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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양장) - 유년의 기억 ㅣ 소설로 그린 자화상 1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 몇 년 새 우리 문학과 사상계의 큰 별들이 유명을 달리 하셨다. 특히 작년(2010년)에는 참 크신 선생님들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는데, 욕심에서 해방될 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얻을 수 있음을 일깨워 주신 <무소유(無所有)>의 故 법정 스님(2010.3.), 우리 시대 최고의 번역가이자 신화학자로 서양문명의 뿌리인 그리스·로마 신화를 우리에게 소개해주셨던 高 이윤기 선생님(2010.8.), 그리고 우리시대 ‘실천하는 지식인의 표상’이자 ‘사상의 은사 -프랑스 르몽드紙가 선생님을 ‘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은사)’로 부르면서 자연스럽게 선생님 성함 앞에 저 호칭이 붙게 되었다 - 리영희 선생님(2010.12.)이 그분들이시다. 자연스럽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따라 붙게 되는 저 분들께서 차례로 영면(永眠)하시니 가슴이 텅 비어 버린 듯한 상실감과 슬픔이 느껴졌다. 그런데 2011년 새해 벽두부터 또 한 분께서 귀천(歸天)하셨다는 비보를 접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성 문인으로 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따뜻한 감성으로 많은 감동을 불러일으킨 박완서 선생님께서 향년 81세로 2011년 1월 22일 돌아가셨다. 인터넷이나 책 표지에서 그 분 사진을 보면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이어서 사진만 봐도 내 마음 또한 밝아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곤 했었는데, 이제 더 이상 그분의 환한 웃음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개인적으로는 여성 작가 작품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故 박완서 선생님은 챙겨 읽어 보는 몇 안 되는 여성 작가들 중 한 분이었다. 그 분 작품 중 읽은 책을 떠올려 보니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 <친절한 복희씨> 등 3권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특히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첫 출간인 1992년, 즉 20 여 년 전에 꽤나 감명 깊게 읽었었고, 부음(訃音)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떠오르던 책이어서 이 책과 함께 연작인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함께 읽어봐야겠다고 맘먹고 있었는데 먼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2005년 9월)>부터 다시 읽게 되었다. 나에게는 선생님의 유년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책으로 그 분의 삶의 궤적을 돌이켜보면서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달랠 수 있었던 소중한 책읽기였다.
이 책은 해방(解放)이전 일제 치하의 1930년대 개성 인근의 개풍군 박적골에서의 유년 시절과 엄마를 따라 올라온 서울에 살면서 해방 이후 1950년대 전쟁으로 황폐해진 서울에서의 20대까지의 삶을 그린 자서전(自敍傳)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자유로울 수 없듯이 작가도 여러 소설 속에서 자신의 경험을 인용해왔다고 하는데, 이 작품과 연작인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이 책에서는 스무 살의 성년으로 들어서던 1951년부터 1953년 결혼할 때까지의 20대 이야기를 그렸다고 한다 - 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삶을 소설 형식으로 풀어내서 “기존 박완서 소설의 모태 혹은 원형”이라고 평가받는다고 한다. 출간후 지금까지 150만부가 넘게 팔렸고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을 정도라고 하니 이미 많은 독자들이 읽어본 “스테디셀러”라 할 수 있어 굳이 줄거리를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싱아”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한다. 처음 이 책을 읽으면서 “싱아”가 과연 무엇일까 하고 찾아봤던 기억이 난다. 싱아는 작가의 고향인 박적골 주변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새콤한 맛의 야생 과일이라고 하는데 나름 도시(대전) 출신인 나로서는 처음 들어본 이름이기도 하다. 작가는 박적골 유년 시절을 떠올리며 시골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 추억, 즉 개천에서 물장구치고 산을 돌아다니며 산딸기와 싱아 등의 산열매를 따 먹었던 추억을 우리들에게 들려준다. 작가가 일곱 살 무렵 자신을 끔찍이 아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숙부와 숙모들을 뒤로 하고 엄마를 따라 서울로 이사 오게 되는데, 가정 형편상 사대문 안이 아닌 문밖 빈민촌이라 할 수 있는 현저동에 살게 되면서 문안의 초등학교(그 당시는 국민학교)로 먼 길을 걸어서 통학하게 된다. 사는 곳이 달라 친한 친구도 없고 주변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하는 어머니 때문에 외로울 수 밖에 없는 통학길, 길 주변 산에 들어가 봐도 고향 박적골처럼 싱아와 같은 야생과일도 없고 낯선 아카시아 꽃만 가득한 그 곳에서 작가는 제목처럼 “(고향에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하고 푸념처럼 중얼거린다. 여기서 싱아는 남겨 두고온 고향의 그리운 가족들과 친구, 그리고 깨벗고 뛰 놀던 고향의 시냇가와 동네 산 등 바로 유년시절의 “박적골”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향에서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가족들과 함께 뛰놀던 동네 소꿉친구들, 산 여기저기 흐드러진 산 열매들과 먹을거리로 행복했던 그녀가 서울에 와서는 어울릴 친구 하나 없이 먼 통학길을 외롭게 다녀야 하고 학교에서도 선생님께 주목받지 못해 겉도는 주변 아이가 된 자신의 처지를 고향을 상징하는 “싱아”의 상실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즉 “싱아”는 바로 작가의 유년시절의 행복을 상징하는 척도이며 그 싱아의 상실은 곧 행복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이 출간되었던 당시 작가의 삶을 솔직 담백하게 그려내어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는 호평(好評)도 많았지만 일제시대, 민족상잔의 비극, 독재 정권의 민주세력 탄압 등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들었던 현대사의 아픔에 대하여 치열한 자기반성과 고민이 보이지 않고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 너무 매몰되었다는 비판도 있었던 걸로 안다. 출간 당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시절이었고, 현대사를 새롭게 해석하고 재조명한 인문서적이나 역사 소설들이 줄을 잇던 시절이라 작가의 개인적 시각에 한정된 시대 인식 - 물론 책에서 해방 후 잠시 좌익운동에 몸담았던 오빠 이야기나 역시 공산주의에 잠시 쏠렸던 작가의 관심, 6.25. 당시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공산당원으로 이북에서 내려온 셋방 이웃 남자 일행에게 식사를 대접한 죄로 인민군 부역자로 몰려 고생했던 이야기들이 나온다 - 이 마치 80,90 년대 인기 드라마였던 “갓난이”나 “몽실언니”, 즉 우리가 못 먹고 못살던 시절 가난의 설움을 강조했던 드라마들에 지나지 않다는 비판이었을 것이다. 솔직히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당시 나또한 그런 생각에 자유롭지 않아서 작가의 이러한 시대 인식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20년 만에 이 책을 다시 읽어 보니 그 당시 비판했던 면면보다는 이제는 작가의 삶이 오롯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비록 대학시절 필독 도서로 불렸던 어느 대하소설처럼 시대에 대한 성찰이나 고민은 부족할지 모르지만 일부러 비장감을 강조하거나 또는 동정심을 유발하는 억지 꾸밈을 배제한 솔직 담백하고 진솔한 작가의 고백도 충분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는 그당시 힘들었던 시대 상황을 잠시 접어두고 조금은 편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인간 “박완서”의 삶에 집중한다면 그분의 삶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올곧이 할 수 있을 것 같다.
살아계실 때는 몰랐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그 분의 글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동적이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그분께서 남기신 소중한 글들을 이제라도 읽어보려 한다. 그리고 그 분의 글을 통해서 그 분의 삶을 돌이켜 보고, 그 분의 환한 미소를 영원히 간직하려고 한다. 그래서 앞으로 읽을 그분의 글들을 생각하니 절로 즐거워지면서도 다시는 그 분의 새 글을 만나볼 수 없다는 게 못내 슬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