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레지스탕스 - 저항하는 인간, 법체계를 전복하다 레지스탕스 총서 1
박경신 외 지음 / 해피스토리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대학시절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사회 부조리와 모순에 대한 저항으로 너도나도 거리로 나서던 시절, 선배들에게 주문(呪文)처럼 지겹게 들었던 말이다. 깊은 성찰도 없이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라는 이 말을 그 당시에는 냉철함을 가장한 비겁한 선배들의 자기 변명 쯤으로 비웃었었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어 선배들이 말하던 것처럼 머리는 점점 차가워졌지만 - 내 일신의 안녕을 먼저 생각하는 이기심을 냉철함이라고 합리화시켜버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이제는 가슴마저 차갑게 식어버렸다. 신문이나 뉴스에서 아직도 횡행하고 있는 날치기, 국회 폭력, 인신공격, 추문(醜聞)에 온갖 비리(非理)를 저지르고 있는 정치인들을 보면 이제는 분노보다는 냉소적인 헛웃음이 먼저 나오고, 비정규직 파업 문제나 철거민 문제 등의 뉴스가 나오면 이제는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애써 외면하고, 한 때는 애청 프로그램이었던 <인간극장>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애환과 슬픔을 담은 방송은 기쁘고 즐거운 일만 생각해도 부족할 판에 저런 이야기로 가슴 아파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려버리곤 한다. 어쩌면 그 당시 선배들의 말은 “비겁함”을 자기 합리화시키려 했던 것이 아니라 부조리와 모순에 분노하는 뜨거운 열정만큼은 나이가 들어서도 잃지 말라는 진정어린 충고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애써 외면해 왔던 사회 모순들, 즉 비정규직 문제, 도시빈민, 학내 종교 갈등, 여성 문제 등을 모아 놓은 책을 제대로 만났다. “저항하는 인간”이라는 말을 제목으로 하는 <호모 레지스탕스; 저항하는 인간, 법체계를 전복하다 (박경신 등 저 / 해피스토리/2011년 1월)>이 바로 그 책이다. 이 책 또한 그냥 외면하고 싶었지만 읽기로 약속한 책이라 불편함을 각오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다 읽고 나니 오랜만에 먹먹해지는 아픔과 함께 가슴 한 켠에서 이제는 완전히 꺼져버린 줄 알았던 불꽃이 다시금 피어오르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책에서는 부의 상징으로 불리는 강남 이면에 감춰져 있던 “구룡마을”, “잔디마을‘ 판자촌 주민들, 안기부 X파일을 인용해 ‘삼성 떡값 검사’ 실명을 공개하여 ‘통신비밀 보호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던 “노회찬” 의원, 단군 이래 최대 공사라는 ‘새만금 사업’, 국익(國益)에 해가 된다는 이유로 구속까지 되었던 “미네르바” 필화(筆禍) 사건, 학내 종교 자유 문제를 온 몸으로 거부해서 유명인사가 되었던 “강의석”씨 등 그동안 뉴스를 통해서 희자되었던 13건의 사건을 소개한다. 다들 유명한 이야기인지라 몇몇 사건들은 발생부터 결과까지 알고 있는 사건들도 있지만, 어떤 사건들은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결과가 어떻게 났을지 궁금했던 사건들도 있고, 다섯 살 난 자신의 딸이 손담비의 노래를 흉내 내는 동영상을 블로그에 올렸다가 저작권 침해로 고소당한 사건 등과 같은,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접해본 이야기들도 있었다. 작가들은 가두 투쟁이나 화염병 투척 같은 과거의 방식으로 “저항”이 아니라 바로 “법”으로 저항하라고 이야기하며 그러한 실제 사례들을 이 책에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현 정권뿐만 아니라 과거 정권들에서도 틈만 나면 강조했던 통치이념인 “법치(法治)”가 결국은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13가지 사례들과 같이 힘없고 약한 사람들에게는 고통 밖에 주지 못하건만 법으로 저항하라니 왠지 아이러니하기까지 한데, 작가들은 서문인 “법으로 저항하라”에서  

법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군림했을 뿐이다. 이제 그 법을 우리 것으로 만들 때가 왔다. 법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은 하나다. 우리가 그 법 위에 앉는 것이다. 우리의 도덕과 정의감을 법 위에 앉히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 책은 어찌 보면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라면 혼자서만 억울해하고 금세 포기해버릴 만도 한 그런 사건들을, 결국 “법”이라는 잣대로 핍박 받던 이 책의 주인공들은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끈질기게 법에 호소하여 결국은 자신의 권리를 쟁취해내는 “승리”의 기록이기도 하다. 즉 부당한 현실에 대한 그들의 끊임없는 “저항”이 결코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법과 사회 통념이라는 철옹성의 문을 활짝 열어 제꼈고, 그들의 목소리는 강한 울림의 메아리가 되어 이렇게 책으로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결국 “승리”했지만 승리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겪었던 과정을 따라가 보면서 얼마나 힘들고 고단했을지 절로 숙연한 마음마저 들게 하고, 그들의 저항이 결국 “진보”로까지 이어졌다는 작가들의 해석에 또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나 그들의 승리는 앞으로도 계속 유효한 것일까? 이미 대법원에서 '현대차 사내하청에서 2년 이상 일한 비정규직 근로자는 정규직으로 봐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이 났지만 아직 도비정규직들은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공장점거 파업을 벌어야 했고 - 결국 노조간부는 불법 파업죄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 90%까지 진행된 새만금 공사를 결국 2년여 가까이 중단시키는 쾌거를 거두었지만 결국 일방적인 공사가 다시 재개되어 결국 “세계 최장 33.9km의 명품 방조제 건설”이라는 요란한 선전과 함께 지난 2010년 4월 준공을 완료했으며, 떡값 검사를 폭로한 노회찬 의원은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떡값 사건의 주인공들이 무슨 처벌을 받았다는 소식은 커녕 금세 사면을 받고 재계에 화려하게 복귀하지 않았던가? 또한 미네르바 적용 법조항이 결국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違憲)” 판결을 받아 일단락되는 듯 했지만 보수 언론들이나 집권여당은 일제히 “공익”을 해치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비난하며 보다 엄격한 대체입법을 만들겠다고 저 난리인 것을 보면 그들의 승리가 결국 “일회성(一回性)”에 지나지 않은, 보다 더 단단하고 굳건한 벽을 만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이다.  

  그러나 계란으로도 바위가 결국은 깨진다는 사실을 입증해낸 이 책의 13가지 사례는 앞으로 새로운 싸움과 저항을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격려와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나처럼 머리 뿐만 아니라 가슴마저 차갑게 식어버린 이들에게는 오래전 뜨거웠던 열정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는 그런 책이다. “분노하지 않는 젊음은 죽은 것이다”라고 하던가? 사회 모순이나 부조리에 분노하는 것은 연령과 신분을 떠나서 대한민국에 사는 모든 국민이라면 당연한 의무일 것이다. 이 책이 그동안 잊고 지냈던 이러한 의무를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상기해볼 수 있도록 널리 읽혀지길 바래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꿈의 도시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쿠다 히데오(奧田英朗). 그동안 읽은 그의 작품을 헤아려 보니 <남쪽으로 튀어 1,2>, <공중그네>, <라라 피포>, <한밤중의 행진> 등 4권이 된다. 그동안 읽은 일본 작가들 작품들중에서는 권수로 꽤나 많이 읽은 작가이다 - 제일 많이 읽은 작가가 미야베 미유키로 5종 8권이다 -. “우울할 땐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을 읽어라”라는 말처럼 작품들마다 담고 있는 주제는 결코 가볍지가 않은데도 정색을 하지 않고 그만의 유머로 재미있게 풀어내서 읽고 나면 절로 유쾌하고 즐거운 기분이 드는, 책 내용을 떠나서 작가 이름만으로도 선택하게 되는 그런 작가이다. 이번에 읽은 <꿈의 도시(원제 無理/은행나무/2010년 12월)>은 처음에는 역자 후기 포함해서 632 페이지에 다다르는 묵직한 분량과 요즈음 신간들과는 달리 비교적 빽빽한 줄 간격으로 이 책을 언제 다 읽나 하는 걱정이 앞섰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존 그의 작품들 중에서 어느 한 작품 지루한 작품이 없었던 터라 탄력이 붙으면 금세 읽어내겠지 하는 기대감도 같이 들면서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역시나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오쿠다 히데오. 만만치 않은 분량임에도 하루 나절 만에 다 읽어 버리게 된 이번 책은 오쿠다 히데오 만의 장점 - 진지한 주제를 웃음으로 잘 승화시킨 그의 능력 - 을 여실히 보여준 참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인근 세 개의 군이 합병한 인구 12만의 가상의 지방 도시 “유메노”, 통합된지 얼마 안된 탓인지 도시 전체가 아직은 어수선하다. 이 책에서는 유메노 시에 사는 다섯 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각자가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런데 다섯 명의 공통점은 “탈출”을 꿈을 꾼다는 점이다. 먼저 시청 생활 보호과에서 생활보조비 수급 대상자를 상대로 일하는 공무원인 “아이하라 도모노리”는 겨울을 지나 봄이 되면 지긋지긋한 유메노 시를 떠나 상위 기관인 현(縣) - 우리나라의 “도(道)”에 해당 된다 - 청으로 복귀를 간절히 고대한다. 여고 2학년 생 “구보 후미에”도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 유메노를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고, 시의원인 “야마모토 준이치”도 다음 선거만큼은 현 의원으로 출마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나머지 두 주인공은 조금은 다른데, 마트 보안요원인 중년 여성 “호리베 다에코”는 사이비 종교인 “사슈카이”에 빠져 현생보다는 이생에서의 복된 삶을 꿈꾸고, 폭주족 출신의 세일즈맨 “가토 유야”는 연일 최고 성과를 올리는 같이 근무하고 있는 폭주족 선배처럼 매출 실적을 올려서 - 노인들만을 골라 전혀 쓸모도 없는 누전차단기를 교체해주고 돈을 받는 사기 영업이지만 - 빨리 자리 잡고 싶어 하는, 일종의 “경제적 신분 상승”을 꿈꾼다. 그들은 이렇게 저마다의 현실에서 “탈출”을 꿈꾸며 하루하루 일상을 반복한다. 그리고 손바닥만한 도시 탓인지 아니면 마지막 결말을 암시하는 작가의 장치인지 서로 서로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작은 인연들을 맺는다. 예를 들어 후미에의 학원 친구가 준이치의 아들이고, 유야는 준이치의 집에 방문하여 누전차단기를 팔아먹고, 도모노리는 유야의 전처 친구와 원조교제를 하는가 하면, 다에코는 유야의 아버지와 여관에서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는 등 직접적인 인연은 아니지만 알음알음 서로 연관이 된다. 그러던 어느날 모두에게 예기치 못한 사건이 터지게 되고 그들 각자의 “탈출 모의” 또한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결국 모든 갈등이 극에 달할 무렵 그들 모두는 전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한자리에 모이게 되면서 책은 끝을 맺는다.  

이 책의 장점을 꼽아 보자면 먼저 생동감 넘치는 인물 묘사를 꼽을 수 있다. 작가 스스로가 스토리보다는 이야기 속 인간들의 모습에 관심이 있다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 속의 다섯 주인공들은 마치 현실 인물들이 그대로 소설로 투영된 것처럼 느껴지는 사실감 넘치는 그런 인물들이다. 또한 종종 이렇게 여러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교대로 들려주는 형식의 책들은 복잡하고 모호해져서 누구의 이야기인지 헷갈리게 하는 경우도 많은데, 오쿠다 히데오는 각자의 개성과 현재 처해진 상황, 주변 인물들을 치밀하게 구성하여 각자의 이야기가 서로 방해받지 않도록 구성하면서도 결말에 이르러서는 절묘하게 합쳐지는 탁월한 구성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각자의 이야기 흐름에 저절로 따라가게 되고, 600 페이지가 넘는 만만치 않은 분량을 읽는 내내 전혀 지루함이 없이 내처 읽게 만드는 흡입력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는 전작들처럼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의식의 유쾌한 전개를 들 수 있겠다. 전작인 <남쪽으로 튀어>에서는 무정부주의자이자 전공투(全共闘) 세대인 아버지를 통해서 교육, 복지, 환경 등 현대 일본 사회의 모순을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게 담아내더니 이 책에서도 생활보호 대상자로 대표되는 복지 문제, 이주 노동자 문제, 사이비 종교, 노인 대상 사기 영업, 유부녀 원조 교제, 이혼 및 자녀 양육 부담 문제, 일본 정치의 주요 특징인 정치 세습과 이권개입과 같은 정경 유착 문제, 방안에만 틀어 박혀 사는 “은둔형 외톨이”, 가정폭력, 입시 문제 등등 마치 현재 일본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사회적 모순을 다 모아놓은 것 같은, 자칫하면 이야기가 무거워지고 심각해질 수 밖에 없는 이런 문제들을 작가 특유의 유머와 재치로 재미있게 그려내 분위기를 가볍고 경쾌하게 환기시키고, 갈등이 극에 달하면서 여기저기 터지는 사건들 - 청소년 납치 감금, 불량 서클간의 싸움, 심지어 살인에 이르기까지 - 이 터지지만 결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그런 잔혹하거나 폭력적이지 않고 그저 시끄러운 난장판 정도로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잘 갈무리해낸다. 즉 결코 유쾌할 수 없는 주제임에도 전혀 불편함을 느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쾌함마저 들게 하는, 그러면서도 다 읽고 나서 뭔가 곱씹을 만한 생각꺼리를 던져주는 오쿠다 히데오만의 글솜씨를 역력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다만 작가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각자의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결말에 이르러서도 완성되지 않고 “열린 결말” 형태로 끝을 맺은 점과 여러 주인공과 많은 주제를 담아내다 보니 전개에 있어 다소 산만한 점, 기존 작품들에서 보여줬던 밝고 경쾌한 유머가 다소 무뎌진 점 -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울을 떨쳐버리기 위해, 즉 기분전환을 위해 이 책을 읽었다면 실망할 수 도 있을 것이다 - 등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궁금한 점이 있다면 번역판 제목인 <꿈의 도시>는 결코 꿈일 수 가 없는 유메노 시에 대한 반어법적 표현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은 데, 원제인 <무리(無理)>는 과연 어떤 의미로 붙인 제목일까? 작가 인터뷰 글들을 찾아봤지만 딱히 발견할 수 가 없어 추측을 해본다면, <무리>의 뜻이 “도리나 이치에 맞지 않거나 정도에서 지나치게 벗어남(네이버 백과사전)”이라고 한다면 수많은 모순과 부조리를 내포하고 있는 현재 일본 사회에서 “탈출”을 꿈꾸는 다섯 주인공의 삶 그 자체가 바로 도리나 이치에 맞지 않는“ 무리한 시도일 수 밖에 없다는 작가의 냉소적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내 멋대로의 억측이겠지만^^ 

“역시 오쿠다 히데오!”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아직도 못 읽어본 그의 작품들이 꽤나 많다. 읽고 싶은 책 목록 맨 앞에 올려 놓고 하나하나 읽어나가야 할 것 같다. 그의 이름만 들어도 먼저 눈길이 가게 될 그의 다른 작품들은 나를 어떻게 즐겁게 해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제생태계 보호 - 세계적인 경제학자 크레이그 토머스의 통찰력 있는 서민경제 생존법
크레이그 토머스 지음, 신승미 옮김 / 지훈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경제(經濟)는 생물(生物)이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만큼 경제 예측이 복잡다단하고 변화무쌍하다는 것을 살아 움직이는 “생물”에 빗대어 설명하는 말일 것이다. 이렇게 경제가 복잡다단하다 보니 경제 상황에 대한 해석 및 처방도 가지각색이다. 한쪽에서는 경제 시스템(시장)은 완전무결한 존재 - 고전 경제학파에서는 전지전능한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 여서 가만히 놔두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니 경기 부양이나 경기 통제를 위한 인위적 개입은 사태만 더 키울 것이라고 주장하고, 한쪽에서는 인간이 만든 이상 경제시스템(시장)은 불완전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경제시스템, 즉 시장에 대한 논쟁은 경제학 태동과 함께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케케묵은 논쟁이라 할 수 있는데, 정책 입안자가 어떤 입장을 견지하느냐에 따라 경제 정책 기조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종종 볼 수 가 있다. 그런데 최근 읽은 미국 경제학자인 크레이그 토머스의 <경제생태계 보호(원제 The Econosphere/지훈/2010년 11월)>은 아예 경제를 생물 그 이상의 개념, 즉 자연 생태계와 같은 개념의 “경제생태계”으로 정의하고, 우리가 자연을 보호하고 가꾸듯이 경제도 인위적 개입을 최소화하여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두어야 한다는, 경제에 대한 색다른 시각을 우리에게 선보이고 있다.  

  작가는 책 서두에 많은 사람들이 생물생태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보호하려고 노력하듯이 경제도 일종의 살아있는 생태계와 마찬가지여서 경제생태계를 잘 이해하면 경제생태계가 손상되지 않도록 잘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경제생태계의 기능과 법칙을 이해하면 최고 가치를 생산해낼 일에 집중할 수 있으며, 훌륭하게 결정하도록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구속 없이 자유롭게 기능할 때 우리 요구에 가장 잘 부응하는 사회 환경과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 즉 자연 보호하는 것처럼 경제에 인위적인 간섭을 하지 말고 잘 보호하면 최적의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는 말이다. 작가는 “경제생태계의 법칙”으로 먼저 종종 양육비와 교육비 때문에 아이 낳기를 두려워하는 젊은 부부에게 어른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인 “누구나 제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을 예로 들며 고의로 방해를 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새로운 구성원은 모두 세상에 부를 추가한다는 “성장의 법칙”을 설명한다. 그리고 차례대로 경제 생태계에서는 문제가 무엇이든 더 나은 정보가 높은 해결책의 일환이며(->정보의 법칙), 경제생태계의 생기를 주는 힘은 바로 인간이며(->지속가능성의 법칙), 종종 제로섬(ZERO SUM)게임으로 알려진 경제 생태계에는 한쪽에는 빼앗아 다른 쪽에 주는 법은 결코 없다(->풍요로움의 법칙)고 설명한다. 

  서두까지는 기존 경제 시각에서 벗어나 “경제생태계”라는 새로운 경제 해석에 다소 흥미를 느꼈는데 본격적인 각론에 들어서부터는 왠지 작가의 사상이 기존에 많이 접해본 그 “무엇”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과연 내가 의심하는 그 “무엇”이 무엇인지 작가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작가는 종종 산업장려책으로 사용되는 정책인 “관세장벽”과 “생산 보조금”정책을 사실상 해당 생산자에게는 보조금이고 소비자에게는 세금이라고 잘라 말한다 - 물론 생산보조금의 재원(財源)이 국민 세금에서 충당되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이다 -. 다른 국가와 교역하는 제품을 생산하는 데 보조금을 지급하는 나라나 상당히 열악한 노동환경이나 느슨한 환경 규정을 묵인하는 나라는 사실상 다른 나라의 소비 장려를 기꺼이 돕는 셈으로 자신들이 창출한 가치를 스스로에게서 빼앗고 있으며 유용성을 제대로 산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운 경제 상황이 지속되며, 반면에 그런 수출국들이 제정신을 차리지 않는 한 적어도 수입국 소비자에게는 이익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작가가 주장하는 경제생태계는 “무역”, 즉 “교환”을 아주 좋아해서 결국 직업과 산업이 자유롭게 이동하도록 허용되면 경제생태계는 생산성이 가장 높아지고 최대한 원활하게 운영되는데, 반면에 자연스러운 이동을 막으려고 하면 압력이 쌓이며 그 압력이 아주 강해지면 구소련에서 경제 붕괴에 이어 정치 붕괴가 일어난 것처럼 성급하고 폭력적인 이동이 발생한다고 경고한다. 
 

작가는 또한 경제에 있어서 “불평등”은 사실상 좋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불평등은 경제라는 탱크의 연료이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성공하는 능력은 자유 시장 경제의 기본 엔진이자 경제에서 생산이 이루어지게 해주는 추진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서 “부(富)의 상속”에 대해서 작가는 상속된 부는 이전 세대의 저장된 노동일 뿐이고, 누군가가 가치를 아주 많이 생산해서 미래 세대에게 안락함을 더해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일이며, 부의 창조자는 자신의 저장된 노동을 물려줄 권리가 있으며, 후대에 장려책을 제공해줘야겠다는 생각은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생산성을 높이 유지하며 일하게 해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는 부자를 질투하지 말고 존경하라고 당부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가 진정한 권한이라 할 수 있는 “재산권 보호”를 제쳐두고 노동조합에 유리하게 법률을 제정하거나 부를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이전하는 등 “재산 재분배”에 더 주안점을 둔다면 결과적으로 사기 기미가 느껴지고 당연히 일부 사람의 격분을 살 일이며, 더구나 그런 정책은 경제생태계의 속성에서 벗어나 효율성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의도하지 않았던 각종 결과를 유발한다고 주장한다.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해서는 경제생태계의 법칙에 따르지 않는 외부 세력이 경제 생태계로 들어온 셈이며, 이 결과로 파문이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작가는 경제생태계의 장려책을 멋대로 조작하려는 정부의 시도는 경제생태계 운영을 비효율적으로 만들어 1인당 생산량, 원자재 대비 생산량, 시간 단위 대비 생산량이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와 최종적으로 모두에게 손해만 가져올 뿐이며, 이렇게 보면 생산자의 삶을 편하게 하고 변화나 압박의 영향을 덜 받게 하려고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는 셈이라고 폄하한다. 또한 정부의 경기 부양 정책의 두 가지 방향 중 하나인 통화정책은 대체로 경제 전반을 침해하는 반면, 또 다른 정책인 재정정책 - 작가는 세계적으로 좌경 성향이 있는 정당이 재정정책을 선호하는 케인스 학설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 은 일부를 집중적으로 침해하는 문제가 있으며, 작가는 저소득층 등에게 우편으로 수표를 보내는 것과 같은 부가가치가 전혀 없는 경기 부양책에 왜 정치계가 전적으로 동의하게 된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작가는 시장가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정부가 가격을 인위적으로 정하고 변경하고 차단하려는 모든 활동은 우리가 번창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시장 가격은 어떤 척도도 알려줄 수 없는 점을 깨닫게 해주고, 세상에 필요한 제품과 가장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는 일자리를 알려주므로 세상에 시장 가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며, 시장 가격이 없으면 우리는 방향을 잃기 때문에 시장가격을 “사랑”하라고 타이른다. 

작가의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나니 그 “무엇”의 정체가 명확해진다. 바로 장하준 교수가 <나쁜 사마리아인>,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등의 저서를 통해서 그렇게 줄기차게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바로 “신자유주의(新自由主義, Neoliberalism)” 사상과 단어 선택과 문맥이 다를 뿐 그 내용은 완전 판박이가 아닌가? 경제가 자연생태계와 같은 유기적인 생물이기 때문에 경제라는 생물이 좀 더 무한한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한 인프라 구축 - 주로 감세(減稅)나 규제 철폐 등과 같은 방법 - 에 매진해야 하며, 정부는 경제 생태계에서는 외적 존재일 수 밖에 없으니 유치(幼稚)산업 보호나 통화정책, 재정정책 구분할 것도 없이 모든 경기 부양책과 같은 인위적 개입을 해서는 절대 안 되고, 경제적 불평등은 동기 유발이 될 수 있는 사실상 좋은 것 - 최근 무상급식 반대론자들 논지와 완전 똑같다 - 이며, 부의 재분배, 상속 제한 등과 같은 정책은 경제생태계를 파괴하는 악덕(惡德) 정책으로 몰아붙이고, 상품과 산업의 자유로운 이동만이 경제 생태계를 유지 보존하는 데 중요하다는 등 주장하는 내용들이 하나같이 그대로 일치한다. 물론 작가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경제 해석이라고 강변할 수 있겠지만 여러 주장들을 종합해 보면 그 사상적 기조는 “신자유주의적” 사고에 기인한 것이라는 의혹을 결코 떨쳐 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장하준 교수의 주장대로 “신자유주의”는 정말 나쁜 것일까? 아직도 신자유주의 신봉자들과 장하준 교수와 같은 반대론자들의 논쟁이 끝나지 않고 있으니 딱히 여기서 내가 두 진영의 쟁점을 다시 중언부언(重言復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장하준 교수의 신자유주의 경제 비판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경향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는 이 책의 주장은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과연 이 책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나” 같은 사람들 - 물론 이 책의 이론에 동의하는 분들에게는 금과옥조와 같은 책이겠지만 - 에게는 읽을 가치가 없는 그런 책일까? 작가는 책 마지막 장에서 “부와 행운을 극대화하는 10가지 방법”을 소개하고 자신의 시간과 재능으로 모든 사람이 이익을 볼 수 있도록 자신의 유용성을 극대화하고, 경제생태계의 가치를 인정하고 보호하라고 당부한다. 이렇게 하면 자신을 구제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타고난 잠재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가난하게 살게 만드는 인공적인 장애물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한다는 말이다. 경제 생태계를 보호하라는 말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동의하긴 어렵지만 경제 주체로서의 “나”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자신의 시간과 재능을 최대한 극대화하라는 충고만큼은 한번쯤 새겨들어볼 만 하다고 생각된다. 나와 다른 생각이라고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보는 차원에서는 한번쯤 읽어볼 만 한 책이라 평가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인자의 편지 - 제2회 네오픽션상 수상작
유현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리소설 장르를 좋아하는지라 참 많은 추리 소설들을 읽게 된다. 물론 작품들 중에 함량 미달 작품들을 만날 때도 있지만 그래도 평균 이상의 재미를 보장하는 것이 바로 “추리소설” 이어서 어느 작품을 선택하더라도 큰 실수는 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있다면 “우리” 추리소설을 자주 만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일본이나 서양 추리소설들에 편중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웃 일본이야 수많은 작가들의 다양한 추리소설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출간되고 있고 추리소설 관련 문학상들 또한 즐비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저변이 튼튼하지만 우리나라는 가뜩이나 기성 유명 작가들의 맥이 끊겼다고 할 정도로 신간 출간 소식이 감감무소식인데다가 변변한 추리소설 작품상조차 찾아볼 수 가 없어 신인들이 등용하기란 정말 어렵다고 할 정도로 저변이 부실하다. 그래도 간간히 우리 작가 소설들을 드문드문 접하게 되는데, 일본 추리소설 못지않은 재미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몇 몇 마니아들에게만 읽힐 뿐 이내 서점 진열대에서 사라지곤 해서 영 아쉽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 문학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장르 문학상 수상작이자 기존 여느 일본 소설들 못지않은 재미와 반전을 보여주는 멋진 우리 추리소설을 읽게 되었다. 유현산의 <살인자의 편지(자음과모음/2010년 12월)>이 바로 그 책이다.  

 수도권 인근의 가상의 도시 영흥에서 가출 소녀가 목을 매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런데 이번 사건의 살인 방식이 이전에 발생한 살인사건인 모터사이클 선수와 퇴역 대령의 죽음과 동일한 교수형 매듭 밧줄을 이용한 사건임을 알게 되고, 현재 진행 중인 “연쇄살인 사건”으로 파악한 경찰 당국은 특별수사본부를 결성하여 수사에 나선다. 연이어 어린이집 원장 내외가 같은 방식으로 죽는 사건이 일어나고, 피해자들의 과거와 주변인물을 탐문 수사하던 중 경찰은 영흥에서 죽은 가출 소녀를 제외하고는 피해자들이 하나같이 인면수심의 범죄 - 혼인빙자간음, 군내 비리와 의문사, 아동 학대 살인 등 - 를 저질렀지만 법의 단죄를 교묘히 피해갔다는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한다. 수사는 답보 상태에 이를 무렵 정의를 위하여 피해자들을 ‘사적 처벌’했다는 “살인자”가 보내온 편지가 수사본부에 배달되어 온다. 논의 끝에 이 편지를 공개하기로 한 수사본부는 베테랑 사회부 기자인 “유제두”기자의 시사 잡지에 게재하여 범인을 압박하여 수면 위로 끌어내려고 하지만, 오히려 사회적 논란만 키우게 되고, 결국 이를 비웃듯 또 다른 방화 살인사건이 발생하고야 만다.  방화 살인사건의 연유를 설명한 글과 함께 잡지 기사에서 살인범을 비난한 것으로 실명 이름이 나왔던 피해자심리전문요원 “박은희”에 대한 살인 예고를 담은 편지가 잡지사에 배달되고, 경찰은 그녀의 보호에 나서지만 범인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그녀에게 살인의 마수를 뻗어온다. 결국 예기치 못한 반전 끝에 연쇄살인범의 진짜 정체와 사건 전모가 밝혀진다(자세한 줄거리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생략한다)  

  이 책을 엄밀히 말한다면 교묘한 플롯과 트릭, 명탐정의 등장이라는 도식화(圖式化)된 일반적인 추리소설에서 벗어난 “사회파” 추리소설 - 대표적인 소설이 작가가 후기에서 좋아하는 작가라고 밝히고 있는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 <이유>를 들수 있다 - 로 분류할 수 있다. “사회파” 추리소설에 대해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본격 추리는 기본으로 삼으며 사회의 어떤 심각한 문제들을 비판” 하는, 즉 현대 사회의 범죄와 도덕적 문제를 다루는 “사회비판” 요소를 부각시킨 추리소설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책에서도 청소년 가출문제, 아동 성범죄, 군내 비리와 의문사, 문란한 성관계와 낙태 등 신문이나 방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회문제들이 주요 사건으로 등장하고 있다.  독자의 허를 찌르는 절묘한 트릭이나 플롯, 명탐정이 등장하지 않는 사회파 추리소설의 재미는 바로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작가는 이번 작품이 두 번째 작품인, 사실상 신인작가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간결하고 명료한 문체와 긴장감을 떨어뜨리지 않는 절묘한 이야기의 배치로 읽는 내내 호흡을 놓치지 않게 만들어 마지막 장까지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특히 범인의 정체가 드러나는 반전과 살인 예고된 “박은희”에 대한 범인의 살인 시도 장면에서는 뒷장을 먼저 읽어 결말을 빨리 알고 싶을 정도로 긴장감과 스릴이 극에 달하게 된다. 또한 범인이 체포되어 모든 전말이 밝혀지지만 계속 의문으로 남았던 가출 소녀 살인사건에 대한 전말이 밝혀지는 두 번째 예상치 못한 반전 또한 마지막 장까지 긴장감을 늦추지 않게 하는 탁월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적지 않은데, 미드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범죄사건의 정황이나 단서들을 분석하여 용의자의 성격과 행동유형, 콤플렉스 등을 추론함으로써 수사방향을 설정하고, 용의자의 범위를 좁히는 데 도움을 주는 “프로 파일러”가 사건 초기부터 등장하지만 그다지 큰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있고 - 활약이라고는 체포한 범인을 자극하여 “내가 죽였다”라고 자백하는 장면인데 이 장면도 사실은 범인이 프로 파일러의 유도 심문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그 의도에 따라준 것으로 설정한다 -, 프로파일러가 여주인공이자 범인의 마지막 살인 대상이기도 했던 “피해자 심리전문요원”인 박은희가 하는 일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범인이 보내온 글을 분석하여 범인의 정체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텍스트 분석가”도 등장하는데, 언제나 경찰은 사건이 터지고 난 후 뒤늦게 등장 한다는 고전 법칙을 되풀이하는 설정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병을 앓고 있는 형사가 가출소녀를 살해한 범인을 그토록 잡고 싶어 하는 이유에 대한 개연성과 “법”으로 심판하지 못한 사회 암적 존재를 직접 처단하겠다는 “사적 처벌”에 나서는 범인이 사실은 어릴 적 학대받은 범인의 상처가 트라우마로 작용했다는 설정, 결국 책 말미에서야 그 이유가 등장해서 책 중반까지는 범인의 살해동기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기가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또한 일련의 살인 사건 속에 전혀 성격이 다른 이질적 사건을 끼워 넣지만 독자들이 알아챌만한 어떤 단서를 사전에 제공하지 않은 점이나  등장인물 중에서 범인이 밝혀지는 일종의 “서술 트릭”적인 설정도 반전으로서는 묘미가 있지만 많은 소설들에서 이미 사용된, 조금은 상투적인 설정이었다는 점도 아쉬웠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아쉬움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재미있는 멋진 추리소설임에는 분명하다. 특히 간결하면서도 흡입력 있는 문체, 끝까지 재미와 긴장을 놓치지 않게 하는 이야기 구성력은 작가의 내공이 결코 녹록치 않은, 앞으로 이어질 그의 후속 작품들을 절로 기대하게 하는 그런 작가로 기억될 것 같다. 한국 추리소설을 읽고 리뷰 쓸 때 마다 꼭 당부하는 말을 다시 해본다면, 부디 작가의 작품이 이번 작품으로 끝나지 말고 계속 이어지기를, 그래서 우리 추리소설들이 더욱 풍성해주기를 고대하는 나와 같은 독자들의 바램을 한껏 충족시켜주는 작가로 기억되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구조절구역
츠츠이 야스타카 지음, 장점숙 옮김 / 북스토리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71년생(올해 만 40세) 돼지띠 남성들 절반이 94세 이상 산다"(조선일보, 2010.1.3.)
“...노인인구비율 2050년 38.2%로 세계 최고”(연합뉴스, 2010.12.23.)
“한국인 평균 기대수명 … 남 77세, 여 83.8세”(중앙일보, 2010.12.10.)

 인구 고령화(高齡化) 문제가 이웃 나라 일본 문제인줄만 알았는데 최근 뉴스들을 보니 우리나라도 사실상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꽤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출산율이 2009년 기준으로 우리나라가 1.15명으로 이웃 일본의 1.37명보다도 낮은, OECD 회원국 중 최저 수준이라고 한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 누구가 예측하듯이 생산 가능 인구 감소에 따른 고령 인구 부양 부담 증가, 저축 감소, 연금과 의료비 등 고령화 관련 지출로 인한 정부의 공공 지출 증가 하는 등 많은 문제점들이 있다. 물론 출산율을 높여 노인 인구 비율을 낮추는 방법이 있겠지만 정부가 온갖 출산 장려 정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오히려 출산율은 더 떨어지고만 있으니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노인 인구 자체를 줄이는 방법은 어떨까? 경을 칠 소리임에는 분명한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소설로 담아낸 작품이 있다. 일본 SF 문학 1세대이자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한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저자인 츠츠이 야스타카의 <인구조절구역(원제 銀齡の果て/북스토리/2011년 1월)>이 바로 그 소설이다. 

  가까운 미래, 일본은 더 이상 고령화 시대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자 노인 인구 자체를 줄이는 방법을 모색해낸다. 일본의 중앙인구조절기구(CJCK)는 행정구역을 일정 지구(地區)로 나누어 지구 내 70세 이상의 노인들이 한 달 기한 내에 서로를 죽이는 “배틀”을 벌인 후 최후 생존자 1인만 살아남는, 완료 시점 이후에 생존자가 한명 이상이라도 남으면 모든 생존자를 처형하는 “노인상호처형제도”을 실행하게 된다. “노인이 노인인 것 그 자체가 죄”가 되는 세상이 드디어 도래한 것이다. 배틀이 드디어 개시되고 노인들의 반응은 실로 다양한데, 살아남기 위해 야쿠자에게 총기(銃器)나 수류탄을 구입하거나 다른 노인들과 연합해 생존가능성이 높은 사람에게 도전하기도 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살하거나 또는 조용히 집에서 죽음을 기다리기도 하며, 자신이 흠모했던 연인을 위해 집을 요새화하거나 또는 모든 경쟁자를 죽이고 연인에게 총을 건네 죽기도 하고, 자신의 남편들을 죽인 노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거짓 자작극을 펼쳐 칼을 들이대는 아내들 등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한다. 그렇다면 이런 노인 배틀을 보는 자식들이나 주변 젊은 사람들은 어떨까? 부모를 잃는 슬픔에 가슴 아파하고 진료를 거부하는 의사에게 배틀 기간이 끝나고 복수하겠다고 울부짖는 자식들도 있지만, 자신을 괴롭혀온 시어머니를 다른 노인의 손을 빌어 죽이기도 하고, TV에서 스포츠처럼 중계하는 뉴스들을 보며 즐기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 죽고 죽이는 배틀 기간이 어느새 끝나가고 드디어 종료 전날, 살아남은 노인들은 먼저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부터 차례로 살해해서 리스트에서 지워나가고 남은 사람들끼리 서로를 죽이기 위한 일대 난리법석을 펼친 끝에 한 명의 생존자가 살아남으며 배틀을 끝내게 된다. 그런데 각 지구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1인 생존자들은 더 이상 이런 끔찍한 배틀을 종식시키기 위해 작당 모의하여 CJCK를 습격하지만 사전에 알고 있던 정부 당국에 의해 모두 사살되고 습격 직전 발걸음을 돌린 미야와키초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구이치로”만 살아남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다. 

  적지 않은 분량(역자 후기 포함해서 391페이지)임에도 금세 읽어낼 만큼 재미와 몰입도가 뛰어난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작가의 의도가 노인문제를 갈수록 심각해지는 인구 고령화 사회 문제에 대한 일대 경종을 울리기 위해 쓴 블랙 코미디 소설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심정을 감출 수 가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그런 살인 장면의 끔찍함보다는 - 사실 이 책에 등장하는 살인 장면들보다 더 끔찍하고 잔인한 소설들이 많다 - 그냥 웃고 즐기기에는 뭔가 꺼림칙한, 즉 실제로 이런 미래가 도래할 수 있다는 끔찍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마녀사냥, 종교전쟁, 유태인 대학살, 생체 실험 등 나와 종교나 피부색,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학살하고 노예로 부려먹는 일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했던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라는 말을 스스로 입증하는 그런 잔인한 일들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잔인한 학살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과연 명분이 없었을까? 다들 신의 명령에 의한 성스러운 집행, 우생학적 우월성, 정부 정책 등 온갖 명분을 다 끌어 들여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았던가? 앞으로 노인 인구 증가가 실제로 경제에 타격을 줄 정도로 심각해진다면 이 책에서처럼 노인 인구 자체를 줄이는 정책이 결코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게 이 책에서처럼 노인들 스스로 서로 죽고 죽이는 “배틀”일수도 있고, 아님 일정 나이가 되면 안락사(安樂死)시키거나 별도의 시설물에 공동 수용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하는 등 다양한 방법의 시도가 있을 거라는 예상에 절로 흠칫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이제 중년의 나이에 들어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현실인 이상 이 책의 이야기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닌 불과 몇 십 년 후 내 미래일 수 도 있다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작가 특유의 유머 코드들이나 우스꽝스러운 죽음들 - 집으로 쳐들어오는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포경선 작살을 발포하지만 너무 큰 위력으로 그만 휩쓸려 같이 죽어버리는 노부부 이야기나 난데없이 코끼리를 타고 나타나 난동을 피우는 장면, 신체적 조건으로 배틀 대상에서 제외되었음에도 그 사실을 모르고 같이 죽어버리는 노인 등 - 장면을 읽으면서도 그리 재미있다는 느낌보다는 그저 끔찍한 그런 장면으로만 느껴졌다. 물론 내가 너무 과민(過敏)한 반응을 보인 탓이겠지만^^ 

  츠츠이 야스타카의 작품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 <최악의 외계인>에 이어 이번 작품이 세 번째 작품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야 워낙 유명한 애니메이션이라 차치하더라도 단편집이었던 <최악의 외계인>에서도 온갖 기괴망측한 상상력의 진수를 보여주더니, 이번 소설은 그걸 뛰어 넘는 독특하면서도 기괴한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는걸 보면 결코 유쾌한 상상은 아니지만 한번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는 그런 재미를 보여주는 작가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 책이 본토인 일본에서는 어떤 반향을 일으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작가가 썼다면 사회 매장까지 각오할 정도로 끔찍한 상상을 일본에서는 잡지에 연재되고 버젓이 소설로 나올 수 있다니 일본의 문학적 다양성과 포용성이 부러워진다. 이 책에 나오는 노인들처럼 이미 칠순을 훌쩍 넘긴 - 1934년 생이니 올해 한국 나이로 일흔 여덟이다 - 작가가 부디 앞으로도 왕성하게 활동해주기를, 그래서 우리의 상상의 한계를 통렬히 깨부수는 그런 작품들을 계속 선보여주기를 기대해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러브캣 2011-02-11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드미르님 축하드립니다~ ^ㅡ^

레드미르 2011-02-17 10:46   좋아요 0 | URL
서평올릴 때나 들어오다 보니 러브캣님 댓글을 이제야 확인했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