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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의 우화 - 개인의 악덕, 사회의 이익
버나드 맨더빌 지음, 최윤재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11월
평점 :
최근 대형 서점 및 인터넷 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장하준 교수의 신작인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가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新自由主義) 정책을 줄기차게 비판해온 기존 그의 작품들과 큰 차별성은 없지만 기존 경제 정책 입안자들이나 주류 경제학자들의 편견과 오류를 조목조목 집어내고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설해놓은 것이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장하준 교수가 비판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뿌리는 과연 무엇일까? 신자유주의 경제의 역사를 말할 때마다 꼭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미국 제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공화당원들이 선거 직후 가진 각종 축하모임에서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9-1790)의 옆모습이 그려진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그 연원을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애덤 스미스보다 한세대 앞선 영국의 의사이자 사상가인 버나드 맨더빌(Bernard de Mandeville, 1670~1733)라는 이름도 생소한 -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나도 이름을 처음 들어봤다 - 사람에게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한다는 책을 최근에 읽게 되었다. 바로 그 당시 유럽의 도덕과 경제관을 철저하게 비틀고 비꼬는 풍자시로 악마(devil)라는 호칭까지 얻게 되었다는 버나드 맨더빌의 문제작 <꿀벌의 우화; 개인의 악덕, 사회의 이익(원제 The Fable of the Bees / 문예출판사/2010년 11월)>이 바로 그 책이다.
어디서 갑자기 뚝 하고 나타난 것 같은 생소한 인물인 버나드 맨더빌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원래 맨더빌은 네덜란드 출신으로 네덜란드에서 철학과 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영국으로 건너가 의사로 일하면서 각종 글을 써왔다고 한다. 1723년 기존에 출간했던 <꿀벌의 우화> 개정판이 나오면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는데, 당시 영국 사회를 지배하던 중세 기독교 도덕, 즉 “금욕”과 “이타심”을 위선이라 비판하며 사람의 이기적인 본성을 바로 보자고 주장하고, “악덕”이라는 욕심이야말로 경제를 살리는 원동력이며, 사치는 생산을 늘리고 일자리를 만들어주어 잘살게 만든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기존의 가치관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이러한 주장은 수많은 종교가들과 도덕가들의 공분을 샀고 그의 책들은 금서(禁書)로까지 분류되었다고 하니 그 당시 사상계에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그런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하겠다. 그러나 이런 맨더빌의 주장에 반발한 후대의 사상가들이 그의 주장들을 반박하면서 새로운 사상 조류를 이끌어왔다고 하는데, 돈 벌 욕심을 아예 버리라는 낡은 도덕을 비판한 맨더빌을 따라 돈 벌 욕심을 받아들이되, 나 돈 벌자고 남의 눈에 피눈물 흐르게 하는 짓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으로, 그런 짓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 칸트의 도덕원칙으로 각각 발전해왔다고 하는 번역자의 말을 들어보면 그의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해볼 만 한다.
책의 구성은 먼저 해제(解題)에서 맨더빌의 삶과 사상을 조명해보고, 맨더빌과 경제학의 아버지라는 애덤 스미스와의 차이점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문제작인 <꿀벌의 우화>와 맨더빌의 주석을 싣고, 마지막 부록으로 맨더빌의 다른 작품들인 <맥주의 우화>등을 소개하고 동시대와 후세의 사상가들이 맨더빌을 평가하는 각종 말들인 <다른 이들이 보는 맨더빌>과 참고문헌을 수록하고 있다. 사실 본문격인 <꿀벌의 우화>는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그런 부분이라 텍스트(text)만 읽게 되었고, 맨더빌이 도대체 누구이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그리고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이 책의 번역자이자 현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인 최윤재 교수의 해제만 꼼꼼히 읽어봐도 잘 이해할 수 있다.
역자(譯者)는 해제에서 맨더빌은 그저 악덕에도 좋은 점이 있다거나 또는 그 좋은 점이 나쁜 점보다 클 수도 있다는 식으로 변명을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며 그가 문제 삼은 것은 사람들이 도덕에 대해 가지고 있던 두 가지 생각, 즉 욕심을 나쁜 것으로 쳐서 금욕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생각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에 따라야 미덕을 지닐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고 소개한다. 맨더빌은 이 두 가지 기본전제를 부인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끝끝내 고집했으며, 이러한 조건에 맞는 미덕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는 나아가 정말로 글자 그대로 미덕만 남게 된다면 세상 경제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동안 비판자들의 말과는 달리 그는 한 번도 악덕 그 자체를 드러내 추켜세운 적이 없으며 그 대신 악덕의 효용을 보여주며 이제 악덕을 어찌 생각해야 할 것인지 물음을 던진 것이라고 말한다.
맨더빌을 이해하려면 그를 비판하면서 경제학의 비조(鼻祖)라고까지 추앙받고 있던 애덤 스미스의 사상과 비교해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역자는 그래서인지 “5. 맨더빌과 스미스는 어떻게 다른가”라는 별도의 장(章)을 할애하여 두 사상가의 차이점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그동안 신자유주의를 탄생시킨 사상적 원흉으로 오해하고 있던 애덤 스미스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었던 좋은 계기가 된 그런 대목이었다.
먼저 “개인의 이기심(利己心)”을 강조했다는 측면에서는 같은 관점이었다고 생각하기 쉬운 두 사상가의 차이점을 역자는 맨더빌의 도덕체계는 미덕과 악덕의 구분을 아예 없애버렸으나, 스미스는 이익이냐 손해냐, 또는 잘사느냐 못사느냐 하는 기준만 남긴 맨더빌의 생각을 해로운 것이라 선언하고 새로 도덕기준을 마련하였다고 설명한다. 스미스는 물론 자기 사랑(SELF-LOVE)을 긍정하였지만, 고삐 풀린 이기심만 있다면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사회는 무너질 것이며, 여기에는 잘못된 행동을 막아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정의 체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오늘날 오해하고 있는 공권력이나 다수결이 정의라고 할 수 없으며 자유로운 시민사회에서 정의는 절대 불변의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도덕 감정에 따르는 것이며, 이러한 도덕감정은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공감에서 나오며, 그것을 배우고 익히고 발전시켜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수준에 맞춰 개인행동방식과 범위가 정해지고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는, 스미스에게 도덕과 경제와 법과 정의는 별개가 아니라 서로 보완하며 함께 발전해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맨더빌이 생각하던 사회 이익은 오늘날의 경제 제일주의 또는 돈 잘 벌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이에 비해 불완전한 현실 세계에서 스미스가 생각한 사회정의는 <도덕감정론>에서 이기심을 철학적으로 비판하며 도덕 수준과 정의를 강조한 데 이어, <국부론>에서는 - 비록 이기심을 기본 행동원리로 삼았지만 - 현실 세계에 비뚤어지게 나타는 이기심을 비판하면서 이를 막을 방도를 연구한 점에서 잘 드러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기업가의 돈욕심>에서 대한 생각은 어떻게 다를까? 맨더빌은 그당시 유행했던 중상주의(重商主義) 체제 차제는 문제 삼지 않고, 오히려 낡은 도덕이 부국강병이라는 중상주의의 목적에 걸림돌이 됨을 지적하였는데, 반면 스미스는 중상주의가 못마땅한 나머지 정부는 손을 떼라고 자유방임을 역설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스미스의 생각을 작은 정부를 실현하여 경제의 발목을 잡는 규제를 없애고 기업이 마음껏 돈을 벌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호도하는 이른 바 신자유주의식 해석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스미스는 요즘 말로는 기업가라고 할 상인과 제조업자가 제 이익만 챙겨 나라에 해가 된다는 점을 가장 걱정했으며, 스미스는 정부가 기업 발목을 잡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기업편만 들어주기 때문에 자유방임과 자유무역을 주장했다고 한다. 소수 대기업이 제 이익을 챙기느라고 나라 이익은 뒷전으로 밀려나건만, 이미 소수 대기업 손아귀에 들어가 있어 이를 해결할 능력이 없을 뿐더러 기업 편만 드는 정부와 의회라면 차라리 소수 대기업의 독점을 없애는 시장 경쟁 체제가 독점 기업이 돈을 벌지 못하게 막을 수 있으며 오히려 그 욕심을 이용하여 나라 이익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스미스와는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또한 맨더빌을 비롯한 중상주의자들은 노동자를 생산요소로만 보았기에 노동자들에게는 간신히 먹고 살만큼만 주면 된다고 주장했는데, 스미스는 생산자 이익보다는 소비자 이익이 앞서는 것이며, 나라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노동자가 잘살아야 진짜 부국이 되고, 나라가 잘살면 임금이 올라가는 것은 마땅한 결과이며, 임금이 올라가면 노동자는 신이 나서 더 열심히 일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맨더빌의 주장대로 돈이 많아 게을러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쉽게 돈을 버는 지주들이며, 물건 값이 올라 국제 경쟁에서 뒤진다면 그 것은 높은 임금 때문이 아니라 높은 이윤 때문이라고 못을 박았다고 한다. 맨더빌은 또한 부자가 돈을 써야 가난한 사람이 일할 수 있다는 이른바 낙수효과(落水效果, trickle down effect)]를 이야기하며, <사치>를 미덕으로 강조했다고 하는데, 부자들에게 마음껏 허용한 사치를 가난한 사람에게는 허용하지 않는 이중적인 태도를 견지했다고 한다. 이에 비해 스미스는 부자의 사치가 경제에 해롭다고 보았다고 한다. 산업이 잘되려면 자본이 늘어나야 하고, 자본축적은 절약을 통한 저축으로 이루어지는데, 부자가 사치하면 나라 전체에 본보기가 되어 사치를 조장함으로써 결국 자본축적을 방해하고 장기 경제성장을 해친다고 주장했다. <교육>에서도 맨더빌은 소수만을 위한 교육을 강조하고 가난한 아이들에게는 오히려 해롭다고 주장한 반면, 스미스에게는 모든 사람을 교육시켜 깨우치는 것이 시민사회로 가기 위한 필요조건이었다고 한다. 교육을 제대로 받아야 제 이익이 무엇인지 깨닫고 제 주장을 제대로 펼 수 있고, 정부도 이들에게 귀 기울일 것이고, 그래야 사회 전체의 이해관계에 균형을 맞추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그동안 자유방임주의자로 널리 알려져 온 스미스는 그가 정부 역할을 제한하려 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 무렵 영국 정부의 능력이 모자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그의 궁극적인 관심은 자유방임이라는 원칙이 아니라 경제 전체의 효율성과 국민 전체의 행복이었다고 말하는 역자는 신자유주의는 원래 주류 경제학이 아니라 정치인들과 재산가들이 만들어낸 풍조라 할 것인데, 이는 중상주의를 타파하자던 스미스보다는 오히려 맨더빌의 중상주의에 놀랍도록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19세기말 강도귀족들이 설쳐대던 약육강식의 자본주의에서도 비슷한 구석이 적지 않다고 말하며, 오늘날 신자유주의자들의 매력적인 구호들 이면의 속셈은 많이 닮아 있지 않은가하고 우리에게 반문한다. 또한 맨더빌은 남의 속마음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는 있었지만 남의 어려운 처지에는 좀처럼 공감하지 않는 따뜻한 마음이 없었던 반면에 스미스는 있는 그대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적절한지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지 묻고, 적절하지 않다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면 함께 화를 내는 것이고 이것이 정의를 세우는 바탕이 된다는, 즉 스미스가 말하는 '공정한 관찰자'는 있는 그대로 보되 적절성을 판단하는 관찰자라고 정의한다.
이 책 덕분에 지난 수 십 년 동안 세계 경제를 지배하면서 수많은 폐혜를 가져온 신자유주의 경제의 진정한 뿌리를 알게 되었다. 맨더빌의 사상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애덤 스미스와 칸트라는 걸출한 사상가들이 탄생한 것을 보면 결코 맨더빌은 이렇게 쉽게 잊혀져야 할 그런 인물이 아님에는 틀림이 없다 할 것이다. 그런데 그의 냉철하다 못해 비인간적인 생각 - 이미 그 당시 많은 사상가들에게 철저히 비판받고 해체되었는데도 불구하고 - 을 현 시대에 되살려 자신들의 세계 경제 지배에 정신적 멘토로 삼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은 어찌 보면 맨더빌이 21세기에 화려하게 부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망령이 아직도 지배하고 있는 지금,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은 그들의 가면과 위선을 철저히 벗겨낼 수 있는 또 다른 애덤 스미스와 칸트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점일 것이다. 모든 사람을 교육시켜 깨우치는 것이 시민사회로 가는 필요조건이었다는 애덤 스미스의 믿음처럼 맨더빌의 망령을 떨치기 위해서는 우리가 스스로 깨우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옛날 민주화 시절 그렇게 강조했던 “깨어있는 시민”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 바로 지금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