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악과 가면의 룰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평점 :
열 한 살의 나이에 아버지로부터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듣는다.
나는 아버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세계를 불행하게 하는 존재라고 했다.
그것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관습이며, 다양한 악행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인생의 종말이 느껴질 땐 또 다른 악마의 존재를 키워내야 한다고도 했다.
후미노리는 아버지로부터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자신 안에 존재하고 있는 악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세상에나, 열 한 살... 한창 꿈을 키워나가도 시원찮을 판에 아버지란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도 놀랍고 그런 무섭고 진중한 이야기를 이해하는 후미노리도 놀랍기만 하다.
범인과 사건이 있고, 그를 쫓는 형사나 수사 기관이 있는 이야기를 기대했다가 아주 된통 당했다. 어쩜 이렇게 어둡고 축축한 분위기인지......
같은 사건일지라도 어떻게, 누구의 입장에서 전개하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냥 단순한 추리 소설을 기대했다가, 내가 너무 가벼웠나, 살짝 자책도 해본다.
사실 2/3 이상을 노려보듯, 양미간을 살짝 찌푸린 상태로 읽었다. 그러다가 뒤로 갈수록 자꾸 의문이 들었다. 내가 너무 지레 겁먹었나? 괜시리 주눅들었었나?
어쩌면 단순한 이야기일수도 있다. 분위기 잡는 아버지와 역시 분위기로 다른 사람을 눌러 버리는 형, 구키 집안에 내려오는 그 어둠의 분위기 때문에 후미노리 안에 깃들여 있는 밝은 기운을 알아채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같은 역할로 태어났지만 다른 선택을 하려는 이토가 없었다면, 후미노리를 아무 이유없이 품어주는 교코가 없었다면, 악을 행한다면서 지루해 죽겠다고 푸념하는 아버지와 형이 없었다면, 여러 다른 경우의 수가 없었다면, 후미노리는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 다양한 가치를 뒤흔드는 거야. 권위나 상하관계, 공통 인식 따위를. 사회 구조같은 건 우리하고는 상관없어. 혁명이니 뭐니, 촌스럽지. 우리의 목표는 인간의 집단의식이야. 그 속에 차례차례 경박한 농담을 던져줄 거야. ”
“ 한가지만 알려주지. 윤리나 도덕이나 상식에서 벗어나 버리면 이 세상은 완전히 다른 것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 마치 일종의 서비스처럼. ...... ” (p210)
“ 선택해가면서 살고 있지. 하지만 많은 경우, 그 선택 자체가 한정되어 있어. ...... 룰 위반이 없다면. ” (p 254)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겨우 책의 분위기에서 벗어나자 그제서야 다른 생각을 해 볼 수 있었다. 후미노리의 아버지는, 형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邪)의 역할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던 것일까? 내려오는 관습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저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열심히 그 역할을 수행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은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그것을 ‘선택의 문제’ 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래서 나는 후미노리의 마지막 선택을 존중하고 싶다. 비록 처음에는 잔뜩 힘주어 분위기 잡고 사람 주눅들게 하더니 뒤로 갈수록 좀 웃기고, 좀 허무하게 만들었을지라도, 인생 뭐 있어? 네가 어떤 삶을 사느냐는 네가 선택하기 나름이야, 라는 다소 교훈적인 내용으로 마무리되더라도 말이다.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작품은 이로서 처음이다. 아직은 작가에 대해 뭐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상태인거다. ‘악이라는 문제는 작가가 데뷔 이후 일관되게 추구해온 테마다’ 라고 하는데, 다른 작품 속에서는 어떤 결론을 짓고 있는지 찾아보고 싶어진다. 음... 뭔가 범죄 스릴러 소설 속에 철학을 담고 싶어하는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쨌든 다음 소설부터 읽고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