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Q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1
조엘 디케르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애드리안 라인 감독의 『롤리타』는 정말 좋아한다. 영화 『롤리타』하면 돌로레스의 뇌쇄적인 눈빛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나는 험버트 험버트 역을 맡은 제레미 아이언스의 어벙한 미소가 떠오른다. 정원에서 스프링클러에 흠뻑 젖은 롤리타를 처음 본 험버트는 정말 환하게 웃으며 뷰티풀을 외친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의 험버트는 변태 소아성애자가 아니었으며, 불행한 사랑에 빠진 자라지 못한 어린애일 뿐이었다. 제레미 아이언스의 얼굴을 한 험버트는 돌로레스와 정말 순수하고 무모하게 사랑에 빠진 남자로 기억된다. 그래서 해리 쿼버트는 책을 읽는 내내 제레미 아이언스였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역을 연기한 제레미 아이언스
해리 쿼버트는 딱 이런 이미지.
*영화 [롤리타]의 제레미 아이언스(험버트)와 도미니크 스웨인(롤리타)
데뷔작의 엄청난 성공 이후 더 그럴듯한 작품을 써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한 글자도 적지 못하는 불행한 작가 마커스 골드먼은 딱 브래들리 쿠퍼다. 영화 『리미트리스』에서 글을 쓰지 못하는 불쌍한 작가 연기가 인상적이기도 했고, 미남인데다가 재능이 넘치고 유능하기까지 하지만 내적으로는 어리고 찌질한 면이 있다는 설정과도 딱 맞아 떨어지는 이미지라서 다른 배우가 떠오르지 않더라. 『HQ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은 자연스럽게 배우의 얼굴이 떠오르고 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읽히는 소설이다. 2012년 프랑스에서의 엄청난 성공에 힘입어 전 세계 30개국에 판권이 팔려나갔고, 급기야 영화화도 계획 중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영화화 된다는 소식이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될 정도로 멋진 소설이다.
* 브래들리 쿠퍼. 마커스 골드먼은 이런 이미지.
그들은 삶을 향해 떠나갔다. (조엘 디케르.[HQ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2].246쪽. 문학동네)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골 마을 오로라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던 미국의 위대한 작가 해리 쿼버트. 그의 자택 정원에서 오래된 시체 한구가 발견된다. 그렇게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된다. 해리 쿼버트의 제자이자 친구인 마커스 골드먼은 첫 책의 성공 이후 명작을 써내야 한다는 욕심에 글을 쓰지 못하고 있는 젊은 작가다. 그는 소설가가 되는 법을, 인생을 살아가는 법을 알려준 스승 해리 쿼버트를 찾아가 도움을 구하지만 좀처럼 ‘작가의 병’을 떨쳐 버릴 수 없어 절망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스승인 위대한 작가 해리 쿼버트가 살인죄로 기소되고, 30여 년 전 해리 쿼버트가 15살 난 여자애와 관계를 맺었다는 추문이 세상에 드러난다.
* 영화 [롤리타]의 험버트와 돌로레스.
내가 상상한 해리와 놀라의 이미지.
해리 쿼버트의 정원에서 발견된 15살 소녀의 시체와 그녀 놀라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고백하는 해리 쿼버트. 시체와 함께 드러난 해리의 과거에 그를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저서 『악의 기원』에 대한 세간의 평가마저 뒤집히며, 해리와 놀라의 사랑이야기였던 『악의 기원』은 추잡한 책으로 여겨지고 국민들의 공분을 사게 된다. 진정한 친구 해리의 구명을 위해, 위대한 스승이자 존경하는 작가인 해리 쿼버트의 명예를 위해 30여 년 전에 일어난 놀라 켈리건 실종사건을 다시 파헤치기로 한 마커스 골드먼. 그러나 사건을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생각지 못한 충격적인 진실들이 하나 둘 밝혀지며 그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작가가 밝혀내는 작가의 진실
미제 실종사건을 소재로 하며, 우연히 발견된 유해를 계기로 과거의 망령과 마주하게 되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할런 코벤의 『숲』과 매우 유사하다. 순박하고 선량한 다수의 사람들이 사소하고 개인적인 이유로 진실을 덮고, 결과적으로는 악인의 공모자가 되어버린다는 전개 또한 『HQ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을 읽으며 할런 코벤의 『숲』을 떠올리게 만드는 요인이다. 하지만 이렇게 유사한 플롯을 갖고 있어도 두 책이, 『HQ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이 다르게(심지어는 좀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이가 바로 ‘작가’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추리소설의 형식을 하고는 있지만, 큰 틀에서 보자면 『HQ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은 작가로부터 한권의 소설이 쓰이고 출판되기까지의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출판소설(이런 말이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다마는)이다. 또한 챕터마다 해리 쿼버트가 마커스 골드먼에게 소설쓰기를 가르치면서 나눈 대담들이 실려 있어서 작가가 어떤 계획을 갖고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는지 일종의 암시를 주고 있는 구성이다. 책 안에서 마커스 골드먼이 쓴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은 르포르타주 형식의 책일 터이지만, 이 책의 저자 조엘 디케르의 『HQ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은 기승전(반전)결이 뚜렷한 한편의 소설이다. 마커스 골드먼의 취재 과정과 책 쓰기가 해리 쿼버트의 소설쓰기 대담에 곁들여져, 조엘 디케르의 소설 쓰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안팎으로 참 재미있는 구성이다.
* 영화 [리미트리스].
로이가 마커스의 '해리 쿼버트 사건' 초기 원고를 받고 계약하자고 얘기하는 부분은
이런 이미지.
마커스 골드먼의 소설 쓰기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뉴욕의 대형 출판사 슈미트 앤드 핸슨의 사장 로이 버나스키와의 본격적인 출판을 위한 논의들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묘사된다. 로이 버나스키는 수완이 아주 좋은 사업가로 자사의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어 내는 데에 엄청난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된다. 독자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책을 홍보할 것이며, 사회의 각종 이슈들을 피해 어느 시기에 어떤 식으로 책을 내놓아야 효과적인지 계산하며 판을 짜는 인물이다. 마커스 골드먼에게 그가 계산한 시기에 맞춰서 책을 내야 한다며 협박과 회유를 일삼고, 원활한 출간일정을 위해 유령작가를 써야 한다며 마커스의 자존심을 긁어대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작가는 일생의 한권의 책을 남긴다는 말이 나오는데, 오로지 명작을 쓰기 위해 고뇌하는 작가와 책의 예술적 가치보다는 상품적 가치를 우선시 하는 출판계의 대립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런 부분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수십 권의 책을 그야말로 찍어내듯 써내는 작가들에 대한 의문이 있었는데 이럴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새삼 새로웠달 까.
또한, 『HQ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은 사실 사랑 이야기다. 작가의 예술혼을 불태우게 만드는 환상적인 뮤즈와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결국 명작을 쓰게 되는 작가의 이야기인 것이다. 『악의 기원』이라는 명작이 탄생하기까지의 일련의 사건들과 그 명작에 대한 작가의 진실을, 그 민낯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이 납득할 수 있는 것인지,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추악한 것인지는 문제되지 않는다. 오로지 작가와 그의 뮤즈가 함께 나눈 아름다운 사랑만이 존재할 뿐이고 그 결말이 해피엔딩이 아니기 때문에 너무나도 씁쓸하고 긴 여운이 남는다.
해서 이 책을 단순하게 미제 실종사건을 소재로 한 추리소설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앞서도 한번 적었지만 너무나도 멋진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사족이지만,
이 책에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수많은 배우들의 얼굴이 스쳤지만, 내가 이 책을 영화화하는 감독이라면 이 배우를 꼭 캐스팅하겠다. 라민 카림루. 엘리야 스턴의 운전기사인 루터 케일럽역에 라민 카림루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더라. 1권을 읽을 때만 해도 루터 케일럽은 흑백영화시절 어설픈 분장의 프랑켄슈타인 같은 이미지였는데, 2권을 읽고 책을 덮자 라민 카림루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라민 카림루는 뮤지컬 스타고, 내가 그 쪽을 잘 아는 것도 아니며, 라민 카림루가 연기하는 건 25주년 『오페라의 유령』에서의 팬텀 역밖에 본 게 없지만, 그 팬텀 역을 연기하는 라민 카림루의 얼굴이 루터 케일럽이었다. 루터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져 있는데다가 키도 크고 덩치도 좋다는 설명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루터 케일럽의 캐릭터가 젊은 팬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캐릭터가 비슷한 구석이 많다.
* 25주년 [오페라의 유령] 기념공연. 팬텀을 연기하는 라민 카림루
* 라민 카림루. 잘생김.
정말 멋지고 좋은 문장들이 많았는데 뒷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서 표시도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여하튼, 읽는 재미가 있는 소설이다. 정말 재미있는 책을 읽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함.
**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텀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