의선상에 올려둔다. 도죠 슈이치가 엄청난 자산을 보유한 재력가였지만 독신이었다는 점, 회사 내에 부하직원과 연적 관계였다는 점 등을 들어 그가 없어지면 금전적으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이득을 보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수사하기 시작한다. 사라진 피해자의 옷, 사라진 둔기 그리고 사라진 피해자의 수염. 증거들이 하나 둘 씩 나타나면서 사건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과연 도죠 슈이치를 살해한 범인은 누구인가? 그는 왜 도죠 슈이치의 수염을 잘랐을까?

 

 

주요 관전 포인트를 안내합니다.

 

이 책은 살바도르 달리의 회고록을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놀랍게도 자궁 안에서의 기억을 갖고 있다고 고백하며 ‘그곳은 더없이 편안한 낙원이었다’고 회상했다. 과연 그가 정말 자궁 속에서의 기억을 갖고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흥미롭기는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니 차치하고,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자궁’이다. 어머니의 심장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고, 따뜻한 물에 감싸여 온갖 소음과 따가운 빛과 중력의 괴롭힘으로부터 벗어나서 오로지 편안하게 존재했던 공간이 바로 자궁이다. 비록 떠올리지는 못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서의 편안함을 경험했고, 세상의 온갖 내적인 스트레스와 외적인 위협을 견디며 안식을 구하고자 한때 본능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곳이다. 달리가 말했던 것처럼 그곳은 낙원이었을지 모른다. 괴로운 일상에서 누구나 그리워하는 안식처의 이미지이자 낙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징을 여기서는 ‘고치’라고 표현한다.

 

정신적·육체적인 위협을 가해오는 세상에 대해 누에고치가 고치를 만들어 그 안에 거처하듯이 자신만의 안식처를 정해 그 안에서 안락함을 취하고자 하는 성향을 사회학에서는 ‘코쿠닝(cocooning;고치 짓기) 현상’이라고 한다. 편안하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도 강력한 본능이므로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고치’가 있다. 어떤 이에게는 화목하고 안정된 가정이 ‘고치’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마니악한 취미가 특별한 안식처가 될 것이고, 이 이야기에서 시체로 발견되는 도죠 슈이치의 경우는 자궁을 재현한 듯 한 명상기계 ‘프로트 캡슐’이 그것이었다. 멋지게 사건의 전말을 파헤쳐 내는 콤비 히무라와 아리스에게도 ‘고치’가 있다. 히무라의 고치는 필드워크라는 명목으로 벌이는 사건 현장에서의 탐정놀음이고, 아리스의 고치는 잔혹한 범인이 등장하고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추리소설을 쓰는 것이다. 어째서 이들은 이렇게 잔혹한 ‘고치’를 갖게 되었을까? 그들이 그런 무시무시한 ‘고치’를 갖게 된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히무라가 교수인 본분을 망각하고 휴강을 펑펑 날리며 사건현장으로 달려가는 이유, 아리스가 잘 다니던 직장을 떼려 치우고 범죄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이 책에서 소개된다. 이 시리즈의 팬이라면 아마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또한 어째서 살바도르 달리를 소재로 이용했을까? 하는 의문도 이 책에 흥미를 놓지 않고 끝까지 읽어나가게 하는 중요한 질문이 될 것이다. 정확히는 어떻게 살바도르 달리가 추리소설 소재로 녹아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살바도르 달리를 추종하는 슈이치와 갈라처럼 너무나도 매력적인 여인 사기오 유코, 그리고 갈라의 수많은 애인들처럼 사기오 유코를 좋아하는 많은 남자들이 등장한다. 엄청난 재력을 자랑하는 독신남에 달리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슈이치는 어째서 프로트 캡슐 안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는가. 돈 혹은 사랑, 그가 죽으면 이득을 보는 이가 분명히 있다. 살해 동기는 다양하고 용의자가 될 만한 인물들도 여러 명이다. 철저한 알리바이 검증으로 하나 둘씩 용의자를 지워나가는 전개에 집중하면서 어째서 달리인지 생각해 보시라. 작가는 속이지 않았다. 숨겨놓은 조커 따위는 없다. 하지만 반전은 있다. 한정된 용의자들 가운데 범인을 직감해 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어째서 그가 범인일 수밖에 없는지는 아마 마지막장을 덮을 때 까지 아리송할 것이다.

 

사건은 기괴해 보이고 모든 정황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상한 살인사건이지만 사건의 전말은 아주 명쾌하다. 도전해 볼만한 미스터리로 나는 퍽 즐겁게 읽었다. 과연 어떨지?

 

 

 

++덧, 서평을 쓸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갈수록 책장사가 되어 가는 것 같다. 하지만 오해 않으셨으면 좋겠는 것이, 나는 서평단으로 받은 도서라도 재미없으면 재미없다, 난해하면 난해하다, 거지같으면 거지같다고 평하는 사람이다. 별로 서평을 열정적으로 쓰지는 않지만 일단 서평을 쓰는 책은 어떤 식으로든 인상적인 책임을 밝힌다. 이 책은 긍정적으로 인상적이었다.(뭔가를 써야 하기도 했지만)

 

평가단 활동도 거의 끝물이라 좀 잘 해보고 싶은 마음에 서평 제목이라도 멋들어지게 붙이고 싶었더랬다. 제목을 뭘로 할까 고민했는데, 사실은 “어떤 일이든 치정이 얽히면 복잡해 지더라”라고 붙이고 싶었지만 은근 스포 아닌 스포가 될지도 몰라서 소제목중 하나를 갖다 붙였노라!(라면서 이제와서 밝히는 이유는 무엇인고 하면 나도 모르오.)

 

오타 아닌 오타인 것 같은데, 248쪽의 밑에서 세 번째 줄, [슈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요시즈미를 어딘가로 데려가려 했다.]에서 슈지가 아니라 슈이치다. 그러니까 이 둘은 형제인데, 형이자 피살자가 형인 도죠 슈이치고 그 동생은 도죠 슈지다. 이름이 조금 비슷한데, 요 부분은 요시즈미와 슈이치가 둘이서 대화하는 장면이고 아직 슈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고로 오타인가?!

 

2012년 3월 20일 고쳐서 다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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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동안
윤성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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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오늘 오다가 교통사고 난거 봤어. 쪼그만 꼬마애가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달려오던 차가 애를 못본거야. 속도도 줄이지 못하고 그대로 쳤는데, 꼬마애가 차에 통 하고 받쳐서 슝 하고 날아가는 거야. 이 얘기를 듣고 순간 웃음이 터질 뻔 했다. 그런데 웃을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 애는 많이 다쳤겠지? 이 얼마나 비극적이고 처참한 이야기란 말인가. 근데 이야기를 전해준 놈이 이상한 의성어를 덧붙이는 바람에 엉뚱하게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면서도 ‘아, 웃으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 웃음이 나오니 참 난감하기 그지없어서, 이야기를 전해준 놈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 책이 딱 그렇더라. 웃을 수가 없는 상황인데 작가는 집요하게 웃기를 권한다. 이렇게 난감할 수가.

 

줄곧 애매한 표정만 짓다가 결국 못 참고 맨 뒤로 갔다. 소설을 읽기도 전에 해설을 읽는 것은 논술숙제를 전과를 베껴 해치우는 것 같이 무식한 짓임을 잘 알고 있지만 나는 아무래도 단편소설이라는 것이 부담스러운 까닭이다. 작가의 글에는 분명 어떤 의도가 숨어있을 것인데 그런 것을 캐치해 낼 정도로 기민한 머리가 없어서 기어코 중반까지 읽었을까 말까 했을때 해설을 펼쳐들었다. 그런데 더욱 알 수 없게 돼 버렸다. ‘영원히 우연적인 것이 기적을 구원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대체 어떤 의미인 걸까? 해설을 읽고 나서 다시 소설로 돌아와서도 내내 신경 쓰였던 문장이다. 솔직히 터놓자면 거슬렸다. 희극적인 비극이란 이 책을 붙들고 있는 내 모습이 아닌가, 괜히 웃음이 나네.

 

이 책, 상당히 위트가 넘친다. 귀신이 귀신 분장을 한 사람에 놀라 자빠지고 뻘건 게 묻은 형사귀신은 총 맞아 죽은 게 아니라 회를 초장에 찍어 먹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자신의 장례식장에 와 육개장을 푸지게 처먹은 친구들을 지켜보는 총각귀신은 참 의연하다. 아들이 돈 쪼가리 때문에 아버지의 시신을 지하실에 내팽게쳐뒀어도 아버지 귀신은 가족들이 걱정이다. 갈수록 가관인데 자잘한 게 참 깨알 같아서 다 나열해 내지도 못하겠다. 근데 뜯어보면 묘하게 끔찍하거나 비겁하거나 치졸하거나 비참한 속사정들이 숨어있어서 표정이 애매해 지고 마는 것이다. 비극적인 일을 당하고도 남의 일인냥 시니컬하게, 무감각하게 받아들여 버리고는 금세 순응해 버리는(심지어 때로는 개그로 승화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오열하거나 소리치고 괴로워하는 것보다 더 씁쓸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삶이 고되거나 지나간 과오를 후회하거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거나 현실에 비참해 하거나 아예 죽어버렸다. 누구 하나 ‘나는 불행하오’하는 사람은 없지만 참 안쓰러운 처지다.

 

특히 ‘죽음’이라는 소재가 정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열편의 단편 중 귀신이 화자로 등장하는 것이 3편이나 되고 나머지 이야기들에서도 꼭 주변인물의 죽음이 소재로 등장한다. 죽음 이라는 것은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불행이 아닌가. 본인이 죽든 주변 사람이 죽든 간에 그런 일을 겪는 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도 누구에게나 힘든 일일 텐데 말이다. 아무리 그 불행에 우연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더라도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견디기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런데 아무렇지 않거나 농담을 건넬 정도로 여유만만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웃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괴리에서 오는 처연함이랄까, 쓸쓸함이랄까. 한편 읽을 때마다 기분이 엉망이 되 버리더라.

 

어디서 보니 ‘우연적인 불행’이라든가 ‘희극적인 비극’이라는 표현을 쓰던데 이런 말장난 같은 모호한 말들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쩌면 이 외의 다른 표현을 찾아내질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 꼬리는 시종일관 어중간한 위치에서 씰룩거리며 그렇게 읽어나갔다. 딱히 나는 비극을 찬양하거나 인생에 있어 비극이 갖는 어떤 가치에 대해서도 얘기할 깜냥이 없기 때문에, 애초에 이런 터무니없이 긍정적인 전개에는 마음이 잘 옮겨지지가 않아서 진득하게 읽어지지는 않았다. 작가는 문장이 이들의 삶을 따라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전하며 글을 마쳤는데, 나는 작가의 글에 내가 제대로 따라가질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로 마무리를 싶다. 이런 건 좀 낯설었다. 그래도 뭔가를 써내려니 붙은 해설만큼이나 아리송해 지고 말았다. 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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