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정주영 회장. 그분을 직접 모신 현대그룹 직원이 아니더라도 그분에 대한 이야기는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그분의 자서전인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와 그분의 경영 철학을 다룬 각종 서적들, 모 방송 드라마, 그리고 1992년 대선(大選) 때 TV 토론이나 홍보 책자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한 두 번씩 접해봤을, 어쩌면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가장 유명하고 존경받는 기업인 - 대한상공회의소가 2007년 조사한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 설문에서 정주영 회장이 34.1%로 1위에 올랐다고 한다 -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로 돌아가신 지가 벌써 10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최근 TV에서 순박한 웃음과 함께 조선소 설립 시절 일화를 들려주시는 모기업 광고 동영상을 보면서 앞으로 10년, 20년이 지나도 결코 잊혀 지지 않을 그런 기업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해보기나 해봤어?”라며 웃음짓는 그분의 말씀은 요즘처럼 먹고 살기 힘들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삶의 고단함에 몇 번이나 포기하고 주저앉고만 싶은 우리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충고이자 따뜻한 격려가 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이번에 읽은 故 정주영 회장 타계 10주년(2011년 3월 21일) 기념 도서인 <정주영, 경영을 말하다(현대경제연구원BOOKS/2011년 3월)>이 유명 기업인들의 판에 박힌 성공신화를 담은 책이나 흔하디 흔한 자기계발서적과는 조금은 다른 느낌으로 읽을 수 있었던 것이.
머리말에서 작가(현대경제연구원)는 고 정주영 명예회장 타계 10주년 기념도서를 준비하면서 논문, 평전 등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지만 결론은 정주영 회장이 살아있다면 우리는 그분께 무엇을 묻고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을까 라는, 즉 돌아가신 정주영 회장과의 가상 인터뷰에 방향을 맞춰 이 책을 기획했으며, 한국 경제가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하고 저성장 늪에 빠진 현시점에서 고인이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중동 주베일 산업항 공사장을 누비던 활력과 조선소 부지 항공사진 한 장으로 중공업을 일으켜 세운 정열 등에 공감과 더불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필요한 정열과 통찰을 얻기를 기원한다고 집필 의도를 밝히고 있다.
본문에 들어가면 “신념과 신용”, “발상과 배움”, “실패와 경쟁”, “국가와 미래”, “세계와 사람” 등 5장에 걸쳐 정주영 회장과의 가상 인터뷰가 실려 있고 각장 중간과 말미에는 그분의 발자취와 업적, 경영 철학들을 전문가들의 입장에서 기술해 놓은 “아산 경영 노트”가 실려 있다. 이미 돌아가신지 10년이 넘은지라 “가상(假想)” 일 수 밖에 없는 인터뷰이지만 소 판 돈을 몰래 훔쳐와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여 시작한 쌀가게 점원 시절 이야기와 계약금보다 더 큰 손실을 봤다는 고령교 복구 건설, 소양감댐 및 경부고속도로 건설, 항공사진과 500원 지폐의 거북선 그림 한 장으로 유명한 조선소 건설 일화 등의 경험담과 함께 자신의 소신과 경영철학을 특유의 직설적이며 꾸밈없는 화법으로 구성해내어 “마치 그분께서 살아 돌아와 직접 말을 한 것과 같이 생생하게 쓰여” 있다는 머리말이 결코 과장되지 않았음을 절로 느끼게 해준다. 그분의 말씀 몇 가지만 소개해본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빨리 빨리”라고 대답하는 것처럼 이제는 한국인의 민족성으로까지 간주되고 있는 “빨리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성공의 열쇠는 시간과 행동이기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빨리 할수록 좋다고 답변한다. 다만 빨리하는 것과 대충하는 것을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데, 빨리한다는 것은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총력을 쏟아 부으라는 것이지. 그저 시간만 맞추기 위해서 대충대충하라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빨리’하라는 것은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집중력의 개념이며 모든 일은 총력을 다해서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처리 할 때 그 결과가 가장 좋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정말로 무엇이든지 ‘하면 되는’ 것이지만 막무가내로 덮어놓고 일만 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 남보다 더 열심히 생각하고 더 치밀하게 계산하여 남보다 적극적인 모험심과 용기와 신념으로 일을 추진하라는 그런 뜻이라고 풀이해 준다. 그분의 유명한 말인 “해보기나 했어?” 라는 말의 의미도 무모함보다 더 나쁜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을 경계하는 말로써 모든 일이 성사될 수 는 없지만 최선을 다했다면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얻게 되며, 다음 번에는 더 잘할 수 있으며, 다른 일을 할 때에도 여기서 얻은 경험이 큰 밑거름이 될 수 있는데, 애초에 해보지도 않았다면 남는 것 하나도 없이 그저 가지고 있는 것을 지켰다는 것이 전부라고 말한다. 따라서 무모함이란 가능성이 적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할 생각이 없는 일을 하는 것이며, 그런 일이야말로 그나마 있는 가능성마저도 스스로 위축시킬뿐더러, 실패했을 때 남는 것 도 없으며, 정말 중요한 것은 실패 그 자체 보다는 실패를 통해서 무엇을 얻었는가 하는 점이라고 충고한다.
손해를 보면서까지 신용을 지켜야 하는 것이냐는 물음에 처음 사업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변함없이 지켜왔던 원칙은 ‘이익이냐 신용이냐, 둘 중에서 선택하라’한다면 언제나 신용이었다고 말하며 엄청난 적자만을 남긴 채 끝난 “고령교 복구 공사”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또한 사업가에게 신용은 공기와도 같은 것이며 신용이 없는 사업가는 잠깐 동안은 돈으로 사업을 할 수 있겠지만 결국 모두가 외면하게 되고, 그 결과 아무런 사업도 하지 못하게 되지만 신용이 있다면 주위에서 ‘무모해 보이지만 저 사람이라면 믿어볼 만하다’라는 믿음을 얻을 수 있어 설사 실패하더라도 재기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신용은 쌓는 것은 힘들지만 잃는 것은 정말 쉬워서 한번 잃은 신용은 다시 쌓는 데에는 처음보다 몇 배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명문대를 나오지 않으면 성공하기는 힘든 것일까요?”라는 질문에는 불리한 지점에 있는 사람이 유리한 지점에 있는 사람과 똑같은 노력을 해서는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에 “그저 열심히 노력”하는 수준이 아닌 “남들 보다 훨씬”몇 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면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격려하며 학교를 떠난 뒤라고 해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작은 것이라도 배우고, 쉽게 좌절하거나 포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어쩌면 이 인터뷰에서 가장 가상 질문다운 우리나라에서도 애플이나 구글 같은 기업이 나올 수 있냐는 질문에는 1970년대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던 우리 기업인들이 가졌던 그 정신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다며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든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는 것부터 출발해서 점점 더 큰 문제에 대한 의문을 품고 해결해나간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세계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고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성패를 쥐고 있는 것은 시간과 행동이며, 생각만 해서는, 그리고 모든 걸 다 갖추어 놓고 시작하려 해서는 이미 늦어버리니 좋은 생각이 났다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그 생각을 현실로 만들라고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냐는 물음에 건강한 몸과 담백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매일 매일 성장하면서 시련 앞에 좌절하지 않는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소박한 행복과 작지만 성공적인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답하며 끝을 맺는다.
고 정주영 회장의 육성(肉聲)을 곁에서 듣는 듯한 느낌의 이 책은 연일 쏟아져 나오는 서양 유명 기업인들의 거창하고 화려한 경영기법이나 사업전략에 비하면 소박하기까지 한 고 정주영 회장의 진솔한 답변이 더 큰 울림과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그래서였는지 인터뷰 글 사이사이 마다 정주영 회장과 현대의 발자취를 전문적인 시각에서 소개하는 “아산 경영 노트”도 나름 가치가 있겠지만 종종 기업 사보(社報)나 창립 몇 십 주년 기념 발간 책자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내용들이라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눈길이 가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신용을 이익보다 우선의 가치로 여기고, 하지 않는 것 보다는 실패해서 얻는 교훈을 더 의미 있다고 여기는, 실패와 시련의 차이를 ‘포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 책에서의 그 분의 말씀들이 그 어느 때보다 힘들고 어렵기만 한 작금의 젊은이들에게 “용기”와 “격려”가 되어주길 바래본다.
개인적으로 고 정주영 회장에게 묻고 싶은 괜한(?) 질문이 있다. 우선 92년 대선 당시 공약이었던 “아파트 반 값”이 과연 실현 가능했을까 하는 질문이다. 난 그 당시 정 회장님에게 투표하지 않았지만 - 투표 결과를 밝히면 비밀 투표라는 선거법에 저촉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아파트 반 값 공약 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많은 아파트를 건설해온 한국 건설업의 역사라는 그 분이 대통령이 되셨으면 반드시 지켰을 것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과연 그랬다면 지금 어떻게 되어 있을까? 이제는 살인적인 전세 값과 자신의 연봉의 수십배가 되는 집 값에 내 집 마련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버린 서민(庶民)들에게 그래도 발 뻗고 누울 만한 작은 내 집 한 채 씩 만은 가질 수 있게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토건(土建) 신화의 주역으로서 역시 토건을 아직도 경제 정책의 일순위로 내세우고 있는 현 정권, 특히 한 때 한솥밥을 먹었던 자신의 직원이었던 대통령의 각종 정책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까? 역시 괜한 질문 같다^^