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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평점 :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런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말도 들었지만, 훌륭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쉬워 보였습니다. 쉬웠습니다. 좋은 사람은 좋은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기대에 부응하는 사람이고, 실망시키지 않는 사람이죠.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무리한 걸 요구하는 분들도 아니었고요. 착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하는 것, 그 정도로도 나는 좋은 아이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단지 그것만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나도 행복했습니다.
좋은 아이가 되는 건 쉬웠는데, 좋은 어른이 되는 건 너무 어렵더군요. 내게 바라는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다양한 요구들과 다양한 기대들은 때로는 상충되기도 해서 나는 때때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마치 거미줄 같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촘촘하고 끈끈한 줄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파닥거리고만 있는 기분이 뭔지 아실까요? 그 거미줄을 끊어버리고 싶었습니다.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혀 개운해지지도 않았고, 내게 돌아온 것은 매도와 비난이었습니다. 싸가지 없는 년, 이기적인 년. 알 수가 없습니다. 좋은 아이로 있으려고 노력하면 모두 행복할 수 있었는데, 좋은 어른으로 있으려고 발버둥 칠수록 행복은 멀어져만 갔습니다. 이럴 바에야 그냥 이기적인 년으로 남아있는 것이 차라리 편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생각합니다.
『완전한 행복』은 완전한 행복을 추구한 어느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너무도 유명한 ‘그 사건’, ‘그 여자’를 모티브로 합니다. 이기적인 인간이 행복에 집착할 때 얼마만큼 무자비해지고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극한으로 보여줍니다. 전개나 묘사가 집요하고 끔찍해서 골이 아파질 정도인데, 단지 소설일 뿐이라고 진정하기에는 현실의 ‘그 사건’이 떠올라 숨이 턱턱 막혔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악인의 독기는 종이를 뚫고 나올 정도로 강력한데, 그녀의 희생양이 되는 주변 인물들은 하나같이 무기력하게 그려지며 엄청난 고구마를 선사합니다. 언제쯤 사이다가 터져줄까 그거 하나만을 기대를 하며 읽는데 결말이 이렇게 나는 군요. 찝찝합니다.
유나라는 캐릭터는 확실히 독특합니다. 행복의 기준이 오로지 나, 본인 한정인 사람으로, 자식도 가족도 없는 사람이죠. 이렇게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사람은 현실세계에서는 잘 없어요. 하지만 그녀의 주변인들은 어디서 본 듯도 합니다. 적당히 이기적인 면도 있지만 그래도 본인의 행복의 기준에 ‘우리’가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나’의 행복을 추구하지만,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일 수도 있는 그런 평범한 사람들. 유나 같은 인간상이 결국 실패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하지만, 물론 제 기준입니다만, 평범한 행복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휘둘리고 고통을 겪는다는 전개는 다른 의미로 충격적이었습니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특히나 마음을 끌었던 게 재인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회피형 인간’인 줄 알았습니다. 감당이 안 되는 문제, 사람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그렇게 가만히만 있는 사람이요. 그렇게 당하면서도 고작 그 정도밖에 못하는 답답한 사람 말입니다. 후반부에야 밝혀지지만 재인은 ‘좋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증오하는 유나를 ‘우리’라는 테두리 밖으로 밀쳐낼 정도로 독하지도 못하고, 부모와의 관계나 전남친과의 관계에서도 나의 행복보다 타인의 행복을 우선시 하는 사람이었죠. 하지만 그녀에게 남은 게 뭔가요? ‘좋은’ 사람인 그녀지만 너무 많은 것을 뺏기며 살았고, 또 너무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그 모든 잘못은 유나에게 있다고, 그녀를 만나버렸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싶었습니다. 원래 ‘좋은’ 사람은 손해를 보는 사람이고, 뺏기는 사람이고, 그렇게 대해져도 괜찮은 사람이지 않나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본능 같은 것이지요. 사람마다 행복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나고, 그것을 나름의 방식으로 추구합니다. 행복을 위해 타인을 도구로 삼는 것은 물론 안 될 일입니다. 반드시 실패하게 될 테니까요. 그렇다고 행복을 위해 타인을 목적으로 삼는 일도 반드시 해피엔딩은 아닐 겁니다. 나는 이 책에서 그것을 읽었어요. 악인과 희생양들의 처절한 사투보다도 그것이 더 무섭고 끔찍했습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건 물 건너 간 것 같은 상황에서 좋은 사람이라도 되고 싶었는데, 뭔가 아닌 것 같습니다. 행복해진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사실 가장 바라는 것은 그건데요. 애초에 행복이란 게 뭘까요? 어디에 있으며, 무엇으로 오는 걸까요?
완독을 하고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가 친구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 친구는 행복은 과거에 있는 것이라고 얘기했어요. 어느 날 문득 과거의 어떤 일을 떠올렸을 때, ‘그 때 참 좋았지.’하는 것이 행복이라고요.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나를 보며 나름의 위로라고 건넨 말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어요. 기억이란 게 원래 왜곡되고, 미화되기 마련이잖아요? 거짓말쟁이 기억을 근거로 어떻게 행복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계속 과거로만 존재하는 행복이라니 얼마나 슬픈 일일까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어쩌면 ‘완전한 행복’이란 과거로 존재하는 행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과거로 있는 행복이야 말로, 관계에 기대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 완전히 벗어나지도 않으면서 온전히 개인적인 행복입니다. 그렇게 생각해버리니 뭔가 개운해 졌습니다. 멀리서 형체도 없이 모였다 흩어지는 행복에서 눈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전히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희망을 품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