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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숲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권수연 옮김 / 포레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오늘도 이렇게 다 지나가는구나 싶다. 어제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빗소리가 들리는 밤이라는 것도 그렇다. 가끔은 공허하고 적적하지만 이렇게 별일 없이 산다는 것이 마냥 축복으로 느껴지는 요즘이다. 나와 같은 시간을 사는 사람들이, 나처럼 어제 같은 오늘을 살다가 이유도 없이 몰살당했다. 테러범은 치열한 작전 끝에 결국 사살됐다. 연일 언론에서는 테러범의 대해서 다루고 있다. 평범한 아이, 공부도 잘해서 명문고를 다녔다는 아이는 십여 년 뒤에 어쩐 일인지 인류의 적으로, 악마로 악명을 떨치고 영원히 사라졌다. 조금은 이상했다. 저렇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야 마는 사람들은 대게 그럴 만한 과거가 있지 않던가?
아버지의 메커니즘. 아버지가 만능열쇠예요. 언제나 아버지의 그늘이 아이의 인성, 행동, 욕망을 형성하죠. 악행의 경우는 더욱이 그렇고요. …… 죄인의 뒤에는 항상 진작에 죄인인 아버지가 있어요. 악이란 건 연쇄반응이니까요. 그렇게 거슬러 가다보면 인간의 기원에 까지 닿을 수 있죠. - 앙트완 페로. 124쪽
마치 죄인에게 일말의 면죄부를 던져주는 것 같이 느껴져서 딱히 동의하진 않지만, 죄인의 뒤에는 진작의 죄인이 있었다는 말은 부정하기 힘들다. 이미 그런 선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죄인의 아버지인 죄인, 또 그 죄인의 아버지인 죄인, 그 죄인의 아버지인 죄인의…….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아벨을 죽인 카인에 이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제 진화의 길을 걷고 있는 유인원을 만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괴롭다. 인간이 그 근원에서부터 악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파리 한복판에서 벌어진 식인 살인사건의 전말은?
머리를 부수고, 사지를 뽑고, 뼈를 부숴 골수를 빨아먹고, 배를 갈라 내장과 살점마저 파먹은 그야말로 기괴한 살인. 파리 도심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범인은 마치 원시 문명의 인신공양 의식을 벌인 듯이 시체를 훼손했다. 벽에는 암호 같은 수수께끼의 문자가 벽화처럼 그려져 있었다. 범인은 누구인지, 어째서 이런 거창한 살인 의식을 벌이는 건지 진실을 파헤칠 만한 단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잇따라 두 번째 살인이 벌어지고, 첫 번째 살인과 같은 끔찍한 현장이 재현 되어 있지만 여전히 범인에 대한 단서는 하나도 찾을 수가 없다. 한편, 프랑스 낭테르 지법 수사판사인 잔 코르바는 전남자친구의 뒤를 캐려는 불순한 의도로 그의 정신과 의사 앙트완 페로의 병원에 불법 감청을 지시한다. 그 과정에서 잔은 살인자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인물의 고백을 듣게 된다. 그의 아들, 요아킴이 또다시 살인을 벌일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잔은 요아킴이 엽기적인 연쇄살인의 범인이라고 직감하지만 불법적인 경로로 얻은 단서라 쉽사리 수사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거기에 잔의 친구이자 그녀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던 사건의 담당 판사 텐이 살해되고, 잔은 더 이상 사건에 접근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다. 수사당국의 견제 아래 단독으로 수사를 진행하는 잔은 차분히 요아킴의 뒤를 밟아 나간다. 파리에서 나카라과로 과테말라를 거쳐 아르헨티나까지 종횡무진하며, 요아킴의 출생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가 어떤 인물인지, 어째서 사람의 짓이라고 볼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것인지 추적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잔이 목도한 것은 더 무자비하고 잔인하며, 교활하고 사악한 악의 단면들이었다.
작가는 잔혹한 살해현장에서 시작해 남미의 정치사, 군부 독재시기 행해진 끔찍한 고문과 학살에 대해 묘사하며 이야기를 폭넓게 확장시켜 나간다. 악한 개인의 폭력을 넘어 국가와 사회의 이름으로 행해진 악행과 그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하며 묘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아버지의 메커니즘’에서의 아버지는 자식을 기르고 가르치며 그의 생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생물학적 관계의 부모를 말하는 것이라면, 이 이야기에서는 그 아버지의 영역을 사람이 속해있으며 그 사람에게 부모와도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부족, 단체, 사회, 국가로 그 범위를 확장해 버리는 것이다. 이 사회에 만연하는 폭력이, 과거에 행해졌던 극악무도한 행위들이, 그리고 현재에 벌어지는 모든 폭력의 현장의 이면에 ‘죄인의 뒤에 있는 진작의 죄인’으로서의 사회를, 단체를, 국가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 우리는 그 죄를, 혹은 죄의 의도를 우리 안에 품고 있거든요. 좋은 교육을 받음으로써만 스스로 균형을 유지하고 숨은 욕망을 안 보이는 통로로 배출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게 조금만 틀어지면 우리의 폭력성은 다시 솟아오릅니다. 그때는 억압, 애정 결핍과 결합하면서 더 심화하죠…… - 앙트완 페로. 악의 숲. 124
태초의 인간이 어떠한 금기도 갖고 있지 않았을 원시의 그 때, 인간은 자유로웠지만 항상 위태로웠다. 잔혹한 환경과 인간을 먹이로 삼는 동물들, 나 이외의 인간을 믿지 못하고, 가진 것을 지켜야 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며 그렇게 생존과 존속을 위협받는 환경 속에서 살아야만 했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폭력적이었으나, 그것을 악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생존과 존속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리를 짓고, 규칙을 만들고, 금기를 정하고 그렇게 차츰 문명을 이루어 가는 동안 인간이 본래 갖고 있던 폭력은 사라졌을까? 어느 사회학자의 책에서 폭력은 인간이 문명화되는 과정에서 오히려 함께 진화하여 체계화 되고 고착화 되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무리의 존속을 위해, 체계의 보호를 위해 잘 정비된 수단으로써 진화한 폭력은 여전히 인간을 향하고 있다고.
극도의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된 인간이 결국 외부의 모든 요소를 위험으로 인지하여 마치 자폐아처럼 퇴행을 겪고,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악으로, 원시로 회귀하고 만다는 이야기는 다소 소설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극단적인 폭력을 경험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째서 인간이 그렇게 까지 잔인해 질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어쩌면, 인간이 그 근원에서부터 악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가정하에서 말하자면 말이다. 인간이 본래 품고 있었던, 현대의 상식과 의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태고의 폭력성이 솟아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겪게 된다면, 인간은 ‘그렇게까지’ 잔인해 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평범한 가정에서 바르게 자랐지만 극악무도한 테러범이 되었다. 그를 테러범으로 키운 것은 그의 뒤에 있는 진작에 죄지은 아비인 그의 부족이고, 그 부족을 품은 것은 폭력이라는 수단을 잘 벼린 칼인 듯 차고 있는 현대사회다. 라고 연결지어버린다면 지나친 궤변일까? 물론 ‘아버지의 메커니즘’을 확대해서 악인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소리는 아니다. 다만 그 악이 어째서 표출되고야 말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하자면 그 책임을 지고 있는 그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보다 가깝고 거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아킴은 동정할 여지가 없는 악인이지만 왠지 불쌍하고 애처롭게 느껴졌다. 이런 생각은 위험한데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기도 했다. 때문에, 잔혹한 묘사에 악몽을 꿀 정도로 읽는 것이 괴로웠지만 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매력적인 인물뿐만 아니라 그에 못지않은 읽고 싶고, 알고 싶어지는 이야기를 잔뜩 닮고 있는 책이다. 매혹적이고, 지적이고, 엄청난 아이디어를 품고 있는 책이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