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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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라는 아주 좋은 말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의 앞에는 대중의라든지, ‘사법적이라든지, ‘사회적이라는 말이 붙기도 한다. 앞에 붙는 말에 따라서 정의는 묘하게 달라지는 것 같다. 그래서 가끔은 내 일도 아닌데 괜히 화가 난다. 내가 아는 정의는 어떤 세상이나 어떤 세계의 그것과는 많이 동떨어진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단순하고 명쾌한게 좋아서 인지 나는 추리소설을 아주 좋아한다. 나쁜 놈은 기상천외하게 나쁜 짓을 저지르지만 결국은 악행이 밝혀지고 벌을 받게 된다. 이 얼마나 명쾌하고 통쾌한 정의의 구현인가. 현실세계에서는 드물게 벌어지고, 별로 일어나지 않는 결론이기도 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추리소설은 항상 범인이 잡히는 데서 끝이 난다. 법정을 무대로 하는 일부 특수한 설정의 소설들을 제하고 나면 범인이 법정에 세워져서 판사에게 죗값을 받는 결말은 본적이 없다. 정의를 주제로 하는 각종 엔터테인먼트 물에서 정의의 사도는 늘 탐정이거나, 경찰이거나, 변호사거나 검사다. 사실 죄를 특정하고 죗값을 저울질 하는 곳은 법원이고 그 곳에서 악인의 형량을 결정하는 것은 판사인데 말이다. ‘악을 벌하는 정의의 사도라는 프레임에 걸맞은 역할을 하는 것은 어쩌면 판사일 것 같은데, 내가 좋아하는 픽션에서는 그려지는 판사는 항상 미미한 조연이다. 어쩌면 피해자이거나 악과 결탁한 부패한 권위로 그려지기도 한다.

 

주인공이 변호사도 아니고 검사도 아닌 판사라는 점이 확실히 흥미를 끄는 부분이었다. 법정 활극이라는 데 주인공이 젊은 여성인데다가, 별명은 미스 함무라비라니 거칠고 과격하지만 속 시원한 사건들이 벌어질 것 같은 엄청난 제목이다. 어떤 종류의 이야기가 기대되기도 하고 예상 가능한 이야기들이 쉽게 그려졌지만, 열어놓고 보니 실상은 법정판 미생이었다. 예상과는 많이 달랐지만 그래도 흥미롭게 끝까지 읽어나갈 수 있었던 건 어째서 범죄, 추리 소설에서 그려지는 판사의 역할은 조연(혹은 피해자, 악역)일 수밖에 없는가라는 소소한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있어서 이기도 하고, 다뤄지는 사건들이 너무나도 생활 밀착형이라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읽게 되더라.

 

작가의 이력을 보자면 아마 이 책만큼 판사들의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는 책을 없지 싶었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때때로 당황스러웠다. 기성 판사들의 목소리를 통해 ‘정의는 한정된 자원이라고 말하고, ‘법원은 사회운동을 하는 곳도 아니고, 탐정놀이를 하는 곳도 아니다. 판사는 정의의 사도가 아니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직접적으로 판사가 할 일은 법정에서 분쟁을 해결하는 일이지 길거리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일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공명심 조차 가져서는 안 되는, 오로지 가운데에 서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판사라는 직업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위치라면 확실히 격정적인 범죄, 추리극에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긴 하다.

 

 

정의로운 변호사, 정의로운 검사는 입에 붙어도 정의로운 판사는 왜인지 어색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에 대해서도, 이 책은 의외의 답을 주고 있다. 사회적 정의와 사법적 정의의 괴리를 우리는 일상에서 빈번히 느끼고 있다. 어째서 저 천인공노할 범죄자의 죗값은 고작 몇 년에 불과한 것인지, 누가 봐도 억울한 소시민인 것 같은 그는 왜 그런 판결을 받아야 하는지, 음주가 죄의 경중을 가리는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어째서인지 같은 의문에 대해 작가는 마치 대화를 청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범죄자에게 너무 무른 것 같은 판결을 내려졌을 때, 사람들은 피해자가 판사의 자식이거나, 부모거나, 형제였다면 과연 그런 판결을 내릴 수 있겠느냐며 분노하고 사법적 정의라는 것을 냉소하게 되는 일이 많다. 하지만 사건의 모든 기록을 읽고 법을 근거로 판결을 하는 판사의 입장에서는 사건이 훨씬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판사의 일은 현장을 직접 뛰는 것이 아닌 기록과의 싸움이라고 한다. 오로지 기록과 증거만으로 법에 근거하여 판단을 내린다. 일반 대중과는 사건에 대한 접근도 다르고 판단의 근거도 전혀 다른 것이다. 법이 현실의 모든 상황을 반영하는 것도 아니니 사법의 정의와 일반 대중들이 느끼는 정의는 분명 다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어려운 것이다. 어려운 것을 어렵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법이 항상 약자의 편에 서는 것도 아니고, 호소하지 않으면 구제해주지 않는다. 울지 않는 아이에게는 젖을 물리지 않는 매정한 어미같은 법을 근거로 사건의 시비와 죄의 경중을 다루는 일이 그들의 일이다. 일반 대중의 상식으로는 이해가지 않는 판결이 내려질 때도 있고, 그럴때면 그들의 사고체계는 나와는 영 다른, 다른 세상 사람 같이 느껴진다. 소설의 인물들은 정의는 한정된 자원이라고 말하는 기성 판사에서부터 냉철하고 이성적인 엘리트 판사, 혈기 넘치는 초짜 판사까지 모두 평범하게 그려진다. 평범한 두 아이의 아빠로, 중간에 끼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직장인으로, 평범하게 세상이 두려운 젊은 여자로. 마치 판사도 평범한 사람이랍니다라고 알려주고 싶어하는 것처럼 조금 과정된 듯 하게 말이다.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일이라는 것이 다양한 갈등상황을 맞닥들이는 것이라, 인간에 대한 혐오나 회의만 가득할 있을 것만 같은데도 판사들의 속내는 의외로 동정과 연민이라는 감정도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그게 이야기의 반전포인트이기도 하고 또 의외여서 이상하기도 하고, 읽는 내내 기분이 묘하더라. 차갑고 딱딱할 것만 같은 석고상의 손에서 의외의 온기를 느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좀 당황스럽기도 하고, 아주 조금 두렵기도 하고, 조금 우리와 닮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사법적 정의와 일반 대중이 느끼는 정의는 분명 다르다. 그 간격이 때때로는 너무 멀게 느껴질 때도 많았다. 사법의 세계는 법을 아는 소수만의 세계이고 그들은 영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사람들인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들도 사실은 법과 현실의 괴리에 대해 일반 대중과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좋았다. 솔직히 인물들은 너무나 소설 같은데, 이야기는 명쾌하지도 않고, 딱 떨어지는 결론도 아니라서 개인적인 취향은 아니지만 그래서 좋았다. 그들도 고민하고 있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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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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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송보송해 보인다. 한마디로 사랑스럽다. 시뻘건 얼굴에 입을 헤 벌리고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는데 웃는 표정도 아니지만 눈을 뗄 수가 없다. 언니가 수 시간의 진통 끝에 생살을 째고 장기를 가르고 아이를 낳았다. 형제가 많은 나는 벌써 네 번째 조카를 만난 것이지만 여전히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어릴 때는 엄마가 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해 보였다. 여고 다닐 때 모의고사 점수가 잘 나오질 않는다며, 대학도 꿈도 이제는 다 모르겠다고 훌쩍이는 친구에게 나는 이렇게 말을 했었다. 무슨 걱정이야. 그래도 한 십년쯤 지나면 엄마는 돼 있겠지. 그때 우리는 무언가 되지 못할까봐 너무도 무서웠던 것이다. 대충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친구는 정말 엄마가 돼있다. 그 친구 카톡 프사에는 방긋 우는 아기가 걸려있다. 그것도 참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되고 싶은 대로 된 사람만 있으면 세상은 북새통이 될 거야~. 신부가 되겠다는 꿈 정도는 이루어도 좋겠지만…….” -20p

 

 

항상 무언가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뭐가 되고 싶은지 적어내야 할 일이 많았던 때는 주변에 너무나도 휘둘려서 이것도 되고 싶었다가 저것도 되고 싶었다가 했었다. 다에코의 말처럼 “되고 싶었던 게 꼭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지 그중에서는 무엇도 되지 못했다. 그래도 엄마는 당연히 되는 건줄 알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엄마가 그냥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똑똑히 아는 지금은 사실 자신이 없다.

 

 

생각해 보면 꽤 오랫동안 나는 누구 씨의 딸이나 누구의 동생으로 불렸다. 그렇게 관계로 규정되는 나에 대한 정의가 너무도 불편하고 싫어서, 너무도 싫어서 견딜 수 없을 때도 많았다. 내가 아니라 누구의 무언가로 불리게 되어 버리면 그만큼 나의 존재감이 나눠져서 줄어드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내가 어쩌면 평생 ‘누구의 엄마’라는 호칭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이상하게 서러워 진다. 결혼을 하고 싶은 것도, 사무치게 아이가 갖고 싶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가끔은 나도 나를 잘 알 수가 없어서 혼란스럽다. 이 짧은 만화를 읽고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A4용지 한가득 내가 원하는 것들을 적어 내려갔다. 땀이 나고 열이 난 몸뚱이를 씻고 싶고, 달디 단 초콜릿이 먹고 싶고, 잠이 들고 싶고, 하고 싶고, 또 하고 싶고. 종이 한 장을 가득 채웠건만 대게가 일신의 욕구들이었다. 희망이 깃들어 있는 욕망으로 읽힐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또 서럽고 서글퍼 졌다. 편안하고 싶은 마음뿐인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어쩌면 내가 바라는 것도 ‘보장’이 아닐까 싶었다. 나에 대한 보장. 내가 온전할 수 있는 보장.

 

 

이제는 ‘좋은 나이’라는 말을 들어도 수긍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많이 늦어버렸다는 생각 또한 들지 않지만 어쨌든 현재의 나는 벚꽃 나무도, 동백나무도 되지 못했다. 종가시나무라서 서글픈 게 아니라 더 이상 무언가가 되고 싶지도, 될 자신도 없어진 것 같아 아프다. 이대로 정말 아무것도 되지 못할지도 몰라. 그럴지도 모른다. 여고시절 그 친구처럼 울먹이면 ‘그래도 엄마는 돼 있겠지’라고 말해줄 사람도 없겠구나. 생각해 보면 지금의 나는 참 여러모로 어중간한 사람이다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는 모두 나무가 되는 게 아니라 새에게 먹히거나 밟혀서 으깨지고 새싹이 나올 수 없는 곳으로 굴러다니기도 한다. 나무가 되는 것은 도토리에게 아주 힘든 일이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엄마는 이미 ‘있다.’ 그것은 무척 대단한 일이다. 분명히 이 도토리에게는.” - 125p

 

 

십년 뒤에도 나는 있을 것이다. 아마도 있겠지? 높은 확률도 나는 십년 뒤에도 ‘있을’것이다. 그래, 그거면 족한 거야. 이 만화는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별거 아닌 단순한 그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위로가 된다. 또다시 10년 뒤에 여전히 어중간한 나라도, 나는 있을 것이다. 나로. 그 말이 ‘멋진 내가 되자’라든가 ‘훌륭한 내가 되자’보다 더 대단해 보인다. 더 따뜻하게, 다정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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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그라운드
S.L. 그레이 지음, 배지은 옮김 / 검은숲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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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하다. 머리도 아픈 것 같다. 보리차를 끓여놓고 식힌다고 뒀는데, 때 모르고 더워진 날씨를 생각 못하고 너무 오래 내버려둬서 걸쭉하게 변질된 보리차 같은. 그래, 그런줄도 모르고 그걸 냉장고에 넣어두고는 무심코 벌컥벌컥 들이킨 것 같은 기분이다. 딱 그렇다. 게워내고 싶은데 게워낼 수도 없는, 그런다고 이 찝찝함과 불쾌감이 없어질 것 같지 않은 그런 소설이다. 너무 혹평인가? 그런 것 치고는 정말 신나게 읽었다. 읽는 내내 내 방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성소’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갇혀 있다고. 이걸 얼른 읽어내고 결말을 봐야 나도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몰입감 하나는 정말 끝내준다.

 

아시아를 시작으로 정체 모를 바이러스가 퍼진다. 놀랄 것도 없이 언론에서는 당장 세상의 종말이 닥친 양 호들갑을 떨어대고, 편집증 종말론자들은 핵폭탄이 떨어진데도 안전하다는 그들만의 성소로 모여든다. 황야에 위치한 생존형 지하벙커 ‘성소’는 정수시설, 공기정화시설, 수경재배시설 등을 갖춘 최고급 주거시설이다. 첨단 보안 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안에서 걸어 잠그면 그 누구도 안으로 침입할 수 없고, 벙커 내부에 갖춰진 식자재들만 갖고도 입주민들이 1년가량 걱정 없이 생존할 수 있는 그런 곳이다. 젊고 유능한 커플과, 신앙심이 유독 신실한 것 같은 가족과, 성공한 이민자 가족과, 어린 아이가 있는 가족까지. 성소에 입주한 주민들은 그들만의 기대를 품고 성소에 왔지만 의문의 변사사건이 발생하고, 성소가 밀실화 되는 사태까지 벌어지면서 그곳은 하나의 거대한 무덤이 되어간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전형적인 클로즈드 써클 미스터리에, 이야기는 후던잇(who done it)의 후를 찾아 흥미진진하게 진행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짐 브라운의 『24시간 7일』을 기대하고 책을 펼쳤는데 난데없이 기리노 나쓰오의 『도쿄섬』이 튀어나온 듯 한 격이랄까. 그것도 별로 적절한 비유는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이던,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던, 어떤 지위에 있던 사람이던 같은, 사회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모든 기준이 폐쇄된 성소에서는 무의미해진다. 사람들은 갇혀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광폭해지고 야비해진다. 그럴수록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오직 생존만이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자 도덕도 종교적 신념도 뒷전이 돼 버린다. 그 와중에 사람 한, 둘이 죽어 나간들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사람들은 항상 이런 짓을 한다. 전쟁 말이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한다. - 441쪽

 

사람다운 생활은커녕 마실 물조차 부족해서 최소한의 생명 유지조차도 위협을 받게 되는 상황에서 연쇄 살인인 것 같은 수상한 사건이 벌어진다고 치자. 어떨 거 같은가? 미친 살인마의 칼날이 나를 향해 겨눠질까 두려워하게 될까? 아니면 입이 하나 줄어 내가 하루 더 연명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될까? 참 불편한 질문이다. 극한의 상황까지 몰렸을 때 끝까지 정의와 사람의 도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재난의 상황을 다룬 책이든, 영상이든, 그 어떤 것이든 에서는 항상 위대한 지도자나 선의 극단에 선 것 같은 인물이 등장해 사람들을 구원했지만, 글쎄. 정말 현실로 그런 일이 닥친다면 차분하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걸 건드리고 있는 소설이다. 살인이 나지만 ‘범인이 누구일까?’ 보다는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소설이다. 그래서 정말 끝까지 긴장하며 몰입해서 읽었다. 그래서 그들은 과연 밖으로 나갈 수 있었을까?

 

마지막장은 작가의 장난 같다. 끝나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 끝까지 아슬아슬한 상황에 독자를 몰아넣고는 자기는 쏙 빠져버리는 작가가 한없이 얄미워진다. 마치 영화 한편을 제대로 감상한 기분이다. 여운이 너무도 길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이 미묘한 불쾌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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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의 50가지 그림자
F. L. 파울러 지음, 이지연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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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요리책이라 함은 사진 보는 맛이요, 그림 보는 맛이다. ‘내가 저걸 해먹어야지’ 해서 본다기 보다는 ‘저거 참 맛있겠네’ 하면서 보는 책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읽는다>라는 동사는 갖다 붙이지 못할 바도 없지만 왠지 가져다 붙이기 어색하지 않은가. 누가 요리책을 읽는담? 보는 거지. 그런데 이 책은 참 정독하게 만드는 요리책이다. 아니, 요리책인가? 소설인가?

 

문제적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패러디한, 제목도 치킨의 50가지 그림자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왜 50가지일까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면, 치킨의 50가지 그림자는 좀 더 명쾌하다. 말 그대로, 닭을 메인으로 한 요리법 50가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닭이야 찌든 굽든 튀기든 볶든 뭘 해도 맛있는 식재료지만 그 조리법이 50가지나 된다니 상상하기도 버겁다. 서양에서는 닭보다는 칠면조나 오리를 즐기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치킨에 대한 욕망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건가보다. 주로 튀기거나 삶는 조리법이 보편적인 우리와는 다르게, 책에서 소개하기는 버터나 와인은 기본이고 갖가지 향신료를 사용하여 굽거나 튀겨내는 요리법이 주를 이룬다. 상당히 이채롭다. 멋스럽다.(물론 닭 얘기다. 닭을 손질하는 근육질 오빠 말고)

 

그의 말이 계속해서 내 영혼의 은밀한 어둠 속에 메아리친다. ‘세련미가 관건이야.’ 치킨은 세련된 요리가 아닌걸. 내 무의식이 불현 듯 스스로를 비웃는다. 나는 바보 같은 속생각에 부끄러워 빨개진다. 하지만 꿈은 꾸어 볼 수 있잖아, 나도 여자인걸. -11p

 

그렇다. 그녀는 암탉인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냉장고에서 떨어져 나온 생닭(16호쯤 되는 특대형이다)과 잘생긴 요리사 일명 ‘칼잡이씨’의 짧은 에피소드에 이어 상세한 요리법과 각종 팁들이 뒤따르는 구성이다. 요리에 세심한 공을 들이기를 좋아하는 요리사 오빠는 어느 날 냉장실 밖으로 탈출한 생닭을 보고 무궁한 요리의 창작욕이 불타오른다. 결코 화려하다고 할 수 없는 식재료인 닭을 보고 의욕에 불타올라 한 달 동안 50가지 요리를 창안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 책은 요리사 오빠의 그 대단한 다짐에 대한 결과물이며, 그 과정을 곁에서 하나하나 꼼꼼히 지켜본 당사자이자 관찰자인 치킨양의 시선에서 서술되어 있다. 요리사 오빠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던 영계양은 레시피가 쌓이고 칼잡이씨가 더욱 능숙하게 닭을 주무를수록 점차 친근해지다 못해 거의 연인이 되어 간다.

 

 

“난 매일같이 매주 당신을 맛보길 원해. 내 재료가 되는 것을 넘어서 그 이상이 돼 주었으면 좋겠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모든 작업에 당신이 그 중심이 되었으면 해. 나는 당신을 갈구해, 암탉양.”

“나에게 요구하는 게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게 맞나요?”

“영계 아가씨. 내 전문분야가 돼 주겠어?” - 151p

 

 

요리 스승의 그늘에 있던 칼잡이씨가 비로소 닭을 전문으로 하는 어엿한 요리사로 거듭난다. 닭을 메인으로 한 50가지 요리 창안 도전기가 한창일일 때 요리책 출판의 제안을 받고 더욱 고급진 닭 요리 창안에 도전하면서 이 요리책(혹은 소설책)은 더욱 풍성해 진다. 갈수록 뭔가 실제로 도전해 보기에는 부담스러운 재료들과 이색적인 향신료들이 등장하지만 그럴수록 소설적(?)인 재미는 더해져만 가니 이래저래 뒤로 갈수록 흥미로운 책이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읽은 독자라면 깨알같이 패러디된 다양한 설정들에 배꼽을 잡을 테고, 안 읽은 독자라도 섹시하게 밀당하는 생닭과 요리사의 만담이 아주 마음에 들 것이다. 나는 참 재미있게 읽었다. 요리책이 아니라 소설책으로도 나름 평타는 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웃기다. 근래에 들어서 이렇게 웃긴 책은 거의 읽질 못했다.

 

 

한가롭게 치맥을 하면서 읽어도 좋고, 냉장고에 싱싱한 생닭을 넣어두고 읽어도 좋을 책이다. 요리책이면서 정독하게 만드는 책이라니, 그런 책이 다 있었다. 아니, 소설책이라고 해야 하나?

 

 

 

 

** 치덕 리뷰단의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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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숲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권수연 옮김 / 포레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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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이렇게 다 지나가는구나 싶다. 어제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빗소리가 들리는 밤이라는 것도 그렇다. 가끔은 공허하고 적적하지만 이렇게 별일 없이 산다는 것이 마냥 축복으로 느껴지는 요즘이다. 나와 같은 시간을 사는 사람들이, 나처럼 어제 같은 오늘을 살다가 이유도 없이 몰살당했다. 테러범은 치열한 작전 끝에 결국 사살됐다. 연일 언론에서는 테러범의 대해서 다루고 있다. 평범한 아이, 공부도 잘해서 명문고를 다녔다는 아이는 십여 년 뒤에 어쩐 일인지 인류의 적으로, 악마로 악명을 떨치고 영원히 사라졌다. 조금은 이상했다. 저렇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야 마는 사람들은 대게 그럴 만한 과거가 있지 않던가?

 

아버지의 메커니즘. 아버지가 만능열쇠예요. 언제나 아버지의 그늘이 아이의 인성, 행동, 욕망을 형성하죠. 악행의 경우는 더욱이 그렇고요. …… 죄인의 뒤에는 항상 진작에 죄인인 아버지가 있어요. 악이란 건 연쇄반응이니까요. 그렇게 거슬러 가다보면 인간의 기원에 까지 닿을 수 있죠. - 앙트완 페로. 124쪽

 

마치 죄인에게 일말의 면죄부를 던져주는 것 같이 느껴져서 딱히 동의하진 않지만, 죄인의 뒤에는 진작의 죄인이 있었다는 말은 부정하기 힘들다. 이미 그런 선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죄인의 아버지인 죄인, 또 그 죄인의 아버지인 죄인, 그 죄인의 아버지인 죄인의…….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아벨을 죽인 카인에 이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제 진화의 길을 걷고 있는 유인원을 만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괴롭다. 인간이 그 근원에서부터 악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파리 한복판에서 벌어진 식인 살인사건의 전말은?

 

머리를 부수고, 사지를 뽑고, 뼈를 부숴 골수를 빨아먹고, 배를 갈라 내장과 살점마저 파먹은 그야말로 기괴한 살인. 파리 도심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범인은 마치 원시 문명의 인신공양 의식을 벌인 듯이 시체를 훼손했다. 벽에는 암호 같은 수수께끼의 문자가 벽화처럼 그려져 있었다. 범인은 누구인지, 어째서 이런 거창한 살인 의식을 벌이는 건지 진실을 파헤칠 만한 단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잇따라 두 번째 살인이 벌어지고, 첫 번째 살인과 같은 끔찍한 현장이 재현 되어 있지만 여전히 범인에 대한 단서는 하나도 찾을 수가 없다. 한편, 프랑스 낭테르 지법 수사판사인 잔 코르바는 전남자친구의 뒤를 캐려는 불순한 의도로 그의 정신과 의사 앙트완 페로의 병원에 불법 감청을 지시한다. 그 과정에서 잔은 살인자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인물의 고백을 듣게 된다. 그의 아들, 요아킴이 또다시 살인을 벌일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잔은 요아킴이 엽기적인 연쇄살인의 범인이라고 직감하지만 불법적인 경로로 얻은 단서라 쉽사리 수사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거기에 잔의 친구이자 그녀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던 사건의 담당 판사 텐이 살해되고, 잔은 더 이상 사건에 접근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다. 수사당국의 견제 아래 단독으로 수사를 진행하는 잔은 차분히 요아킴의 뒤를 밟아 나간다. 파리에서 나카라과로 과테말라를 거쳐 아르헨티나까지 종횡무진하며, 요아킴의 출생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가 어떤 인물인지, 어째서 사람의 짓이라고 볼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것인지 추적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잔이 목도한 것은 더 무자비하고 잔인하며, 교활하고 사악한 악의 단면들이었다.

 

작가는 잔혹한 살해현장에서 시작해 남미의 정치사, 군부 독재시기 행해진 끔찍한 고문과 학살에 대해 묘사하며 이야기를 폭넓게 확장시켜 나간다. 악한 개인의 폭력을 넘어 국가와 사회의 이름으로 행해진 악행과 그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하며 묘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아버지의 메커니즘’에서의 아버지는 자식을 기르고 가르치며 그의 생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생물학적 관계의 부모를 말하는 것이라면, 이 이야기에서는 그 아버지의 영역을 사람이 속해있으며 그 사람에게 부모와도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부족, 단체, 사회, 국가로 그 범위를 확장해 버리는 것이다. 이 사회에 만연하는 폭력이, 과거에 행해졌던 극악무도한 행위들이, 그리고 현재에 벌어지는 모든 폭력의 현장의 이면에 ‘죄인의 뒤에 있는 진작의 죄인’으로서의 사회를, 단체를, 국가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 우리는 그 죄를, 혹은 죄의 의도를 우리 안에 품고 있거든요. 좋은 교육을 받음으로써만 스스로 균형을 유지하고 숨은 욕망을 안 보이는 통로로 배출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게 조금만 틀어지면 우리의 폭력성은 다시 솟아오릅니다. 그때는 억압, 애정 결핍과 결합하면서 더 심화하죠…… - 앙트완 페로. 악의 숲. 124

 

태초의 인간이 어떠한 금기도 갖고 있지 않았을 원시의 그 때, 인간은 자유로웠지만 항상 위태로웠다. 잔혹한 환경과 인간을 먹이로 삼는 동물들, 나 이외의 인간을 믿지 못하고, 가진 것을 지켜야 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며 그렇게 생존과 존속을 위협받는 환경 속에서 살아야만 했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폭력적이었으나, 그것을 악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생존과 존속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리를 짓고, 규칙을 만들고, 금기를 정하고 그렇게 차츰 문명을 이루어 가는 동안 인간이 본래 갖고 있던 폭력은 사라졌을까? 어느 사회학자의 책에서 폭력은 인간이 문명화되는 과정에서 오히려 함께 진화하여 체계화 되고 고착화 되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무리의 존속을 위해, 체계의 보호를 위해 잘 정비된 수단으로써 진화한 폭력은 여전히 인간을 향하고 있다고.

 

극도의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된 인간이 결국 외부의 모든 요소를 위험으로 인지하여 마치 자폐아처럼 퇴행을 겪고,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악으로, 원시로 회귀하고 만다는 이야기는 다소 소설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극단적인 폭력을 경험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째서 인간이 그렇게 까지 잔인해 질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어쩌면, 인간이 그 근원에서부터 악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가정하에서 말하자면 말이다. 인간이 본래 품고 있었던, 현대의 상식과 의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태고의 폭력성이 솟아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겪게 된다면, 인간은 ‘그렇게까지’ 잔인해 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평범한 가정에서 바르게 자랐지만 극악무도한 테러범이 되었다. 그를 테러범으로 키운 것은 그의 뒤에 있는 진작에 죄지은 아비인 그의 부족이고, 그 부족을 품은 것은 폭력이라는 수단을 잘 벼린 칼인 듯 차고 있는 현대사회다. 라고 연결지어버린다면 지나친 궤변일까? 물론 ‘아버지의 메커니즘’을 확대해서 악인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소리는 아니다. 다만 그 악이 어째서 표출되고야 말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하자면 그 책임을 지고 있는 그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보다 가깝고 거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아킴은 동정할 여지가 없는 악인이지만 왠지 불쌍하고 애처롭게 느껴졌다. 이런 생각은 위험한데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기도 했다. 때문에, 잔혹한 묘사에 악몽을 꿀 정도로 읽는 것이 괴로웠지만 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매력적인 인물뿐만 아니라 그에 못지않은 읽고 싶고, 알고 싶어지는 이야기를 잔뜩 닮고 있는 책이다. 매혹적이고, 지적이고, 엄청난 아이디어를 품고 있는 책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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