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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장
신란 지음, 이영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나이가 들면 감성도 무뎌지는 걸까. 어릴 적에는 남자임에도 사랑 이야기를 담은 책들을 읽고는 곧잘 눈물도 흘렸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는 그런 책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들의 애틋한 이별 장면이 나오면 별 감흥 없이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이내 흥미를 잃고는 리모컨을 눌러 코미디나 뉴스 채널로 돌려버린다. <풍장(원제 風葬/신란 지음/랜덤하우스 코리아/2010년 8월)>의 띠지에 적혀 있는 "행방불명된 남편을 찾아 30년간 티베트를 헤맨 한 여인의 애끓는 망부가"라는 소개 글에 이 책도 별 감흥 없는 그저 그런 진부한 사랑 이야기겠구나 하는, 아무런 기대 없이 책 페이지를 펼쳐 들었다. 늦은 밤 침대에서 최대한 편한 자세로 누워 읽다가 졸리면 그냥 자야지 시작한 책 읽기가 책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서 읽게 되었고, 결국은 잠시 잠깐의 쉼도 없이 240여 페이지의 책 한 권을 단숨에 읽고 말았다. 그리고는 다 읽고서도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는 그녀의 이야기에 계속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새벽녘에야 잠들어서 아침에 늦잠을 자고 말았다. 오랜만에 메말라버린 줄 알았던 감성을 일깨우는,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슬픈 사랑이야기를 만났다.
1958년 칭하이(靑海)에서 시작된 티베트 무장 봉기가 전 성(省으)로 번지고 모택동이 대규모 인민 해방군을 티베트로 침공시킨 혼란의 시절, 주인공 스물 여섯 살 수원은 의사 동료인 커쥔과 결혼하여 꿈같은 신혼 생활을 보낸다. 커쥔은 결혼 3주 만에 티베트로 항하는 인민해방군 군의관으로 자원 입대하고 수원은 남편의 무사하기만을 기원하며 하루하루 애타게 기다린다. 그런데 남편이 티베트로 떠난 지 백일도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군으로부터 청천벽력과도 같은 남편의 사망통지서가 날아온다. 남편의 죽음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수원은 티베트 어딘가에 남편이 분명히 살아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남편을 찾기 위해 자신도 군의관으로 자원 입대하여 티베트로 떠난다. 티베트로 가는 도중 구출해낸 티베트 여인 "줘마"와 함께 낙오하게 된 수원은 티베트 유목민 가족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되고, 그들과 함께 살면서 남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언니가 선물했던 책 여백에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꼬박꼬박 적으면서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티베트에서 보내게 된다. 오랜 시간 동안 수소문 끝에 남편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 수원은 정들었던 유목민 가족과 이별하고 남편을 찾아 여행을 떠나고, 20 여 년 전 괴한에 의해 납치되어 헤어지게 된 줘마를 다시 만나게 되고, 역시 줘마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연인과도 재회를 하면서 세 명은 함께 수원의 남편을 찾는 여행에 나선다. 마침내 수원은 남편의 마지막 이야기와 그가 남긴 편지를 읽게 되고 충격과 슬픔에 기절하고 만다. 그리고는 드디어 티베트에서의 오랜 방랑을 끝내고 자신의 고향인 쑤저우로 돌아온다. 모든 것이 변해버린 자신의 고향이 낯설기만 한 그녀, 가족들을 어떻게 찾아야 할 지 막막하기만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인터뷰하러 온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신란에게 이틀 간 숙식을 함께 하면서 티베트에서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홀연히 사라진다.
여느 소설이나 드라마보다도 더 거짓말 같은 이 이야기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니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쉽게 믿을 수 가 없었다. 3주라는 짧은 기간 동안 밖에 함께 하지 못한 남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말도 글도 안 통하는 티베트 오지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한 힘이 될 수 가 있는지, 또 다른 사연의 주인공인 줘마를 납치된 지 20년 만에 무사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되는, 그리고 줘마가 사랑했던 연인 또한 우연처럼 만나는 사연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남편이 마지막으로 남긴 일기와 편지들을 그토록 오랜 시간 후에 수원에게 건네지는 사연 등등 솔직히 믿기 어려운 기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게 허구의 소설이었다면 30년 만에 살아서 서로 다시 만나는 커쥔과 수원으로, 즉 해피엔딩을 기대해 봄직 하지만 결국 남편의 죽음만을 확인하게 되는 현실이 더욱 가슴 아프게 한다. 그렇게 애타게 만나고 싶어했던 남편을 그가 남긴 글로써 밖에 만날 수 없었던, 결국 30년 동안의 방랑이 남편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을 맺어야 했던 수원의 아픔에 읽고 나서도 바로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그런 슬픔과 연민이 느껴졌다. 마지막 페이지 그녀와 다시 만나 그 후의 삶을 듣기를 원하는 작가 신란의 편지글처럼 중국으로 귀환해서의 그녀의 삶이 어떠한지가 더욱 궁금해진다. 과연 수원은 자신의 가족들과 재회할 수 있었는지, 자신의 이야기가 이렇게 책으로 엮여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지, 그녀의 남은 여생이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의 염원을 알고 있는지를 말이다.
어쩌면 하루에도 수십 수백 쌍의 부부들이 이혼하는 요즘 현실에서는 전혀 있을 법 하지 않은 진부한 사랑일 뿐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감성을 다시금 상기하게 하는, 오랜만에 애절한 사랑 이야기에 밤잠을 설치게 하는 그런 책이었다. 아직도 늦더위가 한 낮에는 기승을 부리지만 어느새 가을의 향기가 물씬 풍겨나는 계절의 초입에서 참 좋은 사랑이야기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