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다
김태연 지음 / 시간여행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빨간색 표지가 인상적인 <이것이다(김태연/시간여행/2010년 8월)>을 처음 받아들고 “본격수학소설”이라는 부제에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추리소설, SF소설은 들어봤지만 수학소설이라니 처음 접해보는 장르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수학 소설이라는 장르 명칭이 붙은 소설이 몇권 검색이 된다. 국내에는 2,500 년 전 그리스 피타고라스 학파의 비밀을 소재로 한 팩션 소설인 <천년의 침묵(이선영/김영사/2010년 1월)>이 검색되었고, 해외에는 영화로 더 유명했던 수학자 존 내쉬를 그린 전기소설(傳記小說) <뷰티플 마인드(실비아 네이사/승산/2002년 4월)>, 치매에 걸린 노 수학자와의 아름다운 인연을 그린 <박사가 사랑한 수식(오가와 요코/이레/2002년 7월)>와 몇 권이 더 검색이 된다. 그러나 검색된 책들 대부분이 수학을 일종의 소재로 사용했기에 출판사에서 홍보용으로 “수학”이라는 타이틀이 붙었을 뿐 본격적인 수학 소설이라 부르기는 어려운 그런 책들이 대부분이다. “본격”이라는 수식어로 수학 소설임을 강조한 이 책, 혹시 복잡한 수학공식만 잔뜩 나열한 그런 책은 아닐지 하는 걱정과 430여 페이지에 달하는 만만치 않은 분량으로 몇날 며칠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두려움에 책 첫 장을 넘겼다. 그런데 토요일 아침부터 읽기 시작한 책은 좀처럼 손에서 떨어지지 않더니 저녁 무렵에는 두꺼운 책 한 권을 다 끝내게 되었다. 다 읽고 나서 소감은 본격수학소설이라는 독특하고 이색적인 장르의 정체 - 아마도 앞으로 수학 소설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제일 먼저 이 책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고, 하루 만에 금새 읽어낼 정도 - 물론 식사하고 TV보고 낮잠 잤던, 일종의 휴식 시간을 포함해서다 - 로 몰입감과 재미가 뛰어난, 모처럼만에 즐거운 그런 책을 만났다.

책 첫 시작은 기도원에서 시작한다. 독실한 크리스챤인 원장은 자신이 재림예수라고 생각하는 환자를 만나 그를 회유하지만 그는 천국가는 지도는 성경이 아니라 기하책이라고 강변하여 천국행 약도이자 열쇠를 적어주겠다며 수백 장의 도화지에 수학공식을 잔뜩 적어댄다. 장면이 바뀌어 경남 합천 심심산골에 살고 있던 “나”는 축구공 때문에 살인자로 몰려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피해 집에서 한나절 걸리는 부산으로 유학을 떠나고 “나”의 청소년 시절은 그 누명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괴로웠던 그런 시절이 되고 만다. 다행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법대에 합격하면서 그 당시 자신에 대해 불리한 증언을 했던 동네 아이가 진실을 밝히면서 누명을 벗게 된다. 그런데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그런 일이 일어난다. 어릴적부터 집안을 들락거리던 오도산지기 왕거지에게서 나의 할아버지가 선가인 “여의구파”의 계승인이었고, 그 선맥이 왕거지에게 이어졌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저 12개의 오각형과 20개의 육각형으로 이뤄진 축구공이 사실은 우주의 신비를 담고 있으며 수학이야말로 우주의 비밀을 밝히는 열쇠라는 이야기를 듣고 법대를 포기하고 수학과에 재입학한다. 본격적인 수학의 길에 접어든 나는 수학적 재능을 발휘하여 국내와 해외에서 두 개의 박사학위를 받는 등 촉망받는 수학교수로 성공하게 되고, 왕거지에게서 여의구파 수제자로 임명받기에 이른다. 어느 날 나에게 국내 굴지의 대기업 부회장으로부터 온갖 이상한 것들을 모아놓은 기업 비밀박물관의 위원이 되어달라는 제안을 받게 되고, 그에게서 자폐증에 있는 양아들이 수십년 채 기록하고 있는 낙서 꾸러미를 건네받으며 의미를 해석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러면서 부회장은 픽션인 것 같지만 철저하게 논픽션이라는 황당한 소설 “챔피언스 리그”를 건네받는다. 그 책에는 나도 잘 알고 있는 수학계 실제 인물들과 천재 수학자 김광국이 등장한다. 책에서는 중반부터 액자소설 형태로 “챔피언스 리그”가 전개되고 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다 읽고 난 나는 본격적으로 양아들의 낙서를 해독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다양한 방법으로 검토하던 중 여느 자폐증 환자들처럼 양아들이 천재적인 수학적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의미 없는 낙서를 해석하는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 나는 그 낙서가 우주의 모습을 고차원적인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는 일종의 수학 방정식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밝혀낸다. 왕거지 사부는 뒤늦게 수학이 우주를 해석하는 열쇠임을 깨닫게 된 나를 수제자로 인정하고 경전의 사본을 건넨다.

책 초반부터 황당하게 시작 - 궁금했던 재림예수라 주장하는 사람의 정체는 책 읽는 내내 밝혀지지 않다가 책 말미에 이르러 왕거지 사부가 주인공인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 - 하더니 책 속의 책인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수학으로 차원여행을 떠나는 천재수학자가 등장하고, 현실로 돌아와서는 수 십년간 점만 찍어대는 양아들의 낙서가 사실은 최근에야 밝혀지고 있는 우주의 진정한 모습을 풀이한 것이라는 더 황당한 결론으로 끝을 맺는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런 만화적인 상상이 유치할 법도 한데, 전혀 유치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개연성 있게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물론 문과 출신으로 수학적 지식이 일천한 내가 이 책에 등장하는, 제대로 이름한번 들어보지 못한 수많은 수학자들과 공식들, 수학 및 과학 이론들을 이해해서 소설적 장치로서의 수학이 개연성 있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아니다. 비록 낯설고 생소한 수학 분야를 다루는 소설이지만 이야기 전개를 따라 읽다 보면 황당함보다도 흥미진진함과 재미를 느끼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글솜씨 때문일 것이다. 어렵기만 한 수학적 지식에 천체 물리학, 양자역학 등 과학 뿐만 아니라 스포츠(축구), 종교, 철학, 신비주의에 이르기까지 전혀 섞일 것 같지 않은 다양한 요소들을 기가 막히게 버무려서 이질감 없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작가의 글솜씨는 읽는 내내 글에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몰입감이 매우 뛰어나다. 여느 유명 SF소설 못지 않은 수학적, 과학적 설정이 돋보이는 이 책은 수학이 범죄나 액션, 추리, 역사, 판타지 등 여느 장르적 소재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흥미진진한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낸, 수학 소설이라는 장르의 본격적인 태동을 알리는 그런 신호탄로서 가치 있는 책이라고 평하고 싶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나니 괜히 고등학교 이후 펼쳐 보지 않아 먼지만 잔뜩 쌓여있을 수학 참고서를 공부해보고 싶어진다. 책에서도 이야기 하는 것처럼 이웃 일본에서는 은퇴한 분들이 치매방지를 위해서 수학 공부를 즐겨한다고 하니, 그리고 “페르마의 정리”로 유명한 페르마도 사실은 법학을 공부한 변호사였으며, 지방의회 의원으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그 직에 종사하였고, 수학은 취미였다니 말이다. 이처럼 학창 시절 이후에 잊고 지냈던 수학에 대한 흥미를 되살리는 것을 보면 이 책은 공부중인 청소년들이 수학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권해주고 싶다.

물론 나처럼 수학에 문외한인 독자들이 아니라 실제로 수학이나 과학을 전공하는 전문가들이 이 책을 읽으면 어떻게 받아드릴까 하는 것이 궁금하기는 하다. 그저 유치한 만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할 건지 아니면 나름 개연성도 있고 흥미 있다고 평할지 말이다. 물론 그들의 평이 이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치하던 개연성이 있던 이 책의 재미만큼은 분명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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