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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티나 데이터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정환 옮김 / 서울문화사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히가시노 게이고”의 국내 출간 작품 -외서(外書)를 제외하고 국내에 번역된 작품만도 근 50여 권에 달한다고 한다 - 들 중에서 내가 읽은 작품이 일곱 편에 이르는데, 그의 작품이라면 꼭 챙겨 읽은 열혈 팬들에 비하면 오히려 몇 권 안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워낙 작품 수가 많다 보니 작품마다 재미나 완성도 면에서 편차가 있긴 하지만 어느 책을 골라도 평균 이상의 재미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그의 작품을 읽은 독자들 대부분의 공통된 평가이며 나 또한 내가 읽은 그의 작품들 모두 재미있게 읽었는지라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는 편이다. 이번에 여덟 번 째로 읽은 그의 작품인 <플래티나 데이터(원제 プラチナデ-タ/서울문화사/2011년 1월)>도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 만의 재미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도쿄 시부야의 한 모텔에서 여성의 변사체가 발견된다. 베테랑 형사 “아사마” 반장은 상사의 지시로 현장에서 발견된 모발과 음모를 “경찰청특수해석연구소”에 전달하는데, 연구소에서는 DNA 프로파일러 기법으로 범인의 신상명세와 몽타주는 물론 범인의 친족(親族)까지 밝혀내고 사건은 간단히 종결된다. 이처럼 DNA 수사기법의 놀라운 성과로 국회에서는 개인 DNA 정보를 수집하고 활용하는 법안이 통과되고, 각종 흉악 범죄에 DNA 수사기법이 본격적으로 활용되면서 범인 검거율이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는 개가를 올린다. 그러던 중 동일 범인이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 살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현장에서 결정적인 증거인 남성 정액(精液)까지 채취되면서 여느 사건과 같이 금세 해결될 것으로 보였지만 연구소의 회신 결과는 뜻밖에도 “Not Found"로 밝혀지며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진다. DNA 수사 시스템 구축 책임자인 “가구라” 주임은 DNA 검색 시스템 개발자이자 천재 수학자인 ”다테시나“ 남매를 찾아가는데, 남매는 ”Not Found" 사건에 대해 할 말이 있다는 말만 전하고는 가구라 주임이 치료 - 이중인격(二重人格) 소유자로 나오는데, 매주 한번 씩 또 다른 인격인 “류”를 불러내는 일종의 병원 치료를 받는다 - 를 위해 자리를 비우는 사이 그만 총으로 살해당하고 만다. 남매를 살해한 총탄이 기존 “Not Found" 사건과 동일한 것으로 밝혀지고, 시신에서 발견된 모발은 연구소에서 수거, DNA 분석을 마치고 범인의 신체적 특징과 몽타주가 가구라 주임의 핸드폰으로 전송되는데, 가구라 주임은 크게 놀라게 된다. 핸드폰에 전송되어 온 범인의 얼굴이 바로 자신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가구라 주임은 자신의 또 다른 인격인 “류”의 소행이 아닐까 의심하게 되면서 분석 시트를 조작하여 은폐를 하려고 하지만 결국 발각되고 류가 그리던 그림의 모델이자 류와 텔레파시가 통한다고 주장하는 의문의 소녀 “스즈랑”과 함께 도피하게 된다. 도쿄에서 다테시나 남매의 은신처, 다시 도쿄로 이어지는 기나긴 도피 끝에 가구라 주임과 그를 추적하던 아사마 반장은 마침내 의외의 인물이 연쇄살인범으로 밝혀지고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플래티나 데이터"와 관련된 음모의 전말을 알게 된다.
이번 책은 내가 만나본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과는 색다른 경향이 느껴졌다. 우선 이번 작품이 그가 선보여온 정통 추리소설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분명 연쇄 살인 사건이나 의외의 인물이 범인으로 밝혀지는 반전 등 추리 소설적인 요소를 담고 있지만, 그동안 보여준 정교한 트릭이나 플롯을 이용한 허를 찌르는 반전 대신 사건 배후에 숨겨진 “음모(陰謀)”에 초점을 맞춘 일종의 “사회파” 추리소설 - 탐정추리나 트릭위주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나 시스템적 오류를 중시하는 소설을 말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을 들 수 있다 - 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Not Found" 연쇄살인사건의 경우처럼 증거나 알리바이 조작, 밀실 트릭 등 전통적인 방식을 이용한 트릭의 허점을 단번에 깨뜨릴 수 있는 것이 바로 DNA 수사기법이라는 최첨단 과학 수사 방식 - 살인 현장에 남아 있는 한 두 가닥의 모발과 미세한 피부조직 만으로도 범인의 신체적 특징과 혈연관계, 99%까지 일치하는 정확한 몽타주가 나오는 이상 시간 조작이니 밀실 트릭이니 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더 이상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고 만다 - 이지만 시스템적 오류나 과학기술의 한계가 아니라 시스템 뒤에 도사리고 있는 정치적인 음모에 의해 언제든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릴 수 있는, 오히려 특권 계층을 비호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또한 과학과 전혀 상반되는 초자연적인 요소들, 즉 가구라 주임이 완전 별개되는 또 다른 인격체를 가지고 있다는 “이중인격”으로 설정하고 결말에 이르러서야 밝혀지는 의문의 소녀 스즈랑의 정체 등 과학이 결코 밝혀낼 수 없는 또 다른 사건들도 우리 곁에 분명히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듯 하다. 물론 히가시노 게이고가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커져서 이런 소설을 썼다기보다는 더 이상 추리소설 전통 기법이 유효하지 않는 현 상황에 대한 일종의 “작가”로서의 반발심 - 최근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미드 "CSI" 등에서 보여주는 과학 수사에 대한 작가의 비웃음일 수도 있겠다 -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체계적인 논거가 미흡하고 일부 비약하는 면도 없지 않지만 갈수록 의존도가 심해지는 과학 기술에 대한 작가의 경계심만큼은 이 책을 통해서 충분히 엿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손가락 지문을 뭉개버려 피해자의 신원을 못 밝혀내거나(-><용의자 X의 헌신>), 결정적인 증거였던 비디오의 촬영 시간 조작이라는 기초적인 트릭에 휘둘리는(-><악의>) 등 전작들처럼 이번 작품에서도 DNA 수사가 본격 도입되면서 경찰은 탐문 수사나 증거 확보 등 전형적인 수사를 전혀 할 필요 없는, 그저 시스템이 일러준 대로 범인을 체포하는 들러리로 전락해버리고, 물샐 틈 없이 구축된 경찰의 포위망을 전혀 도주 경험이 없는 초보자나 다름없는 가구라 주임이 너무 손쉽게 벗어나 버리는 등 일본 경찰에 대한 냉소(冷笑)는 이 작품에서도 여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가가 형사”라는 명탐정이 등장하는 시리즈도 여러 편 되고, 이 작품에서도 디지털적인 가구라 주임과 정반대인 아날로그적 인물인 아사마 반장이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보면 일선 경찰 개개인에 대한 폄하라기 보다는 일본 경찰 전체 시스템에 대한 비웃음으로 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전작들과는 다른 경향의 이번 책에 실망스러워 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 인터넷 서점에 올라와 있는 서평들을 보면 호불호(好不好)가 나뉘어 있다 - 개인적으로는 500쪽이 넘는 책을 단숨에 읽게 만들 정도로 몰입도와 재미가 뛰어난,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히가시노 게이고 만의 재미가 어떤 것인지 보여준 작품으로 평하고 싶다. 또한 이번 작품의 일본 현지 출간이 2010년이니 가장 최신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이번 작품에서 보여준 “사회파” 추리소설 경향 - 그의 전작들을 모두 읽지 않아서 그의 기존 작품 중에도 사회파라 부를 수 있는 작품이 있는지를 파악할 수 없었다 - 이 일회성(一回性)으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계속 이어질지 알 수 는 없지만 좀 더 묵직한 주제에 대한 작가의 고뇌가 담긴 작품들이 계속 출간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